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0)

[TS] 은하보안관 이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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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내의 회의실로 향하는 고급스러운 복도에는 수많은 검은 정장의 보디가드들과 호텔 직원들이 지켜서 있었다. 복도를 또각또각 걷는 알터와 레아를 반겨주듯 창밖에서는 나노머신들이 발하는 찬란한 빛이 떨어졌다. 나노머신이 인공적으로 드리우는 빛이었으나 인간의 눈에는 마치 테라의 햇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빛처럼 보였다.

아스라이 비치는 빛은 무뚝뚝한 거구 알터의 옆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트렌치코트와 선글라스의 윤곽이 고스란히 바닥에 드리워졌다. 레아는 완전히 알터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알터는 안내를 받았다. 선글라스 내부에만 비치는 정보를 지켜보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레드호크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전화를 걸었던 37지구의 소유자 테론 아스바르에 대해 생각했다. 전화를 걸어온 그의 태도는 언론의 평가와는 사뭇 달랐다.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아버지 사후 어떤 도전적인 사업도 걸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소인배가 감히 은하보안국을 대적할지도 모를 정도로 용기를 내는 데는 중간에 수작질이 있었다는 소리였으니까.

-과연 어떤 수작일까?

회의실의 여닫이문은 호텔 직원이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열어주었다. 알터가 공적인 미소를 짓자 직원은 움찔 떨었다. 레아는 자기가 오겠다고 했으면서도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알터와 맞잡은 손을 꼭 쥐었다. 알터는 레아의 손을 맞잡지 않은 손으로 선글라스를 빼 앞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들어가시지요, 은하보안관님.”

회의실은 간략하게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지킬 필요도, 지킬 능력도 없겠지만 회의실 안에도 검은 양복을 입은 보디가드 몇 명이 군데군데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 탁자 가운데는 더벅머리에 얼굴이 울긋불긋한 테론 아스바르가 이미 한 시간 전에 와서 자리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라임비 37지구의 소유자 테론 아스바르입니다.”

“은하보안관 알터 카이로스입니다. 이쪽은 이브 양의 동생 레아 양이고요.”

“안녕하세요.”

레아는 소개와 함께 공손히 배꼽 인사를 했다. 알터가 먼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자 테론 역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 정전기가 튀었다. 그러나 알터도, 테론도 그 정전기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인사치레가 끝나자 테론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알터를 따라 착석했다. 레아도 두 사람이 앉자 자리에 앉았다. 레아에겐 머리만 빼꼼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책상이 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테론이었다.

“시건의 당사자끼리 이야기하는 데 사람은 물려도 되겠습니까? 어떠한 기록물의 형태로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불법적인 일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협상하러 오셨을 테니까요.”

“…안전을 위해 저희 측 보디가드 한 명은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몸 지킬 사람 한 명 정도는 남겨 주셔야지요.”

알터는 어차피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남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비밀 협상에도 녹음기나 CCTV, 홀로그램 촬영기 등, 수많은 첩보 물품들이 사용된다. 당장 이 회의실에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는 눈이 느껴졌다. 선글라스의 투시 기능을 쓰지 않아도 이미 테론이 녹음기를 가져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은 버블 하나만으로도 전부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곁에 서 있는 보디가드는 테론이나 이 일을 저지른 놈의 첩보 요원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닐 언론사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알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명만 남기시죠.”

“감사합니다. 여기, 한 사람만 남기고 다 떠나세요.”

테론은 영 탐탁치 않은 기색이었으나 손짓하며 보디가드들을 물렸다.

알터는 조심스레 기록이 남지 않도록 코트 안주머니에 있던 버블을 꺼냈다. 같은 기술등급의 물건이 아닌 다음에야 기록이 남긴 힘들 것이다. 어차피 저 보디가드가 있는 한 완전히 비밀로 숨길 수는 없을 터다.

“그럼 시작해보도록 하죠.”

**

“은하보안관님께서도 긴 말 하시기 싫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갑자기 이런 문서를 받게 돼서 말이죠.”

테론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봉지를 내밀었다. 겉보기에도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그는 같이 동봉되어 있던 편지는 가져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은하보안관은 서류봉투를 건네받고는 꺼내 확인했다. 이브와 레아의 지장과 함께 두 사람을 노예로 부리겠다는 일종의 신체포기각서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그 지장의 진위였으니, 선글라스의 인공지능으로 판단해 보니 실제로 이브가 1년 전에 찍은 것이 맞다고 확인했다.

