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1 (48/73)

제 24화 금발의 마법 소녀 (H씬 없음)

창조의 신의 날 아침, 나는 알람 소리를 들으며 졸고 있었다. 벗어둔 코트 안에서 울리는 시끄러움을 애써 무시하며 그대로 졸고 있었다.

설정된 5분이 지나고 알람이 멈췄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마치 빈혈인 것처럼, 감각이 무디고, 의식이 몽롱한 느낌.

평소 같았으면 유에라가 머리를 다듬고 있거나, 케레브릴이 즐거운 표정으로 옷을 고르고 있거나 하는 등, 그런 한가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오늘은 유에라와 케레브릴과 떨어진지 이틀째 되는 아침이었다.

"......빌어먹을."

난 말없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둘에게 말한지도 얼마 안됐는데. 벌써 떨어져 버렸다. 젠장.

"잘 먹었어. 맛있었어."

"네. 감사합니다."

"손님 어제 밤은 편히 보내셨습니까?"

"응, 푹 잘 잤어."

나와 여주인은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어젯밤 여주인이 방에 초대한 것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어제 여주인이 숙박부에 기제할 때, 살짝 표정이 흔들렸었다. 내 [NTR좋아함]과 [절륜]을 보고는 말이다. 성적인 스킬이 너무 많았다.

"좋은 아침. 좋은 날씨네."

"......좋은 아침."

나는 식당 안을 배회하고 있던 남자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다섯살 정도 되보이는 여주인의 아이였다. 나는 차려진 밥상은 가리지 않는 주의지만 유부녀만은 가렸다.

상대의 가족이 먼저 생각나 버린다고나 할까. 게다가 유에라와 케레브릴이 걱정되어서 더더욱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나중에 이 여주인은 남편이 전쟁에서 죽은 과부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고마워. 이제 갈게."

여주인이 타 준 홍차를 다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계산은 이미 끝냈었다.

"......그렇습니까. 가시는군요."

여주인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잘가!"

남자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아이도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마을 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권 이탈.

혼자가 된 쓸쓸함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좀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여주인이 과부라는 것을 알고난 이후에는, 솔직히 조금 마음이 동했었다. 나는 괜한 짓을 한걸까?

유에라와 케레브릴도 없어서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것이였고 말이다. 여주인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육감적인 좋은 몸매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취향과 상관없이 여자의 육감적인 몸을 만지는 것에 동하는건 당연했다. 물론 그 점에서는, 유에라와 케레브릴이 최고지만 말이다.

둘 다 마른 체형인데도 여자 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피부와, 멜론 같은 거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예쁜 얼굴. 물론 각자의 개성있는 성격도 사랑스러웠다.

"후우......"

두 사람의 생각이 들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연인들이 걱정되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최저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자니까말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건 유에라와 케레브릴뿐이다.

마을을 나와 곧게 뻗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다음 도시로 이어지는, 넓고 훌륭한 가도. 혼자가 되니 왠지모를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시선을 아래를 향해, 바닥에 나 있는 마차의 바퀴 자국을 보면서 걸었다. 점점 오르막이 되는 느낌에, 가도의 끝을 올려다봤다. 언덕이였다. 물론 산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였지만.

계속해서 언덕길을 올랐다. 다리의 피로따윈 무시했다. 불안한 마음이 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초조했다.

괴로웠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힘들었다. 연인들이 보고싶었다.

점심 때 쯤, 여주인이 만들어준 도시락을 먹었다. 괜히 태양광 충전기에 연결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심코 갤러리에 들어갔다.

나는 왜 이걸로 유에라와 케레브릴의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사진으로라도 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대신에 갤러리에 있던 사진은, 전의 세계에서 같이 술을 마셨던 케이코. 뭐 어짜피 이제와서는 의미 없었기에 보는 것을 멈췄다.

점심 때가 지나고, 다음 도시에 가까워졌는지, 가도 주위에 옥수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강한 태양빛이 얼굴에 내리쬐고 있었다.

"읏......"

