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은하보안관 이브 3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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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나노머신들이 발하는 따스한 빛이 고루 쏟아지는 오후 시간.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17스타포트 동물원의 나무그늘 진 벤치는 무척 고요했다. 한없이 조용한 버블 안에서, 알터는 가느다란 어깨를 늘어트린 이브를 또렷이 응시했다.
알터는 이브의 속을 헤아릴 수 없다곤 자주 생각했지만, 오늘처럼 해석하기 힘든 날은 또 없었다. 마치 인생을 체념한 듯한 표정은,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는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 속에는, 무척이나 힘겨운 것과 싸우는 자그마한 인간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열자 알터는 긴장한 속마음을 숨겼다. 답을 만들어 내질 못한 것이다. 도와드린다고 해놓고는,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제 속도 소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알터는 자신이 이렇게 공감력이 높은 사람이었던가 놀랐다.
“지금 이 자리엔 너와 나 둘뿐이지.”
“…예, 그렇죠.”
“나도 너와 비슷한 선택일 것 같은데, 다 죽여버리고 되돌아갈 거야.”
“도와드릴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만은 않잖아. 내 동료는, 그리고 네 동료는 누가 있지? 결국 우리 둘만 고립되게 된다면, 레아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닌가?”
“명심하겠습니다.”
이브는 알터의 단답에 지친 듯 고개를 떨어트려 기대었다. 레아가 흘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브는 입가를 슬쩍 올리면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남자의 품에 고개를 대는 것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감각이 이브를 집어삼켰다.
“남자에게 안겨 제멋대로 안정감을 느껴버리는 이 쓰잘때기없는 몸뚱어리는 나의 것이야. 정말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선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단호한 뜻과는 달리 알터는 마치 연인에게 건네듯 다정하게 말했다. 알터도 레아의 앞에서 연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떨어트려야 하는데 떨어트릴 수 없는 가장 큰 변수. 레아를 떨어트리는 순간 가까스로 버티는 이브가 망가진다.
알터는 자신의 지식이 이처럼 쓸모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떠올렸다. 차라리 이딴 지식이 없었다면 레아를 이브에게서 떨어트리고 바보같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금처럼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브를 떨어트리고 나노머신이 어떻게 해결해 주길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정보를 쥐고 결국에는 선택하지 못한 채로 전전긍긍하는 것 또한 알터다웠다.
이브는 곁눈질로 우수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남성적인 선을 응시하며, 고개를 알터의 무릎에 떨어트리고 알터를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면 참 거대한 부하였다. 이 사람의 등 뒤에 있으면, 지금처럼 복잡한 일 따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지…
…포기하면 편해.
“저에게도 남은 인맥과 힘이 있습니다. 보안관님께서 가진 것이 아니더라도 제힘만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알터는 깊은 감정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이브를 불러 세웠다. 알터의 카드는 이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제가 기른 부관들도 있었고, 수석 은하보안관이 되며 도와줄 인맥이란 온 은하에 널려 있었다. 애초에 경외적인 자산을 지닐 수 있는 기반은 인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알터는 이브의 앞에 서면 자기증명을 해내고 싶었다. 항상 태산같이 그림자를 드리우던 상관에게 이제 자신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심의식 속에선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선지 말이 술술 나왔다.
“그렇다면 그때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너뿐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너 방금, 고백하는 사람 같았다.”
이브는 키득키득 웃었다. 이내 웃음소리는 줄어들고 다시 이브의 표정은 슬픔으로 젖어갔다. 이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감정 변화가 심했다. 이브의 작은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내 곁을 지켜 줘.”
“잠시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고 나면 돌아올까? 모든 것이 사라질까? 그래, 자고 나면 모든 걸 잊게 되겠지. 잊고 싶어. 이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의 나도 나거든.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날 이렇게 만든 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라고.”
비명처럼 내뱉은 이브의 목소리는 발버둥 칠수록 빠져드는 늪지대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녀 같았다. 안쓰러운데도 알터는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손을 뻗는 순간, 퀘이사는 완전히 구렁텅이에 빨려 들어가고, 자신마저 그곳에 빠져들 것 같았다.
