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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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전,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에 혼자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그 손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도착한 것이다.
“일찍 왔네요.”
“예나 씨가 늦은 거죠.”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런데 친구하자는 제 말을 계속 거절하더니 왜 갑자기 수락했어요?”
“그냥 마지막에 제시했던 금액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게 얼마였더라...?”
“1억.”
“지금 바로 입금하라고 할게요. 계좌 불러요.”
처음 그녀가 나에게 친구를 하자고 말했던 것은 함께 식사를 했던 호텔의 지하주차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돈을 줄 테니 친구로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일종의 거래였다.
처음에는 천만 원에서 시작되었던 금액이 내가 거절 할 때마다 계속 오르더니 결국 1억이 되었다. 단순히 친구가 되는 조건치고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금액이 커서 내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건 아니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지.
촬영이 진행되면서 김예나의 씬도 있었는데 많이 연습한 흔적이 보였다. 그렇다고 연기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인큐버스 왕’의 효과가 적용되기 시작했고 그 증거로 나에게 친구를 하자면서 연락을 하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1억을 준다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 도중에 바로 1억을 송금할 줄은 몰랐다.
김예나가 어딘가로 연락을 하자마자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내 통장으로 1억이 입금됐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나에게 반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너는 친구를 사귈 때 원래 이렇게 돈을 줘?”
“아니, 선금을 준 사람은 네가 처음.”
“.....?”
“보통은 상대방이 먼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다가오거든. 그리고 내가 시키는 일을 해줄 때마다 돈을 줬지.”
도대체 김예나에게 있어서 친구라는 건 어떤 존재일까?
아무래도 그녀의 주변에는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접근하는 하이에나들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는 그런 녀석들을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나야, 친구로서 부탁 하나만 하자.”
“얼마가 필요한데?”
“....돈을 달라는 게 아니고 대본...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될까?”
“지난번에는 분량 늘려주겠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네 외모가 뛰어나니까 대사보다는 화면에 얼굴을 많이 비춰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싫어. 대사 늘려줘.”
....이상하네?
며칠 전부터 집요하게 연락을 하며 친구 하자고 하는 걸 보면 호감도가 많이 올랐다는 의미일 텐데.
물론 나를 좋아한다고 순종적으로 변한다는 건 아니지만 잘 보이려고 노력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예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나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는 하지만 행동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너 괜히 대본 때문에 나랑 싸워서 못 보게 되더라도 괜찮아?”
“내가 찾아가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러면 더 싫어할 텐데?”
“너 후회 할걸.”
“후회?”
“나는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든. 주변 사람들부터 괴롭혀주면 대부분 항복하더라고.”
“....농담 한번 살벌하게 하네.”
“과연 농담일까.”
피식 웃으며 말하는 예나의 모습을 보며 순간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널려있을 테니까.
나는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무조건 대사를 늘려달라고 한다. 말투를 보면 거의 협박에 가깝다.
어쩔 수 없이 내용 수정을 위해서 고민을 좀 해보겠다는 핑계로 겨우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촬영장에 가봐야 될 것 같아서.”
“작가가 대본만 쓰면 되지, 꼭 현장에 갈 필요는 없잖아. 2시간만 더 같이 있어주면 천만 원 줄게.”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 앉을 뻔했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예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살짝 화가 난 것 같은데 은근히 신경 쓰였다.
***
촬영장에 갔다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해서 씻기도 귀찮았다. 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 김예나]
이런 늦은 시간에 메시지도 아니고 전화를 걸다니.
당연히 안 받았다. 하지만 벌써 3번째 연속으로 전화를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쯤 되면 나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라서 이러는 건지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시간을 봐라.”
새벽 3시.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전화를 건다고?”
우린 친구잖아.
“친구라면서 내가 하는 부탁은 왜 안 들어줘?”
원래 부탁은 나만 할 수 있는 거야. 물론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주겠지만.
“.....넌 그게 친구라고 생각하니?”
응, 지금까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런 거였어.
서, 설마...나와 친구를 하고 싶다고 했던 이유도 이런 관계를 원해서였나?