가도의 끝 쪽, 옥수수들의 그림자 사이에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보였다.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였다. 저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거지?

나는 왼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리볼버를 언제든지 꺼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나도 꽤나 조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

사람의 그림자에 다가가며 음악의 볼륨을 낮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경계하며 다가갔다.

"......"

여자 아이였다. 게다가 금발의 미소녀. 타이트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옥수수의 그림자 아래에 맨발로 앉아 있었다.

손에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옆에는 광택이 나는 편상화, 검은색 망토, 검은색 고깔모자가 난잡하게 널부러져 있었다. 이 아이는 마법사인게 분명했다.

뾰족한 모자와, 새까만 망토. 솔직히 그 복장은 마법사라기보다는 마녀 같았지만 말이다.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전통적인 RPG의 마법사였다.

"......"

"......"

미소녀는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약간 고압적인 태도로 마주 쳐다보았다.

"안녕?"

"......안녕."

연예인 같은 미소녀였다. 아마도 나이는, 젊어진 지금의 나와 비슷한 또래. 즉, 여고생 정도였다. 귀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기에, 나도 평범하게 인사를 했다.

"......"

"......"

정말 작은 머리에, 치렁치렁한 금발을 등까지 기르고 있었다. 화려하다고 해야할까? 머리색이 마치 태양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의 눈길을 끌어들이는 용모였다.

나는 특히, 이 아이의 유난히 큰 눈이 인상적으로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눈 자체도 컸지만, 비취색의 눈동자가 확연히 컸다.

나는 시선을 미소녀에게서 가도의 끝으로 돌렸다. 이제 정체를 알았기에 딱히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뭐, 좋은 눈요기도 했고, 이제 서두를 예정이였다.

"있잖아, 조금만 기다려."

등 뒤에서 미소녀의 초조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음악을 끄고 이어폰을 뺐다. 나는 뒤돌아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려?

"......"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뜻밖의 말이었다. 미소녀는 불만스러운 듯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귀여워 보이니 미소녀는 참 사기였다.

"......"

말없이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

좀 건방진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에겐 그냥, 더워서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보통 나같은 미소녀가 곤란해하면, 물어봐야하는거 아니야?"

이 아이도 유에라와 비슷한 과인것 같았다. 자신의 외모를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성격은 확연히 다르지만 말이다.

"......내가 잘못했네. 내가 미인한테 꽤 익숙해서 그래. 곤란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

미인과 사귀니까 미인에게 익숙해졌다. 나는 이 미소녀의 외모에 주눅들지도 않았고,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못했고,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흐음. 미인한테 익숙하다라......"

미소녀는 실실 웃으면서,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나의 대답이 그녀의 관심을 끌은 것 같았다.

"그래서?"

"......뭐?"

목소리가 교차했다.

"뭐가 그렇게 곤란한데?

"......신발이 스쳐서 발이 아파."

미소녀가 예쁜 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발꿈치의 피부가 벗겨져서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

나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 곤란한 미소녀를 도울지, 말지. 이것이 앞으로 작은 선택이 될지 아니면 큰 선택이 될지는 모른다. 단지 현재의 선택만 있었다.

"......"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서 약상자를 꺼냈다. 작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전에 약국씨에게 받은 것이였다. 생각외로 꽤 도움이 많이 됐다.

"상처에 좋은 약이야."

"......고마워."

미소녀는 조금 주저했지만, 순순히 감사의 말을 했다, 나는 그늘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약 상자를 열어 연고를 꺼냈다.

"냄새나."

미소녀가 코를 막았다. 연고는 연지색(연지의 빛깔과 같은 밝은 빨강)을 띠고 있었고 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만큼 독하니까, 좋은 약인거야. 자, 발 내밀어."

"......괜찮아. 이정도는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미소녀는 조금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왼손으로는 땅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이런 경계도 귀찮다고 생각했다.

"아, 잠깐......, 흣......"

나는 무시하고 가느다란 발을 잡았다. 미소녀는 약간 요염한듯한,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대로 발뒤꿈치의 상처에 연고를 얇게 발라 나갔다.

