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73)

제1화 여행의 시작 

잠에서 깨어, 나는 이 세계에서의 이주째의 아침을 맞이했다. 얇은 천막을 통해서 부드러운 햇빛이 들어왔다. 

왼쪽 팔에서 저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유에라가 내 왼팔을 베고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드문 일이지만 오늘은 내가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 

"으응..., 응......" 

유에라가 뒤척이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이쪽을 향한다. 새하얀 속옷의 긴 매듭이 풀리며 풍만한 가슴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유에라와 만났던 것도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온 이주일 전. 유에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자연스레 호감이 생기며 내 쪽에서 유에라에게 고백했고, 지금은 사귀는중이다. 

"응......" 

나도 몸을 유에라 쪽으로 향하고 오른 팔로 살짝 유에라의 몸을 안았다. 유에라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사람의 체온이 섞여서 하나로 녹아들어간다. 

나는 잠깐 동안 아침의 기분 좋은 졸음을 즐기기로 했다. 유에라가 일어나면 오늘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어둠의 여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자유의 나라'를 목표로 한, 나와 유에라의 여행을. 

"......" 

바람이 후웅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가운데 나는 턱 하고 가도를 걷는 발걸음을 멈췄다. 밀밭 한복판에서 얇은 코트 자락이 펄럭펄럭 퍼덕였다. 

"......" 

곧게 뻗은 가도의 끝에 보이는 언덕 위에 수백개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소규모 도시라 해도 좋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코트의 주머니를 뒤졌지만, 찌그러진 담배갑만 느껴질 뿐이었다. 

"저게 오늘의 목적지구나" 

"......응" 

유에라도 옆에서 시선을 전방으로 향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생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다. 여성스러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다. 

"뭐랄까, '도시'라는 느낌이네. 나 이 세계의 도시는 처음이야" 

"그렇구나." 

유에라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로 답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 소환되고 나서 아직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저 도시, 네가 보기엔 어떤가? 네가 있던 세계의 거리와는 뭔가 다른가?"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도시는 분명 현대의 도시와는 달랐다. 낮은 석조 성벽이 언덕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어, 마치 중세의 성채 같았다. 

"......아직 가까이서 본 것이 아니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아마 굉장히 다를거 같아" 

나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유에라에게 말했다. 이런 도시가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유에라에게 내가 아는 현대의 도시를 짧은 말로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분명 길고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가" 

유에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역시 유에라는 키가 꽤 크다. 눈높이가 나와 그다지 차이나지 않아 정말 대화하기가 쉬웠다. 

"후훗...... 그러고보니 너의 고향 이야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었구나" 

"읏......" 

유에라가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줬다. '실수다.' 나는 뺨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응......? 왜 그런가? 얼굴이 빨갛다" 

"......아무것도 아니야, 유에라" 

유에라는 보이시한 말투를 쓰면서 평소에는 쿨-한 무표정이다. 표정의 변화가 부족하다고 할까. 그래서 가끔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 나도 모르게 두근 해버린다.

"유에라는 언제나 귀엽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 그런가" 

나는 평소에 생각하던걸 전했다. '유에라는 정말 귀여운 여자아이구나' 지금도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데 아주 나이스(nice)했다. 

"...... 그게 말이야, 나의 고향에 대한 얘기는 짧게 설명하기 힘들어" 

"그런가......" 

유에라는 좀 아쉬운 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 도시에 도착하면 천천히 듣도록 하겠다" 

"그렇네, 유에라" 

나와 유에라는 언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넓은 평지 특유의 '가까워 보이지만 먼 거리'를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다. 한 시간쯤만 걸어가면 도시에 도착할 듯 했다. 

도시 입구는 조그만 성문으로 되어 있었다. 좌우로 열린 문 옆에 두 남자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얇은 금속제 갑옷을 몸에 걸친 것으로 보아 이 마을을 지키는 위병인것 같았다. 

"......" 

나는 긴장하면서 위병의 앞을 지나갔다. 이들은 허리에 칼 같은걸 차고 있어 어쩐지 섬뜩하면서도 어색하게 보였다. '나는 군대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 

위병은 빤히 유에라를 보았다. 하지만 위험 인물을 체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호색한 아저씨의 시선으로 보였다. 앞으로 끌어올려진 거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흥......" 

유에라는 그런 시선이 익숙했는지 당당하게 성문을 통과했다. 다만 좀 불만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위병들을 홱하고 외면했다. 

"......유에라, 보통 이런 도시에 들어갈 때는 뭔가 있지 않아? 수상한 놈이 도시에 들어가지 않도록, 검사라든지......" 

짧은 터널 같은 성문을 빠져 나오며 나는 유에라에게 물었다. 

"응......? 아, 여기는 《상업의 나라》 소속의 도시이다. 그래서 여행자의 이동이 자유인 것이지. 어지간하면 위병이 불러세우지 않는다." 

"흐응......" 

내가 가진 중세의 지식과는 조금 달랐다. 도시라서 그런 것 같았다. 유동 인구가 적은 마을이였다면 좀 더 귀찮았을것 같았다.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소환됐을 때, 나는 어떤 인물과 만났다. 그는 거의 본적 없을 정도의 매우 친절한 남자였는데, 나에게 이 세계에 대한 여러 것들을 가르쳐줬었다. 

'뭐, 나중에 알고보니 마냥 친절하기만한 놈은 아니었지만......' 

그 녀석한테 배운 것을 떠올린다. 

이 세계의 대륙은 내 원래 세계와는 달리 대륙이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의 대륙에 대표적인 일곱개의 나라와 몇 안되는 소국가가 존재한다. 마치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의 칠웅(七雄)처럼 말이다. 

나에게 이 세계는 비현실적인 세계이기도 했다. 정신나간 말같지만, 이 세계에는 신이 진짜로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일곱 나라도 각각 신앙하는 신과 국민의 특성에 따른 국명을 붙이고 있다. 

대륙의 서쪽을 지배하고 있는 대국이《법의 나라》이다. 빛의 신을 모시며 법과 질서, 정의등을 중히 여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라다. 방문한 적은 없지만 말만 듣고도 싫어졌다. 

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는 지식의 신을 모시는《마법의 나라》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지식 하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은 이미지였지만, 나는 언젠가 유에라와 함께 방문할지도 모른다. 

동쪽에 있는 것이 암흑의 신을 모시는《자유의 나라》다. 내 원래 세계의 자유라는 의미와는 달리 이 세계에서 자유는 상당히 욕망에 충실한 의미 같았다.

