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가 몰라."
부인은 현관 가까이에 있는 수화기를 들엇다
역시 상대는 그 작자였다
'허떻게 된 일입니까, 부인? 어떻게 아직도 집에 있습니까? 오
늘밤 약속 설마 잊지 않았겠죠?"
마사오의 가시돋힌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홀러나왔다
부인은 옆에 있는 오스거가 신경쓰여 모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그것이,저.......'
'당장 파 주세요. 나 이래 쫴도 성질이 아주 급한 놈이니까요
만약 오늘 오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마사오의 뭔가 초조해 하는 목소리가 부인의 신경에 그대로 전
해지자 그녁의 뺨은 완전히 핏기를 잃어버렸다
억보세요,듣고 있습니까?'
예,듣고 있어요.
'오늘밤 이리로 와서 일박하고, 내일은 일요일이니 하루 종일
듬뿍 즐긴 뒤 월요일 아침에 궈가하도록 해요.'
'그 그컨... . '
유키 부인은 몹시 낭패해 하며 수화기를 든 손을 떨었다.
'당신에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난 그런 스케줄을 짜
놨습니다.내 얼굴을 세워 주세요.'
내 얼굴을 세워 주세요란 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부인은 마사
오의 독단적인 말투에 참을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갖다.
'어.어쨌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오스기를 홀깃 보며 부
인은 어물쩡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기다려요, 하고 마사오
가 말했다
'무슨 애기를 하는 거요 나는 부인과 에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
라 섹스를 하고 싶은 거예요. 어제부터 생고기도 먹고 마늘도 먹으
면서 층분히 정력을 키워놓았다고요."
'알, 알겠어요."
더 이상 마사오의 말을 들을 용기가 없어 부인은 바들바들 떨면
서 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그 자리에 무
릎을 끓었다.
'마님, 왜 그러세요?'
지금까지 불안하게 그녀의 모습을 살피고 있던 오스기가 당황하
여 달려왔다
'괜찮아, 할멈 걱정하지 마.'
부인은 오스기의 손을 빌리는 것을 거부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
켰다.
'잠깐 두통이 났을 뿐이야."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마님?'
'아니,그렇지 않아."
그러면서 부인은 오스기에게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딴
곳을 보면서 얘기했다
'할멈. 나 말이야. 어쩌면 오늘부터 이틀간 집을 비우게 될지도
몰라
"아니, 웬일이십니까, 마님?'
오스기는 눈을 캄박거리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닐 주일 전에도 하루 집을 비우셨잖아요.제가 이 집에 머문 지
' 꽤 됐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틀이나
집을 비우신다니..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는 듯이 이 충실한 노파는 부인에
게 다그쳤다 그리고 저 엄격한 주인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한탄하실 건가, 하고 노파 특유의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냐, 할멈 후원회장인 카쿠다 씨의 초대로 하코네로 여행을
가게 됐어. 이건 일이야, 알겠지?'
유키 부인은 오스기를 거실 한구석으로 데려가 괴로운 거짓말을
하였다.
가쿠다는 부친의 생전에 둘도 없는 친구로,실업계의 장로이며
현월류 꽃꽂이의 후원회장임과 동시에 자신도 현월회라고 하는 꽃
꽂이 연구회를 갖고 있었다. 유키 부인도 가쿠다의 집에서 열리는
현월류의 모임에 강사로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 가쿠다까지 팔아 거짓말을 한 유키 부인은 갑자기 가슴이
메어 상아빛 뺨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홀렸다
오스기는 당황하여 자신도 금방 울상이 되어 사과했다
마님, 우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말씀 드려서 죄
송합니다
"유리코는 오늘 피아노 레슨이 있지?'
부인은 오스기에게 슬픈 눈길을 보내며. 할멈이 유리코에게 애
기 좀 잘 해줘 하고 말했다
'녀행을 떠나신다면 준비를 할까요?'
= 잉?꼴
'아냐. 소지품만 가지고 가면 되니까 나 혼자서 할게.'
부인은 유리코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나갈 생각이었다. 유리코
에게 이틀이나 집을 비우는 것을 꼬치꼬치 설명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유키 부인은 마사오의 맨션에서 좀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웠다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상점가의 빨갛고 파란 네온들이 찬란했다.
