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64)

   돌이킬 수 없는 밤

 마사오가 고향에서 여름 방학을 지내고 상경한 것은 2학기가  이미 시작된 

구월 중순을 넘어서였다.

 고향에서의 마지막 날은 다에꼬와 새벽녘까지 거의 쉬지  않고뜨거운 사랑

을 나누었다.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마사오는 이제 겨울 방학 때까지는  여자 없이 지낼 

수 있었을 같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역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자신은 여자를 안고  싶은 강한 욕망에 

휩싸일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당장 상대가 없었다.

 아끼와는 이미 헤어졌다.

 그리고 하룻밤 놀이에 불과했던 시나노에게 몇 달이 지난  지금 다시 얼굴

을 내민다는 건 마음내키지 않았다.

 하숙집 미망인인 찌에는 삼십 대 중반의 미인으로, 묘한 쓸쓸함이 담긴 에

로티시즘을 유발시키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시월로 접어든 가을,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다.

 마사오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덟 시가 다 되어 일어섰다.

 교내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역으로 가는 길은 서문이 가까웠다.

 마사오는 이공학부 앞의 은행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건물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뛰어나왔다.

 여자였다.

 마사오의 팔에서 매달리며 등 뒤에 숨었다.

 <도와주세요.>

 가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학생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여자가 나온 어둠 속에서 이번엔 재빠른 걸음걸이로  또 하나의 그

림자가 나타났다.

 학생복을 입은 남자였다.

 마사오의 어깨 너머로 말을 걸었다.

 <이리 와. 남을 귀찮게 하면 안 되지.>

 <가!>

 여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마사오의 왼쪽으로 돌아 여자에게 접근했다.

 <알았으니까 어쨌든 역까지 바래다줄게.>

 여자는 마사오의 팔을 잡은 채 오른쪽으로 피했다.

 <싫어. 빨리 가 버려!>

 <나하고 얘기하자. 남은 끌어들이지 말고.>

 두 사람이 친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사오는 여자를 두고 가버려야 하는가 망설였다.

 <친구입니까?>

 남자가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잠시 의견 충돌이 있어서요.>

 그러자 여자가 큰 소리를 질렀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 날 강간하려고 했잖아!>

 <장난이었어. 그런 곳에서 정말로 그럴 리가 없잖아.>

 잠시 둘이 서로 주고 받는 말로 봐서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강제로 빼앗은 

정도였던 것 같았다.

 결국 남자가 물러서며 말했다.

 <내가 널 강간하려고 했다는 건 절대로 오해야. 피해망상이라구! 난  네가 

허용하는 선까지만 나아가려고  했을 뿐이야. 처음에  넌 허용하는  태도였

어. 그러다가 변한 건 너였고 난 함정에 빠진 식이야. 그러나 널 나쁘게 해

석하진 않아. 넌 아직 순진하기 때문이라고 해두지.>

 웅변조로 말을 마친 남학생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교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

작했다.

 그제야 여자는 마사오의 팔을 놓았다.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드라마가 있었던 같군요.>

 마사오는 비로소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귀여운 이미지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키는 처음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몸집은 자그마했다.

 <부끄럽습니다.>

 <저 사람의 마지막 연설은 꽤 훌륭했습니다. 제가 듣기론 당신이  좀 과민

했던 것 같군요. 그는 단지 당신의 동의를 얻어서 가벼운 페팅 정도나 하려

로 했을 뿐인 것 같은데. 도망치지 않아도 당신이 분명하게  거절하면 그는 

그만두었을 겁니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들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당신도 남자로군요. 남자 편이야.>

 마사오는 쓴 웃음을 지었다.

 <편드는 게 아니고 단지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마사오는 목례를 하고 서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행동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여자는 간혹 전철 안에서도  볼 수 있

었다.

 마사오는 그런 여자에게 별로 좋은 인상은 갖고 있지 않다.

 서문을 나와 상가의 밝은 길로 들어서서 걷은데 여자가 잰걸음으로 쫓아왔

다.

