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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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날카로운 총성이 공기를 갈랐다.
쏜살같이 날아간 38구경 탄환은 100m 남짓 날아가 탄착지점에서 폭발하였다. 폭발은 지름이 1m쯤 되는 구덩이를 일구며 맹렬한 화염과 먼지구름을 내뿜는다.
탄착지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어렴풋이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이 한 팔을 거칠게 휘젓자 거짓말처럼 연기와 흔적이 돌풍에 휘날려 사라졌다.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 독수리 무늬가 수 놓인 실크 셔츠의 남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오, 카이로스 경. 환영 인사 치고는 제법 가벼운데요?”
“게헨나스가 여기까지 달라붙었나? 너희도 참 할 짓 없는 놈들이군.”
검은 트렌치코트의 보안관, 알터 카이로스는 38구경 리볼버를 코킹한 채로 다시금 상대를 겨누었다. 표적 위치에 선 독수리 셔츠는 불탄 피부자국이 있는 쪽의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찢어지는 듯 근섬유가 흉하게 드러난 얼굴이 짜그라들며 그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비집어 나왔다. 다소 허탈한 웃음소리였으나 넘치는 여유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크흐흐, 여기까지 고생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쓸모가 없어져서 말이지만요.”
“그건 나보고 여기서 죽어 달라고 비는 건가? 아니면 자네가 내 손에 죽고 싶다고 비는 건가? 내가 봤을 땐 후자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 헛짓거리를 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독수리 셔츠는 고대의 신화 속 악마처럼 과장된 손짓을 하며 셔츠 속주머니에서 홀로그램 재생기를 꺼냈다. 그가 홀로그램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브와 피그마가 함께 있는 여관방의 모습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재현되었다. 홀로그램 속의 이브는 피그마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를 움찔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이브, 거친 숨결을 색색 쉬며 자그마한 젖가슴이 오르내리는 이브, 얼굴이 복숭아빛으로 물들어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이브, 남자의 가슴께에 파묻힌 채로 달콤하게 속삭이는 이브…
알터는 독수리 셔츠를 조준한 채 흘긋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홀로그램 속의 계집은 분명 퀘이사 보안관의 정보를 지닌 계집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고 싶다는 유혹을 들끓게 하는 계집은 분명히… 퀘이사 보안관의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저 계집이 퀘이사 보안관님일까?
알터는 도저히 그 홀로그램을 믿을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눈앞의 적이 도발을 위해 가져온 것쯤은 옛 저녁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독수리 셔츠는 홀로그램을 재생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알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시죠, 보안관께선.”
독수리 셔츠는 두 팔을 벌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알터는 심하게 망가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고는 속이 울컥했다. 그러나 알터의 표정과 음정에는 변화 하나, 떨림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38구경 리볼버의 가늠자도 알터의 미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저게 어쨌다는 거지?”
“우리 퀘이사 전 보안관께선 남자의 품에 안겨서 영원한 행복을 얻으셨답니다. 당신께서 방해할 시간 따윈 없다는 거죠.”
“그따위 허접한 합성으로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알터의 표정은 비웃음에 가까웠으나 속으론 굉장히 불편했다. 홀로그램보다 언제 뒤를 잡혔는지가 더 큰 문제였다. 겨우 퀘이사 보안관님을 찾아내서 기뻐했더니 안위조차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보다 더 빨리 이브를 찾아낸 상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 이미 마피아 게헨나스에게 납치된 상황일 수도 있고, 몸 안에 나노머신을 심어 더 심각한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스위치를 넣거나 트리우마를 심어 폐인을 만드는 방법은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 온 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알터는 빨리 찾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수색 지원용 드론을 받을 수 있었다면 금세 찾아내서 설득했을 텐데, 팔다리가 다 묶인 상황에서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라도, 그분께선 실수 하나 하지 않고 해결법을 찾아내지 않으셨던가?
여기서 레드호크를 만난 것도, 뒤를 밟는 자를 의식하지 못했던 알터의 불찰이자 실수였다. 불행 중 다행은 홀로그램 속의 소녀는 아직은 안전하다는 점이다. 그의 틀리지 않는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독수리 셔츠는 천천히 알터를 향해왔다.
알터는 레드호크에게 태연하게 총구를 겨누었다.
38구경 리볼버에 작게 달린 모드 레버를 ‘탄환’에서 ‘레일건’으로 슬쩍 돌리면서.
그리고 상대를 가늠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머리통을 날려버릴 요량으로.
“역시… 대단하십니다, 카이로스 경. 이 정도까지 했으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몸싸움하려 들었을 텐데 말이죠.”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레드호크의 주위에는 붉은빛의 파동이 미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위협 사격을 가해도 멀쩡한 것을 보았듯이, 그의 주변에 검붉게 타오르는 기운은 예삿것이 아니었다.
과학 상식을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는 건 문제해결을 해야 할 우주보안관들의 덕목이었으니. 알터는 레드호크의 주변에는 나노드론들이 아보가드로 수만큼 존재하며, 저 미간에 평범한 총탄을 꽂아 봤자 허공에서 나노드론들이 갉아먹어 사그라든다는 점까지 예측했다.
