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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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다리는 위태롭게 후들거렸고, 가랑이는 쑤시고 가슴은 애달파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임시방편으로 자위를 했다고는 하나 뇌수까지 정액으로 물든 몸으론 손가락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몸으로 가까스로 서 있는 것도 겨우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이다. 눈앞에 당장 단단하고 튼실한 남자의 몸이 보이니 저기에 무심코 안기고 싶다는 기대감이 벅차올랐다. 그게 알터인데도, 분명 과거에 동고동락을 함께 한 부하인데도, 어느새 그 기억마저 정욕으로 점점 물들어가는 듯했다.
소녀는 과거의 기억마저 변하지 않도록 애써 알터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품에 안긴 레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이브만의 레아가 자신을 껴안고 뺨을 비볐다. 이브는 레아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머리를 파묻으며, 희미한 목소리로 알터에게 하달했다.
“알터, 반중력 엔진은 안 되고 제트엔진만 써야 한다.”
“자가용 비행선 말씀인가요? 이유가… 있습니까?”
“내 몸 안에는 날 이런 몸으로 만든 나노머신이 들어있어, 아마도 중력의 변화에 센서가 반응하여 나가지 못하도록 센서를 작동시키는 걸지도 모르지. 나노머신은 날 발정 난 암캐로 만들어. 이미 난 이 행성의 대기권을 벗어나려다가 몇 사람을 복상사시키고야 말았지. 어차피 스타포트로 가기 위해 우주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한 번은 더 겪어야 해.”
알터는 체념한 듯 레아를 끌어안으며 늘어놓는 이브의 목소리에 깊은숨을 삼켰다. 알터는 더는 이브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나노머신에게 있다는 센서가 자이로스코프 센서인지, 아니면 정말 중력 센서인지는 모르지만, 알터는 자이로스코프 센서를 가정했다.
그리고 가속도의 한계를 2G로 놓고 계산해 보았다. 이 행성의 중력이 1.03G니, 빠르게 계산해 봤자 제트엔진 만으로 1지구에 가려면 최대 속도 기준 2마하밖에 나오지 않고, 2시간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예약해둔 우주 엘리베이터가 출발하기까진 1시간 남짓 남았으니 오늘은 이 행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빠르게 달려 예약한 우주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불가능했다.
알터의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던 때였다. 문 역할을 하던 판자조각이 찢어지더니 파편이 저만치 뻥 날아왔다. 그리고 먼지 날리는 문짝 너머에서 빨갛게 충혈된 눈을 희번득하게 뜬 루이스와 그 패거리가 들이닥쳤다.
“이브 이 개 쌍년 어디 갔어!!”
루이스는 이브의 거주 구역에 뛰어 들어와선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이브에겐 아쉽게도 지나치게 하얀 은발은 아침햇살을 머금고 금방 눈에 띄었다. 이브를 찾은 루이스는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너 이 개년아… 씨발, 한 대 처맞고 생각하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한 흑인이 이브의 멱살을 잡더니 뺨에 손찌검하려 팔을 휘둘렀다.
뻑-
힘차게 휘두른 팔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루이스는 당황했다. 너무 세게 때려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팔은 허공에서 멈추어 있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손바닥이 이브의 뺨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어?”
갑작스레 튀어나온 알터가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초인적인 반응 속도로 다가와 손목을 휘어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마치 진짜로 뺨에 손찌검을 맞은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브의 붉은 눈동자는 겁을 집어 먹고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두세 걸음쯤 떨어져 있던 레아는 입을 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루이스를 뒤따라 달려들던 네 사내놈도 멀찍이서 다리가 뻑뻑하게 굳어선 움직이지 못했다.
“이 새낀 또 뭐야? 야, 야 이 새꺄 안 놔?”
알터는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흑인이 레드호크의 함정일 가능성과, 흑인이 그냥 미쳐서 들어왔을 가능성,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질해보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감히 보안관님을 몇 번이나 모욕해대는 주변인들의 모습에 피가 한없이 식어가며 손목에 가해지는 힘도 강해졌다. 냉혈한 알터 카이로스의 감정이 꾸밈없이 나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이익, 이 씨발! 놔? 놓으라고!”
“지금 어느 분에게 손을 대고 있는지는 아느냐?”