 <기다려요. 같이 가요.>

 그가 뒤돌아 보자 여자도 멈춰 서서 마사오를 보았다.

 역시 매력적인 얼굴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 애, 사실은 색을 밝히는 여자인지도 몰라.)

 문득 흥미가 생겼다.

 벌써 보름 이상 마사오는 여자를 접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근처에서 국수라도 먹겠습니까?>

 별로 기대하지 않고 말했다.

 <좋아요. 도와주었으니까 제가 사례를 하겠어요.>

 여자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국숫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는 가방 속에서  명함을 꺼내 마사

오 앞으로 내밀었다.

 학과, 집 주소,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사꾸라이 묘우미. 

 3학년이었다.

 마사오도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전 1학년입니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동안이라서.>

 국수를 주문하고 술을 먼저 시켜  마시면서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묘우미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당신은 정말 내가 피해망상자 같아요?>

 <예.>

 다른 손님이 있으므로 마사오는 묘우미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지막이  말했

다.

 <묘우미 씨는 아직 남자 경험이 없죠?>

 묘우미는 입술을 다물더니 조금 사이를 두고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경험이 없는 걸 어떻게 알지요?>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죠.>

 <그러면 당신은?>

 <물론 압니다.>

 <1학년이면서?>

 <남자는 많이들 여름방학 때쯤이면 체험합니다. 전 고교 때부터입니다.>

 <조숙하군.>

 <그보다 좀전의 그 사람에게 이제는 허락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분명

히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그래도 무서워.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서 날 껴안았어.>

 <키스의 감촉은 어땠습니까?>

 <기분 나빠. 그런 사람은.>

 묘우미도 꽤 술을 잘 마시는 체질인 것 같았다.

 마사오가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잠시 후 묘우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 정말로 체험했어?>

 <예. 여러 명.>

 <창녀?>

 <아뇨, 전 여자를 사진 않습니다.>

 <여자 친구가 그렇게 많아?>

 <놀이 상대였습니다. 물론 서로의 합의하에 결합했죠.>

 마사오는 묘우미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지금 이 넓은 도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묘우미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어깨에 기대어왔다.

 <여대라면 몰라도 자유분방한  문학부에서 아직 남자  경험이 없다니!  당

신, 정말 멋지군요. 매우 매력적인  분이라 오늘밤 같은 유혹이 많았을  텐

데, 잘 견뎌내셨군요. 축하합니다. 건배합시다.>

 그러자 묘우미는 마사오의 팔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실은 나도 체험하고 싶어.>

 마사오가 하급생이라 편안하게 생각될 것이다.

 <당신 같은 미인이라면 언제든 가능할 텐데요?>

 <미인이라고 말해주니 기쁘군. 자, 마셔.>

 마사오는 잔을 비웠다.

 묘우미는 주전자을 들어 마사오에게 마지막 잔을 따르고 술을 더 시켰다.  

 그런 다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난 용기가 없어. 부모님이 카톨릭 신자이기 때문일까?>

 <엄격하게 자란 모양이군요. 그 남자는 불행하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나 보

군요.>

 두 사람은 술 네 주전자를 비우고 국수를 먹었다. 

 거나한 기분으로 가게를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마사오는 고개를 숙였다.

 <다음엔 제가 사겠습니다. 전화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묘우미는 진지한 얼굴로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로 여자를 다루는 법을 알아?>

 <예. 그렇지만 그런 무서운 얼굴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 만약에...>

 묘우미는 눈을 크게 뜨고 마사오의 눈을 응시하며 다가왔다.   

 <내가 오늘밤 괜찮다고 하면 승낙해 주겠어?>

 마사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라도 영광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응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농담으로 절 조롱하는 건 죄가 됩니다.>

 <농담이 아냐. 난 결심했어.>

 <진심입니까?>  

 <진심이야.>

 <좋습니다. 그런데 몇 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합니까?>

 마사오는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겠어. 당신, 외박할 수 있어?>

 <물론입니다. 당신이 걱정이죠.>

 <전화해서 친구 집에서 잔다고 할 거야.>

 <괜찮습니까?>

 <날 믿어. 염려하지 마.>

 두 사람은 일단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묘우미는 집에 전화를 걸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마사오에게 되돌아

왔다.

