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3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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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뒤의 시큼한 냄새는 정향을 몰아내고 밀실 안에 가득 찼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정사의 흔적은 소녀의 근처에만 집중적으로 남았다. 강화복에 있는 자동세탁 기능에 의해 소녀의 옷에 묻은 타액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소녀의 피부에 흔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린 희멀건 체액은 여전히 끈적했다. 시트러스 향과 비슷한 관능적인 체향은 소녀의 말려 올라간 옷 안쪽에서 풍겨져 나왔다. 이브의 눈은 우주의 공허를 담은 듯 컴컴했고, 넘버 8은 더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아랫도리를 여미고 여전히 깔끔한 자세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또다시 더럽혀지고야 말았다.
그것도 스스로의 의지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여기까지야. 이게 마지막이야. 같은 안쓰러운 목소리를 간헐적으로 흘리며 끝없이 혼잣말로 자기 위로를 하는 소녀는 다정한 듯이 들려오는 중년 갱의 목소리에 전기 충격을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이브.”
“싫어… 싫어… 나는 싫어…”
다시금 길거리 창녀로 전락한 자신이었다. 알터를 어떤 얼굴로 보나, 그리고 저 죽이고 싶은 남자의 좆을 보았을 때, 다시금 애틋한 마음을 느껴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런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감이 이브의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검고 끈적한 타르처럼 쏟아져내렸다.
섹스 후에 절망감에 빠져 눈물짓는 이브의 모습은 넘버 8에게 25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게끔 했다. 넘버 8은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양심의 가책까지 받으면 뒷세계에서 살아남긴 힘들다는 점은 스스로가 잘 알지 않나. 그렇기에, 그는 가장 냉철하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행했다.
쓰러져 헐떡이고 있는 이브에게 자신의 정보를 여상하게 말해주는 일이었다. 무전 너머로 전투 중이라고 들었지만, 아마 은하보안관이라는 사람이 이길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 또한 직감이 발달한 사내였다. 그의 직감이 아니었다면 약육강식의 뒷세계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긴 어려웠을 테니까.
상대 또한 테라에서 나타난 범죄 조직이라는 건 알지만 은하보안관이 어떤 사람들이던가. 분명히 알터 카이로스 수석 은하보안관이 다수를 물리치고 엉망진창이 된 공주님을 구하러 올 것이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자신도 그런 왕자님을 꿈꾸었던 적이 있더랜다.
“몸으로 지불했으니 너한테 말해줘야겠지.”
“싫어… 오지 마… 나는 여기까지야. 그만 나를 떨어트려.”
이브의 목소리는 물기 가득히 떨렸다. 그러나 넘버 8은 밀어붙이듯 으르렁거렸다.
“듣기 싫어도 들어라. 25년 전, 이브. 자네가 조직을 떠나면서 터트린 사건에 결국 사이먼 갱단과 우리 갱단은 한 판 거하게 붙었지. 내가 너한테만 알려줬던 정보들은 네가 나가면서 보스에게 다 까발려버렸고. 그때 보스는 이 손가락을 가져가면서 전쟁을 일으켰거든.”
넘버 8은 약지 없는 손을 들어 이브에게 들이밀었다. 이브는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로 손가락을 피했다. 눈가가 떠는 게 동물원에서 볼 법한 토끼나 새앙쥐, 병아리 같은 작은 동물 같아 참 귀여웠다.
그와중에도 이브의 떨림은 잦아들었다. 정보를 어떻게든 귓속에 집어넣으려고 이브는 잔뜩 겁먹은 상태에서도 마비된 머리를 굴렸다. 넘버 8은 지금은 말이 통하는 상태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섹스 뒤에 몇 번의 절정을 겪은 탓에 마비 효과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욕망이었지만 이 손으로 다시 이브의 저 배꼽을 쿡쿡 찌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충동을 참았다. 지금의 이브는 배부른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강화복 있는 소녀와 강화복 없는 중년의 싸움은 너무 뻔한 결과니까.
“사이먼 갱단은 저 먼 은하에서 사주를 받고 있었다. 헤블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사실 고아가 아니라 특수한 명령을 받아 나이고정을 시킨 뒤 기르는 소년 소녀들이었지. 특수처리된 성노예라고, 도저히 섹스로이드로는 꼴리지 않은지 불법이라도 인간을 먹겠다고 난리치는 인간들이 있거든.”
