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54화 (54/150)



〈 54화 〉54화

샵에 도착하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밴이 주차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익숙한 차량 한 대가 보였다. 바로 ‘겨울꽃’이 타고 다니는 검정색 밴.
세희가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서연 누나와 은지도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이동을 했고 나는 대기실로 들어왔다. 커피 한잔을 뽑아서 소파에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대기실에는 남자들로 가득했는데, 모두가 소속 연예인들이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대기하고 있는 매니저들인 것 같다.

예능방송에서 연예인들이 ‘같은 샵에 다니는 사이’라는 말을 하면서 친분을 과시하는 걸 자주 봤다. 그런데 그게 연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매니저들도 손에 커피 한잔씩 들고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불만이나 장점, 그리고 담당하고 있는 연예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고갔다. 매니저들은 이런 정보들을 교류하며 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

 본업은 어차피 작가이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에 크게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잠이나 더 자려고 눈을 감았다.

“어! 팀장님 언제 왔어요?”

“...방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수한은 다른 회사의 매니저들과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모른  했더니, 눈을 감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다. 나는 살짝 귀찮은 듯이 눈을 뜨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박수한의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WJ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하는 최우석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TL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작가, 박성우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매니저라고 소개를 하려고 하다가 허울뿐인 ‘팀장’ 직책을 말하는 것보다는 ‘작가’라고 소개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개를 듣고 최우석이라는 남자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작가님이요...?”

“아직 경력이 많지는 않아요.”

그는 박수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친한 매니저 형이라고 했잖아?’라는 말을 했다. 내가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매니저인줄 알고 인사를 하러 왔다가 작가라는 말을 듣고 놀란 모양이다.

“아아, 팀장님이 작가는 맞는데 매니저 업무도 같이 하고 있어.”

“아, 그래...?”

“너 ‘화려한 성공’ 드라마 봤지?”

“엄청 재밌게 봤지. 너희 소속사 연예인들이 주연으로 나왔잖아.”

“거기서 ‘신예진’의 대본을 쓴 사람이 바로 박성우 팀장님이야. 그리고 홍보 영상이 몇 번 나갔을 텐데, ‘세 자매의 약속’이라고 사전 제작중인 드라마의 주연배우들 대본을 전부 담당하고 있어.”

“대, 대박...!”

박수한은 최우석이라는 사람에게 자랑하듯이 나를 소개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랑 친한 사이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런 유치한 자랑은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잘 하지 않는데...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 샵에서 만난 사이...?”

“아니요. 저를 연예계라는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온 원수요.”

“아, 원래 친구였구나. 그런데 왜 같은 소속사에 들어가지 않았어?”

“그 당시에는 WJ엔터테인먼트에 매니저 자리가 없어서 그냥 다른 회사에 취업했었어요. 어차피 경력 쌓고 이동하면 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으음, 자리 나면 WJ엔터테인먼트로 이직하려고?”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어요.”

“응?”

“요즘 WJ엔터테인먼트의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오히려 이 자식이 TL엔터테인먼트로 오려고 고민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 회사에 매니저 자리 하나 비어서 모집 중인 걸로 아는데?”

“저도 알아요. 도서연 씨의 매니저가 그만두면서 팀장님이 임시로 담당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석이도 거기 지원하려고 하는 중이긴 한데, 좀 힘들 것 같아요. 샵에 있는 매니저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경력 많은 매니저들도 지원을 많이 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톱스타 배우의 매니저 자리는 인기가 좋으니까요.”

나도 얼핏 듣기는 했었다. 매니저 입장에서 보면 인원수가 많은 아이돌 보다는 배우를 담당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그 배우가 톱스타라면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스케줄은 더 적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많이 신경 쓰고 있는 톱스타의 경우에는  매니저에 대한 승진이나 여러 가지 혜택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최우석을 이리저리 훑었다. 일단 체격은 좋아보여서 극성인 팬이 달려들어도 잘 막아줄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성격이다.
시선을 박수한에게 돌린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박수한, 네 친구의 성격이 어떤지 말 해 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추천할 수는 없잖아.”

“아, 이놈이 머리는 나쁜데 착해요.”

“....학창시절에 내가 너보다 성적 더 좋았는데  소리냐.”

“난 공부를 안 한 거지, 못한  아니잖아. 넌 공부를 했는데도 그 정도였고.”

“그래도 내 뒤에 10명은 있었어.”

“자랑이다.”

“그 10명에 너도 포함되어 있었지.”

“다시 말하지만 난 공부를 안 한 거야.”

정리를 하자면, 성격은 좋다는 말이다. 공부 이야기를 하자면 어차피 나도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박수한의 성격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 녀석을 믿고 최우석을 회사에 추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둘  공부 못했다는 거 잘 알겠으니까, 그만해라. 내가 회사에 추천을  줄 테니까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형님, 아니 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추천은 해주겠지만무조건 채용된다고는 장담 못해.”

“괜찮아요. 신경 써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결정은 최선호 실장이 하겠지만, 내가 추천을 하면 분명 채용이 될 것이다. 당연히 최선호 실장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면서 왜 매니지먼트 업무에 관여를 하냐고  소리를 하겠지.

