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어요.'
유키 부인은 파리한 얼굴로 꼼짝 않고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필사
적으로 공포의 전율을 참고 있었다.
'오늘로 부인은 꽃꽂이 따위와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되는 거야.
내일부터는 자신의 무기를 철저히 갈고 닦아 조이는 법과 허리 쓰
는 법만 연구하면 그만일 테니까 "
가즈에는 할말만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유키 부인은 수화기
를 내려놓자 격하게 밀려오는 통곡을 느끼며 비틀비틀 방으로 들
어갔다.
다다미 위에 엎드린 유키 부인은 내일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성
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공포와 아울러 돌연 육체가 피학성의 관능
으로 타오름을 야릇한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사오의 맨션에서 꼬박 이틀간 시달리는 동안, 고통과 굴욕감
과는 별도로 마조히즘의 환희를 자신의 몸 한구석에서 감지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유키 부인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
으로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획 몸을 일으켜 유리
선반에서 아도름이 든 병을 커내들었다.
이 한 병만 삼키면 목숨을 끊을 수 있다 그녀는 흑시나 먹차할
때 자살할 결심으로 구입해 둔 수면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
지만 쉽게 병뚜껑을 열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목숨을
끊는다면, 가즈에가 이미 경고한 대로 유리코와 기쿠오가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게 된다
부인은 아도름이 든 병을 손으로 쓸어 버리고, 이마를 풀썩 탁자
위에 처박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유키 부인은 편지를 써서 책상 서랍 안에 넣
었다
그리고 무심코 가을이 가까워 오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마 위로 상쾌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려서부터 정든 이 정원이 오늘로 끝이라니...... 유키 부인은
이윽고 부친이 종종 요곡(:일본 가면 음악극의 대본)의 연습
실로 사용하던 다다미 열 칸짜리 안방으로 들어갔다.
전날 밤 준비해 두었던 장방형의 수반 앞에 앉은 유키 부인은 화
문석에 늘어놓은 수련을 그곳에 꽂기 시작했다. 최후의 추억을 남
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유리코가 일어나기 전에 집에서 나갈 생각인 부인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꽃이 핀 수련을 위로 향하재 꽂아 꽃봉오리
를 수직으로 세우고, 그 잎을 수면에 살며시 뛰운 유키 부인은 잠
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부친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벽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인 뒤, 미련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감색 바탕에 국당초()의 자잘한 무늬,거기에 칠보
문양의 띠를 두른 유키 부인은 횐색 핸드백 하나의 가벼운 차림으
로 살며시 옆 헌관으로 빠져나왔다.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검정색 차가 유키 부인이 모
습을 보이자마자 천천히 미러져 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자 타세요.'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건넨 것은 무라카미였다
'어젯밤, 밤늦게 교대해서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꿔.아무튼 좋습니다.약속을 지켜 주셔서."
무라카미는 문을 열고 유키 부인을 잡아끌어 태운 뒤, 운전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서두르라고 재촉하였다.
유키 부인은 시트에 앉자 무라카미 쪽엔 눈길도 주지 않고 슬픔
이 드리운 눈물 글썽이는 눈동자로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
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무라카미는 유키 부인 쪽으로 바짝 다가
앉으며 지껄여댔다
'부인,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답군요. 마사오의 눈도 휘둥그레질
겁니다. 지금쯤 아마 마음이 들떠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겠지
요
무라카미의 입은 잘도 나불댔다.
'허 옷도 유달리 아름답군요. 하지만 유감이네요. 저쪽에 가면
곧 알몸이 될 테니. 오늘부터 부인은 헝겊 한 조각 걸치지 못하고,
시바다 여사가 만든 움막에 여자 노예로 감금될 겁니다, 시바다 여
사는 약간 정신이상자죠.그런 것을 사디스트라고 하던가요?'
무라카미의 수다에 유키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라카미 씨,좀 조용히 해주시지 않겠어요?저는 이미 죽었다
는 심정으로 시바다 씨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인간적인 헤음으로 있고 싶어요.'
