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오는 열차 시간에 맞추어 아끼를 배웅하러 역으로 갔다.
그런데 개찰구 바로 앞에 유끼꼬가 서 있었다.
<유끼꼬, 여기는 어쩐 일이니? 누굴 기다리는 중이니?>
<친구.>
<약속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아끼가 표를 사 가지고 왔다.
<어머! 아까 하숙집에서 온 애잖아?>
<그 집 딸이야.>
<아유, 귀엽기도 하지.>
마사오가 아끼를 재촉했다.
<자, 어서 서둘러야지.>
<알았어요.>
아끼가 유끼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이 사람을 잘 감시해요. 다른 여자를 방에 들이지 않도록 말이에
요.>
그렇게 내뱉은 뒤 아끼는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마사오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끼가 개찰구를 나가고 마사오는 유끼꼬에게 돌아왔다.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친구를 기다린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야.>
<그래? 난 아끼와 이 근처에서 한 잔 했어. 자, 이제 가자.>
마사오는 유끼꼬의 손을 꼭 잡았다.
함께 걸으며 생각했다.
(이 손은 아끼의 그곳을 만졌던 손이야.)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나왔니?>
<친구 집에 갔다오겠다고 했어요.>
<그럼, 같이 들어가면 이상하겠구나.>
유끼꼬는 마사오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자그마한 손이지만 야무지게 힘이 들어갔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그런데, 좀전의 그 여자와는 친한 사이에요?>
<응? 으응. 조금.>
<오빠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아끼가 유끼꼬에게 한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원래 말투가 그래서 그렇지. 지금 남자 친구 일로 고
민인가 봐. 그래서 자문을 구하러 찾아온 거야. 전부터 날 친오빠처럼 잘 따
랐거든.>
<애인이 있다구요?>
<응.>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오빠에게 그런 걸 상담할까?>
<원래 제멋대로인 애니까.>
<그 여자, 또 찾아올 거예요.>
<그럼 어떡하지? 별로 환영하고 싶지 않은 여잔데.>
<하지만 예쁘잖아요.>
<유끼꼬 이 다음에 훨씬 더 예뻐질 텐데. 그 애에게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어.>
마사오는 손을 놓고 유끼꼬의 작은 어깨를 안았다.
왜 역까지 나와서 마사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린애의 팔을 비튼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마사오는 지금 유끼꼬의 팔보다도 소중한 그 마음을 농락하고 있다
는 죄의식이 느껴졌다.
역에서 멀어짐에 따라 담길이 많아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유끼꼬가 멈춰 서서 마사오를 올려다 보았다.
마사오는 주위를 둘러본 뒤에 등을 구부려 얼굴을 갖다댔다.
입술을 천천히 포갰다.
유끼꼬는 마사오에게 몸을 맡겼다.
마사오는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고 등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끌어당겼다.
<술 냄새! 정말이었구나, 술 마셨다는 거.>
안심한 듯한 목소리였다.
마사오가 아끼와 어디로 갔었는지 의심했던 모양이었다.
<정말이구 말고. 그러니까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어.>
<나는 아직 식사 전인데.>
<그럼 집에서 기다리시겠군. 빨리 들어가야지. 먼저 들어 가.>
<예.>
마사오는 유끼코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끼꼬와는 더 이상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다음 날 아침, 마사오가 역을 향해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앞에 찌에가 걸
어가고 있었다.
마사오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아침에서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찌에가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가십니까?>
마사오가 다가가 인사하자 찌에는 짬짝 놀라며 인사를 받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어젯밤, 학생이 그 아가씨와 함께 나간 뒤에 걱정이 되는지 유끼꼬가 역
으로 나갔었는데, 역에서 만났었죠?>
순간 마사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찌에의 말이 단지 추측이라면 순순히 응할 필요는 없다.
<혹시 친구집에 간 게 아닌가요?>
오히려 반문을 해 보았다.
<후후후.>
찌에는 조용히 웃었다.
<유끼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구실이죠. 아직 어린애니까. 어제 그 아
가씨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학생이 유혹에 빠지
지나 ㄳ을까 걱정이 됐던 거겠죠.>
<유끼꼬가 대학생인 저를 걱정해 준단 말입니까?>
<그래요. 이제 그 애도 사춘기니까 여러 가지로 민감할 때죠. 하지만 난
어머님처럼 엄하게 다스릴 생각은 없어요.>
두 사람은 역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열차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운행되었다.