넘버 8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했다. 담배가 땡겼다. 그러나 넘버 8의 주치의 No. 317이 담배와 술은 금하라 했으니 탐하지 않았다. 타이틀 갱의 넘버 8이 되며 모은 돈도 돈이지만, 그는 결국 영생자가 될 만큼 많은 돈은 벌지 못했다. 그렇다고 로봇 3원칙에 지배되는 인간의 도구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금 남은 생이지만 그는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이브를 취한 건 반쯤 충동이었으나 발정난 이브가 주기적으로 남자를 취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둘 다 만족할 거래였다. 본인은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만.
“너도 곧 저 위로 올라갈 테니 솔깃할 거다. 고아원에 있던 여자애중에 하나가 글쎄, 우주 마피아들의 부하로 들어가서 단숨에 마피아 조직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더냐. 너는 1지구에서 벗어났기에 모르겠지만, 뒷골목에서는 꽤 유명한 소문이었다.”
넘버 8은 허탈한 듯 혀를 찼다.
“어차피 네가 떠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너도 그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니 저 은하에서도 마음껏 날뛸 수 있겠지. 어째서 성노예를 기르는 고아원이, 은하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낳은 시설로 변해갔는지 알아봐라. 말도 안 될 정도로 웃긴 이야기니까.”
“…뭐… 라고?”
어째서 이브는 알터도 모르는 지식을 이 남자가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하보안국이 어떤 조직이던가, 그리고 자신이 키웠던 정보 부관과 정보원들이 어떤 사람들이던가. 빛의 속도를 역산해서 워프선을 갖다 둔 뒤에 망원경으로 사건을 복원하는 방식은 은하에서 숨길 수 있는 비밀이 없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제약은 조금 많았지만.
덕분에, 그 호기심은 이브의 잔물결 같은 쾌락을 싹 가시게 했다. 여전히 허리 아래쪽이 뻐근하고 아팠지만 눈살을 찌푸리면 참을 정도는 되었다. 이브는 비록 휘적거릴지언정 두 팔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더 알려줘. 아르티 프리세크는 어떤 사람이지?”
“어차피 뜬소문일 뿐이다. 그런 소문 따위는 지금 당장 내가 만들어낼 수도 있지. 헤블론 고아원에서 자라난 유망주들이 어떻게 되었겠나. 다 너처럼 길바닥에 나동그라졌겠지.”
“……”
이브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씨발, 개새끼. 눈빛만으로 욕지기를 담아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독기를 되찾은 그녀의 눈빛은 제법 살벌하기까지 했다. 넘버 8은 소녀의 돌아온 눈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저 눈을 짓밟고 깔고 뭉개는 행위도 불가능하겠지.
“일단은, 가까운 웜홀 게이트가 있는 코르디스에 가면 알 수 있지 않겠나?”
“…아무짝에 쓸모없는 정보였군.”
이브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강화복 속에 숨겨두었던 35MW급 레일건을 꺼냈다. 총알 한 방의 힘에 맞춰 5MW급으로 조절된 물건이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에 능욕까지 당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몰아간 상대를 인정했다. 저 은하에서 이보다 더 심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일깨워준 상대가 고마웠다.
이브는 그를 조준했다. 그리고 여태껏 지었던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붉은 라임비-에이(LIME:V-A)의 초승달만큼이나 잔혹하리만치 핏빛으로 물든 미소였다.
“있는 척하면서 따먹는 거, 좋은 도박이었지.”
“하하하! 나에게 라임비에서는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도박이었다.”
넘버 8은 오히려 이브의 대담한 행동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네가? 가능하다고? 그런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했던 건 이브 그 자체의 정체였다. 그는 이브를 헤블론 고아원에서 자란 소녀라고 여겼다. 섹스 후의 여운에 젖은 이브는 자신에게 절대로 손톱을 드러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결국 네가 뛰어 봤자 성노예지. 그런 판단이 기저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살면서 유일하게 그의 직감이 틀린 날이었고, 그건 곧바로 죽음의 냄새와 이어졌다. 이브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나마 방아쇠를 당겼다.
허공을 가르는 레일건 탄환에는, 어떠한 소음도 비명도 섞이지 않았다.
“테라에서는 이리 말하더군, 아디오스.”
넘버 8은 일어난 현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 복부에 손을 올리니 뜨거운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있어선 안 될 바람구멍이 그의 복부를 90%나 제거해버렸다. 내장마저 태워버린 탓에 그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대신, 헤블론 고아원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이겨낸 이브에게 유언을 남겼다.
“…코르디스에 있는 테라 타운에 찾아가라.”
