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경 모텔 3층 엘리베이터 앞,
엘리베이터 표시등에선 6에서부터 시작된 숫자가 거꾸로 바뀌어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올라갔던 것이면 비어서 내려올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음…… 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띵” 소리의 신호음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자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어깨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시선이 그들의 발로 향했다.
검은색 나이키 농구화와 앞이 뾰족한 짙은 브라운색깔의 롱부츠.
거기서 호기심이 동한 나의 눈길은 그 두 사람을 지그재그로 훑어 올라갔다.
힙합스타일의 통이 큰 청바지, 주름이 들어간 짧은 스커트, 체크 무늬 셔츠 위로 패딩조끼,
아이보리색 목폴라 니트 위에 네이비색 트렌치 코트,
작은 키와 마른 몸에 어울리는 갸름하고 뽀얀 그래서 부티가 흐르는 남자의 얼굴,
어깨까지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에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귀염성 있는 여자의 얼굴……
여자의 얼굴, 여자의 얼굴,,,,,,
‘어!’
너무나도 낯익은 여자의 얼굴,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자의 눈은 이미 나보다 더 크게 떠져 있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혔다.
<……보름 전……>
“재진이 행님!”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과 후배인 태호가 긴 다리를 휘청거리며 언덕길을 열심히 뛰어올라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바쁘세예?”
“아니, 왜?”
“그라믄 저짝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시지예.”
우리는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들고 도서관 옆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행님, 요즘 윤식이 행님 댁에서 지내신다면서예?”
“응.”
“윤식이 행님은 부모님이랑 같이 생활한다 아입니꺼, 안 불편하세예?”
“안 그래도 방 알아보고 있어.”
“어차피 2학기도 두 달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냥 우리 집에 안 들어 오실래예?”
“니네 집에?”
“예, 방 하나 비 있거든예.”
“너 상진이랑 같이 자취했었지?”
“예, 상진이 1학기 끝나고 군대 갔다 아입니꺼.”
“그건 아는데, 그럼 그 이후로 계속 혼자 지냈던 거냐?”
“예.”
“혼자서 월세 감당하기 안 힘들데?”
“아니예. 전세로 얻은 거라 그런 건 없십니더.”
“그럼 다른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같이 살지 그랬어.”
“친구 놈들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집 금방 난장판 된다 아입니꺼. 기냥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예.”
“근데, 나한텐 왜 들어오라고 하냐?”
“행님이야 들오셔도 그럴 걱정 없자나예. 그라고 저 내년에 군대 가기 때문에 학기 끝나는 대로 다 정리할끼라예. 어차피 행님도 방학되면 서울 집에 가실 낀데 한달 반 있을라고 집 구하는 거 번거롭잖아예. 기냥 우리 집에 오세예.”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날 저녁 짐을 챙겨 들고 태호의 집으로 들어갔다.
형수님이 중국으로 떠난 지 건 일주일 만에 일이었다.
“집 깨끗하네.”
“행님 오신다고 좀 치았어예. 그란데 행님 짐이 이거 뿐입니꺼?”
“응, 주말마다 집에 가니까.”
태호는 내 짐을 받아 들고 한달 보름 동안 내가 머물게 될 방으로 안내했다.
책상 하나에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행님, 오늘 저녁은 제 여자친구 집에서 묵지예.”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혼자 갔다 와.”
“아입니더. 미리 다 말해놨는데예. 행님 오신다고 일부러 저녁 준비하는 긴데 안 가시면 안됩니더.”
난 태호가 혼자 가기 미안해서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다.
아무튼 면식도 없는 사람 집에 불쑥 찾아간다는 게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상대 쪽에선 이미 간다고 알고 있고 식사까지 준비한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너 언제 여자친구 사귄 거야? 내가 아는 애야?”
“우리학교가 아이라 XX대 다니는 압니더. 작년에 그 학교 축제 때 알게 돼서.”
“꽤 됐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입니더. 아는 사람 거의 없어예.”
“여기 사람이야?”
“아니예, 서울 안데 아는 언니랑 둘이서 자취하고 있어예.”
“아는 언니라면…… 선배?”
“선배는 아니고예. 여자친구 학교 내에 연구단지가 있는데 거기 연구원입니더. 나이는 행님보다 3살 많을 낍니더.”