같은 열차를 타는 것은 어제 아침에 이어 오늘인 두 번째였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출근 시간이라 많이 복잡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약간 비껴선 채 얘기를 주고받았다.
차가 한참 달리고 있을 때 마사오는 허벅지에 무언가 닿아 있는 걸 느꼈
다.
찌에의 가방이었다.
마사오에게는 어제 아침과 같은 일이 재현되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또 두려
워하는 마음이 함께 있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난 그저 이대로 서 있을 뿐이니까. 움직인 건 찌
에의 가방이야.)
열차가 커브 길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중심이 한쪽으로 쏠렸다.
찌에의 왼손이 마사오의 오른팔을 잡았다.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한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동시에 마사오는 찌에의 손등이 허벅지에 와 닿은 것을 느꼈다.
찌에의 왼손은 마사오의 팔을 잡고 있었고 가방을 쥔 오른손의 손등은 차
가 흔들릴 때마다 마사오의 허벅지를 눌렀다.
다시 선로가 곧아지면서 찌에는 마사오의 팔을 놓았다.
그러나 허벅지에 느껴지는 손등의 감촉은 그대로였다.
찌에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떼려고만 하면 쉽게 뗄 수 있는데도 그대로 있는 이유가 뭘까?
(혹시 어제 아침과 같은 경우를 기대하는 건 아닐까?)
마사오는 새삼스레 찌에가 젊은 미망인이라는 걸 의식했다.
윤기 있는 머리결이 어쩐지 그녀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듯했다.
찌에의 손등은 조금은 의식적인 것 같았다.
조금만 옆으로 움직이면 마사오의 그곳에 닿게 된다.
하지만 손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오는 문득 혼자만 괜한 상상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을지 모른다.
그때였다.
열차가 갑자기 서행하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중심을 잃고 움찔하는 사이에 찌에의 손등이 마사오의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들어왔다.
그녀의 몸도 마사오와 부딪칠 정도로 정면을 향해 서게 되었다.
순간 마사오의 몸은 찌에의 부드러운 손등을 느꼈다.
마사오는 아직 부드러웠다.
그 의미는 찌에도 알 것이다.
찌에의 손은 빠져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밀착해왔다.
분명히 열차의 움직임과는 무관했다.
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밀착의 범위도 넓어졌다.
마사오에게 비부를 허락한 유끼꼬의 어머니의 손이다.
너무나 부도덕한 일이었다.
자제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 부도덕함이 오히려 자극적인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좀 덥군요.>
찌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은 지금의 행동이 분명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사오의 몸 급속히 뜨거워졌다.
몸을 돌려야 한다고 머리가 명령했다.
그러나 성기는 오히려 고개를 쳐들더니 찌에의 손등을 찔렀다.
찌에의 상체가 마사오에게 기울어졌다.
팔이 뭉클거리는 그녀의 가슴에 부딪쳤다.
천천히 찌에의 손이 뒤집혔다.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잡는다기보다는 그것을 감싸는 형태를 취했다.
바지를 통해 마사오는 그 손가락을 분명히 느꼈다.
당연히 그녀도 자신의 그런 의도적인 행동을 마사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그런 행동을 했다.
지금껏 성과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찌에의 도발적인 행동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마사오는 아직 <덥군요>라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런다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곧 장마철이 될 것 같군요.>
마사오는 될 수 있는 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그 짧은 대화 속에는 서로 지금의 상황을 용인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찌에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차분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마사오의 그것은 기세 등등하게 찌에의 손에 맥박을 전하기 시작했
다.
그녀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찌에는는 더욱 손가락에 힘을 주어 마사오의 성기를 꽉 쥐었다.
그 움직임에서 애무의 율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꽉 조여올 뿐이었다.
그에 비해 마사오의 불기둥은 세찬 맥박질을 하고 있었다.
열차가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차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종점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찌에의 손은 아직 그대로였다.
얼굴은 거의 마사오의 어깨에 파묻히다시피 되어 있었다.
뾰얗고 가냘픈 목덜미가 검은 머리결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대단히 선정적이었다.
깨물어주고 싶었다.
<곧 내려야합니다.>
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세게 잡았다.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처음 보이는 애무였다.
마사오는 찌에의 귀에 입을 댄 채 작은 소리로 감각을 알렸다.
<아...>
곧 찌에의 손이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손바닥 전체로 그것을 밑으로 비스듬히 밀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한 번 흥분한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열차가 플랫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마사오는 찌에를 에스코트하며 출입
구로 향했다.
