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5화
대본 리딩 현장의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량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 스텝들 차량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이로 깨끗한 검정색 밴이 한 대 보였다. ‘겨울꽃’의 인지도가 치솟으면서 회사에서 새롭게 뽑아준 밴이었다.
은지랑 세희는 먼저 도착했나 보네.
그리고 여전히 얼룩이 잔뜩 묻어 있는 랜드로버도 보였다.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도 도착했다는 뜻이다.
나는 빈 공간에 주차를 하자마자 내려서 얼른 뛰어 들어갔다. 역시나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은 리딩실의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었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가서 인사를 하자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니, 박 작가님.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좀 늦은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아아, 괜찮아요. 아직 30분이나 남았어요.”
나도 지각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보다 늦어서 예의상 사과를 했는데, 황은진 작가님이 손사래를 치며 의자까지 빼주는 바람에 내가 더 무안해졌다.
무의식중에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이 나보다 상급자라고 인식을 해서 그렇게 행동을 했는데, 황은진 작가님은 이제 나를 완전히 동급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야 여유가 생긴 나는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는 음료를 뜯어서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화려한 성공’의 대본 리딩 때와는 다르게 자리마다 배역의 이름과 배우의 실명이 함께 적힌 이름표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배우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네요?”
“작년 ‘화려한 성공’의 대본 리딩 때처럼 모두 중앙 자리를 피할까봐 그냥 지정석으로 해버렸어요. 메이킹 영상으로 확인해 보니까 썩 보기가 좋지는 않더라고요.”
맞는 말이다. 친분이 있는 배우들끼리 가깝게 앉아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는 것도 좋지만, ‘대본 리딩’은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촬영을 위해서 서로 호흡을 맞춰보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자리다.
나는 황은진 작가님의 말에 동의를 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배우가 어느 자리에 앉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며 황은진 작가님과 강무혁 감독님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조연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주춤하다가 나에게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한철진입니다.”
“반갑습니다. 황은진 작가님과 함께 ‘세 자매의 약속’을 집필하고 있는 박성우입니다.”
“아, 작가님이셨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디션 때, 내 얼굴을 보긴 봤는데 누군지 궁금해서 인사를 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작가라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자세가 제법 공손하게 바뀌었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배우들에게 있어서 대사의 분량을 결정하는 작가는 이런 존재인 모양이다.
한철진이라는 배우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도착하는 배우들 역시 비슷하게 행동했다.
배우들이 하나 둘 씩 입장하면서 인사를 나누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분명 주차장에 ‘겨울꽃’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왜 은지와 세희의 자리가 비어 있는 거지?
“황 작가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검정색 밴 뒤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수한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며 담배를 끄고 나를 향해 다급하게 달려왔다.
“팀장님! 큰일 났어요!”
“태평하게 담배 피우고 있는 거 보니까 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은데?”
박수한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답답해 죽겠어요.”
“무슨 일인지 천천히 설명해봐. 그리고 은지랑 세희는 어디 갔어?”
“두 사람은 지금 차에 타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세희의 상태가 좀 심각해요.”
“병원은 갔다 왔어?”
“그런 게 아니고...그냥, 팀장님이 차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 해 보세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박수한의 모습에 나는 얼른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박수한의 걱정과는 달리 은지와 세희는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박수한, 이놈이 무슨 큰일 났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별일도 없네.”
“흐엥, 작가님 저 진짜 큰일 났어요오...”
“어제까지만 해도 대본 리딩에 참석한다고 좋아하더니 갑자기 왜?”
“....막상 여기 도착해서 주변에 카메라가 보이고 감독님이랑 황은진 작가님께 인사드리고 나니까 너무 떨려서 암기 했던 대사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어떡하죠?”
대본 리딩 현장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냥 대본을 보면서 대사를 맞춰본다. 하지만 세희에게는 내가 대사를 모두 암기를 해서 오라고 못을 박아두었다. 서연 누나와 은지에 비해서 대사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고, 불안정한 시선처리가 얼마나 많이 개선되었는지 확인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연기경험도 없는 신인이 중요한 배역을 맡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 그냥 대본을 보면서 연기하라고 말하려니, 다른 이유보다도 세희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어쩔 수 없이 대본을 보면서 읽어야겠지만 일단, 지금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내가 며칠 전에 회사에서 같이 밥 먹다가도 대본 외워보라고 하니까, 입에서 술술 나왔잖아.”
“분명 그랬는데, 지금 너무 긴장했나 봐요...”
“자, 물 한 모금 마시고 집중해서 해보자. 은지 너도 촬영한다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상대역 해주고.”
“네.”
내가 건네 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뱉은 세희가 조금은 진정된 표정으로 은지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중간 중간에 말문이 막히고 한참동안이나 까먹은 대사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대사를 생각할 때는 은지를 바라보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이대로는 대본을 보지 않고 리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데 연습이 끝나고 세희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휴우, 그래도 조금 나아졌네요. 물을 마셔서 그런가?”
