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마법의 나라》의 귀족과의 결투 - 세검 vs 총 (H씬 없음)
행운의 신의 날 아침, 나는 옥수수밭이 있는 도시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쿵쿵, 쿵쿵, 거리낌 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잠들기를 시도했다. 아직 알람도 울리지 않은 시각이였다.
"카오루, 이제 일어나. 아침이야."
문밖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다. 나는 결코 저런 부드러운 목소리에 속지 않았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있잖아...... 카오루, 잠깐만......"
나에게 아침 잠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직 일어나기에는 너무 일렀다
"......"
아무래도 악마는 떠난 것 같았다. 나는 안심하고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연인들이 나오는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아침, 카오루."
"읏......"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꺄앗......?"
"......레이첼?"
침대 바로 옆에는 레이첼이 서 있었다. 내가 갑자기 일어서자, 놀랐는지 크고 맑은 눈을 부릅뜬 채, 양손을 입에 대고 있었다.
"다시는, 놀래키지마."
"......"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나는 멍하니 레이첼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미소녀는 비싸보이는 옷들을 입고 있었다.
"......"
나는 방문을 확인했다. 어젯밤 나는 나무로 된 튼튼한 문을 분명해 잠궜었다. 정상적이라면 들어올 수 있을리가 없었다.
"꺄하핫......, 놀랐어? 문은 『해제』 마법으로 열었지~"
레이첼은 지팡이를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때, 나 대단하지? 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위험한 마법도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아무리 잠궈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굉장해. 마치 악마처럼 말이야."
"누가 악마라는거얏! 네가 안일어나서 그런거잖아!"
아침부터 꽤나 텐션이 높았다.
"게으름뱅이 주제에......"
"......"
이불을 정리하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꺄앗......, 잠깐......, 옷정도는 입으라고!"
이 세계는 여태까지 전혀 추웠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잠을 잘 때에는 팬티 한 장만 입어왔었다.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포기한듯, 레이첼은 커튼을 열고 방 창문을 열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방 안으로 유입되고, 산들바람에 레이첼의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
나는 레이첼이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얘는 뭘 하러 온거지?
"......"
뭐,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휘적 휘적 문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어디 가는거야?"
등 뒤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만 돌려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목욕 하러 갈건데, 레이첼도 같이 들어갈래?"
"......바~보."
레이첼은 여유있게 대답하려 했던 것 같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자, 여기 옷."
"......"
욕실에서 나오자, 레이첼이 옷을 건네주었다. 마침 옷걸이에 걸려있던 것을 가지러 가려던 참이었다.
"......고마워."
목에 걸고 있던 수건에서 손을 떼고 고맙게 받았다. 레이첼은 내 방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바지나 빨리 입어."
레이첼은 부끄러운 듯 뒤돌아섰다.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근데, 어제 그 이상한 도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던데?"
잊어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샤워하는 동안에 알람이 울린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바지를 입으면서 물었다.
"뭔가 옆에 있는걸 눌렀더니 멈췄어. 앞면이 새카맣게 되어버렸지만."
"잘했어, 고마워."
아예 전원을 꺼버린 것 같았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아예 아이템 창에 넣어둘 것이다.
소환되었던 날,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모두 아이템 창에 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지만 말이다.
"그 이상한 음악도 《상업의 나라》에서 유행하는거야?"
"아니. 그런거 아니야."
상의를 마저 입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레이첼은 유행에 민감한 것 같았다
"흐응? ......아, 벌써 다 입었어? 자, 코트."
레이첼은 이쪽을 향해 코트를 펼쳤다. 아예 나에게 입혀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고마워, 하지만 코트는 안입을 생각이야."
"뿌우......"
내가 거절하자 레이첼은 볼을 부풀리며 씩씩거렸다. 레이첼은 불만이 있으면 귀엽게 으르렁거리곤 했다.
"이제 볼일 끝.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레이첼은 코트를 나에게 던지고 문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아침을 먹고 싶었던 것 같았다.
"......가자."