그 아래로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면서 보도
를 걸어가고 있었다
유키 부인은 창백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남의 눈을 피하듯이 걸
었지만, 이내 한 커플이 그녀를 알아봤다.
'어머나,시마하라 유키야 "
하고 작게 속삭이더니 그들은 급한 발걸음으로 그냥 지나가려는
부인을 쫓아와서 사인을 요청했다
부인은 당황했지만 무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어 억자가 내민 사
인펜을 받아들었따.
물방울 무늬의 화려한 기오노를 차려입은 부인의 주변에는 이내
젊은 남녀가 하나둘 모여들엇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고귀함과 깊
이 있는 우아함,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섹시함이 느껴지는 옆얼
굴... . 그래서 현월류 꽃꽂이의 시마하라 유키에게는 젊은 층의
팬이 많았다.
몇 명인가에게 재촉을 받으며 사인을 끝낸 부인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요, 하며 총총걸음으로 상점가를 걸어나왔다
저 사람들이 내가 지금 어디를 가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까무러
치듯이 놀랄 거야. 부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코네로 이틀간 여행을 간다고 할멈에게 말하고 기쿠오에게도
말을 전하도록 한 후, 부인은 소지품 대신에 꽃꽂이용 백합 서너 송
이를 셀로판지에 싸서 들고 살그떠니 뒷문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듯이 부인은 백합꽃을 양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어떠나, 시마하라 부인 아니세요.'
느닷없이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부인은 깜짝 놀라 돌아
보았다
'앗.시바다 씨.'
부인의 등뒤에 우뚝 서 있는 여자는 전위화도의 시바다 가즈에
였다.
나이는 서른두셋으로 영양 과잉인지 뚱뚱하게 살이 씬데다 넓적
한 얼굴에 납작코를 한 추녀지만, 그래도 시바다류라는 이름이 붙
은 신홍 꽃꽂이 연구가였다
그녀는 명성을 떨치는 현월류 꽃꽂이를 시기하여 저것은 선인
의 모방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식으로 현월류를 비방해 왔
다. 그리고 현월류에 제자가 많은 것은 시마하라 유키가 미인이기
때문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꽃을 대하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떠들고 다녔다.
하필 이럴 때 싫은 여자를 만나다니...... 이런 당흑감을 보이는
시마하라 유키에게 가즈에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부인?이런 곳까지 출장 꽃꽂이세요?'
부인의 손에 든 백합꽃을 보았는지 비웃는 듯한 어조였다
예, 저...... 하며 우물거리는 부인에게 가즈에가 요 근방에 제자
들과 함께 술집을 개업했다며 마침 오늘 개점 축하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고 권했다.
저 난 오늘밤 좀 볼일이 있어서요.'
'어머나 부인. 그러시면 섭섭해요. 가셔서 현월류 꽃꽂이의 포
부라든가 뭐 좋은 얘기 좀 들려 주세요.
가즈에는 완연히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
'청말 오늘밤은 안 됩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들르
지요.'
부인이 막 몸을 돌리려는데, 싸구려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술집
호스테스 두 사람이 나타났다
"시바다 선생님, 거기서 꿔 하세요.가게문 열 시간이에요. 빨리
오세요.'
그러면서 가즈에의 손을 잡는 호스테스들을 본 유키 부인은 깜
짝 놀랐다. 가즈에의 애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꽃꽂이 연구가가 제
자들을 호스테스로 삼아 술장사를 벌이다니. 유키 부인의 상식으
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싸 잇떠 꽂
부인은 달아나듯이 얼른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요.'
그때 빨간 드레스를 입은 호스테스가 천한 말투로 부인을 불렀
다. 마치코라고 하는 가즈에의 제자로 술버릇이 나쁘기로 평잔이
난 여자다 또 한 사람의 호스테스도 부인과 안면이 있는 란코라고
하는 아가씨로 마치코와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분나쁜 게 뭐야!우리한테 경멸의 눈길을 보내고 있잖아.'
마치코가 말하자 란코도 맞장구를 쳤다
'언제나 그렇게 찬바람을 일으키면서 다니시는군. 아름다운 사
람은 다들 그렇게 차가운가?
그녀들이 현월류 꽃꽂이를 적대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건
완전히 깡패가 아닌가 싶어 부인은 소름끼칠 정도로 혐오감을 느
꼈다.
