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92화 (92/150)



〈 92화 〉92화

촬영이 끝난 이후의 분위기는 시작할 당시와 비교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방청객들의 시선은 여전히 김건웅과 최유라에게 향해 있었지만 진행자와 피디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만약 내가 피디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정도로 김건웅과 최유라는 예능 체질이 아니었다. 조금만 예상을 벗어난 질문을 해도 그냥 말문이 막혀버리다니...
그럴 때마다 나에게로 질문이 되돌아왔기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다행히 내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들이 좋은 호응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방송 분량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 작가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글을 쓰는 분이라서 그런지 정말 이야기를 잘 하시네요. 앞으로 예능에서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숙련된 진행 실력과 고정 게스트의 리액션 덕분이죠.”

“타 방송국의 예능에도 출연이 예정되어 있으시죠?”

“아, 그게....”

“하하하. 굳이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홍보가 목적인 게스트가 각종 방송사의 예능에 순방하듯이 출연하는 건 관례거든요.”

“네, 사실은 내일과 모레, 연속으로 두 방송사에서 촬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에 빠진 피디의 모습을 보니 질문의 의도를 대충  것 같다. 어차피 다른 예능방송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니, 대답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 개의 프로그램이 모두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송을 먼저 내보내는 쪽이 무조건 이득이다. 피디는 오늘 촬영한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편집해서 이번 주에 바로 방영시킬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방송사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나는 신경 끄고 이만 오피스텔로 돌아가야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밴에 탑승해서 잠시 기대어 있다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미확인 메시지가 몇 개 있어서 봤더니 역시나 은지, 세희, 그리고 서연 누나였다. 전부 촬영을 잘 했는지 물어보는 내용이었고 나는 차례대로 답변을 해주었다.

아, 너무 피곤하네...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집까지 대략 1시간 정도 거릴 테니, 그 동안 잠이나  생각이었다. 그때 또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위이잉.

“또 누구지...”

일부러 연예계와 관련 없는 친구들이나 부모님에게는 촬영에대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전화가 아니라 메지시라서 광고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몸을 살짝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배수연 : 박 작가님, 촬영은 잘 하셨어요?]

피곤함이 달아나면서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박성우 :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배수연 : 다행이네요. 내일 촬영도 파이팅^^]

마지막에 눈웃음 이모티콘을 보면서 배수연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웠다가 정신을 차렸더니 다음  아침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김건웅과 최유라가 소극적인 행동을 보이면 어김없이 진행자는 나에게 그 화살을 돌렸다. 너무 긴장해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박수를 치며 호응을 해주고 있는  보면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김건웅과 최유라가 그냥 나에게 대부분의 역할을 떠맡기고 구경만 했다. 예정된 촬영이 모두 끝나고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왔다.

“우와! 형, 예능방송 진짜 잘한다.”

“오빠, 최고였어.”

“....어휴.”

“매니저한테 들었는데 형을 섭외하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하냐고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더라.”

“혹시라도 TL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연락 오면 무조건 다 거절하라고 말해.”

“어차피 다음 작품 집필하기 전까지 할 거 없으면 예능이라도 해보지?”

“그럼 앞으로 게임할 시간도 없을 텐데.”

“하하, 당연히 농담이지. 이제 촬영도 끝났는데 오늘 저녁에 게임 한판 어때?”

“그래, 오랜만에....잠깐만.”

김건웅의 제안을 수락하려고 하는 그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배수연 :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가요?]

[박성우 : 네, 무사히 끝났어요.]

[배수연 : 이제 진료는 안 받으시겠네요...?]

[박성우 : 음, 방송이 없어도 꾸준히 관리 받고 싶은데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 좀 부탁드려요.]

[배수연 : 오늘 바로 진료 가능합니다.]

예약시간은 원래 병원이 문 닫는 시간보다 훨씬 이후였다.

***

병원에 방문하기 전에 카페에서 간단하게 먹을 간식을 사서 들어갔다. 그런데 로비가 너무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진료실의 문이 열리며 배수연이 나왔다.

“박성우 작가님, 어서 와요. 늦은 시간이라서 간호사들은 전부 퇴근했어요.”

“아, 괜히  때문에...”

“어차피 정리할 서류가 있어서 퇴근 못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렇군요.”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네.”