《자유의 나라》의 북쪽, 그러니까 북동쪽의 작은 나라가 사랑의 여신을 신앙하는《평화의 나라》이다. 

대륙의 북쪽에 있는 나라가 전쟁의 신을 모시는《전쟁의 나라》, 중앙의 북쪽에 있는 것이 창조의 신을 모시는《공업의 나라》, 대륙 중앙의 남쪽에 있는 것이 행운의 신을 모시는《상업의 나라》이다. 

"......그럼, 통행세 같은 것을 거두는 나라도 있어?" 

"《법의 나라》는 도시 간의 이동만으로도 통행세가 있다. 《상업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국경을 넘을 때만 통행세를 낸다. 가끔 위병의 검사가 유난히 엄격한 나라들과 도시도 있다" 

유에라는 마지막 말을 하며 좀 진절머리가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위병의 검사에 안좋은 기억이라도 있는걸까? 

"적어도 여기는 이동이 자유롭다는거네. 딱 봐도《상업의 나라》라는 느낌이야" 

통행세를 없애고 출입을 쉽게해서, 많은 상인의 이동으로, 상업의 활성화를 노리고 있겠지.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것 같다. 나는 이래뵈도 경제 학과를 졸업했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됐다. 이제, 그만 가자고" 

유에라는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홱하고 반대쪽으로 돌렸다. 입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성문 앞에서 쭉 이어지는 거리를 따라 걸어가니 한눈에 봐도 활기 찬 시장이 펼쳐졌다. 이 도시 자체는 작은 편인 것 같았지만, 이 지방의 중심 도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에라, 어떻게할까? 좀 이르긴 하지만, 저녁을 먹을까?" 

"......그러는게 좋겠다" 

유에라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서 잠시 생각했다. 

"일단......먼저 모험가 길드를 찾아 지도를 확인하는게 좋겠다. 나도 이 도시는 처음 왔봤으니" 

유에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녁이 되기 직전의 미묘한 시간대. 시장은 오늘의 마지막의 활기를 띠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유에라의 말대로 할게" 

나는 이 세계의 세세한 지리 같은 것도 모르고 이 세계가 움직이는 시스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이런 영역은 여행에 익숙한 유에라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겠다" 

유에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하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있던 세계에는 없는 모험가 길드라는 말에 신기해 하면서 유에라와 함께 북적거리는 번화가 안쪽으로 나아갔다. 

"우와......" 

복잡한 거리를 걸으며 흥미로운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속제 갑옷을 몸에 걸친 엄청난 덩치의 전사 스타일의 모험가가 어깻바람을 일으키며 걸어가는것을 봤을때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유에라, 저기. 수인이다" 

"후훗......그렇구나." 

내 목소리에 유에라가 약간 미소짓는다. 멋진 셔츠와 스커트를 걸친 머리에 고양이 귀가 달린 누나가 장을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이 못박혔다. 

"네가 있던 세계에는 인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래, 엘프도, 드워프도, 수인도, 거기에 용인도 없었어" 

이 세계는 RPG스타일의 이세계다. 이 세상에서 유에라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내 미래라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이 좋아지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 있는데, 문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부분 유에라 때문이군.' 물론 나를 슬쩍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는 사람도 조금은 있었다. 

아마 나를 힐끔 힐끔 보는 것은 입고 있는 옷이 이곳에서는 볼수 없는 희한한 패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고급지고 진한 남색 청바지는 이 세상에 없었다. '외모도 괜찮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나의 복장은 이 세상에 소환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데 원래 있던 세계에서 산 사복 패션이였다. 부드러운 모직셔츠에 짙은 녹색빛의 얇은 털코트, 그리고 갈색의 헌팅 부츠를 신고 있었다. 

"......" 

내 옷은 주변 사람들과 확연하게 다른 디자인이였다. 그리나 어쨌든 그들보다 품질이 좋고 훌륭하게 보였다. 실제로도 고가 브랜드의 옷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옆에서 걷고있는 유에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 

놀랍게도 이 세계에도 일본옷이 존재했다. 유에라는 아름답고 비싸보이는 푸른빛의 일본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발에는 *편상화를 신고 있었다. 

유에라의 직업은 검사로 허리에는 긴 칼과 *와키 자시를 차고 있었다. 나는 유에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그 유명한 에도 막부 시대의 도지사의 이미지가 머리에 팍하고 떠올랐었다. 

[*편상화: 목이 단화보다는 길고 장화보다 짧은 구두. 신등에서부터 목까지 긴 끈으로 얽어 매게 되어있음.] 

[*와키 자시: 허리에 차는 호신용의 작은 칼(약 50cm)] 

"......" 

유에라가 주목 받는 것은 일본옷이 드물기 때문이 아니였고, 우리의 옷차림이 제각각이여서도 아니였다. 그런 일행들은 주변에 널렸다. 이유는 참 단순하게, 유에라가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였다. 

유에라의 머리는 매우 길다. 먹물같이 새까만 머리가 엉덩이에 끝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촉촉하면서 부드러웠고 만지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앞머리는 눈 위까지만 내려와 가지런했다. 

조금 위로 치켜올라갔지만 의지가 강해보이는 큰 눈. 뚜렷한 쌍꺼풀에 긴 속눈썹. 반듯한 코에 귀여운 연분홍색의 입술.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뭐, 인형치고는 얼굴이 꽤 작고 키가 너무 큰데다가, 어깨는 굉장히 좁은데도 가슴이 매우 컷다. 작은 멜론 같은 가슴이 걸을 때마다 흔들흔들 거리고 있었다. 

"......" 

나는 주변의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남자라는 생물은 예쁜 여자와 함께 걸어다니면 굉장히 자랑스러운 기분이 되어버린다. 

"......" 

유에라는 주목받는 것에 익숙했다. 차가운 얼굴로 남자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분명 어린 시절부터 미소녀여서 타인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는게 분명했다. 

"유에라는 길에서도 시선을 끄네" 

늠름한 장신의 미녀가 씩씩하게 걷는 모습은 정말 눈에 띄였다. 게다가 이 세계의 사람은 문화 자체가 그런지 거리낌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 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유에라는 당연한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유에라는 자신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뛰어난 장점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유에라의 당당한 점이 좋았다. 

나는 자각 없는 미소녀나 꽃미남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겸손하면서도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놈들은 분명 얼빠진 놈들 뿐일거다. 

"얼굴이라면 너도......" 

유에라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꽤, 잘생겼다......" 