'아아,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매우 홍분되어 있는 듯 안절부절 못하고 계
속해서 지껄였다
'치금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시바다 가즈에의 노퀘가 퍼어야 히
는 녁-인의 심중, 알고도 남음이 있지요. 어쨌든 저쪽에 있는 무리
는 부인을 괜스레 미워하고 시샘하는 자들뿐이니까, 아무쪼록 저
만이라도 부인의 아군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모두 제 적이어도 상관없어요. 특히 당신은 내게 있어서 가장
증오스러운 적일지도 모르죠.'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코슈가도를 달리던 차는 어느 샌가 육교를 빠져나와 조그만 상
져가로 접어들었다.
'다 와 갑니다,부인"
무라카미는 천천히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창밖으로 멍하니 시
선을 보내고 딨는 유키 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유키 부인은 무리
지어 쇼핑하러 가는 에이프런 차림의 주부들에게 눈길을 쏟고 있
었다.
이제 나는 저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게 되겠구나 유키 부인
은 그 여자들을 부허운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상점가를 빠져나와 고갯길을 다 올
라온 곳에 시바다 가즈에의 집이 있다. 시바다 꽃꼿이연구회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걸려있는 이층 목조가옥이었다
차 소리를 들었는지 시바다의 여제자 두 명이 현관 유리문을 열
고 얼굴을 네밀었다
'어머 =."
그들이 안쪽에 대고 외치자, 안에서 역시 시바다의 제자인 듯한
여자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그 속에는 란코와 마치코도 섞여 있었다
'잘 오셨어요.기다렸어요 '
란코는 한쪽 뺨을 일그러뜨리며 부인의 냉담하고 우아한 얼굴에
쌀쌀한 시선을 보냈다
?자,들어가요."
마치코가 재밌다는 듯이 부인의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언고 앞으
로 밀었다.
시바다의 여제자들은 마치 백수건달들처럼 청바지를 입은 사람,
평상복 바지차림인 사람, 머리를 붉게 물들였거나 또는 어깨에서
가슴까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등 머리 모양과 복장이 제각각이
었다, 그런 여자들이 마치 포위라도 하는 듯 유키 부인의 주위를
에워쌌다
부인은 몽유병자 같은 걸음걸이로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의 신발을 벗어놓는 발판에는 여자들의 신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여기 여자들은 부인과는 달리 단정치 못한 사람들뿐이거든요
자.누추한 곳이지만 들어가시죠."
마치코가 킬킬거리며 유키 부인의 허리께를 뒤에서 밀었다
유키 부인은 조리('일본 짚신)을 벗고 마루에 발을 얹었다.
유키 부인의 하얀 버선과 먼지투성이인 현관의 마루 귀틀이 극명
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자 뭔가 낯뜨거움을 느끼는지 유키 부인
을 둘러싼 여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야,실물은 처음인데,상당한 미인이잖아."
꽂 어머 입고 있는 옷 역시 멋진데.'
유키 부인의 주위를 에워싼 채 뒤따르는 여자들은 저희끼리 소
곤소곤 얘기를 주고받았다.
돌처럼 굳은 유키 부인은 그런 야비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입을 꼭 다물고 안쪽의 여덟 칸짜리 다다미방으로 이끌려 들어갔
다
그곳이 이 집의 객실인 듯. 서로 다른 선반이 달린 도코노마(객
실인 다다미방의 정면 상좌에 바닥을 한 층 높여 만들어 놓은 곳.
벽에는 족자를 걸고,바닥에 도자기 꽃병 등을 장식해 두는 곳)를
등지고 가즈에가 면직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어서 와요.'
가즈에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털면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자,그곳에 앉아요,부인.'
유키 부인은 가즈에가 지시하는 곳에 조용히 무릎을 끓고 앉
았
다. 그녀를 따라온 여자들도 그 주위에 제각기 좋을 대로 앉았다
우선 소개하지.여기 이 아름다운 분이 현월류 꽃꽂이의 대가
인 시마하라 유키 씨. 그건 이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 '
알고 있어요.오늘부터 저희들의 노예가 되기 위해 온 분이죠.'
도시에가 냉랭히 굳은 부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빈정거리
는 말투로 계속 말했다
앞으로는 시바다류의 회원으로, 매일 듬뿍 귀여워해 줄게. 지
금까지 현월류 꽃꽂이 덕분에 시바다류가 실컷 골탕을 먹어 왔으
니까 말야. 그 답례를 충분히 해야 되지 않겠어?'
유키 부인은 그저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