'창작성이 없는 꽃꽂이란 난센스야'
마치코가 다시 말하자. 한번 토론을 하고 싶어도 저 부인이 영
기회를 안 주네, 하며 란코가 코방귀를 뀌며 달라붙었다.
'나의 꽃꽂이는 당신들과 토론할 만큼 불순한 것이 아닙니다 '
화가 난 부인이 싸늘한 말투로 말하자 뭐라구요, 하고 마치코가
눈을 부라렸다
'마치코, 참아 너, 너무 취했어.'
가즈에가 부인에게 덤벼들려는 마치코를 말렸다.
실례합니다.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
작했다. 비겁자니 위선자니 하고 떠들어대는 마치코의 소리를 등
뒤로 하면서 부인은 까닭없는 분함에 눈물이 났다.
'야,부인,잘 오셨습니다
문을 연 마사오의 입이 한껏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꽤 늦었는걸요.약속시간에서 한 시간 가깝게 지각이잖
아요.
그러나 마사오는 별로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부인
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방안으로 들어가자는 시능을 했다.
부인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신고 있는 하얀
버선이 눈에 스밀 듯이 청초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시는군요,부인."
마사오는 곱게 세팅한 머리칼과 기모노 사이로 보이는 뽀얀 목
덜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아주 힘이 없어 보이는데요.'
탁자 앞에 무릎을 끓고 앉은 부인의 뺨이 창백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 마사오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여기로 오는 증에 전위화도의 시바다 씨를 만났어요. 너무 실
례되는 말을 들어서... .."
부인은 자신이 불쾌한 것은 지금 뱀처럼 싫은 남자 요에 있기 때
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아아, 시바다류 전위화도 말입니까?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데
그런 전위 꽃꽂이는 단순히 몇 명이 모여서 즐기는 것뿐입니다. 현
월류가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고 있으니 질투하는 거지요.'
마사오는 부인의 옆에 앉으면서 슬그머니 어깨에 손을 둘렀다.
시바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지금부터 완벽한
서비스로 부인의 불쾌한 기분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마사오 씨."
부인은 마사오의 손을 어깨에서 떨쳐내면서 애수에 젖은 눈동자
를 그의 시선에 맞추었다.
마사오 씨,지금 현월류 꽃꽂이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습니
다. 다음달부터 관서 쪽에도 지부가 생기고요. 지금 내가 이렇게
파멸의 길을 걷다 보면......."
여기까지 쌓아올린 지반이 붕괴되며 의리있는 후원자들을 배신
하는 일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부인은 또다시 가슴이 메어와
뜨거운 눈물을 홀렸다.
'대체 부인,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마사오는 시침떼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늘 나 고민 끝에 큰마음 먹고 이곳에 왔습니다 부탁입니다,
마사오 씨.오늘을 마지막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부인은 비장한 표정이 되어 마사오에게 애원했지만, 마사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슬이 퍼래져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부인! 이제 당신은 내 여자입니다 삼
류 연극에 나오는 대사 같지만, 시마하라가의 부뚜막 불씨까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이어 꽃꽂이가 어쩌니 후원회가 어쩌니 하는 것은 나하고
관계없는 일입니다. 연극대사를 코듯이 너혀고는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자, 그런 쓸데없는 애거 해봤자 소용없어요. 얼른 플레이에 들
어가야지요. 만 이틀 동안 마음껏 즐기고 나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
은 모두 없어질 겁니다.'
그리고 마사오는 부인이 무릎 근처에 둔 백합꽃을 보고 감탄을
했다.
'과연 꽃꽂이 선생다우시군__. 이것을 침대 머리맡에 꽂아 두자
는 것이지요?'
침대 머리맡의 선반에 화병을 놓고 아무렇게나 백합꽃을 꽂은
마사오는 즐거운 듯이 콧노래를 부르면저 현관문을 잠갔다.
부인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보다 못한 심정으로 탁자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렸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분함이
교대로 자신을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이 비열한 남자에게 또 온몸
을 드러내야 하는 슬픔과 뭔가 싱체도 알 수 없이 가슴을 조여드는
피학의 꿈틀거림이 교대로 부인을 덮쳐온다
'아,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부인,백만 엔은 갖고 오셨나?'
부인은 잠자코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오.이것 참 고맙군요.이것으로 당분간 편하게 지낼 수 있겠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