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호의 존재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비단 우리들 화제에서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11시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태호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야 거실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인사불성이 되어 자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날만큼은 태호가 없었기에 수진이 누나와 지은이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태호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태호를 중심으로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을 테니 말이다.
사람이 난 자리는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고 했던가?
적절한 때 이어진 새로운 인연들로 형수님이 떠난 자리가 그리 공허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공허함이 두려워 새로운 인연들에게 더욱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과 어울리다 주말엔 모처럼 서울 집에 올라갔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단짝친구들을 만나서 본래의 내 생활을 조금씩 찾아갔다.
며칠 뒤면 가장 늦게 군에 갔던 단짝 중에 단짝인 준영이도 전역을 할 테니 많은 것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다시 시작된 한 주는 몇 가지 일들로 정말이지 재빨리 지나갔다.
특히 태호, 나, 수진이 누나, 지은이는 저녁시간이면 항상 같이 어울렸다.
산책도 하고 탁구도 치고 한번은 야구 경기까지 보러 가기도 했다.
난 그들이 늘 이렇게 시간을 함께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태호는 내가 끼기 전엔 이렇게까지 함께 붙어 다녔던 적이 없었다며 진작에 이러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두 번째 맞는 주말, 흥에 겨웠던 기분을 유지하며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더군다나 휴가 한번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던,
그래서 3년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준영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선 집에 들를 사이도 없이 준영이를 만났다.
해는 빨리 저물었고 옛날부터 어울리던 친구들 열댓 명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누구 하나 술잔을 빼는 녀석 없이 기분에 취하고 술에 취해갔다.
그런데 단 한 명, 술잔에 술을 교묘히 버리는 녀석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바로 준영이었다.
게다가 나에게 눈짓을 보내며 자신과 보조를 맞추라 했다. 다른 계획이 머리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사람 수가 많을수록, 분위기가 정겨울수록 술이 소비되는 속도는 빠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0시가 조금 넘자 인사불성이 되어 꼬꾸라져 자는 놈,
화장실 들락거리며 토하는 놈,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놈이 생겨났다.
준영이는 파장을 선언하듯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정신이 말똥말똥한 나와 성주를 먼저 다를 곳으로 피신시키고는
집이 같은 방향인 애들을 짝지어 보냈다.
술에 취한 놈들을 처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모든 정리가 끝이 났다.
그 사이 나는 성주에게서 준영이의 계획을 전해 들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나이트를 가기 위해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나만 믿어!”
처음 알게 됐을 무렵부터 날날이 기질이 다분했던 성주가 제 세상을 만난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준영이는 그 말에 고무되어 굶주린 야수의 눈빛을 번득이며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 새끼 진짜 굶주렸구나!’
성주는 택시를 잡으면서부터 나이트에 도착해서 룸에 들어가기까지 잠시의 주저함도 없었다.
술을 시킬 때도, 웨이터에게 팁을 쥐어주며 구워삶는 것도 일사천리였다.
아니, 웨이터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그리고 웨이팅 걸려서 현관입구에 줄지어 대기하던 다른 손님들과는 다르게 거리낌없이 들어올 때부터
난 이 새끼가 여기 죽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아무튼 테이블이 술과 안주로 세팅 되자 이번엔 여자들이 쉴 새 없이 웨이터 손에 이끌려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괜찮은 여자애들도 많았지만 눈에 안차는 건지, 뭘 알고 그러는 건지 성주는 계속해서 뺀지를 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뜸들이다 드디어 성주가 작업대상을 물었고
그 쪽 나머지 친구들까지 합세해 쌍을 이루어 부어라 마셔라 추어라 불러라 하며 환락에 시간을 보냈다.
스테이지와 룸을 몇 차례 들락거리고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 준영이와 그의 파트너가 자리를 떴다.
성주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파트너를 울러 메고 있었다.
쟈켓을 챙겨 입고 뒤따라 나갔을 땐 성주를 태운 택시는 이미 가속을 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건 내 파트너와 나.
가물가물하지만 그녀의 외모는 상당히 예뻤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까지 내가 만난 여자들 중 최고였을 정도로.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그게 내 성욕을 반감시킬 줄이야.
분명히 발동이 걸린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이쁘다는 사실이 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 택시를 타고 까페촌으로 이동했다.
먼저 허기진 배를 따뜻한 우동으로 채우고 어느 구석진 바에서 칵테일 몇 잔을 더 마셨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어색한 분위기도 아닌 별로 재미없는 그저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 밖에는.
