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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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폐석탄공장 입구는 언제나 그렇듯 술병과 담뱃재와 약봉지, 생활 쓰레기가 을씨년스럽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3미터쯤 되는 거대한 문짝은 뜯겨 나간 지 오래요, 그 흔적만이 남은 대문 앞에 소녀가 우두커니 서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더기처럼 온갖 부품들을 덧댄 시계는 적어도 초침이 돌아가긴 하니 하루에 두 번 맞는 고장 난 시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계가 정확하진 않을 테니 멈출 때까진 맞지 않는 시계일 게 분명했다.
“시계 아저씨. 저 시계 제대로 맞죠?”
“허허. 그렇지.”
소녀에게 시계 아저씨라고 불린 백발의 노인이 껄껄 웃었다. 노인은 깊게 팬 주름 안에 박힌 욕정 가득 찬 눈으로 소녀를 훑었다. 더러운 눈길조차 야릇한 쾌감으로 느끼는 이브는 노인에게까지 다리 벌리는 취미는 없기에 애써 무시하며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15까지 숫자가 있는 시계는 5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까지 보고 시계를 읽으면 20시 34분. 행성의 자전 시간이 30시간이기 때문에 오늘이 9시간 반정도 남아있었다.
“2시간 안에 돌아오면 해는 안 지겠구나.”
“허허, 처자. 어서 돌아와서 나랑 하룻밤…”
소녀는 밀려드는 졸음에 하품을 뻑 하며 노인의 말을 무시했다. 시차 적응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건만 행성의 하루가 이브의 생체시계보다 4시간이나 더 긴 탓이다. 이브의 외모가 아무리 이질적이라고는 하나 신체 능력만큼은 유전자 처리를 받지 않은 평범한 인간 소녀나 다름없었다. 죽지 않는 다는 점만 빼면.
라임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생체시계를 조절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받을 돈조차 없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항상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든다. 유전자가 수정되지 않은 순수한 인류의 생체시계는 26시간 주기다. 느긋한 라임비 행성에 비해 인류는 너무 바지런했다.
“힝… 힝… 쟈기야 조심하라구!”
노인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오니 벌써부터 쓰러져 죽은 듯 자는 노숙자들도 많았다. 이브는 노인에게 했던 것처럼 굳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시비 걸려봤자 좋은 일도 없었고, 질 나쁜 벌레들이 따먹겠다고 달라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폐공장 근처에는 당연히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이 많다.
그러나 오늘따라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주변을 살핀 이브는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뭔 일 있겠어?”
소녀는 적적함을 달래고자 휘파람을 불며 45지구의 상점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이 빠지고 다리 한 짝 없는 시계 노인 대신에 다른 봉이 달라붙을 수도 있으니 머리도 한번 단정하니 쓸어내렸다.
백마 탄 왕자님이나 페라라 탄 졸부, 비행기 탄 재벌은 없어도 적당히 행성의 중상층쯤 되는 사람이라도 붙으면 좋았다. 싸더라도 돈은 던져 놓고 튈 사람이면 좋았다. 특히 상점가 근처라면 더 좋고. 이런 슬럼 행성이라 한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상점가는 있는 법이고 상인들일랑 최소한 자기 주머니를 굴릴 만큼의 돈은 있는 자들이니까.
* * *
정체 모를 컴퍼니에서 만든 고물 자동차들이 콘크리트 깔린 도로를 난폭하게 다닌다. 도로를 따라 네모반듯하게 늘어서 있는 7층짜리 건물들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을 법한 곳이 모두 헐어 앙상한 시멘트와 벽돌이 드러나 보인다.
높이-너비-거리가 같게 지어진 계획구역이기에 조금이라도 그림자 지는 골목이라면 어김없이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계획구역 입구에는 공용어로 ‘45지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던 흔적이 어슴푸레 남아있었다.
이브가 이미 수차례 방문해 익숙해진 45지구의 상점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익숙함 속에서, 소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완전 좆됐네.’
뭔가가 제대로 잘못되어 있었다.
상점가 근처는 붐빈다. 붐벼야만 한다. 13억 명의 사람들이 188지구에 나눠 살고, 이 상점가는 45지구의 중심 지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붐벼야 할 거리에 행인들이 지나치게 적다. 게다가 조금 있는 행인들이 입고 있는 건 전부 우주복… 아니, 강화복이었다.
이상한 점이 그뿐이라면 참 좋겠지만 유리창이 있어야 장소는 철창과 철문으로 가득했고, 나름 행성 컴퍼니라고 ‘라임비 경찰’이라는 명찰이 새겨진 정복을 입은 작자들이 거리에 즐비해 있다는 점이었다.