나도 슬슬 레이첼의 행동에 익숙해졌다. 내 안에서 레이첼에 대한 생각이 첫인상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 옥수수밭 도시에 도착한 것은 어제 오후였다. 묵을 숙소를 찾아다니며 둘이서 같이 돌아다녔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놀랐었다.
도시의 중앙 대로에는 많은 가게들이 있었고,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이 도시는 농사로 발전한 도시였다. 특히 옥수수가 특산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같은 숙소에 묵었다. 물론 방은 따로였다.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객실이였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에 만족하고 있었다.
"우와, 엄청 맛있어."
옥수수의 수프를 홀짝거리며 레이첼이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이네, 맛있어."
"그치? 레시피를 알고 싶을 정도인걸?"
레이첼은 꽤 서민적이였다.
"레이첼은 잘사는 집 아가씨 아니였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레이첼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역시 생각했던게 맞았던 모양이였다.
"어제부터 입었던 옷들이 다 비싸보여서."
오늘의 레이첼은 빨강과 검정색 셔츠와 흰색 바탕에 빨간 장미 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물론 신발은 어제와 같은 부츠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옷들이였다. 어제도 생각했었지만, 이 세계의 평범한 여자아이가 입기에는 많이 비싼 것 같았다.
"옷은 너도 비싸보이는걸?"
레이첼이 반박했다.
"그리고 식사가 품위있잖아. 예절에 엄한거 같은데?"
물론 이것만으로 단정지을 순 없었지만 지금 레이첼의 표정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 사실 가출한거야."
레이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샐러드를 포크로 쪼아가며 말했다.
"그랬구나."
상상했던 것보다 좀 무거운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 나는 《마법의 나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 물론 그다지 높은 계급도 아니고 귀족치고도 가난한 집이였지만 말이야."
레이첼은 쓸쓸하게 웃었다.
"부모님은도 신경쓰지 않으셨지만, 나는 집을 좋아하지 않았어. 어떻게 해서든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그렇구나."
여태 다른 세계에서 살다온 내가 귀족의 사연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부모님도 잃었고, 돌아갈 집도 없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 하지만, 너는 가족이 있잖아."
"흐응. ......너도 뭔가 사연이 있구나?"
레이첼은 초승달 모양으로 입술을 만들며 빙긋 웃었다. 레이첼은 입술이 무척 빨갰다. 나중에는 요염한 미녀가 될 것 같았다.
아침의 식당은 어디나 항상 바쁘다. 우리 주변의 테이블들은 아침 식사를 하는 손님들로 붐볐다. 《공업의 나라》답게 대부분이 장인이였다.
"홍차 부탁할게!"
"네에~"
레이첼은 손을 들고 밝은 목소리로 숙소 아주머니에게 홍차를 주문했다. 사실 난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넌 여기서 남쪽으로 가는거야?"
"응. 수상경비대 기지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대하를 건널거야."
그리고 유에라와 케레브릴을 찾으러 가야겠지.
"나도 같이갈까?"
무심코 레이첼이 말했다.
"이상한 놈한테 쫒기는거 때문에? 대하를 건너서 피하려고?"
"으응......, 그런거지 뭐......"
레이첼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한가지 걱정되는건, 그 놈도 내가 대하를 건넌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를 찾아서 《전쟁의 나라》까지 오는건 아닐까?"
레이첼의 의견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지만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 끈질긴 남자는 어떻게 정확히 레이첼을 추적하고 있는걸까?
"근데......"
"자, 오래 기다렸지? 뜨거우니까 조심하렴."
내가 막 말을 하려던 순간, 아주머니가 홍차를 내왔다. 좋은 향기가 났다.
"고마워, 잘 마실게. ......자, 여기 너도."
"고마워."
레이첼이 내 몫까지 받아 건네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거야?"
"아니야, 별거 아니였어."
뭐, 지금 나에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작은 위화감을 뜨거운 홍차와 함께 삼켰다.
.
.
.
"와아, 오늘도 날씨 좋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씨가 좋았다.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레이첼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리는 어때? 잘 나았어?"
나와 레이첼은 대로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남쪽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제대로 마법으로 치료받았으니까."