사실 그녀와 나는 그다지 코드가 맞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대화하는 내내 겉돌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모텔까지 함께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고개만 갸우뚱해질 뿐이다.
모텔 현관을 들어설 때도, 방 안으로 들어갈 때도, 심지어 샤워를 할 때도 이상하리만치 두근거림이 없었다.
역시나 내키지 않았던 탓일까?
하지만 그 괜한 오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그녀의 육체를 달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어때?”
“잘 모르겠어요.”
“느낌이 안 와?”
“저 경험이 없어서 뭐가 뭔지 잘……”
사실 그 때 그만두었어야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삽입을 시도했다.
“아직도 별 느낌 없어?”
“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 말에 힘들게 유지했던 욕정뿐만 아니라 겨우 발기했던 페니스도 스르르 힘을 잃어버렸다.
“오빠 더 안 해요? 아직 사정 안 하셨잖아요.”
“술 많이 먹어서 잘 안 된다. 그냥 잠이나 자자.”
코드가 맞지 않은 다는 이유 때문일까? 그녀와의 섹스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물론 그 동안 형수님을 통해 갈고 닦은 솜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생긴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테크닉과 상관없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고, 하면서도 나무토막을 상대로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속 궁합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테크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걸 깨우친 순간이었다.
잠에서 깬 건 오전 9시경, 그녀는 음을 소거한 채 TV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깰까봐 드라이어를 키지도 못하고 젖은 머리를 그대로 말아 올리고 있었다.
“더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아냐, 다 잤어.”
화장을 지운 얼굴을 보니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한동안 시선을 빼앗길 만큼 수수하고 이쁘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음씀씀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모습을 대하니 사정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진 건 왜일까?
내가 샤워하는 동안 그제서야 그녀는 머리를 말렸다.
‘아~, 쟤를 어째야 되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제와는 달랐다.
날날이 같았으면 오히려 실망하거나 내가 자고 있을 때 먼저 가버렸을 텐데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았다.
어젯밤을 생각해 보더라도 성주 파트너나, 준영이 파트너처럼 술을 퍼 마시지도 않았고 나대지도 않았다.
그냥 다소곳이 앉아있다가 내가 춤추러 가면 따라 나와서 보조만 맞췄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사귀기엔 괜찮은 스타일 같은데
문제는 내가 육체관계를 무시하면서까지 사람을 사귈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젖은 몸을 닦고 나오자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 위에 윗도리부터 양말까지 차례대로 놓여있었다.
감동스럽기보단 부담스러웠다.
여전히 사귈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장에 안면몰수하고 등을 보여서도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일단 밥이라도 먹자, 먹고 생각하자!’
10시가 조금 넘어 객실에서 빠져 나와 3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표시등에선 6에서부터 시작된 숫자가 거꾸로 바뀌어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올라갔던 것이면 비어서 내려올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음…… 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띵” 소리의 신호음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자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어깨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시선이 그들의 발로 향했다.
검은색 나이키 농구화와 앞이 뾰족한 짙은 브라운색깔의 롱부츠.
거기서 호기심이 동한 나의 눈길은 그 두 사람을 지그재그로 훑어 올라갔다.
힙합스타일의 통이 큰 청바지, 주름이 들어간 짧은 스커트, 체크 무늬 셔츠 위로 패딩조끼,
아이보리색 목폴라 니트 위에 네이비색 트렌치 코트,
작은 키와 마른 몸에 어울리는 갸름하고 뽀얀 그래서 부티가 흐르는 남자의 얼굴,
어깨까지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에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귀염성 있는 여자의 얼굴……
여자의 얼굴, 여자의 얼굴,,,,,,
‘어!’
너무나도 낯익은 여자의 얼굴,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자의 눈은 이미 나보다 더 크게 떠져 있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혔다.
“지은이?”
“네?”
“아냐 혼잣말 한 거야, 아는 후배랑 닮아서.”
“아, 네~”
지은이, 태호의 여자친구 지은이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옆에 있던 그 남자는 누구일까?
분명 태호와 헤어진 건 아닌데 그렇다면 양다리인가? 아니면 원나잇 스탠드?
아니 잠시 스쳐간 모습이지만 그 둘이 서있던 모습은 그날 만나서 즐긴 사이 같지는 않았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간에 지은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태호에게 알릴 생각 또한 없었다.