유에라는 고개를 수그리면서 조금 수줍게 말했다. 고마운 말을 해준다. 사실 잘 믿어지진 않지만, 유에라는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였다고 말했었다. 

아마 나를 처음 봤을 때 번개에 맞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깊은 사랑에 빠진 듯 했다. 

"......" 

나도 유에라와 만났을 때의 일은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처절했던 경험이었다. 정확히는 유에라와 또다른 한 사람을 만났을 때 말이였지만......그때 이세계에 소환된 놀라움 같은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고마워, 유에라" 

나는 웃으면서 유에라에게 답했다. 유에라 같은 미인이 좋아한다니 그리 싫은 기분은 아니였다. 오히려 굉장히 기뻤다. 내가 이런 모델 같은 미인과 사귈 확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첫 만남은 좀 트라우마네.'

"......" 

유에라는 상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유에라는 나에게 특별한 여자다. 이런 식으로 나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다. 

"후우......" 

하지만, 나는 유에라의 흔들리는 가슴을 보면서 몰래 한숨을 토했다. 우리들의 탓은 아니였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사정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는 진실된 사랑을 할 수가 없었다. 

" 좋구나..이런 도시" 

유에라와 시장 거리를 걸으며 내가 중얼거였다. 휘- 주변 건물에 시선을 돌린다. 건물들은 모두 돌로 지어져 유럽의 오래된 시내 같은 분위기가 났다. 

대로의 건물 앞 공터에는 수많은 노점이 즐비하여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야채나 과일이 산처럼 쌓여 있거나, 등뼈나 갈비가 달린 고기 덩어리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볼 수도 없는 진풍경이었다. 외국 시장 같지만, 행상인이 아무렇지 않게 무기를 가게 앞에 늘어놓는 것부터 달랐다. 나는 그것들에 정신이 팔린 채 구경했다. 

"이봐, 길 좀 묻지. 이 도시의 모험가 길드는 어디에 있지?" 

나는 유에라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유에라는 멈춰서서 현지 청년에게 길을 묻고 있었다. 유에라는 굉장한 행동력이 있었다. 

"엣......? 네......그러니까…" 

청년은 당황하고 있었다. 유에라처럼 예쁜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건거니 굉장히 놀란 것이 분명했다. 

"모험가 길드입니까......어......이쪽 길로 쭉 직진하다가......처음으로 나오는 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보입니다......" 

청년은 말을 더듬으며 유에라에게 답했다. 

"그런가. 실례했다." 

유에라는 청년에게 인사를 하고 이쪽으로 걸어 왔다. 

"길드의 위치를 알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에 섰다. 유에라는 꽤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유에라" 

"신경 쓰지 마라. 우릴 위한거니. 자, 출발하지" 

유에라의 재촉을 들으며, 우리는 청년에게서 들은 대로 나아갔다. 

"......" 

잠깐 뒤돌아보았는데 청년은 아직도 우리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에라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건물이구나" 

모험가 길드는 바로 발견되었다. 3층의 석조 빌라 같은 건물이었다. 

"유에라, 저것은......?" 

나는 길드의 문 위의 간판을 가리켰다. 서양의 검과 마법사의 지팡이가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것은 모험가 길드의 상징이다. 어느 모험가 길드에 가던 그 간판이 걸려있다." 

"흐음..., 그렇구나" 

유에라가 가르쳐 주었다. 모험가 길드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쉬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모험가 길드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정면에는 L자형의 큰 카운터가 자리하고 있었고 나머지의 넓은 공간에는 많은 테이블들이 자리하고 있어 여러 모험가들이 편히 쉬고 있었다.

모험가 길드 겸 술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잘 보면 카운터 근처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여관도 겸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RPG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모험가 길드구나. 

카운터 안쪽 술 진열장에는 술병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직원 누님이 잔을 닦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독도 약도 들지 않을 것 같은 영감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실례하지. 잠깐 괜찮겠는가" 

"......" 

유에라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영감에게 대화를 걸었지만 영감은 대꾸하지 않았다. 

"《공업의 나라》까지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다" 

"......" 

유에라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영감은 이야기를 듣고선, 카운터 뒤쪽의 선반에서 말 없이 지도를 꺼냈다. 

"......은화 두장" 

영감이 도면을 카운터 위에 홱 하고 던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기분 나쁜 영감이라 생각했다.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장인가......신경 쓰지 마라" 

유에라는 가격을 확인하고 바로 돈을 지불했다. 마지막 말은 나를 향한 말이다. 아마도 나는 지금 굉장히 짜증나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계의 화폐는 동전 뿐이다. 동화, 은화, 백금화, 금화 4개밖에 없다. 지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하기도 쉬웠고, 나는 세세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원래 세계와 마찬가지로 십진법이 채용되고 있어 동화 열개가 상위의 화페인 은화 한개에 해당되었다. 100원짜리 열개가 1000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물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편의상 동화=100원, 은화=1000원, 백금화=10000원, 금화=100000원 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지도는 대략 20000원 쯤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지도를 보고 갈까?" 

"그러지." 

유에라는 내 제안을 수긍해 주었다. 둘이서 음료를 주문하고 빈 테이블에 적당히 앉았다. 

"헤에......"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지도는 등고선과 기호가 적혀 있는 꽤 상세한 것이었다. 원래 세계와는 다르지만 이 세계도 마법 기술이 발달해서 이런 식의 정밀한 지도도 유통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이 도시에 있다. 이 도시에서 《공업의 나라》에 갈 것이다" 

"응" 

유에라는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내 얼굴을 슬쩍 보았다. 괜찮아, 유에라. 정보의 전달은 제대로 되고 있다. 

"《자유의 나라》는 멀구나." 

"그렇다." 

나랑 유에라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동쪽 끝의 《자유의 나라》를 목표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상업의 나라》에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으면《공업의 나라》, 다시 동쪽으로 국경을 넘으면《자유의 나라》에 이른다. 

"어느 쪽의 가도를 가느냐가 문제인데......" 

유에라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도 몸을 내밀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① 이 도시에서 곧장 동쪽으로 움직이는 북부의 루트 

② 이 도시에서 남하해 큰 도시로 가고, 그 큰 도시에서 대가도를 동진(東進)하는 남부의 루트 

이 두가지 경로가 있었다. 

"북부의 루트는?" 

나는 유에라에게 물어봤다. 

"이쪽의 길는 마을이 적은 것 같다. 게다가 등고선이 혼잡하다. 산길이라 기복이 심하고 야영이 많아질 수도 있다." 