배수연은 간호사가 없이도 능숙하게 움직이며 진료를 했다. 하긴, 강남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실력은 입증이 되었다는 의미겠지. 어차피 어려운 시술도 아니고 단순히 관리를 위한 치료라서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진료를 마치고 기계에서 내려오는데 문득 야한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늦은 시간, 병원에서 미모의 여의사와  둘이 있으니 계속 병원 컨셉의 야동이 생각나서 발기가 되었고 바지가 부풀어 올랐다.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수습을 하기는 했지만 엉거주춤한 자세가 어색해보였는지 배수연이 살짝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닙니다...”

“치료 이후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셔야 됩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 제가 카페모카와 애플파이 사왔는데 집에 가져가서 드세요.”

“그냥, 로비에서 같이 먹고 가요.”

로비의 테이블에 앉은 나와 배수연은 간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는 가벼운 농담이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 예상대로 그녀의 학창시절은 오로지 공부밖에 없었다. 심지어 의사가  이후에도 바쁜 생활을 이어왔기 때문에 유일한 문화생활이 집에서 시청하는 드라마 정도라고 했다.

“지금까지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다고요...?”

“어쩌다 보니까...”

신기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녀는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수연에게 내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저랑 영화 보러 갈래요?”

“.....예?”

“요즘 재밌는 영화가 많이 개봉했거든요.”

내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배수연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고민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아직은 많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어쩌면 이미 선약이 있을 수도 있고.
그냥 다음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같이 가요.”

나도 모르게 배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더니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 뒤로 우리는 말없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그런데 배수연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나를 따라서 지상으로 움직였다.

“차는요?”

“어차피 집도 가까운데 같이 걸어가요.”

배수연의 집은 내 오피스텔과 정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마트에서도 마주쳤겠지. 거리로 따지면 서연 누나의 빌라와 비슷하지만 방향은 반대였다. 신기하게도 서연 누나, 유라, 배수연의 집은 내 오피스텔을 둘러싸듯이 위치해 있었다.

나는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로 간호사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에 진료를 받았다. 이 정도만 해도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몇 번이나 ‘그녀의 손을 잡아볼까’ 고민했지만 주춤거리다가 계속 기회를 놓쳤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일요일이 다가왔다.

배수연이 보고 싶다는 영화를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영화관에도 일찍도착해서 팝콘과 콜라까지 구매한 상태로 기다렸다. 잠시 후, 정말 예쁘게 차려입은 배수연이 도착했다.

“아, 제가 좀 늦었죠?”

“아닙니다. 아직 시간 남았어요.”

“....간식은 제가 사려고 했었는데. 죄송해요.”

“항상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진료해주신 덕분에 피부가 이렇게 좋아졌는데 이 정도는 제가 사야죠.”

“그럼, 영화보고 나와서 점심은 제가 살게요.”

점심까지 내가 산다고 하면 오히려 배수연이 민망해할 것 같아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는지 그녀가 팝콘에 관심을 보이며 슬쩍 하나를 집어 먹었다.

“맛있죠?”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다르네요. 훨씬 더 맛있어요.”

“팝콘을 먹기 위해서 일부러 영화관에 오는 사람도 많아요.”

“....진짜요?”

“당연히 농담이죠.”

툭.

배수연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손으로 툭 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자각을 못하고 있는  같다.  만큼 내가 편해졌다는 의미겠지.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될 시간이라서 나와 배수연은 해당 상영관으로 이동했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는데요?”

“제 손 잡아요.”

어두운 상영관으로 들어오자마자 당황해서 가만히  있는 배수연의 손을 잡고 예약한 좌석으로 이끌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스킨십이라서 그런지 자리에 착석하고 나서도 제법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주말에는 보통 만석이에요. 그리고 대부분 커플입니다.”

“아, 커플...”

“이제, 영화 시작하네요. 휴대폰은 진동이나 무음으로 해두시면 됩니다.”

“이미 전원 껐어요.”

비록 영화관은 처음이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팝콘도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서 소리 없이 천천히 먹으며 영화를 감상했다. 솔직히 나는 영화보다는 계속 배수연의 얼굴에 시선이 가서 제대로 집중할  없었다.

파팟.

상영관의 등이 켜지며 주변이 환해졌다. 입장할 때와는 다르게 퇴장할 때는 주변이 밝기 때문에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배수연도 거부하지 않았다.

“살인마가 그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엄청난 반전이었어요. 왜 사람들이 영화관에 오는지 알 것 같아요. 웅장한 사운드와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생동감.”

“맞아요. 그게 바로 영화관의 매력이죠.”

“박 작가님, 다음에 같이 와   있어요?”

“물론이죠.”

약속대로 배수연이 점심을 사주었고  이후에도 우리는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벤치에 앉으면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순간, 배수연의 몸이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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