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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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소녀, 두 사람은 석탄공장에서 얼마 멀지 않은 허름한 술집에 도착했다. 싸구려 시멘트 벽지에 나무무늬 스티커가 너덜너덜한 플라스틱 의자와 4인용 식탁이 늘어서 있고, 녹슨 액자 틀에 갇힌 메뉴판에는 누른 육즙과 튀김 냄새가 물씬 풍겼다. 거기에 어둑어둑한 형광등까지 더해지니, 아이의 후원을 논하기보단 누군가의 풍문을 흘릴 때나 어울릴 법한 장소였다.
두 사람이 으슥한 귀퉁이에 자리하자 주인은 익숙한 듯 말없이 생맥주 통을 통째로 갖다주었다.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통을 들어 투박한 유리잔을 채웠고, 채우자마자 쨍그랑 부딪혔다.
“건배.”
“건배, 이브의 수정 같은 눈동자를 위하여.”
징그러운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은 이브는 500cc짜리 첫 잔을 꿀떡꿀떡 마셔 바닥까지 다 비우고 다음 잔을 채웠다.
잔이 비면 또 다음 잔, 튀김 안주가 나오고 감자튀김 두어 개를 질겅질겅 씹어먹던 이브는 3번째 잔을 기울였다.
앉은 지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아후… 콜록. 너, 너… 왜 이렇게 빨리 마셔?”
페이스를 따라가려던 피그마는 사레들려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이브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술을 들이킨단 말인가. 후원해준다는 말이 이렇게나 이브에겐 싫었던 걸까?
이브는 그 기꺼운 눈빛을 본채만채 하고는 세 번째 술잔을 다 비우고 식탁에 쾅! 내리쳤다.
“야, 야! 남자 새끼가 이것도 못 마셔서 어따 쓰냐?”
“그건 니가 말술이어서 그런 거고… 콜록. 악… 콜록.”
“야, 팍-씨, 내가 니 나이 때는 뽀드카랑 빼갈 한 병을 스트레이트로 마셨어!”
꼰대에 빙의한 소녀는 또 잔을 비우더니 한 잔을 더 채웠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보다 두 배는 빠른 페이스였다. 나이는 분명 제가 많을 텐데, 하며 궁시렁거리는 피그마는 눈앞의 소녀가 역시 나이를 먹지 않는 게 섹스로이드여서가 아닌가 의심했다. 4년 전보다 부쩍 자란 자신과는 달리 하나도 안 자란 몸도 그렇고.
만약 진짜 그녀가 섹스로이드라면 하드웨어는 예쁘장하고 귀염성 있는 인형 같은데, 소프트웨어는 술고래 상남자, 아니 상여자였다. 분명히 침대 위에선 여자의 욕구를 찾아 헤맸으니, 그 모습에 상남자의 정신이 깃들어있다고는 꿈에서라도 상상이라도 수 없었다.
그보다 저 상여자가 저렇게 마시면 여러모로 위험했다.
피그마는 위태위태한 이브를 보며 기분 나쁜 일이 있다면 달래주고 싶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마셔? 이젠 내가 널 보듬어줄 수 있으니까 말해봐.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신경 꺼라.”
이브도 이브 나름대로, 어리숙한 피그마에게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팍 상했다. 돈은 저 은하의 별들에 비하면 쥐뿔도 없는 새끼가 돈을 논하는 게 같잖았다. 마시는 데도 속이 쓰라렸다. 곱상하게 생긴 사내놈한테 싸구려 연민이라도 받고자 이놈하고 마신 게 아니었으니까.
네 번째 잔을 또 원샷하고, 감자튀김 두어 개를 씹어 먹다 다섯 번째 잔을 들이켠다. 순식간에 2.5L를 마시니 자그마한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소녀의 몸으로 음주를 하기엔 성인보다 두 배로 부담스러운데도 오늘따라 유달리 술이 잘 들어갔다.
“이브, 너 그러다 꽐라된다. 작작 마셔.”
“뭘 작작 마셔, 이제 시작인… 데. 딸꾹.”
이브는 다섯 번째 잔을 쾅! 내리쳤다.
급하게 마신 만큼이나 취기는 삽시간에 올라왔다.
몸에선 반응이 오고 있었다.
염병할…
영업할 때마다 술과 약을 처먹었으니 술기운과 함께 아래쪽도 슬슬 달아올랐다. 아니, 30년 전 작아진 몸으로 첫 술잔을 들이킬 때부터 그랬다.