루이스의 얼굴은 분노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서운 눈매는 마주치기만 해도 굳어버릴 만큼 강렬했다. 루이스는 선글라스 너머로 꿰뚫어 볼 만큼 강렬한 시선을 피하면서 대체 뭔 깡으로 제 손목을 잡는지 알터를 스캔했다.
선글라스, 모르는 회사.
코트, 모르는 모델.
검은 장갑, 베스티아(Bestia)행성 산 코티드리마르… 모름.
하지만 손목에 찬 시계는 럭스(Lux)행성 산 레종 드 뮈레… 최소 1조 페니.
손목시계를 본 루이스의 검은 얼굴은 마치 손목 대신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새하얘졌다. 도를 넘은 공포심에 휩싸인 루이스는 알터에게 잡힌 손목이 뚝 부러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지금 자신이 손목을 잡은 이상한 요원복의 사내의 손목시계만 팔아도 45지구를 통째로 살 수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니, 혀까지 굳어버려선 버벅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감히 네 더러운 입으로 담을 수 없는 사람이지.”
루이스는 이브 쪽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시선을 옮겼다. 아무 때나 다리 벌리고 다니더니 드디어 봉 하나 잡았구나. 씨발, 난 이렇게 하찮은 골목대장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자로 태어나서 다리 벌리며 인생 편하게 사는구나
…다행이다.
-근데 나는 일단 살고 보자.
“아, 그, 그렇… 습니까? 형님?”
“…언니!”
그러나 살고 싶은 루이스의 작은 바람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브가 갑자기 혼절한 것처럼 가련하게 쓰러졌다. 그러자 레아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선 푹 쓰러진 이브를 부축했다.
루이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왔던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알터가 고개를 살짝 돌려 이브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식은땀이 아니라 무슨 용암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는 풀리고 아랫도리는 뜨겁고 축축해졌다. 뇌는 딱딱하게 굳었고 입안에선 제대로 된 변명조차도 제대로 맺히지 않았다.
“아니, 그그… 그게…”
“죽기 싫으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예, 예… 예에에….”
알터는 마지막 자비를 담아 말했다. 약자를 괴롭히는 건 취미가 아니었을뿐더러 아랫도리를 축축하게 적시며 오줌까지 지리는 불쌍한 자를 처리할 이유가 하등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쓰레기한테 욕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으니 손목을 부러트린 건, 퀘이사가 저렇게 된 데까지 영향을 끼쳤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들아 튀어!”
“아… 에… 으 더러운 새꺄…! 오지 마!”
루이스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다리와 너덜거리는 팔을 아무렇게나 공중에 휘저으며, 네 발로 도망가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루이스는 도망가도 죽을 것이라 직감하면서도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저런 사람은 손 까닥하는 것만으로 주변인들을, 이 45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루이스가 사라지자 알터는 이브를 바라보았다. 쓰러진 이브의 입가는 마치 진짜 손찌검을 맞은 양 비틀어져 있고, 눈가는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레아가 불쌍하리만치 망가진 소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보살폈으니,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알 수 없었다.
“퀘이사… 보안관님, 아프신 건 아니시죠? 1지구에 제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엘리베이터는 놓쳤으니 잠시 임시 숙소에서 쉬시죠.”
“거긴… 안전한가…?”
“안전하진 않지만 적어도 제 몸 지킬 장비들은 있지요.”
끔찍한 암컷의 욕망은 여전히 이브를 좀먹고 있었다.
남자의 손찌검을 당하려 오히려 뺨을 들이밀었던 것도, 저거라도 맞으면… 쾌락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든 충동에 이어진 일련의 행동은 떨어질 곳 없는 이브를 더 깊은 곳에 파묻었다. 지금도 충분히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밑바닥이 저 깊숙한 심연까지 꺼져버려 그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알터는 개의치 않거나, 적어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브는 알터가 모르길 바라며 물기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터… 너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얼마나 되지? 안식년이라면…”
흐느낌에 가까운 불쌍한 소녀의 목소리에 알터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흐느끼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 안에 담긴 뜻 때문이었다. 어쩌면… 30년이나 걸려 찾은 건 너무 늦은 걸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로 점철된 보안관은 가장 먼저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 이전의 퀘이사라면 무조건 ‘위험한 모험’을 택했으리라.
그렇기에 알터는 실망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빨랐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적어도 최악의 상황, 그러니까 정신 개조나 기억조작, 생체개조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었다.