레이첼은 어제 저녁, 병원에 갔었다. 지금은 어제 그 부츠를 신고, 쾌활하게 걷고 있었다.
"신발가게에 가서 푹신한 깔창도 넣었다고!"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고는 치마를 휘날리며 뒤돌아보았다. 치마 속 붉은 장미가 펄럭거렸다.
"있잖아,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큰 의미가 있는 질문인가? 단지 귀여운 마법사와, 직업 불명의 어려보이는 나.
"아마 신입 모험가들로 보이지 않을까?"
"꺄핫......, 너라면 그렇게 말할줄 알았어."
레이첼은 입을 벌리고 웃다가, 몸을 돌렸다.
"어라......, 어제 그 아저씨다."
성문 밖 옥수수밭 사이로, 저 멀리 어제 우리를 마차에 태워준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 잘가~!"
레이첼이 크게 외치며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아저씨도 우리를 발견한듯, 손을 들어주었다.
"아~, 어제는 편했었는데. 오늘도, 누구 마차 태워줄 사람은 없으려나~?"
"......그건 그렇지. 편하고 빠르긴 했어."
레이첼은 한가로운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왠지 나도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남쪽으로 향했다. 도시의 경계를 벗어나 주변은 완연한 초원지대였다.
"경비대 기지까지 가깝다고 했지?"
"그렇다는거 같아. 적어도 점심 때 쯤엔 도착하지 않을까?"
"흐응."
숙소의 아주머니가 알려준 정보였다.
"그, 네 여자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야?"
"......"
레이첼은 항상 이런식으로 뜬금없는 화제를 갑작스럽게 꺼내왔었다.
"......어떻다니?
"그냥, 얼굴이라던지."
얼굴...... 나는 연인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가슴이 살짝 욱신거렸다.
"......귀엽지."
"그렇게 말하면 몰라."
레이첼은 즉답했다.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레이첼 정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연인들쪽이 더 좋지만."
"쳇......"
레이첼이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했다.
"레이첼도 귀엽지만, 점수로 따지자면 한 30점?"
"하아?"
레이첼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연인들이 더 좋은건 당연한 일이였다.
"너 눈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아님 머리가 맛간거야?"
"아니. 내 머리는 정상이야."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맛이 간게 맞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내 상태부터 [NTR좋아함]이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NTR좋아함]이라는 것을 레이첼에게 말하는건 부끄러웠다.
"흥, 그래서 내가 왜 30점이야?"
"......"
나는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미소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빨강과 검정색이 어우러진 셔츠에 싸인 가슴이라던지, 가슴이라던지, 가슴이라던지.
"......"
"......"
그리고 머리 속에서 연인들과 비교했다. 레이첼은 슬림한 모델 체형이였다.
"유에라와 비교하자면 레이첼의 키가 더 작아. 그리고 가슴도 좀...... 애초에 케레브릴한테는 상대도 안되고...... 유에라의 하위호환 이랄까?"
(*유에라 169cm G컵, 케레브릴 172cm H컵, 레이첼 162cm D컵)
"이이익......!"
"아파......"
돌연 정강이에서 참을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강제적으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흥......, 멍청이."
레이첼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를 지나쳤다. 저 딱딱해 보이는 부츠의 발끝으로 차 버린 것 같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레이첼에게 미움 받아버린걸까?
"빨ー리ー와ー!"
저 멀리서 레이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팡이를 흔들며 재촉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완전히 미움받은건 아닌 모양이였다. 나는 살짝 웃으며 레이첼의 뒤를 쫒았다.
.
.
.
"어라......?"
가도의 저 멀리에 마차가 보였다. 곧은 길을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상경비대 기지에서 온 것 같았다.
"마차네."
"뒤에서 오는거였으면 좋았텐데."
내 의문에 레이첼이 평범하게 대답했다. 아까의 화는 진작에 없어졌었다.
"수상경비대 사람일까?"
"그럴지도? 꽤나 좋은 마차인것 같은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차에는 하얀 포장천이 씌워져 있었다. 이건 물류 수송용이 아닌 사람을 태우기 위한 마차였다.
"뭐, 상관없잖아? 가자."