"우우......, 이봐......"

아, 맞다. 상처를 문질렀으니 꽤 아플 것이였다. 왼팔을 붕 붕 위아래로 흔들며 아프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약국씨의 이 약은 꽤 잘 듣는 약이였다.

"......그 부츠, 산지 얼마나 됐어?"

"맞아, 《공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산거야. 패션의 중심지는 《상업의 나라》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대부분은 《공업의 나라》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라고. 그럼 당연히 공방에서 직접 사는게 더 좋겠지? 봐봐 엄청 귀엽지?"

미소녀는 별 쓸모없는 말을 쭈욱 늘어놓았다. 빨간 부츠는 귀엽다기보다는 펑크한 디자인으로 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맞장구 쳤다.

"응, 좋은 신발인것 같아. 그리고 비쌀 것 같아."

"너도 비싸보이는 부츠를 신고있잖아."

미소녀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가죽 헌팅 부츠를 신고 있었다. 물론 진짜 가죽이라 비싼건 맞았다.

"내가 묻고 싶은건 그게 아니라......"

"시끄러, 나도 안다고. 새 신발이 원인이라는 거잖아."

아무래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신고싶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조만간 익숙해질거야."

"응, 그런건 어쩔 수 없지."

꽤나 근성이 있는 아이 같았다. 새 신발을 샀을 때의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붕대를 두껍게 감아보자. 뭐 아는 다른 방법 있어?"

"없어."

솔직히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몰랐다. 미소녀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

소녀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나갔다. 여리고 새하얀 다리였다.

"......뭔가, 익숙해보이네."

"응 나도 많이 까지거든."

미소녀는 붕대를 감고있는 내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끝났어."

"......고마워."

미소녀는 감사의 말을 하고 일어섰다. 생각보다는 꽤 키가 컸다. 붕대 위에 양말을 신고 부츠 안에 발을 넣었다

"어때?

"......그러저럭 괜찮아."

미소녀는 신발끈을 묶고 일어섰다. 그럼 다행이였다. 나도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아파도 좀 참아."

"멍청한 소리. 아픈건 아픈거야."

"......"

초면부터 심한 말을 들어버렸다. 꽤나 입이 험한 여자 아이였다.

"나는 레이첼. 넌?

"......카오루."

미소녀는 이제와서 이름을 물었다. 아까 있었던 일 따위는,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카오루, 고마워, 넌 친절하구나?"

"......칭찬 고마워."

레이첼이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이런 미소를 착각하고, 좋아하게 되버리는 남자도 있겠지?

"넌,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어?

"난 《상업의 나라》 출신이야."

나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어둠의 여신에게 다른 세계로부터 소환된 일은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소환된 곳을 출신으로 삼고 있었다.

"흐음, 역시 그렇구나? 꽤 특이한 디자인의 옷을 입었길래. 그 옷은 《상업의 나라》에서 유행하는 거야?

"유행하는건 아니야. 그냥 내가 특이한거야."

레이첼은 잘 넘어가주었다.

"《상업의 나라》인가? 나도 《상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살아보고 싶었는데......"

레이첼은 안타깝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업의 나라》의 수도는 유행의 선두주자로 젊은 층이 동경하는 곳이였다.

"레이첼도 가보지 그래? 모험가는 어딜 가든 자유잖아?"

"조만간 가볼 생각이지만...... 지금은 안돼."

레이첼은 대답을 하면서 허리를 굽혀 검은색 망토에 손을 뻗었다.

"왜?"

나는 레이첼의 행동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하얀 손이 검은 망토를 움켜쥐었다. 들어난 망토 아래에는 검은 칼집과, 뽑혀 있는 은색 레이피어가 놓여 있었다.

"읏......"

"꺄핫, ......놀랐지?"

숨을 삼키는 나를 보며 레이첼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너는 신사적이였지만, 봐. 나는 미소녀잖아. 남자는 다, 늑대라고."

"......꽤 똑똑하네."

경계를 했던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레이첼도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레이첼은 마법사 아니였어?