소녀는 경찰을 싫어했다. 아무리 공공연하게 이뤄진다고는 하나 엄연히 라임비 컴퍼니에선 매춘이 불법이다. 잘못 걸리면 주머니에 있는 정액 묻은 돈 500페니가 고스란히 빼앗긴다. 면피를 위해 다리를 벌려줘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그 돈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합법이라는 이름의 갈취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상점가에는 나름 45지구의 중심 구역이라고 네온사인이나 디지털 전광판 같은 것도 있는데, 보는 전광판마다 붉은 글씨로 ‘수정 폭풍 5단계 특보!’라는 글귀가 대문짝만하게 띄워져 있었다.
“모두 안전지대로 대피하시고 건물 안으로 대피하십쇼! 유리창은 철창으로 보호하시고 강화복을 입지 않는 자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폐공장 근처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는 라디오뿐이다. 평소에 옆옆 거주 구역에 사는 할배의 라디오를 도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고, 그나마 일기 예보라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내니 이런 사단이 발생했다.
-라디오라도 사야 하나… 이거 어떡하지?
라디오를 산다고 이브가 기상 현상 따위를 경청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라디오 살 돈은 당연히 없다. 그날 날씨가 어떠니 ‘오늘은 밤 조심하세요. 일찍 돌아오세요.’ 같은 엄마 잔소리를 하던 게 레아였기에 그 부재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그 레아도 잠들어 있는 사이에 몰래 나왔으니 기후예보를 챙기지 못한 건 오롯이 이브의 책임이었다.
-어쩌지, 진짜 남자라도 꼬셔서 하룻밤 묵어야 하나? 그러면 레아가 걱정할 텐데…
이브가 한창 궁시렁거리며 심사숙고하고 있던 때였다. 남자도 제 말 하면 찾아온다 그러던가.
“애야. 집이 어디니? 어서 돌아가렴.”
라임비 컴퍼니 경찰이 다가와 이브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건넸다. 신입인 것 같았다. 말끔하니 생긴 게 라임비 상류층 출신의 인상 좋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어벙한 표정을 짓는 게, 하룻밤 자고 뜯어내기 딱 좋은 인상이기도 했다.
이브는 요사스럽게 미소를 꾸미며 ‘오늘 밤은…’까지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경찰이 달려와 신입의 손목을 붙잡으며 이브를 노려보았다. 그쪽은 어딘지 모르게 이브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공기업 직원에 대한 접대는 받지 않는 거로 알지 않느냐?”
“아니, 접대라뇨… 선배, 그럼 이 애가…?”
얼떨떨한 신입이 이브를 위아래로 훑었다.
조금 전까지 순진한 아이를 보던 온정어린 시선은 온데간데없었다.
상종도 못 할 쓰레기를 바라보는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무튼, 날씨가 궂으니 돌아가라. 방금 전은 없던 일로 해주겠지만 다음엔…”
“예, 그럴게요.”
사수가 으르렁거리자 이브는 곧잘 대답했다.
다행히도 사수가 그 공공연한 불법을 저질러 소녀와 몸을 섞은 사람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얄짤없이 철창행이었다.
철창에서 밥이 더 잘 나오고 더 안전하긴 하지만 발정 나면 그만큼 더 해소하기도 힘들다. 제 발 저린 사수가 신입을 혼내는 사이 이브는 종종걸음으로 뛰쳐나왔다.
“후… 지뢰 밟을 뻔했네.”
**
불안하게 대기가 흔들리고 웅웅거렸다. 먼 지평선 너머에서 부는 바람 소리와 천둥 우는 소리는 오래전 이브가 들른 적 있었던 인류의 고향별 테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랬다.
저건 마치 행성 내 전쟁 중에 터지는 폭탄 소리와도 같았다. 굳이 화력을 따지자면 우주전에서 터지는 폭탄 정도의 위력과 비교할 만하겠지만, 우주엔 소리를 전달할 매질이 없어 남의 전함에서 터지는 소린 들리지 않으니까. 천둥이 꽝꽝 울릴 때마다 이브의 어깨가 부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약해 빠지진 않았었는데.
어쩌나. 나노머신이 모습을 바꾸고 본능조차 소녀의 것으로 뒤틀어버린 것을.
소녀는 애써 겁먹은 티 내지 않으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리 파편 조금 맞더라도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할 일은 해결하고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돌아가지 않고 앞을 향했다. 남자가 칼을 뽑았다면 무라도 썰어야 할 것이 아닌가.
비록 지금의 이브는 남자도 아니었고, 칼도 무도 없었지만.
당장 소녀가 떠올린 곳은 45지구의 공장식 정육점이었다. 구역 입구에서 가장 가깝고 가격도 괜찮았다. 그러나 정육점을 향해 걷던 이브는 어느새 편의점 판매대에 눈길을 주며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판매대에는 이브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드벤처 호’ 잡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브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부터 가장 좋아하는 잡지였다.