생체 개조는 어느 정도는 이뤄지긴 했겠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기에 비가역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없다고 보면 너에게 추적 장치가 걸려있을 확률은 어떻게 되지?”
“…아.”
하지만 퀘이사는 퀘이사였다. 지금은 이브라는 가명을 쓰긴 하지만 그의 직관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알터는 속주머니에 있던 홀로그램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튕겨 나오며 플레이 버튼이 눌렸지만, 곧바로 낯부끄러운 장면이 나타나진 않았다.
“가죠. 건물 구조는 이미 머릿속에 있으니 아마 2층 베란다 쪽으로 가면 될 겁니다.”
알터는 생각했다.
어쩌면 제가 멈춰 있던 퀘이사의 시계 태엽을 감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든, 퀘이사가 이전의 퀘이사로 남아있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
루이스는 도저히 제 심장 같지 않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달렸다. 인큐베이터에서 분유 먹던 힘까지 짜내며 뛰니 숨통이 터지는 듯했고 눈알은 빠질 것만 같았다. 패거리라며 데리고 다니던 놈들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다. 그러나 루이스는 형님을 배신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달렸다.
목표하던 석탄공장의 1층 홀에는 자신이 모시던 세레니티의 행동대장이 팔짱을 끼고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입꼬리는 억지로 들어 올렸으니 입은 웃는 것 같아도, 눈매는 사람 잡아먹을 흉흉한 기운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루이스야, 일은 해결했니?”
“그, 혀, 혀형님… 저희… 찾으면 안… 돼요… 죽어요.. 저희 죽어요… 안돼요.. 안 돼… 루이 드 뮈래… 우리 다 뒈져요!!”
루이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토해냈다.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선 절대로 이 일을 해결해선, 이브를 잡아 고객이라는 사람에게 넘겨선 안 되었다.
루이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는 중년의 행동대장은 루이스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 큰 사내새끼가 오줌까지 지리고 입에서 침을 튀기기까지 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꼴이… 참으로…
같잖았다.
“이브라는 년 빨리 찾아오라고 했었지. 일 똑바로 못 하니?”
“예… 흡… 그렇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뭐라고?”
행동대장은 글룩 85를 꺼내선 헐떡헐떡 숨을 쉬는 루이스의 왼쪽 심장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루이스의 동공이 수축하며 헐떡이는 숨마저 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입을 놀렸다.
“그, 그게, 형님…! 옆에 보디가드가…”
“입 닥쳐라!”
행동대장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루이스의 명치를 걷어찼다. 루이스의 꽤 큰 허우대가 휘청이더니 뒤로 나자빠졌다. 행동대장은 발로 지긋이 루이스의 배를 밟고는 여전히 루이스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며 말했다.
“네 과거에 했던 일을 봐주지. 이브라는 년 산채로 잡아와.”
“…형님!”
-철컥.
스프링이 걸쇠에 걸리는 장전 소리가 잔혹하리만치 공간을 갈랐다.
“잘해오면 세레니티에 한 자리 넣어주지.”
“…헙.”
루이스는 머리를 굴렸다.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십수 년을 살아오며 절반 이상을 바친 ‘형님’의 목소리엔 반사적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행동대장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글룩 85를 허공을 향해 쏘았다. 그리고 루이스의 앞에 글룩 85를 내던졌다.
“들고 가.”
“…예.”
행동대장이 발길질을 멈추고 루이스에게 여유를 주었다. 루이스는 급히 일어나 총을 들었다. 그리고 공포심에 해까닥 돌아버린 머리가 거대한 오판을 해냈다.
세레니티가 어떤 회사던가, 라임비의 자회사이자 45지구의 소유주가 만든 회사였다. 제아무리 레종 드 뮈레 시계가 있다 한들 어쩌겠는가, 어차피 인간은 총알 한 방이다. 형님이 까라면 까야 하고 어차피 죽는 게 확실하다면 형님 편에 붙어야 했다. 그 괴물같이 생긴 보디가드도 어짜피 총알 한 방…
“다리에 접착제라도 발랐나?”
“아, 예! 빨리 튀겠습니다!”
루이스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어차피 죽을 거, 저승에서 형님의 말은 듣고 죽은 충절한 부하라고 보너스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체내에서 생성되는 가장 강렬한 마약, 엔도르핀이 뿜어져 나오는 몸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래피티 가득한 죽음의 복도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