“어색한 거 질색인데, 그냥 너 혼자 갔다 오면 안되겠냐?”
“행님 진짜 이라깁니꺼!”
“알았다, 알았어.”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더. 지은이도 누나도 진짜 사람 좋아예.”
태호의 여자친구 집은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빌라형식의 건물이었다.
당시 그 일대 여러 대학에 타 지역 출신들이 급증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몇 층이냐?”
“3층예.”
태호 뒤를 따라 층계를 올랐다.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설 때마다 몸도 마음도 조금씩 긴장되었다.
“민지은! 내 왔다.”
“기다려!”
현관문 너머로 한 여인의 음성이 들리더니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초인종 안보여? 동네 창피하게 왜 맨날 이름 불러?”
뾰루퉁한 표정으로 태호를 흘겨보는 태호의 여자친구,
동그스름한 얼굴에 젖 살이 채 빠지지 않은 볼,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
귀여운 이미지 탓인지 애교도 많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뭐, 어떻노! 행님한테 인사나 해라.”
“아 참,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네. 실례 좀 할게요.”
“이거 행님이 사오신 화분이다. 받아라.”
“와~ 이쁘다. 뭐 이런 거까지 사오셨어요.”
“가시나, 고맙다는 말은 안하고.”
“참, 고맙습니다. 태호 너도 오빠 보고 좀 배워라.”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토마토소스 냄새가 솔솔 풍겼다.
“언니, 태호랑 태호 선배오빠 오셨어.”
“누나 저 왔습니더.”
“응. 딱 맞춰왔네.”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일단 욕실에서 손 씻고 이쪽에 앉으세요.”
“점퍼는 벗어서 저 주세요.”
욕실로 들어서려다 말고 태호 여자친구에게 점퍼를 벗어 건네주었다.
그리곤 손을 씻고 나와 태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스파게티 좋아하세요?”
“아~, 네!”
“맛 없어도 맛있게 드세요.”
“누나! 맛 없는데 우째 맛있게 묵겠십니꺼!”
“넌 맛없음 먹지마!”
“아이, 말이 그렇다는 기지예. 하하하.”
“조용히 하고 먹기나 하셔!”
해물스파게티와 레드 와인, 좋아한다고 대답은 했지만 나에겐 익숙한 음식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리를 잘 한 덕분인지 생각 외로 입에 잘 맞았다.
그리고 붉은 포도주의 약한 알코올 기운은 긴장된 마음을 적당히 풀어주었다.
“이름이 뭐에요?”
“최재진입니다.”
“어, 나랑 이름 비슷하네. 난 최수진인데.”
“누나 최씨였십니꺼?”
“응.”
“이름만 들으면 둘이 남매 사이 인줄 알겠다.”
“그러네.”
“재진씨는 어디 최씨?”
“경주 최씨입니다. 몇 대손인지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와, 나도 경주 최씬데…… 먼 친척일 수도 있겠네.”
별 것 아닌 우연이지만 처음 대하는 사이에 이런 공통점은 동질감을 형성하면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도 금새 친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그렇게 서먹함이 걷힌 후엔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졌다.
어색했던 존칭도 사라지고 호칭도 자연스러워졌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 바닥에 맥주 한 캔씩을 들고 둥그렇게 앉았다.
TV를 켜놓았지만 우리들의 시선 밖이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우리들의 대화소리에 묻혀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낯을 더 가렸는데 그 날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도 우스개 소리가 잘도 나왔다.
분위기가 그만큼 좋았던가 보다.
시계 초침이 11시가 막 넘을 무렵에서야 태호와 나는 수진이 누나와 지은이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소주 2병이 든 검은 봉지가 함께했다.
“행님, 잠깐만 기다리세예. 찌개 데파께예.”
내가 경상도 출신이 아니었으면 저 말을 어찌 알아들었을까 생각하며 거실 바닥에 작은 상을 가져다 놓았다.
화력 좋은 가스 불에 찌개는 금새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었다.
그 사이 소주잔 두 개에 참치 캔 하나로 된 단출한 술상이 준비됐고
김치찌개가 옮겨지면서 술잔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태호와 나는 같은 과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같은 밴드동아리이기도 했다.