하지만 내가 서연 누나에게 이야기를 하면 정말 쉽게 해결될 문제다. 도서연이라는 톱스타가 자신을 담당할 매니저를 직접 추천하면 회사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인천에 위치한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은지와 서연 누나는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움~하~ 바닷가는 정말 오랜만이네.”

“촬영만 아니면 작가님이랑 같이 경치 구경하면서 걷고 싶은데...”

나도 마음 같아서는 은지의 말처럼 여유롭게 바닷가를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촬영이 시작되기 때문에 희망사항일 뿐이다. 더구나 촬영이 아니었다면 주변 통제가 안 돼서 서연 누나와 은지가 이렇게 바닷가를 구경하고 있는 상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같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세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중에 박수한이 길을 잘 못 들어서 촬영 직전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자까님! 저도 사진 같이 찍어요오오!”

“빨리 와.”

“헥헥...”

꽤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세희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V를 했다. 그렇게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 명의 미인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런지 내 얼굴이 평소보다 더 못생겨 보였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며 은지가 한 말이 더 가슴 아프다.

“작가님, 너무 멋있게  나왔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서연 누나의 말은 내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진짜 잘나왔네. 배경이 좋아서 그런지, 분위기도 있어 보이고.”

세희는 서연 누나가 후벼 판 심장에 소금을 휙휙 뿌렸다.

“우우! 치사해요. 본인만 잘나오게 찍다니!”

나는 세 사람에게 사진을 전송해주고 촬영 현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은지가 나와 둘이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은지와 다정하게 서로의팔을 어깨에 올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 이후에 서연 누나와도 사진을 찍었다.

세희가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뭔가 흠칫 놀라면서도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세희야, 오랜만에 바닷가에 왔는데 기념으로 나랑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자.”

“네에~”

세희가 밝게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와서 포즈를 취했다. 다만, 은지나 서연 누나처럼 팔로 나를 감싸거나 하지는 못하고 그냥 귀엽게 V를 하며 밝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세희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바짝 끌어당기면서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스텝들은 촬영 준비를 마쳤고 세 사람은  바로 촬영 현장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씬에서는 세희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싸우고 나서 어색해진 맏언니와 둘째의 사이를오가며 화해를 시키는 장면인데, 장난스럽게 웃으며 연기를 해야 한다.
긴장만 안하면 세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라서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원래는 도착하자마자 서로 호흡을 맞춰보며 연습을 했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바다를 보면서 사진을 찍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는 그냥 잘하라고 응원하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야, 바닷가를 배경으로 세 사람이 이렇게  있으니까 화보가 따로 없네요. 그럼, 이대로 리허설 가보겠습니다.”

다행히 세희는 귀엽게 웃으며 자신의 매력을 잘 살려서 연기를 했다.아직 리허설이긴 하지만 느낌이 괜찮다. 서연 누나와 은지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연기가 아주 자연스럽다.
감독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느낌 좋습니다. 이대로 바로 촬영 시작할게요.”

“레디, 액션!”

서연 누나와 은지가 서로를 외면한 채, 아무런 말도 없이 해가지고 있는 바닷가를 걷는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로 셋째인 세희가 파고들어 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대사에 맞춰서 두 사람의 시선을 오가는 세희의 연기가 제법 자연스럽다.
시선처리도 크게 문제없어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희의 손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같다.
대본에서 제시하는 행동묘사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냥 걸으면서 대사를 해야 하는 씬에서 손이 계속 이리저리 움직였다.
세희가 긴장했을 때 무의식중에 보이는 습관이었다.

“컷! 세희 씨, 손은 그냥 평상시에 걸을 때처럼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대사만 해봅시다. 이 상황에서 굳이 제스쳐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것 빼고는 다 좋았으니까, 그대로 다시 가봅시다.”

“...네, 죄송합니다!”

역시 감독님의 시선에도 세희의 손동작이 어색하게 보인 것 같다. 하지만 저 손동작이 긴장해서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더 생동감 있는 연기를 하려고 세희가 의도적으로  행동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컷! 손에 힘 풀고 다시 갑시다.”

“컷! 세희 씨, 손동작 신경 쓰느라고 대사를 잊어버렸나보네요. 자자, 긴장 풀고 다시 해봐요.”

“컷! 아이고, 혼자 연습할 때, 계속 제스쳐를 취하면서 했나보네요. 20분만 쉬었다가 할게요.”

계속 같은 장면에서 세희 혼자서 연속으로 NG를 내는 바람에 스텝들이 상당히 많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세희는 박수한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세희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등을 톡톡 두드렸다.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친 세희가 화들짝 놀라며 살짝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진짜, 연습은 엄청 많이 했는데...”

“임세희, 차에 가서 나랑 이야기 좀 가자.”

“네...”

세희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스르륵 일어나서 내 뒤를 따라왔다. 걷는 중에도 고개를 푹 숙여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밴에 탑승해서 문을 닫자마자 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리허설 때는 잘하는 것 같더니 실제 촬영에 들어가니까, 많이 긴장 했나보네.”

“그런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내가 무슨 말만해도 세희는 항상 끝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붙였다. 아무래도 야단을 치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왔다고 착각을 한 모양이다. 지금 세희는 긴장한 상태에서 겁도 나는지, 내가 몇 마디만 더 하면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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