나노머신에 의해 색을 밝히도록 맞들어진 몸. 술이 들어가면 정신이 흐릿해지고 자연스레 남자가 고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브는 사고를 돌리고자 아무 생각이나 떠올렸다.
미안, 레아야. 오늘 밤도 늦겠다. 레아, 나의 사랑스런 레아, 길러야 하는데. 좋은 곳에서, 재개발 때문에 떠나야 하니까, 재개발, 루이스, 재개발… 이사… 재개발…! 급류처럼 흐르는 사고의 흐름 속에서 소녀는 다시금 울화통 치미는 단어를 연상했다.
“씨발, 딸꾹… 놈들… 뭔 재개발이야. 딸꾹.”
눈앞에 있는 게 그 재개발 회사 직원이었다. 소녀는 직원 앞에서 엄청난 실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지깟 게 날 죽이기라도 하겠어? 게다가 근처에 앉은 사람들은 죄다 술에 들큼하니 취했으니 소녀의 뇌까림을 들을 자도 없었다.
피그마는 이대로 소녀의 폭주가 이어지는 게 두려워졌다. 이대로 이브가 세레니티를 비난했단 게 피그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렸다면… 게다가 신입인 피그마가 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제 안위보다는 소녀가 망가질 것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연분홍빛 홍조가 떠오른 소녀의 어깨를 확 잡았다. 말려야 했다.
“히익?”
“아, 아… 미안.”
피그마의 손이 닿자 가느다란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소녀는 생각지도 못한 자극에 비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덕분에 딸꾹질은 멈췄지만, 소녀의 가녀린 몸에 가해진 남자의 손길이 잔향처럼 찌릿찌릿하게 남아 수없이 많은 떨림으로 이어졌다.
술에 취하면 분명 간에서 알데히드를 합성하니 둔해져야 하는 게 분명한데, 몸속의 나노머신이 알코올을 분해해 알데히드 대신 발정 나는 이름모를 호르몬을 합성해대는 게 틀림없었다. 저것도 사내새끼라고, 겨우 어깨에 남자의 손길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온몸이 뜨거워진다. 자신의 멍청한 모습을 잊고 싶은 이브는 여섯 번째 잔도 입가에 가져갔다.
“하윽…?”
도저히 소녀의 폭주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청년이 손목을 잡았다. 휘청이며 잔에 든 내용물이 쏟아져 식탁에 흘렀다. 식탁에 고인 맥주는 모서리를 따라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잡힌 소녀의 팔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이브야, 정신 차려.”
“씨… 뭘 정신 차려! 야! 피보다 아까운 술을 갖고 뭐 하는 짓이야!”
이브는 위태위태하게 떨며 여섯 번째 잔을 다시 채우려 들었다. 그러나 피그마의 저항이 거셌다. 소녀의 손목을 꽉 잡은 건 아무리 곱다고는 하나 기다란 남자의 손이었다. 남자의 손에 손목이 강하게 잡힌 상황에서 자연스레 욕정이 치미니 더 성질머리가 났다. 남자의 손길은 나노머신의 먹이이자, 소녀의 몸에는 지독한 독이었으니까.
“씨발, 씨팔… 개 쌍놈 새끼들. 놔, 안 놔? 놓으라고. 소리 지른다. 하나, 두울-”
“아, 알았으니까 그만, 쉿. 조용히 해. 너, 세레니티 컴퍼니가 어딘지 모르는 거 같아서 그래. 세레니티는… 재개발을…”
피그마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소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이젠 갑자기 소녀의 수정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맺혀 줄줄 흐른다. 손을 떼어내려고 히끅히끅 떨다가 결국 도를 넘은 쾌락이, 이브의 정수리까지 관통하며 금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피그마는 미칠 노릇이었다. 화냈다가 울었다가, 도저히 이브가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뭔가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올 만큼 커다란 일이 벌어진 건 틀림없었다.
“…알아, 안다고! 세레니티가 여길 재개발하는 회사인 것쯤은 알아!”
“알면 말하지 마, 차라리 날 욕해. 너 그러다가 여기서 영영 못 살 수도 있어. 컴퍼니 모욕죄가 얼마나 큰데.”
컴퍼니, 부자들. 그들을 모욕하는 건 다른 행성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라임비에선 사실상 불가능하다. 라임비에서 컴퍼니를 모욕한 자는 작은 것부터 천천히 손해를 본다. 물과 전기가 비정기적으로 끊긴다거나, 음식을 주문했는데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것이 온다거나. 아주 사소한 것부터 컴퍼니의 서비스가 끊기기 시작한다.