그 와중에도, 악마같은 레드호크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아니면, 정말로 이 소녀의 목숨은 아무 가치가 없다거나-“
알터는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사람을 죽이기엔 이미 인류가 화약을 발명한 시기부터 있었던 총이라는 투박한 무기가 있었다. 그리고 반작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레일건이라는 조금 더 세련된 무기도 있다. 방어도 마찬가지다. 과거엔 방검복과 방탄복이 있었고, 지금에는 수천 도의 열기조차 막아주는 강화복이 있다.
그런데 나노머신으로 막을 친다니, 저건 오로지 값비싼 사치였다. 멋 부리고 싶은 사람들이, 판타지의 낭만에 젖은 사람들이 마법을 부린 것처럼 꾸미고 싶어 몸 주변에 떠도는 나노머신을 통해 자연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나노머신을 만드는 것도 만드는 돈이지만, 저걸 조종하기 위해 컴퓨터 칩을 뇌에 심어야 하니, 그 가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격에 비해 하찮은 가성비는 덤이고. 사치꾼들이나 저런 사치스러운 짓을 한다.
저 붉은 기운을 만들기 위해 이 행성 사람들이 모두 일 년 동안 배터지게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행성에서까지 저런 놈을 만났다는 사실은 가증스럽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다. 저런 카드를 스스럼없이 보여준다는 건, 상대가 내밀 수 있는 ‘부’의 카드가 얼마나 더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다.
특히 저런 전문 ‘무법자’에게는… 알터가 챙겨온 최소한의 개인장비로는 얼마나 맞받아칠 수 있는지 모른다.
“보십시오, 당신의 보안관께선 이미 임자가 있단 말이죠. 기억해 보시죠, 보안관은 항상 은퇴하고 외딴 행성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모든 보안관들의 꿈이지. 너 따위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알터는 조곤조곤 말했으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살기는 숨길 수 없었다. 마치 선글라스를 꿰뚫고 알터의 표정을 본 듯, 레드호크의 흉측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더 강해졌다. 입술 역할을 했었을 흉터가 귀까지 찢어질 정도로 큰 호를 그렸다. 이글거리는 레드호크의 눈빛은 즐거워 미치겠다는 뜻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한 걸음씩 다가오던 레드호크의 미간이 마침내 38구경 리볼버. 아니, 38기가와트(GW)급 레일건의 차가운 총구에 딱 붙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군요, 카이로스 경. 당신께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제 동공에 있는 카메라로 이 모습을 기억해 보스에게 전달해 주겠소.”
“…최대출력.”
알터가 방아쇠를 당기자 38기가와트(GW)급 레일건이 빛을 토해냈다.
쿠우웅! 굉장한 파동과 함께 폭발음이 공기를 삽시간에 갈랐다. 쇳덩어리마저 녹여버리는 열기의 파동은 일대의 모든 입자를 몰아내 진공으로 만들었으며, 대지에는 거대한 상흔을 남겼다. 먼지돌풍이 일어나 일대는 빛과 먼지로 뿌옇게 흐려졌으며 세상이 온통 화염과 빛으로 물들었다.
쿠우웅-
빛은 금세 사그라들었으나 화염과 먼지구름은 진공을 채우기 위해 탄흔지로 빨려와 재차 쇼크웨이브를 만들어냈다. 상대는 물론이고, 레일건이 지나간 자리엔 근처에 있던 황무지와 사람 없는 폐건물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멀리서 들리는 고장 난 자동차의 비프음과 충격으로 인한 이명이 폭음의 뒤를 이어 고요한 진공을 가득 메웠다.
“사라졌군.”
당연하게도 끝은 아니었다.
이건 쫓고 쫓기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다만 쫓기는 쪽은 상대가 아니라 알터였다. 상대가 내밀 수 있는 패는 어디 까지고 어느 세력이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마피아 게헨나스라니, 퀘이사만이 반파할 수 있었던 카인 성계의 잔당들이었다.
피식, 알터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양 38GW급 레일건 앞에서 미소를 띠던 상대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드호크는 알터를 완전히 갖고 놀고 있었다. 당연히 죽지 않고 살아있겠지.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느낌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귀찮아지겠어.”
알터는 입맛을 다셨다.
입안에는 꽤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알터는 레일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자신의 손가락이 조금은 흔들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재미있었다.
저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 떠는 자신이 너무 하찮고 즐거웠다.
알터가 자리를 뜨려 하자, 발치에 떨어져 있던 멀쩡한 홀로그램 재생기가 걸렸다. 알터는 허리를 굽혀 파란 큐브 모양의 홀로그램 재생기를 주워 강화복 속주머니 안에 넣었다. 소리가 재생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소리까지 들렸다면 훨씬 즐거웠을지도 몰랐다.
‘퀘이사의 인물정보를 지닌 계집은 웬 곱상한 사내의 품 안에서 쾌락에 허덕이고 있었지, 그리고 홀로그램은 아마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알터는 중얼거리며 추측했다. 그리고 30여 년 전, 그분께서 마지막 임무를 나가시며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나는 한탕 크게 잡아서 성과급 받고 은퇴할 거다. 퇴직금 가지고 작은 소일거리나 하면서 시골에서 배불뚝이마냥 떵떵거리며 살다가 제명에 죽으련다.’