레이첼은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걸어갔다. 마차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읏......"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마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명백히 우리를 의식한 속도였다.
"레이첼."
"응."
레이첼에게 말을 걸자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알아?"
"몰라. 그냥 마부 아니야?
마부를 깔끔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
마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뒷쪽을 돌아보며 마차 안에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꽤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피해갈게요."
레이첼이 외쳤다. 외길에서 마주치면 보행자가 피해가는 것이 예의니까 말이다.
"읏......"
하지만, 그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우리 앞에 천천히 멈춰섰다.
"읏......"
마차에서 시커먼 복장을 한 체격 좋은 남자가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옷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어 또 다른 검은 옷 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먼저 나온 남자보다 많이 마른 남자였다. 두 사람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덩치 큰 남자는 갱처럼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마른 체형의 남자는 간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것이 섬뜩했다.
"우리한테 볼일 있어?
나는 엷게 웃으며 물었다. 기분 나쁘게도, 둘 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왠지 심상치 않았다.
"......"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위압적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휴......"
옆에서 레이첼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지겹다는 반응이였다. 나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읏......"
마차가 흔들거리며 또다른 누군가가 나왔다. 나느 그 쪽을 응시했다.
"레이첼,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하얀 턱시도를 입은 우아한 꽃미남이였다. 찬란한 금발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걸어와서는, 검은 남자들 앞에 섰다. 자신은 우월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첫인상부터 이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이 레이첼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남자일게 분명했다.
"넌 여전히 짜증나는 놈이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레이첼이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무슨 소리야, 레이첼. 내가......"
"내 물건에 『탐색』 마법을 걸었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정확히 따라올 수 있을리가 없어. 어디에 걸었는지나 말해. ......기분 나쁘니까."
"큿......"
레이첼이 말을 끊어버리고 퍼부었다. 잘생긴 남자는 기분 나쁘다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별 상관 없지 않아? 우리 사이에......"
"이거지? 예전에 너가 빌려갔었던거."
잘생긴 남자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레이첼은 무시하고 손수건 한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기분 나쁜놈."
"큿......"
잘생긴 남자는 순간 화가 났는지, 허리에 찬 세검 자루를 쥐려고 하다가 멈췄다.
"뭐, 그정도는 괜찮아. 레이첼, 《마법의 나라》로 돌아가야지?"
"싫어. 너네나 돌아가."
나는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 너는 내 신부가 되야 하니까."
"진짜, 멍청하네. 그게 싫으니까 《마법의 나라》를 나온거잖아? 거절이야."
"우리는 어릴적부터의 약혼한 사이잖아? 너희 집안도 찬성했고."
"우리 집안도 바보취급하는 주제에."
레이첼은 이제껏 스토커로부터 도망치던 것이 아니라, 약혼자로부터 도망치려고《마법의 나라》를 나왔던 것이였다.
"딱히 바보취급을 한 적은 없었는데. 단지, 그런 집안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창녀의 집안이라든가."
"쓰레기......"
"자, 돌아가자. 레이첼, 《마법의 나라》에 도착하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자고."
"너 같은건, 죽어도 사절이야."
레이첼은 정말 싫어보였다. 나는 레이첼의 귀여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와줄까?
"......됐어. 약한 주제에."
레이첼은 조금 생각하다가, 그리고는 슬프게 웃으며 거절했다. 약한 주제에...... 그러고 보니 어제 나보고 근육을 키우라고 했었지?
"이봐, 레이첼. 저 녀석이랑 무슨 사이지?"
나와 레이첼이 말하는 것을 보고, 남자가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랑 상관 없잖아? 내가 레이첼이랑 무슨 상관인지는?"
"쳇......"
남자는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레이첼의 사이를 착각하는것 같았다. 내 왼손이 자연스럽게 코트 안으로 미끄러졌다.
"......"
짜증내고 있는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저 녀석이 싫었다. 조금 삐뚫어진 걸지도 모르지만, 난 싫은 녀석이 기분 나빠 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읏......"
남자 뒤에 있던 검은 녀석들이 살기를 들어냈다.