유에라의 대답은 지도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할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 남부의 루트는?" 

"보통은 그쪽 대가도를 다니겠지. 역참 도시도 많고, 무엇보다 치안이 좋다." 

몰랐던 정보였다. 이 세계에도 역참 도시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 그렇구나...... 그럼 남부의 경로로 할까?" 

"아니, 나는 북부의 루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본래 나는 너와 만나기 이전부터 북부의 루트로 여행하려고 했었다" 

신기하네. 유에라가 좀 엉뚱한 말을 했다. 유에라는 가장 효율적인 길을 택할거 같았는데......

"유에라, 어째서야?" 

"나는 그 길을 통해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 일도 하나의 경험이다. 거기다 모르는 장소를 여행하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울거 같지 않나?" 

"......유에라 말 대로야. 그 기분은 나도 잘 알고 있지" 

이 세계에 소환되기 전에도 나는 자주 혼자 여행을 다녔다. 유에라의 말대로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것은 정말 즐겁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선한 것이니까. 

"역시 그러는게 좋겠지?" 

유에라는 아무래도 북부의 루트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에라, 이 세계는 내게 낯선 곳이야, 이왕이면 나에겐 안전한 여행쪽이 더 좋지 않을까?"

"치안도 더 나쁠거 같고......"

"산적 따위, 나의 적수가 아니다" 

유에라는 그러면서 칼자루를 툭툭 두드렸다. 유에라의 말대로였다. 

유에라는 굉장히 귀엽지만, 실은 인간이 아니다. 용인이라 불리는 이 세계 특유의 희소 종족이였다. 겉보기는 인간과 다르지 않지만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무서운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훗......그리고 지금은 너도 함께이니까." 

유에라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조금 생각해 보았다. 하나의 작은 선택일 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으로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북부의 루트에서도 치명적인 위험은 적어 보였다. 뭔가 재미있는 만남이 있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유에라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유에라의 말대로 북부의 루트로 하자" 

"괜찮은건가?" 

유에라의 표정이 확하고 밝아졌다. 유에라는 생각 이상으로 기뻐했다. 

"괜찮아. 어짜피 나에겐 둘다 안가본 길이고, 기왕이면 유에라가 좋아하는 쪽이 좋지" 

"미안하구만" 

유에라는 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곧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걸로 그 녀석과 재회할 확률은 거의 없게 되니까" 

유에라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그렇네" 

나는 모두 이해했다. 유에라는 그 녀석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전에 그녀석은 우리와 헤어져 남쪽의 대가도를 통해 《공업의 나라》의 수도로 향했다. 

나는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에라가 조금도 생각하기 싫어하는 경박하고 강압적인 그녀석의 얼굴......분명 지금도 이 세계의 외로운 남자을 위해 장사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칸타 로우. 

"기다리셨죠오......?" 

길드의 누님이 나른하게 말하면서 음료를 가져왔다. 주문하고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이 누님은 자기 업무에 대해서 너무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누님에게 음료를 두 잔 받았다. 어려운 이야기는 끝. 이제는 유에라와 쉴 시간이다. 

"미안해요오"

"유에라" 

나는 유에라에게 호박빛의 술이 담긴 잔을 건넸다. 유에라는 이런 강한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너의 고향은 어떤 곳이야?" 

유에라는 곧장 내 고향 이야기를 물어봤다. 나와 유에라는 이렇게 서로의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내가 있던 세계는 말이야......" 

나는 적당히 주문한 칵테일을 살짝 맛보며 말했다. 

"네가 있던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건 '너의 고향' 이야기다"

유에라는 호박색의 액체를 꿀꺽 마신다. 아직까지는 잘 마시고 있었지만, 마시는 페이스가 좀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질문의 내용은 곧바로 정정됐다. 

"그럼 내가 태어난 집의 주변 지역의 이야기를 좀 할게" 

나는 술을 홀짝홀짝 맛보며 말했다. 술은 학생 때 토할 때까지 마셔봤고, 사회 생활도 2년간 경험했다. 그래서 술은 나름대로 마실 줄 알았다. 

하지만 마실 수 있을 뿐, 별로 강하지는 않았다. 금방 취하고 쉽게 기분이 고조되지만, 그래서 더욱 다음날 심한 숙취가 온다. 그 고통은 피하고 싶었다. 

이전에 숙취로 한심한 모습을 유에라에게 보여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유에라와 사귀는 계기가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다. 

"아아, 나는 너에 대한 걸 더욱 알고 싶다" 

유에라가 드물게 솔직한 말을 했다. 술 덕분인 걸까. 왠지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겨울이되면 눈이 내려" 

유에라는 천천히 끄덕이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름엔 습기가 적고 시원하지만, 겨울엔 엄청 눈이 쌓여. 3m까지도 쌓인다니까" 

신기하게도 이 세계의 단위는 내가 있던 세계의 단위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도 조금 취기가 올라왔다. 

"그거 큰일이군" 

"응, 큰일이지. 하지만 국가가 잘 돌아가니까" 

"국가?" 

"국가의 행정 서비스가 제대로 되어있지. 도로의 눈을 치운다거나" 

"그건 대단하군" 

유에라가 두잔째의 음료를 시키는 김에 음식을 주문했다. 

"그래서 눈이 오는 나라여서 곰이 서식하는데......" 

"그렇겠지" 

"나는 곰을 쏴 보고 싶어서, 사냥을 시작 한거야" 

"허......그랬던가......" 

"......응"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곰은 쏴본 건가?" 

"맞혔지. 비록 이년이나 걸렸지만, 홀로 거물을 잡았지" 

"후훗......그거 좋았겠군" 

"꿈이 이뤄진거지" 

"그러나 이년이라니,, 대단하군. 어떤 상황이었어?" 

"사냥개로 몰던 큰 곰이 산비탈 위에서 나를 향해서 덮쳐왔어. 위험한 상황이였지. 나는 아슬아슬한 곳까지 끌어들일 생각으로 옆에 서있는 나무를 방패 삼아......" 

그렇게 나는 그때의 일을 유에라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에라는 기쁘게 들어 줬다.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알았다" 

유에라는 뭔가를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유에라?" 

"그게 너의 눈동자 색이 밝은 이유다" 

그리고 유에라는 새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눈이 오는 나라에는 눈동자 색이 밝은 사람이 많으니까" 

유에라의 말대로였다. 내 눈동자 색은 검정색이 아닌 밝은 갈색이다. 그중에서 특히 눈동자의 색깔이 옅고, 마치 컬러 렌즈를 넣은 것 같은 연한 갈색이였다. 