“원본이군요.”

“예, 원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문서의 소유권을 넘겨받았고 말이죠. 요즘에는 정보화된 계약서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고는 하나, 여기는 아닙니다. 게다가 그 지장은 엄연히… 진짜입니다.”

테론은 앉은 자세에서도 올려다봐야 하는 은하보안관의 체구에 위압을 느꼈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생기기까지 했는지 소름이 끼쳤다. 은하보안관을 보는 순간, 설움과 분노를 담아 아버지의 명예훼손에 대한 피해보상을 외치리라는 다짐은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악수한 순간부터 손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도를 넘은 두려움에 테론의 손아귀에 땀이 찼다. 왜 자신은 이런 괴물에게 분노하고 있었을까?

“피차 긴말 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쇄된 계약서는 은하 경제 연합회(GEF)의 협의 내용 상, 적절한 공증 서류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현재 기술력으로 인쇄된 분자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 하지만… 라임비는 은경련의 일원이 아닙니다. 여긴 다른 법이 존재한다고요!”

테론은 눈을 질끈 감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역시 먼저 언론플레이를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아마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언론플레이해도 될 것이다.

은경련의 협의서에는 엄연히 노예가 합법이다. 라임비도 그렇다. 두 곳 모두 사유재산 침해는 합법이 아니다. 은하의 언론들, 스타 스트링스의 언론사들은 특종을 위해 이 사건을 물고늘어질 것이다.

은하보안관을 상대로 흠집을 내려는 언론사는 저 스타 스트링스에도 많을 테니 퍼트리면 된다. 뭣이 정의이고 뭣이 악인가. 당장 제 가족을 살인하고 도망가려 하는 쪽이 악이 아니라면 뭣이 각이겠는가!

“지장은 진짜겠죠, 하지만 저는 이런 문서에 찍은 적 없어요.”

테론이 예상치 못하게 옆에서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곁에 있던 꼬마는 살인자의 지장 옆에 있는 다른 지장을 가리켰다. 테론은 꼬마애를 보고는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다시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작 살인자는 데려오지 않고 저 꼬마애를 데려온 것에 갑자기 승질이 뻗쳤다.

“아저씨가 말씀해주신 대로 서류는 조작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애초에 언니와 저는 라임비 컴퍼니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미등록자의 서류는 아무 의미 없는 거 아시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꼬마야.”

“레아에요.”

“꼬마야, 지금 장난하러 온 거 아니잖니? 그래, 당신! 계약서 가지고 말하는 자리에 애새낄 대려와서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레아의 말에 화가 치밀어오른 테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알터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대로 은하보안관에게 쏘아붙이려 했으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하보안관의 눈빛은 사람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 몇 명 잡아먹었을 것 같았다. 일부러 평소에 쓰고 다니던 선글라스를 벗고 나타났는지, 눈빛만으로도 숨통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테론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소리쳤다.

“그래, 그쪽 말씀대로 이 계약서가 가짜라고 칩시다. 저희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에 큰 슬픔을 남긴 그 영생자를 데려오십쇼. 이 계약서가 아니더라도 저희는 정당히 살인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은경련 협의 조항 중, 범죄자 인도 계약에 따라 의미 있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끝에는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테론은 뒤늦게 자기답지 않게 화가 끓어올라 터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서운 은하보안관은 테론과 눈을 마주친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옆의 꼬마애도 겁먹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테론은 자신이 무엇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팔다리가 달달 떨렸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착잡함인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 느끼지 않았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많이 화나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제 의견도 레아와 같습니다. 하지만 라임비 37지구 소유주님께선 믿으실 수 없겠지요. 그러니 제안합니다.”

“…대체 어떤 제안인지 들어나 봅시다.”

테론은 색색거리는 숨을 쉬며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이미 터트린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가슴 속에 있는 마지막 불꽃을 태워서라도 몰아세우고, 이 협상을 자기 것으로 끌어와야 했다.

“450조 페니.”

“예?”

“450조 페니입니다.”