찌에는 마사오의 팔에 팔짱을 꼈다.
친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지도 모른다.
마사오는 팔을 조여서 찌에의 팔에 신호를 보냈다.
(만약 이 사람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그 사실을 유끼꼬가 알게 된다
면 어떻게 될까?)
하쥬다도 염려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까지 진전이 될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찌에가 만약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마사오로서는 그것을 거부할
윤리 의식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다른 여자에게서 느껴 보지 못했던 쓸쓸한 에로티시즘이
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열차가 굉음을 지르며 멈췄다.
그리고 출입문이 열렸다.
두 사람도 인파에 섞여 내렸다.
찌에가 팔을 풀면서 재빨리 속삭였다.
<벤치에서 잠깐 쉬어 가요.>
<예.>
<오늘 밤 너무 늦지 말아요.>
아끼와 오늘 만나기로 되어 있다.
하쥬다에게 어젯밤에 내일 친구를 만나 좀 늦을 거라고 말해 두었다.
<예.>
벤치는 비어 있었다.
쉬어 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찌에의 의사를 존중해서 마사오는 멈
춰 섰다.
그런데 찌에는,
<나중에 봐요.>
하고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걸어가 버린다.
(왜 저러지? 부끄러워서일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 버리다니. 아무
튼 좀 앉자. 개찰구도 붐비고, 좀 늦게 나가는 편이 편하다.)
이윽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마사오 혼자 남겨졌다.
복잡한 선로를 보고 있는데 누가 다가왔다.
찌에였다.
<미안해요.>
상냥함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색기마저 풍겼다.
<아닙니다.>
<내가 싫어졌죠?>
중요한 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마사오는 의식했다.
<그 반대입니다.>
<정말?>
<예.>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요.>
<물론이죠.>
<차분히 여러 가지 얘기하고 싶어요.>
<예, 저는 언제든지 좋습니다.>
<하지만 전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질문의 뜻은 대충 알만했다.
빨간 음모
그날 저녁에 마사오는 약속했던 대로 신주꾸의 술집에서 묘우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언제나 약속 시간에 맘춰 어김없이 나타나던 묘우미가 그날 따라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마사오는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술집문이 열렸다.
묘우미는 아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았다.
묘우미와 <구름> 동인인 시루꼬였다.
마사오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왔다.
흰 블라우스에 바지 차림이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 여기 있는 걸 알고 온 것 같은데?)
<오래간만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만나고 싶었어요. 여기 좀 앉아도 괜찮겠죠?>
시루꼬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존댓말을 했다.
일단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시루꼬는 마사오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엉덩이를 조금 밀착시키는 듯했다.
시루꼬의 앞에 잔이 놓여졌다.
마사오는 작은 오리 모양의 주둥이가 긴 병에 담긴 술로 잔을 채워 주었
다.
시루꼬의 가느다란 손이 그 잔을받았다.
한 모금 넘기고 시루꼬가 말했다.
<묘우미가 못 오게 되었어요.>
<예? 아니, 왜요?>
<갑자기 오늘 저녁에 시골에서 사촌이 올라오는 바람에 제가 대신 나온
겁니다.>
<여기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역으로 마중나가면서 수첩을 집에 두고 나와서 그
렇게 됐대나 봐요. 술은 혼자 마시며 재미 없잖아요. 왜요, 저는 안 되나
요?>
시루꼬는 마사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영광입니다.>
<오늘밤은 저랑 마시는 걸로 하죠. 저도 술 취하면 꽤 괜잖다구요.>
시루꼬는 세련된 웃음을 꼬리처럼 붙였다.
실은 이 자리는 묘우미와 시루꼬 두 여자가 마사오를 시험해 보기 위해 짠
각본이었다.
오늘 오후, 묘우미와 시루꼬는 다방에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마사오를
화제로 떠올리게 되었다.
시루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 널 좋아해서 만나는 건 아니라고 봐. 다른 여자가 유혹하면 또
슬쩍 넘어갈걸. 남자란 다 그렇잖아.>
묘우미는 마사오와의 관계가 별다른 의미없고, 또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라 말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시루꼬의 이 말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냐, 처음에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달라. 설마 네가 그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마사
오 씨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봐.>
묘우미는 자신있게 단언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야. 남자들은 유혹에 반드시 넘어가게 돼 있어.>
시루꼬는 묘우미를 자꾸만 자극했다.