소녀가 말한 대로 작금의 상황은 외통수였다. 알터는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려 두터운 손을 얹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었다. 진짜로 이 손을 대어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없었다. 손을 내뻗는 순간, 구렁텅이 속의 소녀와 함께 진짜로 선을 넘어버릴 것 같았다. 제 취향도 아닌 소녀를 안아버릴 것만 같았다.
알터는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버블 밖, 유리벽 너머에서 암수로 보이는 펭귄 두 마리가 무리에서 따로 떨어진 채 걷고 있었다. 보낼 무리생활을 하는 펭귄 두 마리가 무척 다정해 보였다. 제 무릎에 쓰러져 눈꺼풀을 가라앉힌 소녀의 시선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던 레아는 어디선가 솜사탕을 사 들고 촐랑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마 마르테르트의 직원이기에 직접 사지 않아도 받았을 것이다.
한없이 순수하게 웃는 가면을 쓴 소악마, 알터의 눈에는 레아의 걸음걸이가 그 어떤 암흑가의 두목보다도 묵직해 보였다.
“언니~! 아저씨!”
알터는 버블을 거두었다.
“그래, 레아야. 다 구경했니?”
그리고, 이전처럼 레아의 앞에서 한없이 친절한 아저씨를 연기했다.
**
일행은 동물원을 돌고는 놀이공원으로는 가지 않았다. 레아가 이브는 공포에 약하다며 극구 반대했던 탓이다. 알터는 이브에게 직접 그걸 묻고 싶었으나 이브는 들은 체 만 체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알터는 이브가 있지도 않는 귀신이나 좀비 같은 것에 공포심을 느낀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공포를 느낀다면 마피아들 사이에 들어가 혈혈단신으로 싸웠던 과거는 누구인가?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가 마피아들을 반파내는 사람이 공포에 약할 리가 없었다. 아마 레아가 공포에 약하다고 핑계를 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포심으로 농담따먹기를 하기엔 이브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버블 속에 빠졌다 나온 시간부터 쭉 저랬다. 허공을 보는 듯,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저 알터의 곁에서 따라오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 레아가 부르면 상냥하게 대답해주었지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돌아갈 시간입니다. 엘리베이터로 가시지요.”
“조금 더 보고 싶은데… 저기 칠면조도 보고 싶은데….”
“밤이니까 이제 다들 자러 갈 시간이란다.”
“하루는 30시간이잖아요! 오후 7시면 아직 해가 쨍쨍해야 하는데…?”
코르디스는 인간의 생체주기에 맞춰 하루가 26시간이다. 골디락스 존에 있는 아무 행성을 잡아 테라포밍하면서, 자전축을 조절하여 26시간으로 만든 탓이다. 일조량을 조절해 주는 기상나노머신들은 서서히 빛을 줄이며 노을을 드리웠다. 어둠속에 타는 촛불같이 붉은 불빛이 일행을 내리쬐었다. 창밖의 푸른 구체의 선 너머로도 푸른 주계열성이 고개를 감추고 있었다.
레아는 갑자기 줄어든 시간에 적응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말 동물들이 제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니 레아도 더 보고 싶다고 때 쓰다가 비어가는 동물원을 보고는 포기했다.
“살펴 가십시오.”
출구 안내원의 말과 함께 꿈만 같던 테마파크의 일상은 로비에 나온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레아는 못내 아쉬운 듯 입을 부루퉁하게 떴다.
“다음에도 보러 오자.”
“역시 언니밖에 없어.”
“그렇지?”
이브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자 미소지었다. 해가 지니 자연스레 졸음이 쏟아지고 시가가 끌렸다. 그러나 시가조차 피울 수 없는 몸에 무엇하랴.
알터의 예약에 따라 인공중력이 끊이지 않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통해 대기권으로 내려가면서도, 이브의 감정은 제 궤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의 부관들도, 알터도, 레아도. 자신이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할 능력도 안 되는 주변인들이 결국에는 어떤 한 지점으로 의견이 수렴하는 것 같아서.
