소설리스트

49화 (49/49)

 "헛?"

 벨라는 어쩔줄 몰라하는 그의 손바닥을 꽉 잡고 악수를 했다.

 "과연 스승님처럼 차가운 손이군."

 "스, 스승이라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팔을 귀신들린듯 쳐다보다가, 벨라의 말에 놀라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렇다. 블라드 체페슈 저하는 아버님 이후로 나의 두 번째 스승님이셨다. 부르고뉴에서 만났고, 슈바르츠발트에서 헤어졌지."

 아브라함은 자신보다 스무살은 어릴듯한 처녀의 자연스러운 평대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부르고뉴의 버건디를 마지막으로 끊겼던 아버지의 행적이 눈앞의 상대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었다. 과연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헤어지던 날, 그는 나에게 강제로 악마의 심장을 먹여 정신과 신체를 폭주시켰고, 악마가 된 나는 기꺼이 그를 죽여 영원한 안식을 선사했다."

 "무어……..뭣이라?!!!!!!!!"

 아브라함은 벨라의 말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다가 그 의미를 깨달은듯 경악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되었다.

 "내 이름은 이사벨라 크리스티나 폰 루도비카 트란실바녜. 그대와 같은 가문의 일족이나 서부에서 살아가던 먼 방계이며, 또한 앞으로 모든 흡혈귀들의 지배자가 될 여왕(Queen)이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포에 아브라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친을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자신의 신체는 그대로 정지한 체 아무런 동작을 펼칠 수 없었다.

 억누르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의 대치가 일분 가까이 이어졌지만, 두 인괴(人怪)의 신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조금 진정한듯 하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그녀에게 묻는다.

 "아버님의 끔찍한 실험이 끝내 성공한 것인가….. 당신은 불리한 사실은 모두 숨기고 그저 스승의 후계를 자처하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자식 앞에서 진실을 말해주었는가?

 "그것은 그와 나, 나와 그대가 대가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작의 끔찍한 실험에서 마지막 희생양이 되었다가 믿기지 않는 천운 속에서 살아나 강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증오스러운 스승을 죽였고, 이후 그대의 혈족은 마녀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에 놓였지만 오늘에 이르러 나에게 구함을 받았지."

 벨라는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를 써먹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원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저 그대의 말대로 진실을 숨기고 감정과 신체를 조절하여 내게 무한의 호감을 지니도록 바꾸어 놓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이토록 궤변으로 들릴 말을 펼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한 명의 보잘 것 없는 방계 여인이 아니라, 모든 혈족을 보살피고 대표하는 뱀파이어 퀸(Vampire Queen)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스승님 평생의 바람대로 말이다."

 무형의 기세가 조금씩 조금씩 강해졌고, 아브라함은 어쩐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나는 흡혈귀들의 신체와 정신을 장악하는 포악한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속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 그대의 부친이 내게 부여한 힘에는 목적이 있었다. 본래 '지옥의 서'를 쓴 악마는 어떠한 의도로 이 흉험한 괴력을 예언하고 풀어놓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힘에 일정한 사명과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륙의 무수한 강자들은 힘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수련하고 이를 이룬 뒤에는 목표를 잃고 사리사욕을 실현하는 데 쓸 뿐이다. 나 또한 무궁무진한 사욕을 지님을 부인하는 바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내 삶의 목표를 위해 힘을 수단으로 삼아 수련했고, 힘이 커지면서 더욱 거대해진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여왕의 말에 조금씩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이 퀸의 지닌 세뇌의 힘일까, 아니면 궤변에 설득되고 있는 것인가?

 벨라는 진심이었지만, 그녀가 효과적으로 이를 전달할 수 있었던 건, 블라드 공작이 지닌 세세한 기억 덕분이었다.

 '첫째와 달리 둘째인 너는 공작에 의해 무보다 문을 좋아하도록 교육받았지. 항상 의무와 권리의 한계에 대해서 교육받았고. 과연 이런 식의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군.'

 "자신의 젊음을 위해 매일 수십 명의 무고한 처녀들을 희생시키는 이, 부친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감정을 느끼지 못해 분노가 사그러드는 이. 피폐한 동부에 갇혀 자기들끼리 물어뜯다가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외적의 침입에 허무하게 쓸려나가는 이들. 과연 이것이 인간의 삶인가?"

 아브라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세상을 피와 혼란으로 물들이는 에르제베트 폰 바토리를 토벌하고, 모든 흡혈귀들을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제 그대에게 묻노니, 진심으로 나의 신하가 되어주겠는가?"

 여왕의 진심이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아브라함의 마음 또한 생생하게 그녀에게 전송되는 중이다.

 '되었군.'

 동시에 아브라함이 몸을 움직여 그녀의 앞에 부복한다.

 "당신은 아버님의 원수이나 또한 아버님의 유산이고, 아버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부친의 죽음을 원망하나 결코 배반하지는 않겠사오니, 부디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퀸의 능력으로 아브라함 정도의 강자를 완벽히 세뇌하고 이를 유지할 영구적인 동력을 부여하는 작업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릴 것이다. 대화시간은 삼십분이 채 안 되었으니, 한 시간의 수고를 덜은 셈이지만…. 이사벨라는 그녀의 권속들을 단지 그런 효율적인 관점으로만 대하지는 않았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구속구에 묶여있는 채로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는 모습이 예민한 감각에 의해 시시각각 느껴진다.

 새벽은 절정에 이르러, 하늘에 쏟아진 은색 별들이 광활한 자작나무숲을 비춘다. 어둠은 더더욱 깊어져 갔지만 새벽의 여명 또한 산맥 저편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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