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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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제 궤도 엘리베이터가 난기류 지역을 벗어났기에 안전벨트를 풀고 자유롭게 움직이셔도 괜찮습니다. 목적지인 스타포트까지는 1시간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브는 손장난을 치며 안전벨트를 한 채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불안감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알터는 VIP룸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서서히 대기가 희미해지기 시작하며 흔들림도 잦아들고, 창밖도 연한 붉은색의 대기가 심우주의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과거의 슬픈 기억을 최대한 잊고자, 이브는 벽면의 빈 공간을 응시하며 우주 엘리베이터의 다른 사고들을 떠올렸다.
우주 엘리베이터의 가장 큰 사고는 우주쓰레기가 부딪히는 일이다. 물론 인류는 우주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행성을 수만 개는 가지고 있지만 빈민 행성일수록 사고율은 높아진다. 그런 폭발사고조차도 스타 스트링스의 재벌들이 돈을 쏟아부으면 그런 사건을 없던 일처럼 되살릴 순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냥 사고로 끝난다.
그래봤자 사고율은 1% 미만에 불과하지만 이브는 왠지 그런 어쩔 수 없는 사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혹시, 그런 사고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들었다.
어차피 자신을 도와주러 온 존재들이 그 재벌들이 아닌가?
소녀는 피식 웃었다.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우주 엘리베이터는 사소한 결함으로 파괴될 만큼 약하게 만들어지지도 않으니까.
“언니.”
“응?”
“심심해.”
곁에 앉아있던 레아는 다리를 휘적거리며 굉장히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불만인지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이브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브만큼이나 긴 금발이 흘러내려 사이로 비치는 얼굴이 토실토실했다.
이브는 여전히 레아에 대해 지켜줘야 할 동생이자 딸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레아도 마찬가지로 이브를 지켜줘야 할 언니로 보고 있었고. 그러나 이브는 한 번도 레아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혹시 돌아가게 된다면, 레아가 자라나서 성인이 된다면 사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의 나래도 펼쳐졌다.
“어떻게 놀아줄까?”
“잠깐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
“응… 같이 갈까?”
“그래! 언니는 혼자 두면 위험하니까.”
레아는 벨트를 풀고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브도 마음을 완전히 놓고 레아와 함께 일어났다. 누군가가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나 습격하려 들어도 당연히 알터의 가방 안에 든 총으로 쏴 죽일 수 있을 거니까.
물론 은하의 무법자들이 온다면 모르겠지만, 일반인 정도라면 몸싸움이야 자신 있었다. 지금 입은 강화복과 이미 복용한 중력멀미 방지약 덕분에 몸 안의 나노머신들이 지랄하지 않아 몸이 심하게 달지도 않았다.
그저께 밤 마셨던 술에도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취해서 별일 없었던 걸 보면 아마 그 남자가 뱃속에 제 욕망을 털어 넣어준 영향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승객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바깥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창문이 있었다. 복도를 따라 빙 둘러진 좌석칸에는 일반석마저도 라임비의 상류층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비즈니스로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면 다른 컴퍼니의 행성으로 망명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긴 건지, 그저 무표정인 건지, 이브는 알 수 없는 눈동자에 리벳으로 잔뜩 둘러져 있는 둥근 유리창이 비쳤다. 고도가 상승하고 스타포트에 점점 다가갈수록 몇 안 되는 워프선이 출발하며 생기는 중력렌즈 효과가 은하계의 별빛을 엉망으로 왜곡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항로를 스타 웨이라고 부르고들 했다.
그렇게 창문을 보며 복도를 걷던 때였다.
“언니, 나 화장실.”
“갑자기 화장실은 왜?”
“…급해”
허벅지 안쪽을 비비적거리며 참는 모습에 이브는 붕어빵과 함께 콜라 한 캔을 다 비웠던 레아를 떠올렸다. 급할 만도 하겠지. 이브는 천장에 있는 화장실 표시등을 따라 빈 화장실에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비된 여자화장실은 칸마다 잠금장치로 봉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레아와 함께 들어오니, 몸에 살짝 부유감이 느껴졌다. 이브는 반사적으로 아랫도리를 꾹 눌렀다. 중력멀미 방지약이 제 역할을 하는 덕분에 그렇게까지 몸이 발정 나지는 않았다.