 <자, 이제 피하지 마. 오늘밤은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전 마치 꿈 같습니다.>

 다방에서 곧바로 나왔다.

 <자, 여관을 찾겠습니다.>

 <모두 당신에게 맡길게.>

 이상한 여심이었다.

 남자 친구의 장난에는 화를 내더니 처음 만난 마사오에게 처녀를 허락하려

고 한다.

 꽤 취기가 올라 있지만 알콜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여자가 어느 나이에 이르면 성의 세계를 공상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현

실에서 남자가 유혹하면 달아난다. 이 여자는 그런 유혹에서 벗어난 직후에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는 어떤 선입견도 없다. 또한 나의 결점도 

모른다. 나에 대해서 백지 상태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귀찮게  따

라 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갑자기 요즘 느끼는  숙제를 해결

하려는 마음일까?) 

 <이 부근은 조금 꺼림칙하죠? 일단 전철을 탑시다.>

 보통 이런 경우 언제 여자의 마음이 변할 지 모르므로 서둘러 여관에 들어

가려고 한다.

 그러나 마사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학생복 차림인 두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학교 근처의 여관을  출입하기가 

꺼림칙했다.  

 전차를 타고 내려서 여관을 찾아  들어갈 때까지 묘우미는 변심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낡은 대문의 일식 여관으로 들어갔다.

 기모노를 입은 우아한 여인이 현관에서 맞았다.

 착실한 주부 스타일로 나이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이쪽은 학생복이었다.

 (역시 낯뜨겁군.)

 마사오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 여자는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마사오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전차는 아직 있습니다.>

 묘우미가 마사오 앞으로 나섰다.

 <알아요. 하지만 묵고 싶습니다.>

 도전적인 어조였다.

 수줍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경박함이나 음탕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중년 여인은 마사오와 묘우미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구두를 벗고 여자의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자그마한 다다미방

으로 들어섰다.

 붉은 이불이 깔려져 있고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방석 위에 안았다.

 묘우미는 의외로 침착해 보였다.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곧 돌아와 차를 내려놓은 다음에 숙박부를 내밀었다.

 <기입해 주십시오.>

 이어서 요금을 말했다.

 마사오가 지갑을 꺼내려는데 묘우미가 막으며,

 <아니냐. 내가 낼게. 내가 제안한 일이잖아.>

 하고는 재빠르게 요금을 지불했다. 

 여인은 숙박부를 작성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러면 안녕히 주무십시오. 혹시 한밤중에 소동이 나더라도 내다보지  마

십시오.>

 하고서 장부를 들고 나갔다.

 미도리에겐 수줍은 듯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관능적인 자태도 없었다.

 마치 막차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투숙한 듯한 태도였다. 

 마사오가 말했다.

 <먼저 목욕하십시오.>

 묘우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먼저야. 남자잖아.>

 <그러면 그렇게 하죠.>

 마사오는 욕실에 들어가 몸을 닦기 시작했다.

 (설마 목욕하는 동안 달아나 버리지는 않겠지.)

 그럴 염려가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늘밤 처음 만났다.

 달아났을 경우 나중에 학교에서 마주쳐도 불평할 수는 없다.

 (그때는 혼자서 느긋하게 자지, 뭐. 어차피 요금은 다 지불된 거고.)

 마사오가 여관의 가운을 입고 방으로  돌아오자 묘우미는 책을 읽고  있었

다.

 도저히 잠시 후에 첫 경험을 할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유와 침착함

이었다. 

 (정말 특별한 여자군.)   

 <자, 들어가세요.>

 그녀는 일어서서 욕실로 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 버리면 안 돼.>

 <이불 속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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