"용케도 봤네" 

"후훗......" 

유에라는 기쁜듯, 그리고 조금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사랑스러운 미소다. 

"너의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구나......" 

유에라는 수줍음을 잘 타서 평소에는 이런 말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에라도 취해 있다는걸 깨달았다. 유에라는 술을 잘 마시지만 그게 꼭 잘 취하지 않는다는건 아니구나. 

"너는 눈이 내리는 곳에서 살고 싶어? 나는 추운 곳도 괜찮은데" 

"......나는 추운 걸 질색한다" 

유에라가 응석부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에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알고 있었다. 

"......"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창에서 오렌지 색의 노을 빛이 비스듬히 비치고, 카운터의 누님이 램프에 불을 켜고 있었다. 밤이 되려했다. 

"사실 사는 장소는 어디라도 괜찮아. 다만 밝은 가정을 꾸리고 싶어" 

"...... 그렇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유에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램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램프의 빛이 부드럽고 포근하다. 내가 우회적으로 전한 뜻을 유에라는 알아챈 것 같았다.

우리는 램프의 불빛 아래에서 차분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후아......" 

나는 하품을 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다. 나는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있었고, 유에라는 벌써 다섯 번째 잔을 마시고 있었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좀 취한 기분이 들었다. 

"......?" 

덜컹 하고 누군가 자리를 뜨는 큰 소리가 나서, 나는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 

구석 테이블 자리에 앉아 있던 2인조의 모험가가 일어나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둘 다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있었다. 

"......" 

『나는 뭔가 예감이 들었다.』 

"아하하, 둘 다 기분 좋게 마시고 있네." 

모험가 중 마른 쪽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선 실실 웃는 경박한 놈이였다. 

"우리들도 함께 마시자구" 

이어 둔해 보이는 쪽도 옆 테이블에 앉았다. 둘 다 젊은 남자였다. 

"후......"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에라가 예쁘기 때문에 이런 헌팅을 목적으로한 남자들이 어김없이 접근한다니까...... 

"엉? 좋지?" 

퉁퉁한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에 멋대로 바싹 다가왔다. 무례한 놈이얐다. 

"......" 

나는 침묵했다.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왜냐하면, 이 녀석이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오늘 이 도시에 왔지? 잘 모르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물어봐" 

마른 남자는 속셈이 넘치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말했다. 이제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난 연인과 마시고 있다. 너희들은 필요 없다" 

"하아......? 남자......?" 

"거짓말이지......?" 

퉁퉁한 놈과 마른 놈이 차레로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아아, 혹시나가 역시나다. 이놈들은 나를 여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눈이 썩은 거 아니야? 나는 남자야." 

나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 아이 같은데......" 

마른 남자가 핥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기분 나쁘네. 학생 때 모르는 남자가 달라붙었던 일이 생각나잖아...... 

"......남자로도 보이는군" 

퉁퉁한 남자가 턱에 손가락을 대고 중얼거린다. 당연하잖아, 라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여자같은 얼굴이라 들어왔고, 20세 정도까지도 자주 여자로 오인받았다. 

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동안이랄까, 담배를 살 때도 미성년자로 자주 오해 받았었다. 이 놈들 같은 반응에는 이제 감흥이 없을 정도로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 

"......" 

그리고 모험가들은 얼굴을 맞대고 씨익 하고 웃었다. 게다가 서로 처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알기 쉬운 놈들이라 생각했다. 둘 다 머리가 너무 나빠 보였다. 

"꼬마야, 아이는 이제 잘 시간이지?" 

퉁퉁한 남자가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방금전까지와는 달리 위협하는 어조였다. 

"그래, 이제부터 어른의 시간이란다? 어린애는 일찍 자지 않으면 안돼" 

마른 남자도 도발적으로 웃으면서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다지 화나지 않았다. 

"그렇네. 나도 좀 졸립다" 

어린애라고 부르면서 비웃는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실제로 나의 외모는 어려보였다. 아마, 고등학생쯤으로 보인다고 생각한다. 피부도 반들반들해서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나를 이 세계에 소환한 어둠의 여신은 많은 희귀한 아이템들과 스킬들을 주었다. 그때, 왠는 모르겠지만 나를 꽤 젊게 해줬었다. 

내 실제 나이는 24세로, 사회에서 2년간 일했었다. 이 모험가들과 비슷한 나이다. 실제로 이놈들에게 어린 아이 취급당할 이유는 없었다. 

"후아......" 

나는 하품을 꾹 참았다. 술 때문에 정말 졸렸다. 모험가들을 무시하고 카운터 근처의 계단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은 모험가 길드에서 묵을까. 

"......" 

뒤이어 카운터 속에 할아버지와 누나가 보였다. 두사람은 저쪽을 보면서 모른체 하고있다.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다는게 얼굴에 쓰여 있다. 

"유에라, 오늘은 모험가 길드에서 묵을......" 

"오? 그럼 마침 잘됐네. 우리도 여기 3층에 묵고 있어" 

나는 유에라에게 말했지만 퉁퉁한 남자가 말을 잘랐다. 

"그쪽 누님은 아직 덜 마셨지? 우리 방에서 함께 마시자고. 분명 재밌을거야" 

마른 남자가 계속 유에라에게 방에서 마시자고 꼬셨다. 노골적인 권유 방식이었다. 

"꼬마는 술 잘 못하지? 먼저 가서 자라고" 

그리고 퉁퉁한 쪽이 나를 노려보며 몰아붙이듯 말했다. 고릴라처럼 위협하기는......

"술, 강하네......" 

마른 쪽이 유에라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잔을 보는 척했다. 실제로는 유에라의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풍만한 가슴의 골짜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끄럽다. 저리 가라" 

유에라는 조금 화난 듯이 까칠하게 말했다. 유에라는 표정의 변화는 적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다. 

"......내 애인을 나쁘게 말하지 마라" 

유에라는 퉁퉁한 남자를 찌릿하고 노려봤다. 

"누님, 진정하라고. 우리는 저녀석 욕 같은거 하지 않았다고" 

퉁퉁한 남자는 익살맞은 태도로 양손을 위로 들었다. 입술 끝을 치켜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아이는 이제 잘 시간이라고 했을 뿐이야. 그치?" 

퉁퉁한 남자는 다시 찌릿 나를 노려보았다. 이 고릴라, 내가 위축되었다고 생각하는건가? 