얼마 후면 군입대 할 마당이고, 굳이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다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데,
적어도 내 가치관으로선 남의 인생을 옳으니 옳지 않니 하며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마주치지 말아야 할 상황을 마주쳐버린 것이고,
앞으로의 숙제는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지은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였다.
머리 아픈 일요일을 보내고 드디어 월요일, 오전 수업이 없던 나와 달리 태호는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행님, 수업 끝나는 대로 바로 오실꺼지예?”
“아니, 요번 주는 계속 도서관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예?”
“중간고사 끝나고 계속 놀기만 해서, 이것저것 할 게 많다.”
“아, 그래예?”
그게 순간적으로 둘러댄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면야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했을 테지만 그땐 안보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물론 태호 때문이라도 아예 안 볼 순 없겠지만 그것도 한달 정도 남은 2학기만 버티면
그 땐 자연스럽게 마주칠 일 없게 되는 것이니까.
아무튼 그 한 마디 핑계로 일주일을 벌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 홀가분한 기분 때문인지 그제서야 지은이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순진한 앤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당돌한 모습이 있었을 줄이야.
수진이 누나와 간단한 전화통화만 두 차례 했을 뿐,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파묻혀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주말을 맞이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친구들과 오랜만에 농구를 하며 땀을 뺐고 목욕탕에서 때도 밀었다.
그리고 꿀맛 같은 낮잠.
저녁이 되어서는 당구와 4:4스타 대결로 1, 2차 술내기를 하며 박터지는 시간을 보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내기의 향방이 가려졌고 가까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옛날 이야기와 서로의 치부를 들추어내며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과 순식간에 비워지는 술이 아쉬울 뿐이지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에 낄 틈도 없이 웃고 있는 사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재진이 오빠?”
“네, 누구?”
“나 지은이, 지금 통화 가능해?”
“응, 잠깐만.”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인지 의심할 사이도 없이 술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여보세요?”
“친구들이랑 같이 있나 봐?”
“응. 근데 무슨 일이야?”
“왜 전화하면 안돼?”
“아니, 그게 아니라 한번도 전화 한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했지.”
“그냥…… 가까운데 있으면 술이나 한 잔 사달라고 하려 했는데.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안 되겠네!”
“넌 어딘데?”
“친구랑 같이 있다가 친구는 남자친구 만난다고 방금 가고 방배역쪽에 혼자 있어.”
“음…… 10분 정도 걸릴 거야. 4번 출입구 쪽에서 보자.”
축 쳐진 지은이의 목소리가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그 날 일에 대해 변명이든 사실이든 어떤 말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나에게 전화하기까지 수십 번을 망설였을 것이고
그렇게 힘든 결정이었을 만큼 내가 미루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잠 못 이룰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피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지은이가 날 피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지만 자기가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고자 한다면
내가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화장실로 향하던 재신이와 마주쳤다.
“재신아. 나 집에 갔다 와야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제사라는데 아침부터 애들이랑 노느라고 모르고 있었어.”
“그럼 집에서 전화 왔던 거냐?”
“응. 제사 끝나는 대로 올게.”
“그 시간되면 이미 파장했겠다. 애들한테는 내가 천천히 말 할 테니까 들어가봐.”
“알았다. 그럼 잘 놀아. 내일 연락할게.”
주말 늦은 시간이라 택시는 막힘 없이 한번에 달렸다.
그리고 미처 마음에 준비를 하기도 전에 지은이가 서있는 곳에 도착했다.
“금방 오네.”
“가까운데 있었어. 어디로 갈까?”
“오빠,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면 안될까? 혹시 아는 사람 만날까봐.”
“난 상관없으니까 편한 대로 해.”
다시 택시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찻길 건너로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번쩍이며 늘어서 있었다.
“여기 어디 건널목 있을 텐데.”
“오빠 번잡한데 말고 조용한데 없을까?
“나도 여긴 잘 모르는데…… 그럼 이쪽 골목으로 들어가 볼까?”
건너편 도로와는 다르게 어둑어둑하고 외진 곳, 거기서 더욱 외진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골목길 끝으로 술집 간판 하나가 보였다.
“저기 갈까? 조용해 보이는데.”
“응.”
3층까지 걸어올라 가자,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손님이 제법 있었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이쪽으로 오세요.”
“중앙 쪽 말고 창 쪽으론 자리 없나요.”
“잠깐만요.”
잠시 우리를 세워놓고는 구석으로 사라져버린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 종업원,
그녀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손짓을 했다.
