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당하자니 도저히 못 참겠고,신고를 하자니 기자들이 무
섭고...... 유키 부인은 실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져든 것이다.
며칠 후, 약속한 토요일이 돌아왔다.
'토요일 저녁 일곱 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와주
십시오."
마사오는 그날 그녀를 풀어 주며 끈질길 정도로 다짐을 했었다
돈을 꼭 갖고 오라는 말과 안 왔을 경우 어떻게 된다는 협박도 잊
지 않았다.
앞으로 영원히 그 비열한 남자의 노리개로 살아가야 하는가 아
니 자기뿐만이 아니다. 그 남자는 유리코까지 영원히 따라붙으며
괴로움을 줄 것이다
아아,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고 부인은 아침부터 몇 번이고
한숨을 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 그렇게 괴로움에 젖어있는 가운데 때때로 자신의
체내를 기분 나쁜 광선이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고양이에게 놀림감이 된 쥐마냥 끈질기게 마사오에게 당했던 자
신. 그러나 그토록 냉혹하고 잔인하게 당하면서 결국에는 피가 역
류하는 듯한 쾌미감을 감지하지 않았던가. 그 비열한 남자에게 음
갈한 행위를 받는 동안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던 체내 깊숙이 잠재
되어 있는 여자의 마성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정신은 그를
지렁이처럼 싫어하는데 육체는 뼈까지 녹을 듯한 감격에 젖고 싶
다고 바라지 않았던가. ..
아. 바보 같은. ..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하얀 꽃 섶
송이가 부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박꽃이었다. 여름 저녁녀에 하얀 꽃을 피우고 다음날 아침에는
미 시들어 버리는 꽃이다.
꽃꽂이 하나에만 목을 매고 있는 자신을 꽃에 비유한다면 시든
꽃일 것이다, 삭막한 청춘을 보내고 사랑이 없는 결혼, 육체의 기
쁨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껴 본 적도 없이 벌써 서른 살이나 되었
다.
꽃꽂이를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었지만,규율 바른 생활을 하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인가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그
떻다고 해서 악따가 덮칠 줄이야.
자신에게 육체의 기쁨을 뼈에 새겨지도록 가르친 것은 동생을
범한 그 징그러운 남자.. ... 문득 그런 생각을 하자, 부인의 전신
에 어느 틈엔가 땀이 맺히고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박꽃처럼 극히 한 순간, 자신에게 하얀 꽃을 피우게 한 것이 그
비열한 치한이었던가 부인은 그런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심정
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사오와 약속한 시간이 일각일각 다가온다. 이제 자신은 슬픈
박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박꽃을 닮은 부인의 하얀 뺨
에 열기가 몰려왔다. 마사오를 그렇게 저주하고 미워하면서도 오
늘 아침 은행에 가서 백만 엔을 찾고 미용실에 가서 몸단장을 한
것은 대체 꿔라고 설명해야 된단 말인가 분명 마음 한구석에는 그
맨션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아, 나는 얼마나 천
한 여자인가. 부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혼들었다
아무리 협박해도 이제 그 남자에게 가서는 안 된다 거기 가면
자신은 결국 파멸하게 될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부인은 객실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호랑이 그림이 걸려있었다.부인은 잠깐 그림을 올려
다본 후 장식으로 꾸며놓았던 북을 내렸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세
우고 앉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둥둥, 부인이 치는 북의 마른 소리에는 나믓가지를 넘는 비조처
럼 기백이 담겨있었디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 부인은 아버지와 함께 북을 연
습한 적이 있었다. 지금 북을 치는 그녀의 눈앞에 웃도리를 벗고
북을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아아,아버지.......
북을 계속 치는 부인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홀렀
'아주머니,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복도 쪽에서 기쿠오의 소리가 났다.
'아아,기쿠오 군 들어와.'
유키 부인은 북을 바닥에 놓으며 반갑게 대답을 했다
문이 열렸다. 기쿠오는 복도에 끓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다. '자,들어와."
유키 부인은 기쿠오를 웃는 얼굴로 맞아들였다
기쿠오는 문을 여닫는 법이며 앉는 법, 걷는 법에 이르기까지 세
세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예절견습생 명목으로 시
마하라가에 입주해 있기 때문이었다. 관서 가부키의 샤미센 명수
인 기쿠오의 아버지가 유키 부인에게 기쿠오에게 꽃꽂이를 가르쳐
주길 원했고. 유키 부인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꽃꽂
이도 예절견습 학습 중의 하나였다,
기쿠오는 십칠 세. 윤곽이 뚜렷하고 단아하게 생긴 전형적인 미
소년이다. 쌍꺼풀이 진 눈은 소녀같이 크다.