"그래. 오늘밤은 일찍 자는 게 좋다고 생각한거 뿐이라고. 요즘은 왠지 뒤숭숭하니까. 아하하......" 

마른 남자는 일순간 낮은 목소리를 내며 우회적으로 나를 압박했다. 폭력에 호소하려는 모양이였다. 

"......" 

나는 가볍게 웃으며 모험가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안에서 모험가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나빠져 갔다. 이놈들은 특히 더 악질적인 놈들인것 같았다. 눈에 들어온 여자한테 애인이 있어도 포기하기는 커녕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 

유에라의 약간 찢어진 큰 눈이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유에라는 내가 바보 취급 당하고 있는 것에 화가 났는지 금방이라도 일어설 기세였다. 

"유에라" 

"......" 

내가 유에라의 이름을 부르자 유에라는 깜짝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진정된 모양이였다. 

"읏......" 

유에라는 좀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취했을 때만 보이는 행위이다. 나는 넋을 잃고 유에라를 바라보았다. 

"유에라, 괜찮아" 

나도 학습하고 있었다. 내가 발끈 해서 화를 내면 분명 이 모험가 길드에 폐를 끼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닥이 피로 흥건히 젖어서 얼룩져 버리고 말것이다. 

"이제 자러가자" 

그러니까 정말 괜찮다. 나는 싸움이 싫었고, 조금 바보 취급 당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유에라가 무사하다면 그것만으로 좋았다. 

"......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참겠다" 

유에라도 그 마음을 알아 주었다. 아직 좀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떳다. 나도 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밤은 다른 숙소를 찾는게 좋겠군" 

"그렇네" 

우리는 셈을 치르기 위해서 카운터로 향했다. 유에라의 말대로, 오늘 밤은 모험가 길드에 머무르는 건 그만두는게 좋을것 같았다. 

"좀 기다려봐, 누님. 취했지? 그러면 이대로 길드에 묵으면 되잖아. 에스코트라면 우리들이 해줄테니까" 

"그 순진해 보이는 꼬마는 미덥지 않지? 우리가 방까지 데려다 줄게" 

모험가들은 집요했다. 두 사람도 따라 일어나며 유에라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은 무시하는게 좋다. 

"괜찮으니까 기다려보라고" 

마른 남자가 유에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에게 손대지 마라!" 

유에라가 날선 소리를 지르며 함께 마른 남자의 손을 팍하고 쳐냈다. 그 순간 길드의 안의 소란이 뚝하고 그쳤다. 다른 모험가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보고 있는 얼굴, 눈을 얼른 돌려서 얽히는 것을 피하려는 얼굴, 그런 얼굴들 뿐이었다. 모험가들에게 정의란 없는건가? 

"흥......나의 연인이 훨씬 믿음직하다" 

유에라는 두 명을 노려보며 도발적인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 따위보다 대단히" 

불만이 상당히 쌓였던 것 같다. 지금의 유에라는 생기가 넘친다. 

"하, 뭐야...... 농담이지? 이런 여자 같이 생긴 꼬마가 우리들 보다 믿음직스러울리가 없잖아. 그것도 이런 밤중에 말야" 

마른 남자가 아하하-하고 웃었다. 

"크큭, 당연하잖아. 이런 꼬마는 그만 놔두고 우리끼리 마시러 가자고......즐겁게 해줄테니깐" 

퉁퉁한 남자는 마른 남자의 목소리에 맞장구를 치며 무리하게 유에라를 꼬시려 했다. 

"왜 내가 너희같은 놈들과 마셔야 하지?" 

유에라는 좀 싫은 듯이 말했다. 

"거기다 거짓도 아니다" 

그리고 오른팔을 내 팔에 감고는 기모노를 내말에 꽉 밀어붙였다. 자연스레 가슴이 밀려올라가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저 둘에게 과시하는듯 했다. 

"후훗......" 

유에라는 웃으면서 왼팔을 들고 엄지와 검지만을 쫙 펼쳐 총인 것처럼 모험가들의 얼굴에 들이댔다. 

"나의 연인이 진심을 내보이면 너희들 따위 상대도 못된다." 

유에라의 그 말을 듣고 퉁퉁한 남자가 내쪽을 바라봤다. 이놈은 나를 여자로 착각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 얼굴을 제대로 본 것 같았다. 

"헤에...... 꼬마, 네가 그렇게 강하다고?" 

퉁퉁한 남자는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키도 크고 팔의 굵기도 통나무 처럼 굵었다. 직업은 한눈에 봐도 전사였다. 분명 일반적으로 싸운다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 

하지만,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꼭 평범하게 싸울 필요는 없었다. 

"아하핫......누님은 강한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마른 남자한테는 농담으로 여겨진 것 같다. 

"그럼 말이야......누님, 우리쪽이 더 강하다면 우리들과 파티를 짜자고. 동료로 넣어 줄테니까" 

유에라는 나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들어달라고!" 

퉁퉁한 남자가 덜컥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큰소리로 말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리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와 이 꼬마가 '결투'를 할꺼다" 

"!......" 

고릴라는 미친 소리를 해버렸다. 주위의 모험가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들이 이기면 저 누님은 우리들의 동료가 된다. 어때?" 

라니 억지스러운 놈들이다. 

"자네가 이겼을 경우는 어떻게할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재하러 나온 길드의 영감이 나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들의 식사비 결제나 시킬게"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영감에게 답했다. 이놈들은 좋은 장비도 없어 보이고, 별로 있을거 같지도 않은 소지금도 별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놈들의 존재쪽은 더 가치가 없었다. 

"여기서 싸우는건 길드에 폐가 될꺼다. 밖으로 나가서 하지"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내뱉고는,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뒤에서 유에라의 발소리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쫓아오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무서운 시스템이라고 할까, 규칙이 있는데, 그게 바로 '결투'다. 증인을 세우고 정식으로 결투를 한 경우, 상대를 죽여도 아무런 죄를 묻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길드 사람들과 주변에 있던 모험가들이 증인이 된다. 증인은 여러명 이여도 상관 없었다. 정확히는 많은 쪽이 더 바람직했다. 만약 상대와 증인이 같은편이기라도 한다면 견딜 재간이 없으니까 말이다. 

또 승자는 패자에 사전에 보수를 청구할 수 있었다. 이번의 저들의 이번 보수는 유에라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상대가 죽든, 내가 죽든 보상에는 상관이 없었다. 

"저기, 유에라. 이런적은 처음이지? 왜 그런 도발을 한거야?" 