소녀는 잃을 게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소녀는 라임비 컴퍼니의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 아니기에 더 큰 굴레가 덧씌워진다. 실제로 목에 칼을 들이밀거나, 발에 족쇄를 채운다거나, 아니면 더 소중한 것을 앗아가거나. 거기까지 생각한 소녀는 하나 잃을 것이 생각났다.
‘레아.’
레아의 순수한 얼굴이 떠오르니 속에서부터 열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래아를 데려간다고?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스껍고 목 안에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 증오를 담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피그마를 태워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아, 그래. 너도 세레니티다 이거지?”
소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치가 떨리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알싸하게 올라오는 술기운도 억제할 수 없었고, 레아에게 알맞은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거나하게 취해 고민이라도 잊고자 술집에 왔더니 더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있는 힘껏 밀치는 것 같았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피그마도 마찬가지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녀를 보며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누가 들었을까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취한 사람들은 다들 제 테이블에서 소리 지르기에 바빴다. 아무도 자기들을 바라봐 주지 않고, 아무도 자기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게 라임비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브.”
“피그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이브는 가르랑거렸고, 피그마는 더없이 차가웠다.
소녀는 알싸한 술기운과 함께 끓어오르는 욕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 비실비실하고 곱상한 놈의 목소리가 끈적끈적하게 귓가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이브는 최대한, 과거의 퀘이사답게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자 머릴 굴렸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둘은 술을 마시고 있다. 4년 전에 만난 애송이는 이제 세레니티 컴퍼니의 어엿한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창녀였다.
오랜만에 만난 직속 부하에게까지 몸을 대주려 했던…
억장이 무너지며 이젠 들어갈 틈 없을 것 같았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부끄러움까지 들이닥쳤다.
“아아…으…”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남자가 고팠다.
저열한 암컷의 욕정이 흐트러진 미소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복부에서 피어오르는 아득한 욕망이 더 참을 수 있냐고 소리질렀다. 이렇게 축축하니 군침이나 흘릴 뿐인 민감한 아랫도리를 저 남자를 이용해 달래보지 않겠냐고.
“…자리를 옮기자.”
그 와중에 들려온 피그마의 2차 제안에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향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폐쇄된 석탄공장 근처의 허름한 편의점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피그마는 맥주와 과자 안주를 잔뜩 담은 봉지를 들고 옆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이브가 유달리도 신경 쓰였다. 이브는 술집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피그마의 손을 꼬옥 잡고는 한마디도 안 한 채 조용히 있었다.
여전히 이브의 얼굴은 상기된 채로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았고,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에 달뜬 숨결은 새하얀 입김으로 바뀌어 솜사탕처럼 피어났다.
이브는 입만 열면 사나운 전투 안드로이드 같은 여자지만, 가만히 있으면 장식용 인형처럼 참 곱상하고 어여뻤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저 무심한 얼굴로 손길에 섹스로이드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의 아랫도리가 절로 뻐근해졌다.
“뭘 봐.”
“아니… 아무것도.”
그렇다고 둘 사이에 로맨스를 바라기엔, 이브는 너무나도 값비싼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값비싼 인형은 속으로 자기혐오를 씹어 삼키고 있었고,
‘씨팔 년.’
‘어쩌자고 빨리 나온 거야. 이 섹스밖에 모르는 저열한 계집아.’
올챙이처럼 부른 배와 소변을 참으려고 안다리를 비비적거리는 모습은 다행스럽게도 피그마에게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피에 맥주가 흡수되어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어떻게든 틀어막으려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편의점까지 들르는 여유를 부리는 피그마의 모습에 아연한 기분까지 들어 황망한 눈을 하기까지 했다. 이건 소녀의 몸에는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고문이었다. 하물며 한때 남자였었다는 이상한 자존심까지 있는 소녀라면.
참기 위해 천천히 걷는 소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피그마는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이브를 재촉했다.
“어서 가자”
“하힛? 야 이 새꺄! 뭐 하는 거야!”
피그마가 자연스레 어깨를 감으려 드니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다. 참느라 더더욱 민감해졌는데 이대로 남자의 손길이 닿았다간… 이브는 어쩜 끔찍하고 잔인한 상상이 실제로 일어날지 스스로가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길거리에서 흘려버리기 전에 재빨리 피그마의 팔을 쳐내자 피그마도 무리하지 않고 손길을 거두었다. 겨우 3초 남짓 닿았을 뿐인데,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찌릿찌릿한 쾌감이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 미안해.”
“알았으면 어서 가자고… 급해.”
급하단 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피그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