뭔지 아주머니에게 걱정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기쿠오는 유키 부인 앞에 무릎을 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
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그떻게 보였나?'
부인은 뭔가를 얼버무리려는 듯한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제 일로 고민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어머나,어째서?'
기쿠오가 갑자기 그런 말을 커냈으므로 부인은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주간지에 그런 기사가 나와서 아무래도 현월류 꽃꽂이에 큰 오
명을 씌운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부인이 고개를 저었지만 기쿠오는 아까부터 뒤에 감추고 있었
던 듯 얇은 주간지 하나를 머뭇거리며 꺼내놓는 것이었다.
부인은 잡지를 보자 혹시 마사오가 찍은 그 사진이 실린 게 아닌
가, 하고 순간 호흡이 멈출 듯했지만, 그것은 아오야마의 방악(
) 연구소에서 샤미센을 배우고 있는 기쿠오의 사진이었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키 부인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뿐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그 사진설명이 문제였다
꽃꽂이계의 명화 시마하라 유키의 너무나 젊은 애인 이라고 쓰억
있었던 것이다
'그냥 방악 연구회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응했더니, 이런 식으
로 해놨지 뭐예요.'
기쿠오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부인을 보며 억울한 듯이
말했다.
기쿠오는 근래 부인의 안색이 안 좋은 게 이 기사를 본 탓이아
닐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 이런 잡지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아 쓰고 싶으면 마음대로
쓰라고 그래 "
'게다가 어제 발행된 실화정보}에 전위화도(또)의 시바
다 가즈에가 아주머니와 저의 일에 관해 비방한 인터뷰 기사가 실
렸습니다.색에 미친 현월류 꽃꽂이라구요."
'뭐, 나를 색에 미쳤다고?"
유키 부인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래서 현월류 후원회도 곧 해산할 예정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
답니다.
"시바다 가즈에라는 사람은 머리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전에
정신병원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
유키 부인은 홍분하고 있는 기쿠오를 달래려 했지만, 그가 뭔가
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이대로 있으면 유키 아주머니에게 너무 폐를 끼칠 것 같
습니다. 그래서. ... 저. 이 집을 나갈 생각입니다. 교토에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인은 목소리를 높이며 엉겁결에 기쿠
후왼회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가 몰라.'
부인은 현관 가까이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역시 상대는 그 작자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부인? 어떻게 아직도 집에 있습니까? 오
늘밤 약속 설마 잊지 않았겠죠?'
마사오의 가시돋힌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부인은 료에 있는 오스기가 신경쓰여 모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 그것이, 저....
'당장 와 주세요. 나 이래 꽤도 성질이 아주 급한 놈이니까요.
만약 오늘 오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마사오의 뭔가 초조해 하는 목소리가 부인의 신경에 그대로 전
해지자 그녀의 뺨은 완전히 핏기를 잃어버렸다
'혀보세요,듣고 있습니까?'
예, 듣고 있어요.
'오늘밤 이리로 와서 일박하고, 내일은 일요일이니 하루 종일
듬뿍 즐긴 뒤 윌요일 아침에 귀가하도록 해요.'
그. 그건 ... .'
유키 부인은 몹시 낭패해 하며 수화기를 든 손을 떨었다.
'당신에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난 그런 스케줄을 짜
놨습니다.내 얼굴을 세워 주세요.'
내 얼굴을 세워 주세요란 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부인은 마사
오의 독단적인 말투에 참을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어,어쨌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떼었다.
,기쿠오 알겠지?절대로 내게서 떠나면 안 돼!"
부인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기쿠오에게 다짐을 시켰다.
지금 자신은 감당하지 못할 고뇌를 지고 있다. 여기서 기쿠오마
저 떠나간다면 그 절망감과 얼어붙을 듯한 고독감에 자신은 정녕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멋대로 행동하지
.알겠습니다. 아주머니의 말씀이 있을 때까지
않겠습니다.
"고마워, 기쿠오.
기쿠오가 자리에서 나감과 동시에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민
심부름꾼 노파였다 오스기라고 하는, 조부 때부터의 하녀로
예순 살을 넘었다 것은
"전화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인은 마사오임을 직감했다. 얼굴이 창백해
졌고, 온몸은 얼어붙는 듯했다.
'누구에게서 온 전화야,할멈?'
그게,저,젊은 남자의 목소리인데 느낌이 아주 나빠요.누구시
냐고 물었더니, 마님을 바꾸기나 하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겁니다 '
역시 그 비열한에게 온 전화라는 것을 안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북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도 하녀에게 억지 미소를 보였다
'알았어,할멈.'
.요즘 젊은 남자들은 정말 예의가 없는 것 같아요,마님."
부인은 불쾌한 표정을 짓는 오스기를 달래며 복도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