**
폐허와 잔해들로 쑥대밭이 된 대지 위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광선검의 소음은 수차례 허공을 갈랐다. 허공만을 가른 것이 아니라 주변의 온갖 건물과 쓰레기, 구조물들을 전부 반으로 갈라 흉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러나 광선검이 유일하게 벨 수 없었던 건 알터와 그의 동료인 특수 처리된 38GW급 레일건이었다.
알터의 레일건 몸체를 이루는 금속은 플라즈마 검을 튕겨냈다. 그러나 알터의 총구 또한 절대로 서철현의 몸체에 닿지 않았다. 쏘아진 레일건 탄환 또한 허공만을 갈랐다. 백분의 일 초 간격으로 벌어지는 그들의 합은 그저 빛의 구와 부딪힐 때마다 쏘아져 나오는 탄환처럼 보였다.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는 쑥대밭이 되었고, 알터가 이브가 있던 클럽만은 피했기에 상황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지키는 것이 있어 빈 틈이 있어야 할 알터는 마치 뚫리지 않는 방패처럼 서철현의 광선검을 막아냈다.
“지킬 것이 있나 보군.”
“그래, 지킬 것이 있지.”
서철현은 극한까지 몸을 단련하고, 결국 로봇 3원칙에 위배되는 불법 기계의 몸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은하보안관 알터의 무력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알터는 커다란 건물을 지키면서도 호각세를 이루고 있었다. 서철현의 눈에는 알터의 움직임이 확률로 예측되었지만, 알터의 눈에서 또한 서철현의 움직임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깔끔히 알터가 인정한 순간, 서철현은 가지고 있던 모든 카드를 꺼내었다.
“지금이다!”
서철현이 데리고 왔던 열 명의 호위무사가 일제히 위장을 풀고 알터에게 달라붙었다. 하나하나가 불법으로 개조한 몸을 이용해 절정고수의 영역에 달한 이들이었다. 핵융합 회로로 달구어진 심장과 뻗어나가는 열 개의 검에서 쏟아지는 에너지의 흐름이 알터의 총에 닿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알터는 그 가운데서 중심축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든 광선검을 받아내고 흘려냈다. 사이로 스며든 서철현의 일격에도, 열 병의 급습에도 알터는 여유로웠다. 물론 그의 마음은 조급했지만, 천성이 무뚝뚝한 그의 표정에는 그 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오, 공은.”
알터는 양옆에서 달려든 검을 흘러당겨 위로 튕겨냈다. 그리고 총구는 정확히 그들의 심장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쏘아진 탄환은 그들의 심장을 정확히 맞추어 핵융합 회로의 이상을 일으켰으며, 반동을 이용해 올라온 총구는 그대로 그들의 미간에 꽂혀 뇌의 정지까지 이르렀다.
서철현이 알터의 틈을 보고 앞가슴을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알터는 방전된 두 개의 레일건을 뒤로 던져 호위무사들을 넘어트리고, 공중에서 떨어진 두 광선검을 들어 서철현의 검을 가로막았다.
일자로 내뻗은 서철현의 검은 분명 묵직했다. 호위무사의 검 따위는 치즈처럼 잘라낼 정도로 강한 일념을 담은 광선검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알터는 허공에서 휘돌던 광선검을 잡아 서철현의 광선검을 받아냈다. 쩡 울리는 진동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대단하시구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정제된 알터의 움직임은 끝이 아니었다. 검을 흘려낸 다음에 쌍검을 버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호선을 이루며 돌아온 레일건에 베터리 탄창을 끼우고, 양 팔을 벌려 쏘고, 교차하는 팔로 다시금 쏘았다. 사선에서 달려드는 네 명의 가슴과 미간에 정확히 총알이 꽂혔다.
삽시간에 여섯을 잡아내고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서철현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광선검을 퉁겨내고 다른 넷도 건카타의 기본 초식만으로 끝내버렸다. 정확히 방아쇠 네 방으로, 그들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서철현은 다른 호위무사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제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의 정체를 느꼈다. 피였다.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여기서 시간낭비 하기 싫은 사람이지.”
알터는 완전히 힘을 잃은 서철현의 미간에 방아쇠를 당겼다. 서철현은 풀썩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죽어도 죽어도 되살아날 것이다. 애초에, 저것은 본체가 아니었기에 그렇다. 인격마저 복사하는 복제인간, 그건 불문율로 그릇된 것이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일은 다 보셨습니까?”
“보았지.”
폐허 안쪽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의 입구에서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위풍당당히 걸어나왔다. 다소 걸음걸이가 어기적거리기는 했으나 얼굴에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 작품 후기 ==========
오늘 사실 못 쓸것 같았는데 어찌저찌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