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 정각에 현관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의자에 앉아 멍한 눈
으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던 마사오는 황급히 텔레비전 스위치를
끄고 긴장된 얼굴로 일어섰다.
느끼며 마사오는 문이 열려 있다
운명의 시간이 온 듯한 기분을 ??.
조용히 문이 열리고 매끄럽게 올림머리를 한 기모노 차림의 미
녀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마사오는 그 자리에 얼어붙는 듯 했다.
물론 그 여자가 유키 부인이라는 것은 금세 알았지만, 이 얼마나
우아한 아름다움인가?
모란꽃이 수놓인 화려한 기모노에 싸인 하얀 목덜미가 얼마나
고운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차분함과 그윽함이 있는 유키 부인의
계란형 얼굴을 정면으로 본 마사오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시마하라 유키라고 합니다."
유키 부인은 부드러운 속눈썹에 그늘진 눈동자를 마사오에게 쏟
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동생의 일로 내밀히 의논할 게 있어
서 왔습니다.
"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마사오는 정중한 태도로 유키 부인을 안으로 들여, 탁자를 사이
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부인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아마 여동생을 노리개로 삼았던 마
사오에 대한 증오를 필시적으로 참고 있으리라.
한동안 서로 노려보는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나를 몹시도 원망하고 계시는군요,부인.
마사오는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을 떨치려는 듯 공허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가서 컵에 주스를 따랐다.
'부인 주스 어떻습니까?'
마사오가 탁자 앞에 단정히 앉아있는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것,신경쓰지 마세요.
그녀는 곤흑스럽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마사오는 재빨리 주머니 속에서 작은 종이봉지를 꺼내 그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컵 하나에 넣었다
그런 다음 주스 두 잔을 쟁반에 받치고 마사오는 탁자 앞으로 돌
아왔다
'자, 드세요.'
유키 앞에 놓인 주스에 들어간 내용물은 외국산의 강렬한 마취
제였다. 마작 친구인 다키가와의 부하에게서 상당히 비싼 값으로
산 것이었는데,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을 먹이면 6분 안에 다운
되어 약 20분간 수족이 마비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유키가 이 주스를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가 관
컨인 것이다.
'마사오 씨, 확실히 묻겠습니다, 그 필름, 얼마면 내게 주시겠습
니까?"
유키 부인의 상아및 나는 아름다운 볼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유리코는 어제 울면서 당신과의 관계를 모두 내게 고백했습니
다:유리코는 제게 단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동생입니다 "
유키 부인의 눈에는 자기 동생에게 상처를 입힌 독나방에 대한
원망과 저주 같은 섬광이 담겨 있었다.
'유리코 씨가 부인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
다만, 어쨌든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어느 쪽이 먼저 손을 댔는지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유리코가 내게 먼저 꼬리를 쳤는
지도 모르니까요.'
마사오는 담배를 입에 물고 거들먹거리며 스스로를 아주 기분
나쁜 남자로 만들고 있었다.
'뭐, 꿔라고요?'
유키 부인의 아름다운 상아색 볼이 한층 더 창백하게 굳어졌다.
'당신은 정말 뱀 같은 남자군요.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유키 부인은 눈물이 나올 만큼 억울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긴 이미 끝난 일 가지고 왈가왈부해봐야 소용없겠지요.'
그러더니 유키 부인은 하얀 사슴가죽 핸드백에서 작은 비단 보
자기에 싼 지폐다발을 꺼냈다.
'여기 백만 엔이 있습니다.'
옛? 마사오는 부인이 탁자 위에 쌓아놓은 돈다발을 보고 놀랐
다
백만 엔이라...... 이런 떼돈 버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하고 마
사오는 탁자 위의 돈다발을 핏발선 눈으로 바라보면서 순간 냉정
을 잃었다
'자, 이 돈을 받으시고 그 필름을 건네 주세요. 마사오 씨."
'좋습니다 드리지요 "
마사오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제 이것으로 두 번 다시 유리코를 불러내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세요,마사오 씨.'
마사오는 유키 부인의 우울한 빛을 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눈부시게 쳐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맹세하겠습니다.원하신다면 글로 남겨 두겠습니다.'
그러면서 선반 위의 편지지를 꺼내 탁상 위에 놓았다
'백만 엔이나 받았는데 의당히 그렇게 해야죠. 역시 부는 다
른걸. 야 참!"
마사오는 웃으며 머리를 긁다가 펜을 들고 편지지 위에 서약서
쓰기 시작했다
오늘 이후, 가즈에 마사오는 시마하라 유리코에게 귀찮게 따라
붙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하고 반쯤 장난치듯 기묘한 서약서를
썼는데 그것을 본 유키 부인은 겨우 안심을 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사오 씨, 미안합니다만 전화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예,쓰세요."
유키 부인은 마사오가 가리키는 침실 쪽으로 가서 침대 머리맡
에 있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부인은 집에 있는 유리코에게 이
결과를 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 유리코. 이제 걱정할 것 없어. 마사오 씨가 서약서를 썼으
니까, 이것으로 지금까지의 일은 다 잊어버리는 거야. 알겠지, 유
리코?"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하는 부인의 하얀 볼에 진주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눈두덩을 손수건으로 누르면서 전화를 끊은 부인
은 마사오의 앞으로 돌아왔다.
유리코 씨는 나와 인연이 끊어진 걸 기뻐하고 있습니까?'
마사오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하면서 책상 서랍을 열어 필름
을 꺼냈다
'계 , 수화기를 들고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미친개에게
물린 기억을 빨리 잊게 해주어야겠죠.'
부인도 비웃는 듯한 어조로 응수하며 마사오가 내민 필름을 벌
레라도 집는 듯이 불쾌한 표정으로 핸드백 속으로 넣어 버렸다.
'그럼 마사오 씨, 이것으로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
라겠습니다 '
그러면서 막 일어서려는 부인을 마사오가 만류했다.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이것으로 일단락되었으니 문제가 해
결된 것에 대한 건배라도 합시다 주스여서 미안합니다만.'
마사오는 탁자 위의 주스 잔을 들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유키는 이런 뱀같이 징그러운 남자 앞에서 한시라도 빨리 모습
을 감추고 싶었지만, 주스 잔을 들고 미소짓고 있는 마사오를 그대
로 두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은 다시 고쳐앉아 자기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들었다
앞으로 유리코의 행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유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으로 컵을 싸서 입에 갖다대었
다.
흘껏 그것을 곁눈으로 쳐다븐 마사오의 가슴은 격렬하게 고동치
고 있었다. 긴장을 한 탓에 목이 말랐던지 부인은 잔에 든 주스를
거의 다 마셔 버렸다.
잠시 후, 그러면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유키 부인은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정신이 아물거리며 발밑이 휘청
거리는 것을 느꼈다
실,실례.'
유키 부인은 황급히 사이드보드를 짚으면서 몸을 곧추세우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전신의 힘이 차례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킴이 들
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부인은 허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묘
하게도 허공에 붕 뜨는 듯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부인?'
마사오는 마취제의 강력함에 놀라면서도 일부러 낭패한 듯한 제
스처를 해보이며 유키 부인의 어캐에 손을 얹으려 했다 그돗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