마법사의 망토 아래에 칼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마법사 맞아. 조상 대대로, 마법사 집안이였고."

꽤나 화려한 레이피어를 비싸게 보이는 검은 칼집에 넣고 벨트로 허리에 매달았다. 레이첼은 싫다는 듯이 말했다.

"난 마법사지만, 직접 몸으로 움직이는 쪽을 좋아해. 이래봬도 직접 검술을 배운 적도 있다고."

입술이 초승달 모양으로 빙긋 웃었다. 연분홍색의 빨간 장미 꽃무늬가 인상적인 원피스에, 신기하게도 세검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을 휘두르는건 멋있잖아! 마검사라는 느낌? 엄청 쎌꺼같지 않아?"

"내가 태어난 곳의, 14살 정도의 아이들은 모두 그런 생각을 할걸?"

나는 레이첼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중2병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바보 취급 하는거지?"

"응. 반쯤은?"

레이첼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얼굴의 표정이 무척이나 다채로웠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넌, 얼굴과는 다르게 꽤 심술궂네."

모자와 망토를 걸치고, 레이첼은 옥수수 그림자에서 나왔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 너도 빨리 가자."

"......"

레이첼이 나를 재촉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와 함께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나, 꽤 급한 일이 있는데."

'싫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작은 인연을 생각해 한 번 참았다. 꽤나 제멋대로 해서 살짝 짜증이 났었다.

"넌, 동쪽으로 가고 있지? 다음 도시, 그냥 지나칠꺼야?

"......"

레이첼의 말이 맞았다. 여기까지 무리하며 걸어와서, 오늘은 다음 도시에서 쉴 생각이였다. 목적지에는 내일 중으로 도착 할 예정이였다.

"......가자."

나는 레이첼 옆으로 다가갔다. 별것도 아닌 일에 금방 발끈하는 것은 나의 나쁜 버릇이였다. 유에라와 케레브릴과 떨어진 이후, 나는 아무래도 냉정을 잃었던 것 같았다.

"너도 모험가야?"

"난 모험가가 아니야. 단지 목적이 있어서 《자유의 나라》까지 여행을 하고 있어. 레이첼은?

레이첼은 천천히 걸었다. 상처가 아파서 그런가? 나도 레이첼의 옆모습을 보며 보폭을 맞춰 걸었다.

"나는 모험가야...... 라고 해도, 길드에 갓 등록한 신입이야. 일단, 나는 다음 도시를 향하고 있어."

"일단?"

"나 정도의 미소녀 한테는 힘든 일이 많이 생기거든. 《공업의 나라》의 수도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서 등록을 했는데, 기분 나쁜 남자한테 걸려버렸거든. 그래서 도망다니는 중이야."

"흐음."

레이첼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토커 같은 걸까?

"그렇다면 《상업의 나라》로 가는건 어때? 레이첼도 가고 싶어 했잖아."

"그건 안돼. 나도 처음에는 《상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등록할 생각이었어. 어릴 적부터 동경 했던 거리였으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날 원래 알던 사람이여서, 미리 《상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매복하고 있었어."

"......꽤나 본격적인데."

나는 레이첼의 얼굴을 비스듬히 대각선에서 보고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뭔가, 기시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야?

"악연이야. 쓸데없고, 최저인 놈. 확 죽어버렸으면......"

레이첼은 혹평했다. 레이첼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어떻게든 도망쳐서, 《공업의 나라》의 수도에 도착했는데. 결국 그 남자도 나를 쫓아 《공업의 나라》까지 왔었어."

"미소녀란건 항상 눈에 띄니까 힘든거구나, 하지만 그 남자도 여러가지로 대단한걸, 무슨 추적계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걸까?"

레이첼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날 것 같았다.

"개처럼 코가 좋은 놈이야. 집요하기도 하고. 아...... 짜증나......"

레이첼의 억울한 얼굴을 보고, 나는 드디어 쓸데없는 것이 생각났다. 전의 세계에서 만났던 케이코. 그리고 이름을 잊은 A와 B.

