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40)

[TS] 은하보안관 이브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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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구.

이브가 발정난 채로 남자의 품 안에서 앙앙대고 난 뒤, 나른함이 찾아오면 제 실수를 깨닫게 되어 다시는 오기 싫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저 우주를 나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들려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1지구는 둥글고 완만한 곡선을 지닌 반구형의 강철 프레임과 유리로 이뤄진 돔 형태로 막혀있다. 스코르피우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감탄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 구조가 다 쓰고 버리는 다이슨 스피어를 그대로 처박은 만큼 엄청나게 저렴하며, 돔 안의 기후조종용 나노머신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구두쇠적인 방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라임비의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걸 선조의 지혜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또한 저 돔은 나노머신을 독점하겠다는 라임비 1지구민들의 이기심과 알량한 특권 의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돔의 중심에는 타워가 있는데, 이는 고대 신화의 바벨탑을 연상케 할 만큼 하늘 끝까지 뻗어있었다. 저게 바로 우주 엘리베이터였다. 저 끝에는 온 은하로 나아가는 우주선들이 정박해 있는 스타포트가 있다.

이브는 설렜다.

그게 돌아온 부하에게서 느끼는 오묘한 감정 때문인지, 결국 자신이 암컷임을 각인시킨 곳에 돌아와서인지. 다시 은하보안관이 되기 때문인지.

어쩌면 그 감정들의 혼합일지도 모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돔의 서쪽 끝에는 유달리 움푹 들어간 곳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2중 격벽으로 된 비행기 출입구였다. 출입구에 알터의 스코르피우스가 활강하자 외벽은 자동으로 열렸다. 활주로를 운행하는 라임비의 직원 수십 명은 이미 단체로 나와선 알터에게 익숙한 듯이 손을 흔들며 맞이하고 있었다.

이브의 감상이었지만, 저 직원들도 분명 하는 일이 있을 터인데, 환영하러 단체로 나오는 것이 무슨 우주시대 초기의 독재자라도 맞이하는가 싶었다. 알터는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없었고 해 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 행성에서 수색했던 만큼 볼 것 못 볼 것 다 보았을 텐데도 이미지메이킹을 하고자 아부하는 모습이 가당찮았다.

“야, 쟤네 너 오면 항상 저러냐? 뭐 돈이라도 뿌렸어?”

“그것도 저들의 자유이지요. 저는 분명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들고 올 수 있는 것 중에는 스코르피우스가 젤 싼 기체였으니까요.”

이브는 한숨을 쉬고는 알터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선글라스, 강화복, 셔츠, 장갑, 신발, 시계, 양말까지. 온몸에 몇천억 단위의 핸드메이드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아마 30년 전의 퀘이사도 얼마나 자신이 이들에게 위화감 덩어리였나를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안전을 위해 고성능 장비를 갖추려면 자연스레 명품을 찾고, 몸에 걸친 것들이 비싸지는 건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을 테니까.

아직 격벽으로 막혀있는 1지구의 정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는데도 스코르피우스의 창문을 여니 무척 상쾌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지금까지 마셨던 건 먼지 스무디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지나치게 깨끗한 공기였다. 아무리 못 사는 행성인 라임비라 하더라도 1지구는 188지구의 소유주들이 모여 살며 13억 인구의 20% 이상이 밀집된 행성의 주도였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이브는 앞유리창에 떡하니 보이는 저 원시적인 문구에 혀를 내둘렀다. 이브가 이 행성에선 항상 밑바닥 인생만 살았기에 오히려 행성 상류층의 생활은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스타 스트링스의 일원들이 라임비에 왔을 때 저 문구를 얼마나 이질적이게 느낄지 상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기체 인식조차 없나?’

이브가 궁시렁거리는 동안 알터는 직원을 향해 보안국의 사민증을 내밀었다. 직원은 활짝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세미정장풍의 라임비 정복의 여성은 머리카락을 딱 붙여 좌우로 가르마를 타서 뒤로 묶은 것이 곁눈질로 보기에도 태어날 때부터 잘 먹고 잘살아오며 잘 교육받은 사람 같았다. 어쩌면 영생자이며, 라임비 컴퍼니의 이사급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브의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라임비 1지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이로스 경. 그런데 곁의 아이들은….”