마사오밖에 모르는 묘우미로서는 몹시 기분 상하는 얘기였다.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어서 <연인> 관계가 아님에도 마사오의 정조 관념
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자 시루꼬는 묘우미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밤 내가 너 대신 마사오 씨를 만나 볼까? 넌 자신이 있을 테니
까, 괜찮겠지? 만약 나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너희들의 순수성을 인정
하고 존경하겠어.>
묘우미는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싫어. 말도 안 돼.>
<그럼 그렇지. 거 봐. 너도 못 믿고 있잖아.>
시루꼬는 비웃었다.
결국 묘우미는 그 제안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을 마사오가 알 리가 없었다.
<저도 마침 오늘 저녁에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어요. 게다가 마사오 씨와
함께 얘기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마사오는 순수하게 이 말을 맏었다.
실망한 마음으로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고집스런 여자인
긴 해도 따분하지 않게 얘기 상대는 되는 여자였음으로 함께 있는 것도 나
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 마십시다.>
건배를 하고 마사오는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시루꼬 씨의 연애담을 듣고 싶은데, 어떻게 요즘도 잘 돼 갑니까?>
<글쎄요.>
시루꼬는 목소리를 죽여 마사오의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후꾸이 씨는 마사오 씨보다 세 살 위죠. 올해 졸업했어요.>
<아, 그래요.>
<지금은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요즘 몸이 많이 약해졌어요. 섹스가
요.>
마사오는 새삼스럽게 시루꼬가 요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 그렇죠?>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시루꼬의 따스한 입김이 귓볼을 간지럽혔다.
<발기력도 약해졌고 의욕도 없어요.>
그때 자신의 무릎 위에 있던 손이 떨어지며 마사오의 팔에 시루꼬의 가슴
이 스쳤다.
입으로는 매우 직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랬다면 이미 제가 눈치챘겠죠. 그럴 만한 힘도 없어 보
여요.>
<그럼 불만이 많겠군요. 다른 사람을 사귀지는 않으십니까?>
<아니오. 난 묘우미처럼 사랑스럽지 못하거든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세 병째 술을 비우도록 묘우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시루꼬로선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그 가게를 나왔다.
시루꼬는 마사오의 팔짱을 깊숙이 꼈다.
유방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제가 사겠어요. 소주 때문에 목이 마를 테니까 맥주 한 잔씩 해
요.>
<좋습니다.>
시루꼬가 안내한 곳은 어두컴컴한 경양식집이었다.
두 사람은 빈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시루꼬는 점점 요염한 자태로 마사오에게 접근하며 친절하게 여러 가지 신
경을 써 주었다.
(나를 위로하는구나. 관념적이고 고집스런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여자다운 면도 있다니, 의외인데.)
시루꼬의 또 다른 면모를 신선하게 느끼면서 마사오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맥주를 받아 마셨다.
당연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가끔씩 시루꼬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는 것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
지 않았다.
그 손은 점점 중심부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의 아홉 시가 다 되어 그 가게를 나왔을 때 마사오는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시루꼬가 마사오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내 아파트에 가서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스카치가 있거든요.>
학생 신분으로 스카치를 마실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마사오는 취중에도 자신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마사오는 시루꼬를 따라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순수하게 스카치를 마사기 위함이었다.
또 묘우미의 친구이므로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탁자 위에 스카치가 놓여졌다.
귀한 술이었다.
간단하게 마른안주가 나왔다.
시루꼬는 벽장에서 가운을 꺼냈다.
<편한 것으로 갈아입으세요. 좋은 술은 느긋한 마음으로 마셔야 제 맛이
나거든요.>
<그러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아무도 오지 않아요. 오늘밤에는 지난번과 같은 음모는 없으니까요. 안심
해요.>
잠시 사양하다가 마사오는 시루꼬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윗도리와 셔츠를 벗었다.
시루꼬는 뒤에서 가운을 마사오의 어깨에 걸쳤다.
마사오는 바지도 벗었다.
이미 시루꼬는 허리띠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루꼬는 앞으로 쓸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전문적인 문학 용어가 많아 문외한인 마사오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
지만 문학에 대한 시루꼬의 열정만은 알 수 있었다.
이야기에 열중한 시루꼬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소설 얘기가 끝나고 잠시 세상 얘기로 옮겨가는 듯하더니 시루꼬의 임신한
친구에게로 화제가 바뀌었다.