“지금 창가 자리는 여기 밖에 없어요. 어떡하실래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친절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기 앉을게요.”
“잠깐만요. 박스 좀 치울게요.”
입구와는 가장 먼 구석 중의 구석, 이 곳이 손님으로 메여터지지 않는 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그래서인지 박스 몇 개가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구석자리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날은 오히려 그런 구석이 더 없이 편했다.
게다가 창가 자리 중엔 유일하게 아래 창문이 열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 소주 한 병이랑, 모듬꼬치 주세요.”
술이 오기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내 시선은 침묵을 피하는 듯 창 밖으로 향했다.
작은 사무실 건물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 골목길.
방금 걸어온 그 골목길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늦은 주말 저녁이라 불 하나 켜진 창문 없이 죽은 길처럼 보였지만 평일 낮이라면
이곳이 건너편보다 더 활기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술집이 존재하는 것일 테고.
그 사이 소주와 서비스 안주가 먼저 나왔다.
서로의 술잔을 채우고 건배, 그것이 그 날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쉽사리 시작되지 못했다.
결국 주문한 모듬꼬치 안주가 나오고 3번째 술잔을 들이킨 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네. 아무튼 오빠는 그 날 본거 기억 속에서 지웠어. 태호한테도 말 할 생각 없고.”
“태호한테건, 누구한테건 말 안 한다는 거 알아.”
“그럼 너도 마음 편히 가져라. 아님 나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태호한테 거짓말하게 만든 꼴이잖아.”
“물론, 태호 얼굴 보긴 좀 그래. 특히 너에 대한 이야기하고 좋아라 하는 표정 보면. 근데, 니들 둘이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지켜질 약속도 아니지만. 아무튼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무 말 안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신경 안 썼음 좋겠어.”
“고마워 오빠!”
“태호 군대 갈 때까지만이라도 잘 해줘.”
“알았어.”
그때 지은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받아.”
“안받아도 되는 거야.”
그사이 한 번 끊어졌던 전화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잖아. 받아봐.”
“알았어 그럼 잠깐만.”
그제서야 전화기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보세요 / 내가 어디 있건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구 / 나 이제 정말 오빠 안보고 살 거야!”
통로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서 하는 말이 내 귀에도 들렸다.
물론 상대방이 뭐라고 했는지 누군지도 알지 못했지만.
“오빠 미안해.”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하면서 지은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겨우 상황을 마무리 지었나 싶었는데 또 다른 난관이.
사실 지금도 여자가 눈물 흘리는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난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고개 숙여 우는 지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그 상황의 내 표정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르고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번엔 지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때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내 첫사랑이고 첫 남자였어.”
“그럼 오래된 사이네.”
“응. 고 2때부터 알았으니까.”
‘그럼 태호가 중간에 끼어든 꼴인가? 그래도 지은이가 양다리 걸친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는 틈에 다시 지은이의 말이 이어졌다.
“고 3때 수능보고 나서부터 사귀게 됐는데 내가 지방대 다니다 보니까 오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구.”
“그래서 헤어졌구나.”
“결론적으론 그런데 그 사실을 1학년 여름방학 될 때까지 몰랐었어.”
“떨어져 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
“그런 것도 있고, 오빠 뺏어간 애가 내 친구였거든. 둘이서 완벽하게 연기하니까 알 수가 없었어. 결국 다른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 된 거야.”
“뺏어간 친구도 그렇지만, 그 남자애는 진짜 뻔뻔하다. 그렇게 헤어져놓고 다시 사귀자고 하는 건 뭐야?”
말을 해놓고 보니 약간 이상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걸 본 게 불과 일주일 전 일인데,
그럼 다시 사귀게 된 것 아닌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스토리였다.
“아니, 아직도 둘은 사겨.”
“그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 친구 그 여자랑도 사귀고 너랑도 사귀고 뭐 그런 거야? 아님 니가 친구한테 복수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거?”
“아니, 복수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아. 안보면 그만이니까.”
“그럼 뭐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뿌리쳐야 했는데……”
“……”
“말했잖아 내 첫 남자라고. 나 버리고 친구한테 갔는데도 오빠 전화만 받으면 거절을 못해서.”
“그럼 니 친구하고는 계속 사귀는 거고. 너랑은 육체관계만 원한다?”
“……”
지은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앙다문 입술이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헤어지고 나서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난 거야?”
“이번 4월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