아주 충실한 놈들같았다. 주인이 약혼녀에게 욕을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생판 남인 내가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였다.
"기다려, 이 사람은 상관없잖아."
레이첼이 검은 녀석들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이미 내 왼손은 코트 안의 리볼버를 잡고 있었다.
"이봐, 뭘 믿고 그러는거지? 너 따위가?"
"......"
잘생긴 남자는 나를 증오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듣고 있나? 너 따위는......"
"......"
남자가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단지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넌, 왜 웃고만 있는데?"
레이첼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첼의 약혼자라는 저 녀석,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보여서 말이야. 얼굴이 가운데로 쏠렸다고 해야하나......?"
"꺄핫......, 네 말대로야. 저 녀석은 얼굴이 쏠려있어."
레이첼은 저 녀석을 보며 입을 벌리고 웃었다. 역시 이 아이에게는 미소가 가장 잘 어울렸다.
"시끄럽다! ......웃지 마!"
잘생긴 남자가 고함을 친 것과 세검을 뽑은 것은 동시였다. 이어서 뒤의 검은 녀석들도 말없이 검을 뽑았다.
"누가 쏠렸다는 거냐! 날 바보 취급하지 마라!"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도발은 잘 전달된 것 같았다.
"뭐든 한곳에 몰아버리는건 좋지 않아. 고르게 분산시켜야지."
"그래. 나도, 너처럼 독재자 같은 스타일은 싫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크읏......"
내 말에 이어 레이첼도 거들었다.
"시끄럽다! 창녀의 딸 주제에!"
잘생긴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레이첼에게 심한 말을 했다. 나는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은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레이첼도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사실이지 않나? 너희 집안의 여자는, 돈 때문에 누구와든지 허리를 흔들잖아? 안 그래?"
남자의 표정이 잔학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얼굴이였다. 지금까지 몇번 봐왔던 것이기도 했다. 약자를 가지고 놀다가 죽이고 싶어 할 때의, 그 끔찍한 표정.
"......이제, 그만."
그리고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설마 저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나? 하핫......, 레이첼이 말하지 않았나 보군. 자기 집안이 음약을 팔아먹고 사는 집이라는걸 말이야."
"읏......"
잘생긴 남자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레이첼의 집안은 대대로 《마법의 나라》의 왕실에 미약을 납품하고 있는 집안이다. 왕실어용이라고는 해도 미약을 얼마나 쓰겠어?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팔아야지."
"......입 다물어."
레이첼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레이첼이 집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
레이첼이 불안해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식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 부끄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걸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괜찮아."
"어......?"
나는 레이첼에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아까 말했었지? 내가 미친거 아니냐고. 사실일지도 몰라. 난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거든."
"뭐야, 그게......"
레이첼은 웃으려 하고 있었다.
"레이첼, 도와 줄게. 저런 놈이랑은 인연을 끊는 것이 좋아."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 욕을 하는 놈과는 상종을 하는게 아니였다.
"이봐, 너희들 뭘 그렇게......"
"쏠린 얼굴은 가만 있어!"
"크윽......"
레이첼의 일갈에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네 말대로, 저 녀석이랑은 인연을 끊는게 좋겠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레이첼은 내 물음에 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셋 다 순식간에 처리 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이랑 결투를 하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
"......그렇겠네."
마부가 한쪽에서 벌벌 떨면서 양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셋을 결투도 없이 처리해 버리면 살인죄였다. 그렇다고 죄 없는 마부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내가 나갈게."
"......됐어. 넌, 약하잖아."
레이첼은 또다시 내 제의를 거절했다.
"레이첼, 사실 난......"
"너가 사실은 강해도 상관 없어. 이건 내 문제니까."
"......"
나는 레이첼의 목소리와 표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을 초승달 모양으로 하고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알아?"
"......네가 왜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첼은 애매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꺼내놨던 리볼버를 발견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넌 지금 나를 위해 결투 따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여자친구들을 찾아야지."
"......"
사실 레이첼의 말이 옳았다. 나는 유에라와 케레브릴을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하고, 결투같은 위험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괜찮아, 나도 꽤 강하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내 문제야."