밖에 나온 나는 유에라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이정도는 괜찮지 않나? 나도 남자 친구 자랑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유에라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좀 취한듯 했다. 앞으로는 유에라가 너무 마시지 않게 주의하자. 

"......" 

아무리 나라도 남자 친구 자랑으로 매번 결투를 하게 된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유에라에게 항의의 시선을 보냈다. 

"잘못했다. 하지만 나도 여자다." 

얼굴을 휙 돌리며 말한다. 내가 질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 

나는 모험가들의 얼굴을 보았다. 보기 싫은 얼굴이다. 나는 인간의 좋고 싫음을 주로 첫인상으로 결정했다. 

"......" 

고릴라 같은 퉁퉁한 얼굴과, 경박할 것 같은 마른 얼굴. 사람을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정들 중 하나였다. 

"......" 

저 둘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다', '치사해',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결투에서 나를 죽이고 유에라와 어떻게 밤을 즐길지를 논의하고 있을게 뻔했다. 

"두명 인가......" 

나는 모험가들을 보고 그때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에라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뭐야?" 

유에라가 이상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유에라,이 결투, 무승부가 나면 어떻게 될까?" 

"뭣......?" 

유에라가 놀란 듯 소리쳤다. 

"전부 무효가 되는건가?"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유에라의 어깨를 품고선 조용히 끌어당겼다. 얼굴을 유에라의 귀에 붙이고 작은 목소리로 나머지 말을 속삭였다. 

"아니면 유에라가 하룻밤 동안만 저놈들의 동료가 된다던가?" 

"으읏......?" 

내가 내쉬는 숨이 유에라의 귀와 검은 머리를 간질였다. 유에라는 오싹오싹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때 유에라, 내 말대로 될수도 있지?" 

'그' 스킬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치만, 당연하잖아?'

'그때'는 보지를 못 했었다. 그때는 목소리로 듣는 것만으도 좋았지만......

'모처럼의 기회니까 보고 싶네' 

"...... 그럴지도 모르겠군" 

유에라는 뺨을 화악 붉히며 말했다. 분명, 여러 망상을 했음이 분명했다. 

"......"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번엔 큰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기거나 아니면 비기거나. 진다는 선택 사항은 없었다. 나는 유에라를 잃는다면 견딜 수 없게 될것이다. 

"......" 

결투에 이기거나 비기거나, 나는 결과를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나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으나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마지막까지 도달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어이...... 결투를 시작하자고" 

두 사람 중 뚱뚱한 쪽, 그러니까 고릴라 같은 얼굴의 모험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 다녀올게" 

"아아" 

나는 태평한 어조로 유에라에게 말했다. 마치 '요 근처에 산책을 갔다오겠다'와 같은 편한 느낌의 말투였다. 유에라도 똑같이 평탄한 목소리로 답해줬다. 

"......" 

나는 흔들흔들거리며 거리 한복판에서 기다리고 있는 2인조 쪽으로 걸어갔다. 

"......유에라, 나는 승리할거야" 

그리고 유에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결투에서 이기고 유에라를 모험가들로부터 지키기로 결심했다. 

"......믿고있겠다" 

유에라는 나를 신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말이야, 유에라. 

내가 만약 결투에서 고의로 비긴다고 해도, 유에라라면 용서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쩌면 좋을까, 유에라? 

"......" 

길드 앞 거리의 한복판에 섰다. 2인조와의 거리는 10m정도. 나는 재빨리 주변을 체크했다. 주위의 건물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길 위는 생각보다 밝았다. 

"......" 

나는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증인들은 길드 문 앞에 서있었다. 문바로 앞에 영감이 서있었고 그 곁에는 카운터의 누님과 다른 모험가들이 자리했다. 결투 소식을 듣고 모여든 구경꾼들도 꽤 있었다. 

"......" 

나는 얼굴을 찌뿌렸다. 마치 구경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구경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중에는 유에라의 사랑스러운 얼굴도 있었다. 

"......"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지만 코트 주머니에 있는 것은 찌그러진 빈 곽뿐이였다. 담배가 떨어진지는 꽤 됐었다. 나는 이제는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둘 다, 한꺼번에 와도 괜찮아"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뚱뚱한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녀석은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는데 무장이 그거 하나 뿐이였다. 갑옷 같은 것은 착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우리들은'이라고, 분명히 말했어"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죽일 작정이었다. 

"아하핫...... 내 차례는 저 녀석이 진 이후다. 우리 둘이 함께 덤비는건 비겁하니까 말이지" 

마른 남자는 웃으면서 조금도 공평하지 않은 제안을 했다. 애초에 2대1이라는 점에서부터 공정성은 없었다. 

"그럼 한명씩" 

이미 난 경고했다고 생각했다. 그 경고를 안 들은건 저들이다.

"......" 

나는 왼손을 코트 안쪽에 넣었다. 왼쪽 허리 부근에 손을 미끄러지듯이 뻗어, 목제 손잡이의 감촉을 확인하고선 단숨에 금속 덩어리를 뽑아냈다.

놀랍게도 내 손에 있는 물건의 정체는 총이였다. 나의 무기가 바로 이 리볼버다. 내가 태어난 세계의 콜트사가 개발한 사랑스런 회전식 권총. 총신에는 PYTHON.357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물론 어둠의 여신이 하사해 준거지만......'

다만 원래의 총과는 달리 시커먼 건-블루가 아니라 파랗게 빛나는 금속 소재로 되어 있었다. 

"언제 시작할까?" 

엄지의 면에 닿은 격철을 철컥 일으켰다. 나도 사실 정식 결투는 처음이였다. 

"언제라도 좋다" 

뚱뚱한 남자는 고릴라처럼 억센 팔로 롱소드의 자루를 잡고 단숨에 쑥하고 뽑아들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럼 시작 신호는 동전으로 하지 " 

나는 개의치 않고,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제안했다. 

"동전을 던지고 그 동전이 땅에 떨어진 순간부터 결투를 시작하는게 어때?" 

"뭐든지 상관없어. 빨리 시작이나 하자고......" 

고릴라 남자는 화가 나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싶은걸까? 

"유에라" 

"알았다. 동전이군" 

내가 이름을 부르자 유에라는 곧바로 이해했다. 유에라는 결투의 보수다. 동전을 던질 권한 정도는 있었다. 

"이걸로 해도 괜찮나?" 