“귀중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환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저희는 카이로스 경께서 최소한의…”

황망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이사를 보고는 이브가 알터의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알터가 무려 허리를 굽혀서까지 꾀죄죄한 이브에게 귀를 기울이자 스코르피우스 밖에서 지켜보던 이사 포함 직원 수십 명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브의 겉모습이 아무리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행동거지나 옷은 빈민가에서 막 주워 온 부랑아 같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서로 눈알을 굴리며 대체 저 소녀가 누구인지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브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브의 생체정보는 라임비에 등록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여기선 그냥 호의를 받아. 저 사람들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하지만 사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일조차 팽개치고 나오면…’

‘이 개새… 아니다. 그냥 가자.’

둘끼리 속삭이는 말소리가 새어 나가려면 얼마든지 새어 나갔을 테니, 최소한 이브는 라임비에서 먹고 살 걱정은 덜게 되었다. 물론 이건 라임비 직원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고 이브가 계산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확인되었습니다. 카이로스 경.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따라오지 마십쇼. 추적하지도 말고요. 프라이버시는 존중받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지나쳐가는 스코르피우스를 지켜본 라임비 직원들은 각종 부러움과 시기심을 담아 이브를 노려보았다. 이브는 쏟아지는 따가운 눈빛이 등딱지에 못질이라도 쾅쾅 해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작부터 다리 벌려 남자나 꾄 창녀로 보이니 썩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브의 몸으로 알터의 곁에 붙어있으려면 인고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1지구로 향하는 격벽이 완전히 개방되니 이브의 눈동자에 엄청나게 높게 치솟은 마천루들이 비쳤다. 여기가 돔의 안이라는 느낌도 거의 들지 않았으나 투명한 벽 사이로 안쪽은 푸른 하늘이고, 바깥쪽은 붉은 하늘인 게 대비되었다.

“우와… 언니, 여기가 우리 살던 곳 맞아?”

레아는 어느샌가 일어나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눈으로 스카이라인과 그 사이를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는 수없이 많은 드론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해 있는 1지구의 모습에, 이브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졌다.

그러니까 퀘이사로서 1지구를 보는 눈과 이브로서 1지구를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분명히 거지 같은 동네라고 생각했던 곳이 길거리마다 가득한 불빛과 드론들이 수없이 날아다니는 게, 엄청난 부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래… 맞아.”

물론 빛만 보자면 그렇겠지.

아무리 거지들이라도 제집은 꾸미고 싶어 하니 거의 쓰지도 못하는 초기형 기후변화 나노머신들을 소량으로나마 사 와 버리는 다이슨스피어 모델을 부숴서 씌우고 구색을 갖춘 동네에 불과하다.

저 150층이 넘는 마천루들이 이루는 스카이라인 아래의 어둠엔 무엇이 도처에 깔려있는지는 겪어본 저만 알 테니 더더욱 우울해졌는지도 모른다.

라임비에는 쥐도, 바퀴벌레도 살지 못한다. 그건 1지구도 마찬가지다.

**

스코르피우스는 1지구에서도 하이-에어리어라고 할 수 있는 100층 이상의 빌딩 숲 사이로 나아가서는 VIP전용 이착륙장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호텔 직원 수십 명이 나와 피곤할 정도로 맞이해 주었다. 중간에 안드로이드도 섞여 있긴 했지만 그게 돈이 없어서 기계이식을 한 혼종인지 알 게 뭔가.

가는 곳마다 이브는 따가운 눈빛을 받았고, 레아는 무서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이브의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알터에 비해 두 사람의 겉모습은 하잘것없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알터도 지나치게 관심을 두는 그들이 피곤했다. 심지어 이브에게 보내선 안 될 눈짓을 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 숙소에 들자마자 이브는 레아와 함께 쉬고 싶다며 욕탕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이브의 뒷모습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어 혹여 몸속에 있다는 나노머신이 지랄맞은 일을 했는가 걱정했다. 그러나 이브가 속상할 말을 입 밖으로 차마 내뱉을 순 없었다.

대신 알터는 두 사람이 들어간 뒤에 호텔 옷장에 있던 어린이용 샤워가운을 찾아 욕탕 앞에 가져다 두었다.

그게 10분 전의 일이었다.

알터는 한쪽 벽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 도시 풍경이 보이는 탁자 위에서 깊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브의 일도 일이지만, 스타 스트링스 너머에선 막 잠에서 깬 부관 페이가 하는 변명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젠장. 암표까지 싹싹 쓸어갔어요. 일주일 치나 없네요. 아, 하나 있어요. 내일 거 한 자리]

“페이야, 내가 이런 건 미리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했지 않았냐?”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히 오늘 출발하실 줄 알고 연락 드린 건데…]

요약하자면, 저 위의 스타포트에 뻔히 알터의 자가용 우주선이 있는데, 대기권을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쓰지도 못한다는 소리였다. 스코르피우스는 어쨌든 대기 내에서 쓰는 물건이었고 할리제이비슨 732B의 무중력 엔진은 이용조차 하질 못하니까.