이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약한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데…
왠지, 루드를 만나면 알량한 정보를 얻는 대신, 알터가 자신에게 돌아온 사태의 종말을 맛보게 될 것만 같았다.
**
코르디스 102지구의 테라 타운은 은은한 스모그가 가득했으며, 가로등 불빛은 흐릿했다. 돌바닥이 듬성듬성 깔려 있었으며 오래된 벽돌로 지은 저택이 양옆으로 늘어져 굉장히 오래된 도시처럼 느껴졌다. 낡은 안드로이드 메이드, 턱시도에 우산 든 남성,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용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산업혁명 시기의 런던을 방불케 하는 흐릿한 스모그는 담배연기처럼 테라 타운 근처에 뿌옇게 서려 있었다. 언뜻 보기엔 무척 더러운 공기처럼 보이지만, 기상나노머신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현상이기에 마시기에는 한없이 깨끗한 공기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턱시도를 차려입은 곱슬머리의 사내가 손을 바르르 떨며 담뱃재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폐부와 핏줄을 전부 니코틴으로 가득가득 채우지 않으면 도저히 진정되지 않을 일이기도 했으니까.
“노상 흡연은 하지 말랬지.”
담배를 잡은 검은 가죽장갑의 손목 부위에는 크로노스라는 명칭이 은실로 짜여있었다. 막 씻은 머리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기상나노머신들이 그의 머리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다 주었다. 그는 담배를 아무 대나 버리고 근처에 있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의 마호가니 표지판에는 숏벅스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의 손에는 인화된 사진이 들려 있었다. 새하얀 은발 소녀의 모습이었다. 활짝 웃는 사진 속의 소녀는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듯했다. 턱시도 사내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스로 찾아오시리라곤,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턱시도 사내의 앞에서 카페 주인이 반겨주었다. 백인에 40대를 조금 넘은 중년의 대머리 아저씨였다. 물론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불문율이다. 코르디스에 정착자들이 발을 내디딘 시기부터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 만큼 아주 오래된 인간 중 하나였으니까.
“커피. 하나.”
런던인들에게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는 없다. 쓰디쓴 커피의 액기스만 담은 농후한 향 그득한 에스프레소뿐. 카페 주인은 진중한 표정으로 털 가득한 팔을 들어 정성스레 커피를 갈아 볶았다. 그리고 미리 갈아둔 커피를 내려서 턱시도 사내에게 내밀었다.
그 사이에 턱시도의 머리 물기가 전부 말라버렸다. 커피잔을 받은 턱시도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잔을 잡아 온기를 느꼈다. 지금 먹기엔 다소 뜨거웠다.
“자네가 다락방에서 나왔다면, 어딘가에서 일이 터졌다는 거겠지.”
“소풍입니다.”
카페 주인은 턱시도 사내의 소풍이 굉장한 일일 거라고 직감했다. 항상 아리송한 말만 하는 그가 이다지도 수다스럽게 대화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런던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감탄사를 뽐냈다.
“흠… 오, 아…. 좋군. 소풍이라.”
“네, 소풍이죠.”
“다락방에 처박혀서 컴퓨터나 들여다보는 것보단 가끔은 나와서 바람도 좀 쐐.”
“칠면조는 언제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잔소리 그만 좀 하쇼.’라는 뜻이다. 500년째 카페를 운영해온 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턱시도 사내는 ‘그럼 그만 할 테니 가보게나.’라는 행동을 읽고는 카페에서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제 테블릿을 펼쳐 놓고는 뭔가를 한참 두들겼다.
카페 주인은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곁눈질로 턱시도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는 한참을 이 카페에서 기다렸다. 그저께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아마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이틀 내에 나타나겠지.
턱시도 사내의 이름은 루드 크로노스.
한때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그가 이제 은하에 남은 유일한 숏벅스 카페로 찾아왔을 때면 항상 재미있는 일이 터졌으니까. 그것도 은하 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