"......"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와 레이첼은 연인같은 사이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길에 알게된 사람일 뿐이였다.
더 나서면 레이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였다. 레이첼은 첫인상과 많이 달랐다.
"다 들었지?
"......좋다, 레이첼. 너의 결투를 받아주지."
잘생긴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결투를 받아들였다.
"증인은 어떻게 할거지?
"......"
레이첼은 마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싫어......, 내가...... 그렇게 큰 역할은......"
마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절했다. 이 세계에서는 결투의 증인이라는게 얼마나 무거운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증인을 할게."
"......네가?"
잘생긴 남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쏠린 얼굴이 어떻게......"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레이첼은 어제 처음 만났어."
"......"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누가봐도 네 아랫사람인 저기 검은 녀석들 보단, 공정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편파는 없겠지?"
"물론."
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편파? 그런건 물론, 하는거다.
"......좋다. 그럼, 레이첼. 내가 이기면 나와 결혼해서, 앞으로의 인생을 모두 나에게 바쳐라."
"좋아. 내가 이기면 나와 우리 집안에 다시는 상관하지 마. 복수도 포함이야."
"......둘의 보수는 확인 했고, 장소는...... 여기, 이 길 위야."
"아아."
"결투의 시작은 동전을 던지는 걸로 할게. 이 동전이 땅에 닿는 순간, 결투 시작. 어때?"
"......알겠다."
남자는 세검을 칼집에 넣더니, 아이템 창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이 녀석도 마법사였던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결투를 하는걸 지켜보는 것 보다, 스스로 결투를 하는 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레이첼의 걸음이 멈췄다. 두 사람의 거리는 약10m.
"시작해."
그리고는 내게 말하며 차분한 태도로 레이피어를 뽑았다.
"그럼......"
"애송이. 아직 승리 조건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검은 녀석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갸름하고 간사한 얼굴을 한 놈이였다.
"읏......"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의심을 품으면서도 승리 조건을 말했다.
"......항복하거나 사망 혹은 전투 불능이면 승리다."
"알겠어."
"......"
레이첼은 순순히 승낙했지만 나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시간을 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하핫......"
잘생긴 남자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재킷 앞 단추를 풀었다. 의심이 한층 더 커졌다.
"저기, 저 녀석도 《마법의 나라》의 귀족이야?"
나는 레이첼에게 한가지를 확인했다.
"그래. 저런 녀석도 귀족이야."
"읏......"
'《마법의 나라》의 귀족은 조심해라. 걔네들은 총을 가지고 있으니까.' 건스미스가 한 말이 생각났다.
"레이첼, 저 녀석......"
"이봐. 너는 증인이다. 설마 증인이 편을 들어준다는건 아니겠지?"
검은 녀석들 중 덩치 큰 녀석이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에 어금니를 세게 깨물다.
"......아니, 그런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녀석의 하얀 재킷의 왼쪽 가슴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단지 저 쏠린 녀석이랑 나랑 왠지 닮은거 같아서, 좀 봐주면서 하라고 말하려고 그랬지."
"큿......"
"애송이! 이분을 무시하지 마라!"
덩치 큰 남자가 소리쳤다. 하지만 레이첼은 뭔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저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메시지가 잘 전달된 것 같았다.
"......증인. 빨리 시작해라."
남자는 내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알겠어. 자, 준비해."
나는 평소에 선택을 후회하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내 손바닥에 동전 하나를 꺼내서 펼쳐보였다.
"......"
그리고 나서, 사뿐히 동전을 던져올렸다. 동전은 태양빛을 반사하며, 포물선을 그리면서 둘 사이에 떨어졌다.
"읏......"
동전이 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레이첼이 자세를 낮추고 뛰쳐나갔다. 무척이나 빨랐다. 레이피어의 칼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레이첼은 팔을 높이 든 자세로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약간이면 됐는데......"
레이첼이 억울하다는 듯 신음했다. 남자의 뒤에, 튕겨나간 레이피어가 땅바닥에 푹 박혀있었다.
"레이첼, 내가 이겼어."
잘생긴 남자의 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상태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오른손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아름다운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