알터는 눈을 꼭 감았다.
정말로 그분께선, 이런 행성에서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살아가는 게 꿈이셨던가? 배불뚝이라는 말이 중년의 덕을 뜻하는 내장지방이 아니라 아이를 밴 여성의 임신을 뜻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다, 절대로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저렇게 사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자,
직접 보고 물어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시금, 이번엔 알터가 막 부관으로 부임하던 시절에 그분께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민하지 말고 행동부터 해라. 어차피 눈치 보다가 못 해결할 거, 빨리 움직이기라도 하면 실마리라도 잡는 거다. 애송아, 알았냐?’
**
시원하고, 못내 아쉬웠다.
단골을 잃는 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그래도 여자 만족시켜줄 줄은 아는 놈이었는데…
이브가 쾌락을 좇아 힘껏 요분질을 해대기 시작하니 피그마는 금세 쓰러졌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브의 몸을 달래줄 최소한의 힘 정도는 남아있었다. 덕분에 술기운에 들끓어 오른 욕정도 얼마간 해소되었다.
이브는 화장실에 들러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샤워기에서 몸을 씻어낸 뒤 간단히 정리하고 나왔다. 섹스 전에 벗어 둔 속옷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입기는 참 편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이브의 눈앞이 팽글 돌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방안은 여전히 허름하니 변하지 않았는데, 불은 중간에 꺼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대 정전이라도 일어났는지 밖도 컴컴했다. 아직도 해가 뜨지 않는 새벽녘이었다. 하루가 30시간인 라임비의 시간은 꽤 길었고, 어둠 속에 잠긴 ‘소녀의 몸’은 꽤나 쓸쓸하고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남자를 더 안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기억들은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피그마를 만났던 기억 또한 부스러져서 사라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또한 곧 추억이 되겠지. 한때 이브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매춘부 일을 하곤 했었다고 호사가들 앞에서 술자리 안줏거리로 떠벌리고 다닐지도 모른다.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몸뚱어리에서 드디어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 묵은 것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친년마냥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아하하! 하하. 흐흑…”
왜 이런 하찮은 것을 고민했었나 웃음까지도 나왔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45지구의 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브로서의 케케묵은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퀘이사로서 날아오를 시기가 된 것이다. 지나치게 구질구질한 여관방이 지금까지는 현실이었는데, 오늘만큼은 현실성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피그마, 돈은 알아서 가져간다?”
조그마한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느다랬다. 교성을 마음껏 질러댄 탓에 목도 푹 쉬었고, 피그마의 외투에서 지갑을 꺼낸 손끝의 힘은 풀려있었다. 손바닥에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자국도 가득했고, 회음부는 벌어져선 안쪽에 민트라도 쑤신 것처럼 화화하고 따끔거렸다.
모두 한숨 자고 나면 다 회복될 상처였다. 이브의 몸으로는, 이브의 몸으로는 하룻밤 지독한 악몽일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이브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두툼한 지갑을 보았다. 검은 레자로 만든 싸구려 지갑이었다. 정사 후 기절한 상대가 ‘알아서 가져가쇼’하고 내어놓는 지갑이었다.
지갑을 뒤적거리던 이브는 작은 감탄을 삼켰다. 두툼한 것도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 안에는 1만 페니짜리 수십 장이 있었다. 순간 이브는 이 지갑을 가져가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소녀의 몸에 발정기는 있어도 도벽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이젠 이런 돈은 퀘이사의 은행에 수백조는 있으니 가져갈 필요도 없겠지.
이렇게 돈이 많으면 페니 카드를 쓰면 될 텐데. 졸부는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의 이브에겐 과분한 돈이었다. 1만페니 지폐를 쓰려면 이게 위조냐 어디서 났냐, 꼬치꼬치 캐묻고 그 자리에 경찰 오고 난리난다. 소지하는 것조차도 문제다. 그렇다고 안 가져가자니 이놈이 나중에 지랄할 것 같고…
이브는 지갑의 끝에서 1000페니 지폐를 겨우 찾아냈다. 그게 이 지갑 속에서 찾은 가장 작은 액수의 돈이었다.
“더 가져간다고 하룻밤 더 자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브의 하룻밤 가격은 국밥 한 그릇 가격이니, 지금처럼 기분 좋을 때라면 언제든 다시 와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코도 안 골고 기절해버린 피그마에게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갈게.”
이브는 넝마 망토를 뒤집어쓰고 짧은 인사와 함께 방을 나왔다. 아마 앞으로도 피그마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다시 만날 때쯤엔, 이브가 아닌 퀘이사가 맞이할 테니까.
밖에 나온 이브는 불어오는 상쾌한 바깥공기에서 미묘한 탄내를 맡았다. 그리고 이브는, 수없이 많은 경찰들이 댓바람부터 나와 주변 일대를 봉쇄하고 경계하는 요란한 거리의 한 가운데에 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