나는 취미생활 정도였지만 태호는 정말 음악에 인생을 걸어볼 생각까지 하는 정도로 미쳐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우리의 이야기는 늘 음악이었다.
그날도 소주 한 병을 비우기까지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적당한 취기가 올라오자 태호는 머리 속을 채우고 있던 고민을 하나 둘씩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고민의 본질은 결국 군대와 자신의 여자친구인 지은이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 그 고민을 들었을 땐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위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건 스스로 부딪히고 아파해야 할 몫이지 않는가!
그저 술 한잔 후의 깊은 잠이 가장 좋은 위로라고 여겨졌다.
다음날 아침 태호는 아침 수업이 없어 나만 먼저 집을 나섰다.
한결 쌀쌀해진 늦가을 아침 공기가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을 만들어 내었다.
“재진아!”
고개를 돌려보니 꺾어진 골목에서 걸어 나오는 수진이 누나 모습이 보였다.
까만 색 정장 차림, 굽이 제법 높아 보이는 힐은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누나! 지금 출근하시는 거에요?”
“응, 카센타에서 차 찾아서 가려고. 좀 일찍 나왔어. 근데 넌 왜 이렇게 일찍 나가?”
“뭐 좀 할게 있어서요. 그렇게 입고 안 추워요?”
“내가 몸에 열이 좀 많은 편이어서 그런지 안 추운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큰 길가로 나가자 때마침 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정류장에 멈춰서고 있었다.
“버스 왔다. 누나 갈게. 참, 저녁에 밥 먹으러 와.”
“네.”
버스를 향해 총총 걸음으로 뛰어가는 누나의 뒷모습, 왠지 형수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키는 누나 쪽이 약간 더 큰 듯 했지만 A라인 스커트가 꽉 끼는 골반과 힙,
그리고 허벅지라인, 아니 전체적으로 육감적인 두 사람의 몸매라인이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 날 오후 수업 하나 듣고 집에 오니 3시가 조금 넘었다.
과제를 마무리 짓고 나자 어느새 5시.
그 즈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태호냐?”
“아니, 나 지은이.”
지은이도 현관 열쇠가 있었나 보다.
내 방에서 거실로 나가니 지은이는 소파 위에 가방을 놓아두고 커피포트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오빠도 커피 마실래?”
“그럴까?”
“태호는 아직 안 왔나 봐?”
“만나기로 했으면 금방 오겠지 뭐.”
“아니, 만나기로 한 건 아니고 있을 줄 알고 온 거야. 오늘은 같은 시간에 수업 마치거든.”
커피포트에서 금새 끓은 물은 새하얀 김을 내며 두 개의 커피잔으로 쏟아졌다.
지은이는 커피잔을 소파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그제서야 점퍼를 벗었다.
점퍼를 벗는 순간 자연스레 내밀어진 가슴,
티셔츠의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중량감이 느껴질 정도로 컸다.
일부러 보려 했던 건 아니지만 왜 자꾸 그런 쪽으로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인지!
지은이가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부터 대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지은이의 친숙한 말투와 성격으로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같이 어색함이 없었다.
“근데, 오빠는 서울 어디 살아?”
“방배동.”
“어, 나도 방배동인데.”
“난 방배 전철역 그 뒤 쪽.”
“난 까페촌 뒤.”
“오~~ 거긴 부촌인데.”
“안타깝게 우리 집 뒤쪽부터 부촌이야. 히힛”
“그럼 중, 고등학교도 거기서 나왔겠네?”
“응.”
알고 보니 지은이는 중학교 후배였다.
물론 지은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난 고등학생이 되어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같은 동네 출신이란 점에서 형성된 유대관계는 중학교 선후배란 사실로 더욱 공고해졌다.
서로의 과거들을 꺼내 대입시켜보는 사이 시계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가 바뀌었다.
태호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메모 한 장 남겨놓고 지은이네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왔어? 태호는?”
“아마 밴드부 애들이랑 같이 있나 본데요.”
“근데, 어떻게 지은이랑 같이 왔어?”
“태호 데리러 갔더니 오빠만 있어서 같이 왔어. 근데 언니, 알고 보니까 재진이 오빠랑 나랑 중학교 선후배인 거 있지.”
“진짜?”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