“왜 과학자라는 놈들은 워프 엔진을 캡슐 안에 못 넣는 거야?”

[13차원 공간에서는 이종물질이 폭탄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시면서 물어보신 거죠…]

“알아, 일단 라임비 대기권을 벗어나려면 우주 엘리베이터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 우주시대 초기에나 쓰던 액체연료 분사식 로켓을 구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저 우주선을 이쪽으로 들였다간 난리 나겠지.”

[난리만 나겠습니까? 아주 행성 하나 날려 버시려고 작정하신 게 아니라면요.]

“일단 우주 엘리베이터 예약이라도 찾아봐. 두 표가 아니라 세 표. 그분께서 애를 하나 데려가고 싶으시단다. 방 하나를 잡으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아. 최대한 빨리 찾아봐. 어떤 방식으로든 스타포트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어디 보자, 내일 화물칸이라면 가능하겠는데 설마 이걸 타실 건 아니시고요.]

“일단 그거라도 예약해봐.”

[예… 예에에? 이걸… 화물칸에 타신다고요? 이거 타서 사고 나면 책임 못 져요. 어차피 살아남으시겠지만… 애도 있다면서요.]

“추적자가 꽤 많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가야 해. 안전 챙긴다고 고객전용 칸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엉덩이 깔고 뭉개다간 오히려 놈들의 함정에 걸릴지도 몰라. 일단 게헨나스의 레드호크 관련된 정보랑… 수십 년 단위로 성노예 됐다가 풀린 사람들 자료 찾아서 보내라.”

[외람되지만 그건 왜 보내드려야… 하나요?]

“페이야,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니?”

[그분께서 생체개조를 당하시거나… 힉, 알겠습니다.]

페이는 알터의 부관이었다. 특히 똑똑하고 판단 잘 하는 애들만 뽑아 놓은 전략 부관이었다. 명석한 머리로는 잘 알아들을 테니 어떤 걸 뜻하리라곤 잘 알 것이다.

알터는 화물칸에 타는 방법을 떠올렸다. 몰래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갈 방법과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일 방법. 아마 화물칸에 기압조절 장치도 없을 거고, 공기는 꽤 많이 빠져버릴 테니 강화복은 필수로 필요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주에 나가려면 당연히 강화복은 필요했다.

‘강화복이면… 백화점에 가야겠네.’

안식년의 알터가 이 행성의 대기권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건 무척 적었다. 퀘이사의 영향을 크게 받아 보안관이 응당 지녀야 할 강화복과 자기방위장치에는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었으나, 본인이 사치를 싫어하고 생활도 이곳저곳에서 지원해주니 각종 생필품이나 사치품 따위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편에 가까웠다.

가지고 내려온 건 자가용 캡슐 두 개와 몸뚱어리, 자기보호용 레일건과 폭탄 몇 개. 그리고 술과 시가뿐이었다. 3D프린터로 주문제작을 하고 싶어도 그 재료가 되는 필라멘트는 전부 우주선에 있었다. 내심 알터는 자신이 얼마나 덜렁거리고 세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는지 자책했다.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당연히 이런 행성에서 찾을 줄 알았으면 필라멘트와 3D프린터는 가져왔어야 했다. 거지행성에서 멀쩡하게 강화복 입고 살아남았을 리가 없지 않았나.

게다가 라임비는 수송능력이 떨어져 배달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뭔가를 사기 위해선 항상 직접 찾아가야 한다. 이 거지 행성에서 백화점에 가봤자 마음에 드는 게 있을 리가 없을 테지만, 잡동사니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찾아보니 중저가 브랜드 백화점인 폼페이라 백화점이 있었다.

‘귀찮게 됐군.’

알터는 하품을 크게 하고는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던 각성제 알약을 꺼내 삼켰다.

100정이라고 쓰여있는 허연 약통의 절반 가까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로지 잠 깨는 용도로 쓰이는 각성제였다. 부작용을 최소화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생체적으로 인간인 이상 오랫동안 잠을 못 자면 정신이 피곤해진다.

그러나 퀘이사와 레아,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잠은 반납할 수 있었다.

욕탕 문 너머로 두 소녀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나마 느껴지는 이 평화가, 알터로서는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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