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9화
스텝들에게 커피를 전달하는 최유라의 행동이 처음에는 다소 불편하고 어색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매일 아침마다 반복 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업무의 특성상 그녀와 소통이 없어서 싸가지 없는 성격을 잘 모르고 있던 스텝들의 경우에는 그저 감격스러워서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까지 곱다.’는 말을 쏟아내며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최유라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매니저와 조감독이 이 소문을 들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지겠지?
내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촬영장에서 최유라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이다.
드르륵.
차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본을 검토하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인물이 앞에 서 있었다.
“오빠, 커피 다 돌렸어.”
“문 열기 전에 노크하라고 몇 번 말했어? 기본적인 예의잖아.”
“아, 몰라. 김건웅 그 새끼가 아침부터 시비 걸어서 짜증나 죽겠어!”
“왜 또 싸웠는데?”
“계속 졸졸 따라다니면서 죽을 때가 됐냐? 의사 불러줄까? 이러면서 약 올리잖아.”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까지 싸가지 없던 네 모습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오빠!”
“귀 떨어지겠다. 가서 건웅이 그 자식도 좀 오라고 해. 다음 씬, 어려우니까 촬영 전에 두 사람 감정 잡는 거 연습해보자.”
“그냥, 전화해서 오라고 해.”
“안 받더라. 휴대폰 차에 던져놓고 어딘가에서 담배 피우고 있을 거야. 찾아서 데려와.”
“그걸 왜 나한테 시켜?”
“싫으면 됐다.”
“아, 아니야...내가 데려올게...”
호감도가 상당히 많이 올랐는지 최유라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색하면 바로 꼬리를 내려버린다. 이런 감정을 이용해서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간단한 심부름을 종종 시키고 있다. 항상 누군가에게 명령하며 심부름을 시키기만 했으니 당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도 좀 느껴봐라.
십여 분 정도가 흐르고 김건웅과 함께 걸어오는 최유라의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서 보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서로 인상을 쓰며 격한 손짓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또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워낙 익숙한 장면이라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다.
드르륵.
“너 한 번만 더 시비 걸면 진짜 죽는다!”
“어이구, 무서워 죽겠네.”
“오빠, 김건웅, 이 새끼가 나한테 미친년이래.”
“웃기고 있네. 네가 먼저 다짜고짜 병신 어쩌고 하면서 옷을 잡아당겼잖아.”
무슨 상황인지 훤히 보인다. 김건웅을 데리러 갔던 최유라가 사정도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 끌고 오려고 하다가 싸움이 났겠지. 그렇다고 서로 욕하는 걸 보면 다를 게 없다.
“둘 다 시끄러워. 조용해라.”
“......”
“......”
내가 살짝 언성을 높이며 경고했더니 두 사람 모두 조용해졌다. 그리고 내 앞에서 욕을 하던 것이 무안해졌는지 대본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내린다. 여기서 더 뭐라고 해봤자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나도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부분에서 NG가 많이 날 것 같아서 미리 맞춰보자고 부른 거니까 그만 싸우고 감정 잡아 봐.”
“좀 어렵긴 하겠더라.”
“....아, 진짜 이 씬 너무 싫다.”
내 말에 김건웅과 최유라도 동의했다. 제법 연기력이 좋은 최유라까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항상 화를 내고 윽박지르던 오빠가 처음으로 동생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는 장면.
그리고 그런 오빠의 말에 감동한 동생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화를 주고받게 된다.
“상상만으로도 내 손발이 다 사라지는것 같아...”
“으으, 벌써부터 오글거린다.”
“촬영에 들어가서 최대한 NG 적게 내려면 눈 마주보고 실전처럼 연습해야 돼.”
뛰어난 연기력이 요구되는 씬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비뚤어진 관계 때문에 상당히 난이도가 올라간 연기였다. 그래도 3시간 정도 계속 눈을 맞추며 대사를 외우게 했더니 조금은 적응을 한 것 같다.
연습 과정은 정말 힘들었지만 촬영에 들어가서 강무혁 감독님으로부터 연기가 상당히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었다는 칭찬을 받았으니 효과는 좋았다고 봐야지.
***
어느새 따스한 봄이 지나가고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다. 땀 때문에 메이크업 수정이 잦아지는 배우들은 물론이고 장비를 조작하는 스텝들도 힘들어지는 계절이다. 촬영이 끝나는 시점은 가을이라서 어떻게든 참고 견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배우들은 대기하고 있는 동안 차에서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쉴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트러블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김건웅과 최유라도 내가 현장에 있는 동안은 통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차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벌컥!
아, 진짜! 문 열기 전에 노크를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최유라...어?
“형, 형! 나 완전 망했어!”
내 차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사람은 최유라가 아니라 김건웅이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예의를 지켜왔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화를 내려고 했지만 녀석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이유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주식이라도 떨어졌냐?”
“그, 그게 아니라...최유라가...”
“또 싸웠어? 어휴, 지겹다 지겨워.”
“싸운 거면 차라리 낫지.”
“싸운 것도 아니면 도대체 뭔데?”
“사실은...내가 승연이랑사귀는 걸 최유라가 알아버렸어...”
“.....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촬영장 구석진 곳에서 신승연의 땀을 닦아주는 걸 최유라가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하다. 의심스러운 행동이긴 하지만 상대 배우에 대한 매너라고 우겨도 될 상황 아닌가?
“진짜 땀만 닦아줬어?”