"그래서, 《공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대하를 건너 ......, 《전쟁의 나라》로 가는 척을 하고......"

레이첼의 얼굴이 자꾸만 언짢아져 갔다, 왜 그런걸까?

"......넌, 왜 웃고 있는거야?"

"읏......"

나도 모르게 옛날 생각이 나서 웃고 있었나 보다.

"......내가, 웃고 있었어?"

"씨익 웃고 있었잖아! 너 최저!"

레이첼이 삐진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가 잘못한게 맞았기에,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 레이첼을 봤더니, 전에 같이 술마셨던 여자애들이 생각나서......"

"......"

레이첼은 내 말을 듣고 더욱 뺨을 부풀렸지만 귀여울뿐이였다. 여자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다른 여자 아이를 생각했다. 확실히 최저인 행동이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했다.

"한명은 A라고 하는데,"

"......이상한 이름."

레이첼이 당연한 말을 했다. 미안해, 얼굴만 아는 A양. 이름을 까먹었어.

"응 그 A라는 애가 말인데, 옆모습이 레이첼이랑 좀 닮아서 그랬어."

"......흥, 나보다 더 귀여워?

레이첼은 삐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당연히 레이첼이 훨씬 귀엽지."

"흐음......"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레이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그런 바보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가도를 걸어갔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이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 오랜만에 여자 사람 친구와 얘기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레이첼도 입을 벌리고 신나게 웃고 있었다. 이게 가장 귀여운 표정이 아닌가 싶었다.

"......너 말이야, 여자친구 있어?"

둘이서 대화를 나누면서 걷던 도중 느닷없이 레이첼이 말했다. 꽤나 당돌했다.

"있어."

"흐응......"

왠지 재미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있는데?"

"모르겠어......"

심장을 꽉 붙잡힌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돌아왔다. 스스로의 표정이 어두워져 가는 것을 나도 느꼈다.

"모른다고......, 설마......"

"......"

레이첼의 표정도 점점 흐려졌다. 내 표정을 보더니, 괜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

"......"

그리고 나서 잠시동안 우리는 말없이 걸어갔다. 나는 마차의 바퀴자국만 보고 있었다. 레이첼과 이야기하며 즐거웠던 만큼 죄책감이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고 걷고 있었다. 레이첼은 아무것도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대하에서 용이 날뛰었어."

"아......"

내 목소리에 레이첼은 작게 반응했다.

"그거 나도 항구 도시에서 들었어, 나도 그날 대하를 배로 건넜거든......"

"......그래."

그러고 보니 레이첼은 《공업의 나라》의 수도에서 왔다고 말했었다, 우리와는 반대로 대하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건넜다는 말이였다.

"여자친구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고마워."

다정하게 격려하는 목소리에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나는 가슴 한 구석에서 아픔을 느끼며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날, 혼자 다음 배를 타게 됐어. 그건......"

.

.

.

전쟁의 신의 날 아침, 우리는 항구 거리에서 배의 출항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 호문클루스 집사와 헤어진 다음 날이었다.

이 도시는 대하의 북쪽 위치하고 있으며, 제법 규모가 컸다. 어업과 운송업에 주로 종사하는, 활기찬 도시였다.

또, 이 거리는, 여행자들이 대하를 건너기 위한 거리이기도 했다. 옛날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도하용 배가 있다는 것 같았다.

이 가도는 《전쟁의 나라》의 수도까지 이어지는 큰 가도였다. 방문하는 여행자들의 수도 당연히 많아, 도시가 활기찬 것도 당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의미로 거리에 사람이 넘쳐 났었다고 했다. 대하에서 용이 날뛰어서 잠시 배가 뜰 수 없었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것을 이 세계의 천재지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용은 떠났다고 들었다.

"......"

나는 항구에 서서, 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펄럭 흔들렸다. 오직 수평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야 가득, 푸른 물줄기가 펼쳐져 있었다.

"자, 그만 가자."

"......그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등 뒤에서 케레브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돌아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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