“언니, 이상한 느낌 들어.”
“일단 먼저 들어가서 잠금장치 닫고 있어.”
“언니도 위험한 거 아니야?”
“아니,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
빈칸은 하나, 이브의 행동을 급한 걸로 판단했는지 레아는 이브를 먼저 들여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브는 괜찮다며 레아를 먼저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벅지에 끈으로 묶어둔 거터에 걸린 35MW식 레일건을 꺼냈다.
“…함정이야.”
얼마 뒤, 여자화장실 입구가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화장실보다 눈부신 복도의 불빛을 뒤로하고 나타난 건… 상완근이 잔뜩 부풀려진 흑인이었다. 눈동자는 온통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그런 눈으로 이브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이브는 순식간에 몸을 긴장시키며 알터의 서류 가방을 뒤졌다.
그 흑인은 입술을 비틀며 짐승같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 드디어 찾았다. 내 좆집.”
욕망이 그득한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목소리도 지나치게 흥분된 상태여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이브는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으나 그게 루이스라는 것을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루이스, 여긴 무슨 일이지?”
소녀는 흉악한 외모에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사람의 말을 이해는 할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마약을 먹은 듯했다. 고전 상업영화의 녹색 괴물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원형은 남지 않고 끔찍했다. 이브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아, 당연히 널 따먹으려고 왔지.”
루이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코를 벌름벌름거리고, 무슨 냄새를 맡는지 호흡할 때마다 얼굴에 핏발이 하나씩 더 생겼다. 루이스는 잡아먹을 듯한 눈을 이브에게 고정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에선 ‘꺄아악! 남자가 왜 여길 들어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경고등이 켜졌다.
“역시 내가 아니면 안 되지? 발정난 암컷 만족시켜 주는 데는 이게 특효약이야. 그래, 다른 병신들은 생각하지 말고 나랑 살자.”
“무, 무슨 연유로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이거 좋아했잖아?”
미련이 그득한 표정으로 바지를 찢어 발기한 물건을 드러낸 루이스는 추악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는 남은 게 없었다. 레드호크의 속삭임이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다. 이브를 잡아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그 말은 얼마 없는 이성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의 동물적으로 발달해버린 감각은 여자화장실에서 나는 미미한 페로몬을 느끼고 있었다. 후각이 몇만 배는 강한 개처럼 약을 먹고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브의 몸에서 나는 어린 외모의 채취는, 다른 여자들이 내는 채취와는 달랐다. 훨씬 더 달고 상큼했다.
“…루이스.”
“그래, 나다. 이브. 다른 사람들이 너 쑤시는 거 지켜줄게, 그러니까 같이 살자.”
“개소리 지껄이지 마.”
소녀의 주먹은 꾹 쥔 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막 거터에서 꺼낸 35MW식 레일건이 있었다. 흥분한 루이스는 이브의 손에 들려있는 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할 최소한의 정신머리도 없었다. 그저, 이브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아득한 페로몬의 냄새에 이끌릴 뿐.
루이스는 두 걸음 남짓 남은 곳까지 성큼성큼 다가섰다. 이브는 과연 어떤 약을 먹었을지 생각했다. 아마 여러 가지가 혼합된 약물일 것이다. 몸 안쪽에서부터 체조직을 파괴시키는 약물이거나, 그에 준하는 물건이리라 판단했다.
육탄전으로 기절시키기엔 3마력으론 부족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브의 몸은 근육 하나 붙지 않고 생활을 위한 쓰임새 이상으로는 항상 익숙해지지도 않는 몸이었다. 어쩌면 약물복용한 루이스에겐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으르렁거리며 발을 구르고 달음질을 쳤다. 엘리베이터 전체가 쿨렁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브는 심장이 마구 뛰었으나 침착했다. 그저 총구를 루이스의 심장에 향했다. 삐이이 울리는 경보등이 그들을 붉게 비추었다.
“씨발년, 역시 넌 말로 해선 안 돼.”
루이스는 목소리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이브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겨 가차없이 루이스에게 총탄을 욱여넣었다. 동시에 왼쪽으로 몸을 틀어 회피했다. 레일건을 맞은 루이스는 달음질할 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 쪽으로 날아갔다. 외벽의 리벳이 뜯겨나가며 창문이 와장창 깨지면서 화장실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빠져나간다.