비록 지금은 매달 구독할 돈은 없지만, 지금 이브의 주머니 속에는 500페니나 되는 돈이 있었다.
“저것만… 사자.”
시선이 끌린 이브는 어느새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판매대 앞에 서 있었다. 판매대에는 두 달 전의 잡지까지 있었으며, 두 달 전 잡지는 다른 이가 수십 번은 읽은 듯 끝이 너덜너덜했다.
옆에는 새것인 이번 달 호도 있었다. 소녀가 그곳에 손을 뻗다가 옆에 있는 두 달 전의 헌 것을 골랐다. 소녀는 판매대에서 뽑아낸 잡지를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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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남자의 로망.
우락부락한 마초가 집채만 한 구형 35메가와트(MW)식 레일건을 이고는 황량한 테라포밍 이전의 황무지 행성을 배경으로 싯누런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는다.
그 옆에는, 휘날리는 먼지바람 사이로 매혹적인 S라인의 여인이 두툼한 엉덩이를 슬쩍 빼며 봉긋한 가슴 라임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는 마초를 유혹하듯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
2753년 12월, 어드벤쳐 호
정가 200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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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표지만 보고도 입가에 침이 고이는 걸 슥 닦았다. 발정기가 끝난 뒤엔 남자를 보고 흥분하는지 여자를 보고 흥분하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욕이 심해졌을 때는 남자를 보고 더 많은 자위를 했으리라. 누가 보면 참 변태 같을 거라고 혼자서 식식 웃고는 어드벤쳐 호를 집어 여주인에게 들이밀었다.
수정폭풍을 대비하며 밖에 내어둔 물건을 치우던 젊은 여주인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100페니입니다.”
“뭔데 이렇게 비싸요? 견본품이잖아요.”
“싫으면 사지 말든가.”
젊은 여주인은 드잡이질하기 싫다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여주인의 키는 170쯤 될까, 잡지 표지의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가슴이 크고 엉덩이가 튼실한 게 참 섹시하고 건장해 보였다. 이브는 건장한 여주인에게 내심 부러움을 느꼈다. 작은 몸은 잘 팔리지도 않으니까.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100페니를 건넸다. 흥정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아부는 했다.
“언니 예뻐요.”
“어머, 계집애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곤. 오늘 어차피 장사도 더 안 되겠다. 반값으로 가져가라.”
바쁜데 흥정 들어줄 시간 따윈 없는 여주인이 내심 선심 쓰듯 웃고는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는 식으로 잡지를 내던졌다. 이브는 그 앞에서 대놓고 반발은 못 하고 그저 꾸며진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속으론 차마 내뱉지 못할 욕지거리를 삼켰다.
‘씨발년, 저거 남친이나 남편 있으면 따먹고 만다.’
이브는 ‘어드벤처 호’를 겨드랑이에 끼고 문을 열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굳어버린 얼굴로 문밖을 나서는 이브의 곁으로 익숙한 약 냄새 나는 남자가 지나갔다.
이브가 남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는 과장된 몸짓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여보, 미안. 내가 늦었지?”
“아니! 어딜 갔다 왜 이제 와요! 어서 저거 밖에 있는 거나 치워요.”
“우리 여보야 많이 화났어? 어유. 인상 찌푸리지 말고 도와줄게, 도와줘.”
처음엔 이브는 여주인은 젊은 주제에 결혼도 했는가 놀랐다. 그리고 다 큰 배불뚝이 남자가 아내에게 아양을 떠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다음 사냥감은 저걸로 할까, 하며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브의 속이 우습다 못해 시큰거렸다.
그야 당연히, 어젯밤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저 여주인의 남편이란 작자가 약 기운에 취해 짐승처럼 자길 박아대던 놈이었으니-
“고마워요.”
이브는 씨익 웃으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편 쪽의 표정이 순간 팍 식는 걸 보면서 이브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아마 무덤까지 가도 모를 기둥동서를 생각하니 하늘이 유달리도 반짝이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하늘이 반짝였다.
반짝이는 파편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기의 장막이 콘크리트와 시멘트 가득한 거리를 뒤덮으며, 이브를 향해 고장 난 폭주자동차처럼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먼발치에서부터 몰아치는 수정폭풍은 귀를 날카롭게 찢는 강렬한 뇌우와 천둥과 함께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찌 오늘 하루 운수가 좋더라니…”
라임비 행성에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엿 같은 날씨.
수정폭풍이 삽시간에 이브를 집어삼켰다.
========== 작품 후기 ==========
복사가 잘못 된 부분이 확인되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