이런 때에도 유에라는 침착했다. 손바닥 위에 은화를 꺼내고 우리에게 보였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던지겠다" 

유에라는 그렇게 말한 뒤 한호흡을 쉬고 오른팔을 높이 휘둘러서 동전을 던졌다. 

"......" 

나는 동전을 쫒아 시커먼 하늘을 뚫어져라 보았다. 은화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나랑 고릴라 놈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 

은화가 팅 소리를 내며 석조 도로에서 튀어올랐다. 그 순간, 고릴라가 장검을 치켜들며 이쪽으로 달겨들었다. 나는 천천히 리볼버를 앞으로 뻗어 양손으로 쥐었다. 

나는 이 세계에 소환되기 전까지는 권총을 쏴 본 적이 없었다. 클레이 사격 때처럼 중심을 조금 앞으로 하고 매일 반복 훈련 한 대로 왼쪽 눈 앞에서 총구를 고릴라 남자에게 향했다. 

나의 눈과 가늠쇠, 가늠 구멍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릴라의 가슴 위로 붉은 점이 떠올랐다. 레드도트 사이트 처럼 내 눈에 보이는 이상한 붉은 빛. 바로 [저격]스킬의 효과였다. 

너무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운데다가, 고릴라의 가슴팍은 지나치게 넓었다. 그립을 서서히 움켜쥐며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그와 동시에 총구가 위로 치솟으며 달려들던 고릴라가 말 없이 털썩하며 쓰러졌다. 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진 것 처럼 부자연스럽게 쓰러지는 모습. 야생동물을 한방에 쓰러뜨렸을 때와 같은 반응이였다. 

"......"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자신이 총을 쏘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큰 소리가 울린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높아진 집중력 탓에 지각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 동료, 죽었어요 " 

나는 총을 옆으로 기울이며 엄지 손가락으로는 격철을 일으키며 말했다. 실린더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콜트사의 총에는 로망이 있었다. 

"검을 안 뽑아도 괜찮아요?" 

마른 남자는 허리 양쪽에 단검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기겁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볼 뿐이였다. 그래서 아까 물어봤잖아? 봐줄 생각은 없었다. 동료가 죽었으니 이제 이 녀석의 차례다. 

"......" 

마른 남자에게 총구를 돌렸다. 남자의 가슴 위로 붉은 점이 떠올랐다. 이 녀석 움직이지 않아 머리를 노려도 괜찮을것 같았지만 나는 늘 확실히 죽일 수 있을 만한 곳을 쏜다. 

격발의 충격이 어깨를 관통하며, 리볼버의 총구가 치솟았다. 마른 남자는 최후까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릎부터 부드럽게 힘이 빠지고, 털썩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이로써 결투는 끝났다.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면 정말 삼초도 걸리지 않았을 '결투'였다. 

"그럼, 나의 승리로" 

나는 모험가들의 시체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그래, 나는 강했다. 유에라에 걸맞을 정도로 강했다. 어둠의 여신에게서 이 세상에서는 거의 무적과도 같은 무기와 스킬들을 받았다. 

모험가들의 몸은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시체의 아래 쪽으로 붉은 피가 퍼져나가며 천천히 바닥을 적셨다. 

"......" 

이 세계에 소환된 이후 네명을 죽였었다. 이놈들까지 여섯명째다. 

"후......" 

나는 작게 숨을 토했다. 화약 냄새와 심한 쇠 비린내 같은 인간의 피냄새가 후욱 올라왔다. 죽은 자들은 아무말도 없었다. 

"......" 

길드 영감을 쳐다보니 얼이 나간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 채 서있었다. 아마 총은 난생 처음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세계도 총은 존재 했다. [총 지식]스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총은 고대 문명의 유산 같았다. 숫자도 정말 적은 데다가 [총 지식], [저격], [재장전] 이 세개의 스킬이 없으면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 세계의 총 사용자는 《마법의 나라》 정도에만 몇 명 있을 뿐, 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총이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총을 갖고 있는 이 무적감. 나는 이 세상이 정말 좋다. 

"역시 해냈구나...... 후훗...... 너는 또다시 나를 지켜줬군" 

순간, 유에라가 달려오며 나를 껴안았다. 정말 기쁜 목소리였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는 나를 꽉 안아 주었다. 

"유에라......" 

유에라의 향기가 훅 퍼지며 비릿한 피냄새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마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에라를 빼앗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였다. 

"자, 가자" 

유에라는 내 팔을 잡은 채 걸었다. 결투의 보수는 우리가 길드에서 먹은 음식값이다. 그러므로 이제 길드에 용무는 없었다. 

"외상은 없겠지? 아아, 넌 피곤하겠군. 빨리 숙소를 잡고 쉬도록 하지" 

유에라가 걱정스럽게 물어봐 주었다. 유에라는 항상 친절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나의 뺨을 토닥토닥 만지고 있었다. 

"유에라, 시신은 저대로 괜찮아?" 

살인에 대한건 그다지 생각하지는게 좋았다. 심각하게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이놈들은 나를 죽이고 유에라를 빼앗아갈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저 시체의 정리는 누가 할까 라는 의문이 들 뿐이였다. 

"그런 일은 도시의 위병에게 맡겨두면 된다. 그게 그 녀석들의 일이기도 하고, 어차피 비용은 저 모험가들의 돈으로 지불될 것이다" 

유에라는 도시의 위병에 대해 냉담하게 말했다. 분명 싫어하는거다. 

"그렇구나" 

"그렇다. 자, 가지"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중심을 지나쳐 걸어갔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이제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는 유에라의 뒷모습만 보며 걸어갔다. 

둘이서 밤의 거리를 여인숙을 찾아서 계속 걸었다. 단지 유에라가 팔에 착 달라붙어서 조금 걷기 어려울 뿐이였다. 

"유에라, 걷기 힘들어" 

"이정도는 괜찮지 않나? 우리는 연인 사이다" 

유에라는 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유에라도 술의 취기와 결투 때의 피 때문에 흥분하고 있었다. 팔에 느껴지는 거유의 감촉과 어깨에 스륵 스륵 닿는 머리카락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유에라......" 

나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의 여신의 저주]는 잔혹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유에라와 오늘밤 사랑을 나눌 수 없다니......

"......" 

나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유에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흥분해서 오늘 밤에 잘 수나 있을까? '그 마을의 숙소'처럼 조건에 맞는 여관이 있다면 좋을텐데...... 

"이 숙소로 할까?" 

유에라가 발걸음을 멈추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동쪽 외곽에서 유에라가 택한 것은 허름하고 수상한 분위기의 여인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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