“이게 괜찮아진 거라고...?”
“아까는 훨씬 더 심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괜히 피해만 주는 것 같아서 연기를 시작한 걸 후회했을 정도거든요. 으으, 창피하다.”
“으음,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다시 한 번만 더 해 볼래?”
“네엡!”
아직 대본을 보지 않고 리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회복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상태가 좋아져서인지, 시무룩했던 세희의 표정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다.
은지도 최선을 다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세희와 호흡을 맞추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시선이 흔들리는 실수가 잦았다. 결정적으로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무릎 위에 올렸다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하면서 긴장된 마음이 무의식중에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일단 대본 연습의 흐름을 끊었다.
“잠깐만, 은지 너도 컨디션 조절해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좀 쉬어. 내가 대본 읽어주면서 세희랑 연습할게.”
“저는 괜찮아요.”
“너는 오히려 서연 누나와 주고받는 대사가 더 많잖아. 그거 연습하고 있어.”
“네...”
은지는 조심스럽게 뒷자리로 이동해서 서연 누나와 감정 대립하는 씬의 대본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나는 세희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장먼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세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갑자기 내가 자신의 손을 잡아서인지 세희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일단 이 손부터 좀 고정하자.”
“아, 제가 긴장하면 손이 마음대로 대로 막 움직이는 습관이 있어요. 인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자까님, 꽉 붙잡고 있어줘요!”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해보자.”
“파이팅!”
오히려 내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쥔 세희가 귀엽게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기를 시작하는데 정말로 조금 전과비교해서 확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가끔 시선이 흔들리는가 싶을 때도 내 손을 꽉 움켜쥐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며 도중에 막히지 않고 1화의 대본을 모두 소화했다.
“이제 긴장이 좀 많이 풀린 것 같은데?”
“와아 진짜 신기하네. 떨림이 확 줄었어요오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리딩실로 들어가자.”
마지막 연습에서 세희는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훌륭하게 대본을 소화했다. 스스로도 뿌듯한지 의자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한다.
“우호호~ 자까님이랑 같이 연습 하니까 신기하게 긴장도 별로 안 되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근데 리딩실 가서 또 긴장하면 어떡하지...”
“걱정 마. 나랑 마주보는 자리잖아.”
“아싸!”
나랑 가까이 앉는다고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닐 텐데.
황은진 작가님은 본인이 쓴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에 대해서만 지적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연 누나와 은지, 그리고 세희의 연기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언급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좋은 말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연 누나와 은지에게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조언 정도로 말을 하겠지만, 세희에게는 조금 엄격하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
대본 리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황은진 작가님이 모든 배우들에게 나를 공식적으로 소개시켜 주었다. ‘주연 배우들의 대본을 책임지고 있는 작가’라면서 힘을 주어 말하는 바람에 다들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메이킹 영상에도 이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서 나갈 테니, 내 이름이 연예계에 조금씩 알려질 것 같다.
“그럼, 씬 순서대로 대본 리딩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1화의 첫 도입부는 맏언니 역을 맡은 서연 누나가 퇴근 후에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서, 둘째를 연기하는 은지에게 이런 저런 충고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언제까지 연예인 되겠다고 이러고 있을래?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알았어. 꼴 보기 싫으면 내가 나가서 따로 살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 더 늦으면 너 취업도 못해.”
“그렇다고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기는 싫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는 줄 알아? 정신 좀 차려.”
“그렇다고 언니처럼 퇴근하면 기절하듯이 잠이 들고, 다음 날이 되면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아.”
대사가 좀 많아서 가끔 대본을 힐끔거리며 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연 누나와 은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실감나게 연기를 했다. 조연배우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가끔씩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는다. 하지만 황은진 작가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은진 작가님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도 황은진 작가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의 호흡을 잠시 끊기로 했다.
“잠시만요. 서로 감정적으로 대립을 하는 씬은 맞는데 무작정 싸우자는 게 아니잖아요. 두 사람의 관계가 자매라는 걸 잊지 마세요.”
서연 누나와 은지는 대본 리딩을 하기 전에 몇 번이나 나와 함께 연습을 했었기 때문에 분명 내가 어떤 의도로 쓴 대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연기를 하다보면 은연중에 경쟁심이 생기면서 대본과 상관없는 감정이 나와 버리는 것 같다.
두 사람도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린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도서연 씨는 화를 내면서도 동생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보여주시고, 은지 씨도 반항적으로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가끔 시선을 외면하면서 언니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듯이 톤에 변화를 좀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볼게요.”
“죄송합니다...”
황은진 작가님에 이어서 톱스타인 서연 누나까지 나에게 예의를 갖춰서 행동하고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직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척 담담하게 내가 쓴 대본의 방향성에 대해서 조언을 했다. 그리고 이런 내 행동을 지켜보던 황은진 작가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