“그, 그게....땀 닦아주고 볼에 뽀뽀도 했어...”
“에라이.”
“아아, 진짜 어떡하지? 그 미친년이라면 이걸로 협박하고도 남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시청률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안 하겠지.”
“기사로 내보내지는 않겠지만 나한테 복수할 목적으로 승연이를 괴롭힐지도 모르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승연이라면 최유라의 몇 마디에 두려움에 떨면서 밤잠을 설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연기가 흔들리고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건 좀 곤란한데.
“유라는 내가 이야기 잘해서 단속 시킬 테니까 너도 앞으로 조심해. 기자한테 안 걸린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지.”
“알았어...”
내가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는지 돌아가는 김건웅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그래도 자기 여자 친구라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네.
몇 시간 후, 촬영을 끝낸 최유라가 땀을 흘리며 내 차에 들어왔다. 마치 자기 밴에 타듯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후우, 엄청 덥네. 오빠, 차에 시원한 거 없어?”
“당연히 없지.”
“매니저한테 음료수 좀 사오라고 해야겠....”
말을 하던 최유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싸가지 없는 그녀의 성격을 뜯어 고치는 과정에서 생긴 버릇이다. 그렇다고 정당한 권리까지 거부하라는 뜻은 아닌데.
“그런 건 매니저가 할 일 맞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시켜.”
“....오빠도 하나 마실래?”
“너랑 똑같은 걸로.”
“응, 알았어.”
최유라가 휴대폰으로 자신의 매니저에게 시원한 음료를 사오라고 주문했고 손으로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훑어낸다. 에어컨을 틀어놨지만 여전히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았는지 열심히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최유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더운데 수고했어.”
“아, 아니 이 정도야 뭐....”
지금까지 본적 없는 다정한 내 행동과 말투에 최유라가 살짝 당황한 것 같다. 이 분위기를 이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촬영 일찍 끝나면 같이 저녁 먹을까?”
“대, 대본 어딨어! 빨리 외워야지...”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나와 저녁을 먹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대본을 찾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최근에는 싸가지 없는 행동이 많이 줄어들면서 예전의 안 좋았던 감정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고 오히려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것 같아서 걱정 될 때가 있다.
특별한 문제없이 최유라의 촬영은 저녁 7시쯤에 끝이 났다. 함께 저녁을 먹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매니저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벌어지고 있었다.
“대표님에게는 말 안 할 테니까 너 먼저 퇴근해.”
“어, 어....그건 안 되는데...”
“뭐가 안 돼! 박 작가님이랑 대본 관련해서 이야기 좀 나누면서 저녁 먹겠다는데.”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그냥 박 작가님 차타고 같이 움직이면 돼. 너도 일찍 퇴근해서 쉴 수 있으니 좋잖아.”
“대표님에게 이 사실 알려지면 저 진짜 큰일 나요...”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살짝 끼어들었다. 매니저의 고충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나름대로 타협을 보려는 거다.
“박형준 씨는 그냥 빈차로 따라 오세요. 식당에 도착하면 다른 방에 예약 하나 더 해드릴 테니까 거기서 식사하시고 집에 갈 때만 태워다 주세요. 그러면 됐죠?”
“그,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오히려 제가 고맙죠.”
“그럼, 출발 합시다.”
예전에 최유라에게 얻어먹은 것도 있고 오늘은 조금 아쉬운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밥은 내가 사기로 했다. 내 차의 조수석에 탑승한 최유라가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한 모습을 보였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잠들어버렸다. 더운 여름에 오랜 시간 야외에서 촬영했으니 당연히 피곤하겠지.
식당에 도착해서 깨웠더니 잠이 들었던 것이 억울한지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예약한 방에 앉아서 음식이 나오기 전에 슬쩍 김건웅과 신승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최유라의 눈빛이 달라진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김건웅! 지금까지 나를 비웃고 놀린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야.”
“으음, 유라야. 그래도 한 배를 타고 움직이는 입장에서 드라마에 영향을 미칠만한 행동은 하면 안 돼.”
“기자에게 알리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인 복수는 좀 해야지.”
“너 승연 씨 협박해서 건웅이 괴롭히려는 거지?”
“어, 맞아.”
“승연 씨는 아직 신인이라서 너의 몇 마디에 정신 나간다. 결국은 촬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
“너한테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그냥 두 사람의 관계는 모른 척해줘.”
“아, 아무리 오빠 부탁이라도....”
“가끔 이렇게 촬영 일찍 끝나는 날에 저녁 사줄게.”
“앗, 진짜?”
“약속할게. 그러니까 너도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기억에서 지워.”
“그러면 추가로 부탁하나만 더 들어 줘.”
“뭔데?”
“오빠도 내 볼에 뽀뽀 해줘.”
“........”
“아, 왜...한 번 해주면 어때서...오빠가 내 성격 싫다고 해서 몇 달 동안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그 정도도 못 해줘?”
틀린 말은 아니다. 최유라는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촬영이 시작 된 이후로 지금까지 스텝들에게 커피를 돌리고 있다. 그리고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도 하고. 거기에 대한 보상이 조금은 있어야 할 것 같긴 하네.
“알았어. 눈 감아.”
“와! 진짜 해주려고?”
“하지 말까?”
“아니! 눈 감았어. 빨리 해줘.”
최유라는 눈을 감은 채 오른쪽 뺨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쪽.
나는 살짝 방향을 틀어서 볼 대신 최유라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