커지는 불안감 속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와 대화를 나눠본 결과, 농담이 아니었다. ‘인큐버스 왕’의 능력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인큐버스 왕’의 효과는 나에 대한 호감이 생긴다고 해서 근본적인 성향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독특한 신념을 가진 배수연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배수연과 마찬가지로 김예나 역시도 독특한 성향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런데 호감도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불안감이 느껴진다. 특히,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을 때는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1억 다시 돌려줄게. 나는 그런 관계 싫거든.”
잠깐만.
“피곤해서 이만 끊을게.”
끊지 마! 도서연, 이은지, 임세희, 최유라. 네가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들에 대해서 언론에 뿌려도 괜찮겠어?
“....너 뭐야.”
지난번에 경고했지? 내가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는 목표물의 주변부터 망가뜨린다고.
김예나의 행동보다 나에 대한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해답은 길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내 실수였다.
“내 휴대폰 봤지?”
글쎄.
확실하다. 오늘 카페에서 실수로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왔었는데 그때 내 톡을 확인한 모양이다. 아, 진짜 미치겠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일단 짜증나는 장난감들부터 다 버려. 너도 마음의 정리는 해야 할 테니까 시간을 조금 줄게.
“그 다음에는?”
평생 내 옆에 붙어 있어. 그러면 돈도 주고 편하게 살게 해 줄 테니까. 원한다면 취미로 글도 쓰게 해줄게.
“장난도 적당히 해라. 끊어.”
담담한 척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나에게 집착하는 거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내 주변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호감도’를 올려서 대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전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시도해 봐야 할 것 같다.
***
파파팟!
어둠속에서 갑자기 빛이 생기며 낯선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웅성웅성.
인큐버스 왕, 마르고스?
단상 위에서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너무 놀라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크르륵, 반갑군.”
“아, 예....반갑습니다...”
팔이 6개 달린 그 괴물이다. 녀석이 내밀고 있는 손을 잡으며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 마르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성과에 비례해서 선물을 드리고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복잡하다고 생각했는지 허공에 홀로그램을 만들어 자료화면을 보여주었다.
[공모전 개최]
[내용 : 드라마 제작]
[평가자 : 인큐버스 왕을 비롯한 그 부하들]
[응모 방법 : 본인의 세계에서 제작한 영상을 인큐버스 왕에게 전달]
[주의 사항 : 본인의 세상에서 상영을 하면 실격 처리됨]
[상금 : 추후에 결정]
‘마성의 작법서’를 여러 세계에 뿌린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마족들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드라마의 제작.
다행히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영혼이나 수명을 가져간다는 끔찍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을 알게 되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상금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이유는 수상을 하게 되는 대상에 맞춰서 유용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요한 건 엄청난 보상이 예상된다는 것.
공모전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는 가장먼저 손을 들고 인큐버스 왕, 마르고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김예나에 대한 현상을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 상황을 들을 마르고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여성이 가진 성향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원래 가지고 있는 본질을 유지하면서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는 거니까요. 순종, 복종, 집착....어떠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결국 마르고스의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쳐서 봤더니 팔이 6개 달린 짝꿍이었다.
녀석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크륵, 그냥 죽이면 되는데 뭘 그렇게 고민을 합니까?”
“....제가 사는 세상에는 힘이 있어도 함부로 동족을 해치지 못합니다.”
“크르륵, 이상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군요.”
처음 봤을 때 했던 말의 반복이다.
그래, 네가 사는 세상은 정말 편하겠다.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더 강한 녀석에게 죽을지 모르니까 조심해라.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 여러분 헤어지기 전에 가방을 열어보십시오. 선물이 있을 겁니다. ‘마성의 작법서’를 통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면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수연에게 사용했던 그 종이와 같은 신비한 물건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제발 김예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들어있기를 빌었다.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는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작은 종이 한 장이 적혀 있었다.
[사용 방법 : 종이에 대상자의 이름을 적고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 올리면 효과가 적용됩니다.]
[효과 : 대상자에 대한 모든 생각과 사상, 신념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오오, 좋다.
드라마가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그런지 정말로 지금 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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