삐이이-
경고- 경고- 경고-
[긴급하게 안내말씀 드립니다. 궤도 엘리베이터 내의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벨트를 매어 주시길 바라며, 어떤 문제인지는 최대한 파악한 후 다시 안내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압이 급강하하고 응결된 공기가 안개처럼 서렸다. 엘리베이터가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이브는 강화복의 기압 조절 기능을 급하게 키고는, 검은 남자가 뚫고 날아간 구멍을 막을 만큼 커다란 판자를 찾았다. 이브는 침착하게 손 씻는 세면대를 뜯어서 곧바로 집어던져 막았다.
꽝, 금속음과 함께 침대가 구멍을 틀어막으며 기압 강하는 사라졌다. 쇳덩이로 된 세면대는 1기압 남짓한 강한 압력을 얼마간 버틸 수 있었다. 흔들림이 멈추고서야 이브는 한숨을 돌렸다. 화장실 칸에서 뛰쳐나온 레아가 놀란 얼굴로 이브에게 달려갔다.
“언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레아….”
레아를 껴안았다. 눈물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라임비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있었다. 레아는 영문을 모른 채 갑자기 들린 경고 소리에 놀랐지만, 이브가 무사히 나왔으니 되었다며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레드호크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야 말았다.
**
알터는 화물칸에서 나갈 수 없었다. 기계장치에는 문제가 없었고, 잠금장치를 내부에선 열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락이 걸려있었다.
이걸 적절한 해제방식 없이 물리적으로 풀었다간 이어진 복도에 있는 민간인들이 온통 우주의 진공으로 빨려 날아갈지도 몰랐다. 게다가 안전벨트를 메고 있어도, 대부분 산소 통제 기능이 없는 강화복을 입은 탓에 잠금장치를 깰 수 없었다.
스타포트의 카르고 도크와 우주 엘리베이터의 화물칸이 완벽하게 도킹되기 전까진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알터는 화물칸에 남아 레드호크가 남긴 화물칸에 남겨진 증거들을 조사했다.
이브에게는 언제든 위험할 때 동작하도록 지갑을 맡겨 둔 채였다. 알터는 보안관님이 적어도 다룰 수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은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판단력이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중간에 잠시 경보등이 울리는 일이 있었으나, 알터는 화물칸 잠금장치를 깨고 승객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줄 정도로 불안한 일을 벌이진 않았다.
스타포트에 도착하자 카르고 도크와 화물칸이 도킹된다. 극한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기압을 빼는 방식 덕택에, 알터는 스타포트에 도착하고 나서야 은하보안관의 간의 명찰을 보여주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터가 나오고 화물 담당 직원과 대화를 나눈 지 한시간 뒤. 스타포트 방송실에서 이브와 레아를 찾는 방송이 나온다.
“죄송합니다. 라임비 컴퍼니에서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그건 됐고, 13번 VIP룸에 있던 아이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게…”
대응하는 직원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응했다. 사실 그는 스타포트에서 항시 근무하던 라임비의 이사였다. 그는 한쪽 귀에 착용한 헤드폰에서 승객들의 안전 유무를 듣고는 알터에게 응답했다.
“…우주 엘리베이터 내에 다친 승객은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실종되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고요? 기압 경고등을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알터는 그의 말을 완벽히 믿지는 않았다. 얼마 뒤 이브와 레아가 방송을 듣고 무사히 나타났을 땐 한시름 놓았을 뿐이다. 이브는 알터를 보자마자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쥐고 알터의 복근을 두들겼다.
“어디 숨어있다 나타난 거냐?”
“…이브님, 함정에 걸렸었습니다.”
이브는 다소 산발된 은발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는 알터를 향해 빙긋 웃었다.
“보호한답시고 와선 나 두고 자꾸 혼자 다니지 마라.”
“네… 그래야지요.”
“알았으면 빨리 우주선으로 가자고. 코르디스까지는 일주일이면 가겠지.”
이브는 의연하게 잠시나마 울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라임비의 지긋지긋한 인연을 조금이나마 털어내고 새 걸음을 하는 장소에서 애새끼처럼 울 순 없었다.
인공적으로 형성된 스타포트의 낮은 중력 하에서 뒤돌아 익숙한 듯이 턱 턱 저중력 걸음을 걷는 이브의 뒷모습은 씩씩해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