<일주일 전에 중절 수술을 했는데 그동안 제가 수술실 밖에서 기다렸어요.
그리고 그날 밤은 제가 그 애 집에 가서 돌보아 주었죠.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절한 뒤에는 손에 물을 묻혀서는 안 된다더군요.>
<좋은 일을 하셨군요.>
<그것도 일종의 경험이죠. 저녁 때 남자가 왔었는데 태도가 냉랭하더군요.
삼십 분쯤 있다가 돌아가 버렸어요. 그 친구는 그 남자와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수술비를 부담하는 걸로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이니
까요. 그런데 마사오 씨는 묘우미와 피임을 어떻게 하고 있어요?>
꽤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주의하고 있습니다. 고무 제품을 사용하기도 하구요.>
대부분 연인끼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 조절법은 생리가 정확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겠죠?>
<알고 있습니다.>
<조심하는 게 좋아요.>
<예.>
시루꼬다 책상 서랍을 열더니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콘돔 상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였다.
시루꼬가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드리겠어요. 묘우미와 함께 사용하세요.>
<시루꼬 씨는?>
<난 이제 필요없어요. 좀전에 소주집에서 말씀드렸죠? 후꾸이 씨와는 헤어
질지도 몰라요. 다른 남잘르 사귄다 하더라도 여자가 이런 물건을 갖고 있
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없애는 편이 나아요.>
<그럼 받아 두겠습니다.>
<오늘밤에는 묘우미를 만나기로 한 거니까 이미 가지고 계시겠죠?>
<예.>
<이거와 같은 거?>
<아니 달라요.>
<보여 줘요.>
마사오는 지갑을 찾아 그 속에서 꺼내 시루꼬의 앞에 내밀었다.
<어머! 소중하게 갖고 다니시는군요.>
시루꼬는 종이를 펼쳤다.
봉지에 담긴 것이 네 개 나왔다.
<와, 이걸 다 사용할 생각이었어요?>
<함께 밤을 새게 되면 그 정도는 준비해야죠. 하지만 세 개면 충분해요.
나머지 하나는 예비용이죠.>
시루꼬는 봉지 속에서 콘돔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밤에 이걸 사용할 참이었는데 저 같은 애와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재마 없죠?>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잖아도 시루꼬 씨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터인데
이렇게 귀한 술까지 대접받고 영광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입니다.>
<그럼 안심이에요.>
시루꼬는 검지로 손바닥 위에 있는 물건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마사오 씨는 이것을 처음부터 사용하나요? 아니면 중간에?>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합니다.>
<그래요. 이걸 그 애와 당신이 사용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드는군
요.>
시루꼬는 그것을 다시 종이에 싸서 마사오에게 준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사오의 잔에 스카치를 채웠다.
<자, 오늘밤에는 술이나 실컷 마셔요. 내가 묘우미라면 기쁨을 위해 이쯤
에서 절제해야겠지만 말예요.>
<아니오, 전 묘우미 씨와 함께 있을 때도 마실 때까지 마셔요.>
<하지만 너무 마시면 즐길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래요?>
마사오는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오늘밤에는 뜻밖의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시루꼬는 놀란 얼굴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금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인데 여기서 주무시고 가세요.>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제가 너무 몰염치한 사람이 되죠.>
<아이, 괜찮아요. 제가 마시게 했으니까 저도 책임이 있어요. 무사히 하숙
집까지 도착했는지 걱정하는 것보다는 여기서 주무시는 게 제 마음이 편해
요. 아침밥도 맛있게 지어 드릴게요. 예? 그렇게 하세요.>
마사오가 잠시 망설이다가 재차 시루꼬가 권유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편한 마음으로 삼십 분 정도 더 마신 뒤 술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시루꼬는 탁자를 치우고 대충 청소를 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방 중앙에 이불 한 채를 깔고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놓았
다.
<같은 이불에서 자도 괜찮겠습니까?>
<이불이 한 채밖에 없어요. 설마 남자인 마사오 씨가 절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죠.>
<먼저 주무세요. 전 부엌일을 좀 해야겠어요. 그릇 쌓아 두는 건 싫거든
요.>
마사오는 가운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상대는 묘우미가 아니라 친구인 시루꼬였다.
마사오는 그냥 얌전히 잠만 잘 생각이었다.
흑심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먼저 잠을 청해야 한다.
<먼저 자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제가 들어갈 자리만 남겨 두시면 돼요.>
술기운에 올라 있는 마사오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곧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