그러나 적개심을 불태우기엔…

“다, 당최 무슨 소립니까?”

“이 일을 무마시키는 데 제가 드리는 돈입니다.”

제안은 너무 달콤했고,

“현금으로. 450조 페니.”

그건,

“지, 지금… 저를 돈으로 사겠다는 말씀입니까!”

“차분히 앉아서 생각해 보시죠.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테론이 맹랭한 정신으로 바들바들 떨며 의자에 쓰러진 사이, 은하보안관은 태블릿 위에 뜬 공수표에 숫자를 적었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은행, 스타 스트링스의 거부들만 이용한다는 그 은행에서 발행하는 수표 파일이었다. 은하보안관이 적은 숫자는 무려 0이 14개나 달린 금액이자, 라임비 전체의 1년 치 예산과 같은 금액이었다.

“일단 선금으로 100조 페니 드릴 테니, 언론사 잠재우시고.”

그 자리에 있던 꼬마도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은하보안관을 바라보았다. 은하보안관은 옆의 꼬마에게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저 은하보안관은 라임비에서 소유주가, 테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미 조사하고 왔을 터다.

사실상 20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범죄자를 찾지 못하자 사건 자체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이상하게 일어난 분노는 제 속물적인 욕심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거저 받는 거나 다름없는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그러나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저 눈빛에 까딱 긴장을 풀었다간 

 저 돈을 버는 건 라임비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벌벌 떠는 손으로 자신이 이 은하보안관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떠올렸다.

“하,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서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은하보안관이 서류를 끌어당기자 테론은 고개를 병적으로 끄덕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집힌 것 같았다. 청명한 송금 소리가 들리자 테론은 제 태블릿을 꺼내었다. 화면에는 갤럭시 익스프레스 100조 페니 수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드,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그럼 관련 파일들이랑 자료들 전부 지우시고, 노예계약건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아니, 응당 그래야지요.”

은하보안관은 두께가 꽤 되는 A4 서류뭉치를 들고는 그 자리에서 벅벅 찢었다. 찢은 서류조각은 따로 가져온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저런 흉흉한 서류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었으니까.

“다 해결되면 잔금 입금하겠습니다.”

“예! 보안관님!”

은하보안관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했다. 옆의 꼬마도 곧 은하보안관을 따랐다.

자리에 남은 테론은 하찮은 인간이 감히 스타 스트링스의 존재들에게 화를 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고자 제 뺨을 꼬집었으나, 그저 의미모를 눈물만이 쓸모가 없어진 나노머신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그의 뜻을 더는 거슬러서는 안 될 것이다.

**

“아저씨! 아저씨!”

알터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적의 카드를 무마시켰다. 평소 같았으면 언론을 다스리고, 적당한 협박과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썩어나는 돈으로 시간을 산 셈이다.

“왜 그 돈을 준 거예요? 서류는 거짓이잖아요. 다른 방법으로 언니가 잘못이 없는 걸…”

레아가 보폭이 큰 알터를 총총거리며 따라와 따졌다. 알터는 잠시 멈춰 서서는 레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으며 걸음걸이를 맞춰주었다.

생각해 보니, 이 꼬맹이가 어젯밤부터 자신을 이토록 몰아세운 것이다. 아군이든 적이든, 무뚝뚝한 알터를 이토록 몰아세운 점은 높이 살 만했다. 저 꼬맹이가 의도한대로 이용당한 걸지도 모른다.

“이게 제일 빠른 길이란다.”

“그래도…….”

레아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다물었다.

우주자본주의 시대의 인류에게 돈과 가치란 수명까지도 살 수 있는,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하게 할 수도 있는 진짜 진리다. ‘없는 자’가 가진 개인의 신념이나 분노, 복수심 따위는 ‘있는 자’가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마피아들이 그 사람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쓰기 힘들 정도의 돈, 그리고 제 몸 하나 보전할 수 있는 돈, 라임비의 사람이 격앙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은 딱 450조 정도였다. 준비 제대로 안 하고 온 값치곤 싼 값이었다.

또한 종이 쪼가리 하나에 320조를 쾌척했던 자신이 아니었나, 그래서 가장 빠른 길을 걷기 위해 합리적인 가격을 불렀을 뿐이다.

“어서 돌아가야지, 네 언니를 지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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