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9화
* * *
요즘 워낙 철새처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지내고 있어서 오피스텔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거의 1시간 가까이 청소를 한 결과, 이제 제법 깨끗해진 것 같다.
띵동 띵동!
청소를 마치고 잠깐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타이밍이 상당히 좋은데?
인터폰으로 박시은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건물로 진입하는 도어를 열어줌과 동시에 바로 마중을 나갔다.
“....데스크 컴퓨터를 들고 오는 거였어?”
“네. 아무래도 노트북은 성능이 좀 떨어지잖아요.”
“너도 참 대단하다.”
“중요한 사냥인데 최상의 컨디션과 조건을 유지해야죠.”
모니터가 포함된 데스크 컴퓨터를 내 방으로 옮겼다. 설치하는 걸 도와주려고 하니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직접 움직였다. 이런 경험이 많은지, 회선을 연결하는 과정이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땀을 많이 흘렸네. 씻고 와. 그동안 내가 게임하면서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도 좀 만들게.”
“오오, 간식 좋죠.”
게임을 하면서 간식을 즐기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이 상황이 마냥 즐거운지 박시은이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기다리고 있을 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솨아아아.
간단하게 세수로 땀을 좀 씻어내라는 의미였는데 그녀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뭐,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처음 방문한 남자의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샤워를 할 줄은 몰랐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박시은이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주방으로 걸어왔다. 이미 옷도 다른 것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처음부터 샤워를 할 생각으로 준비해 온 모양이다.
“저기, 시은아... 여기서 샤워하는 거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어?”
“왜요?”
“그냥, 조금 놀라서.”
“전 그냥 상쾌한 기분으로 게임 하려고 샤워한 건데 별다른 뜻은 없어요. 부길마님은 다른 생각이라도 하셨나 봐요?”
“아니.”
“그럼 상관없어요. 간식은 다 됐어요?”
“거의 다 됐어. 먼저 가서 인터페이스 점검 해봐.”
“앗, 그걸 깜빡했네.”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은 박시은의 복장은 편하기는 하지만 그 만큼 맨살이 많이 드러나는 옷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직 게임을 즐기기 위한 최적의 환경만을 생각했다.
촤르륵.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박시은이 내 앞에 A4용지 몇 장을 펼쳐서 내밀었다. 글씨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중간 중간 지도로 보이는 그림도 있었다. 이게 뭔지는 짐작이 갔다. 그저 이런 준비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 갈 사냥터의 정보? 아직 홈페이지나 공략 게시판에서 공개할 시기는 아닐 텐데...”
“돈 주고 샀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양이면 한 명이 제공할 수준은 아니지 않나...?”
“당연히 여러 명에게 산 정보를 내가 직접 편집했죠. 철저하게 중복되는 정보만을 사실로 판단하고 정리했으니 신뢰성은 제법 높을 거예요.”
“허...진짜 대단하다...”
박시은, 그녀는 연기도 제법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데뷔했을 때부터 줄곧 톱스타가 될 배우라고 예상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데뷔 6년차인 그녀는 톱스타라고 하기에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작품 수.
지금까지 박시은이 출연했던 작품은 고작 3개가 전부였다. 그 마저도 데뷔는 조연이었고 그 이후에 출연했던 2작품 정도만 주연을 맡았다.
왜 이렇게 작품과 작품 사이에 공백이 긴지 알 것 같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게임!
게임에 대한 열정을 연기에만 쏟았다면 지금쯤, 유라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인지도를 가진 배우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고 지금의 모습이 현실이었다. 누군가 설득해서 될 일이었으면 진작 변했겠지. 이제는 소속사에서도 포기했을 것 같다.
어차피 박시은 정도 되는 여배우는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손해는 아니었다. 괜히 강제적으로 작품에 밀어 넣으려다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더 손해였다.
“준비 다 됐으면 출발!”
간식으로 준비한 소시지 하나를 입에 넣은 박시은이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며 새롭게 생긴 사냥터로 캐릭터를 움직였다.
***
준비된 공략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몬스터의 공격 패턴뿐만 아니라 어두운 지역을 아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3시간 정도 사냥한 것 같은데 경험치 오른 것 좀 봐요. 신규 던전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아직 정보가 많이 안 풀리고 난이도가 높아서 그렇지 한 달 정도만 지나도 플레이어들이 몬스터 수보다 더 많아질 걸?”
“그 전에 이득을 챙겨야죠. 장비가 좋아서 그런지 할 만하네요. 2층도 가볼까요?”
“그러다가 죽으면 오히려 더 손해인데...”
“몇 마리 잡아보고 힘들면 후퇴해요.”
“뭐, 몇 마리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좋아. 가보자.”
박시은의 말에 설득된 나는 결국 2층으로 진입해 보기로 했다. 나와 박시은의 캐릭터는 이제 고레벨에 속하기 때문에 캐릭터가 사망하게 되면 이틀 동안 사냥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사라지는 셈.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2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정지!]
화려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십여 명의 플레이어들이 진입로를 막아서며 위협했다. 주변에 몬스터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접근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나보다 먼저 박시은이 앞으로 다가가서 채팅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왜 길을 막고 난리세요?]
[2층부터는 출입이 허락된 플레이어가 아니면 못 지나갑니다. 1층에서만 사냥하도록 하세요.]
[???]
[아무리 ‘블러드 엔터’길드라도 못 지나갑니다.]
[아니, 그러니까 못 지나가는 이유가 뭐냐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에 화가 난 박시은이 키보드를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말이 짧아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괜히 죽어서 징징거리지 말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
[못할 것도 없지.]
퍽퍽!
가장 선두에 있던 녀석이 박시은의 캐릭터를 공격했다. 죽일 생각으로 달려든 건 아니고 2대 정도만 타격하고 뒤로 물러섰다. 명백한 경고의 표시였다.
[....지금 쳤어?]
[억울하면 너도 공격해보던가. 물론, 나를 건드리는 순간 전쟁이야.]
먼저 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격을 하지 못했다. 겨우 2대를 맞았을 뿐인데 체력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는 건 상대의 레벨과 장비가 보통은 넘는다는 의미.
무엇보다 인원수에서 차이가 심했다.
“쟤들 ‘백호’길드 맞지?”
“네, 맞아요.”
우리 서버의 플레이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길드였다. 가장 커대한 성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즉,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길드라고 할 수 있다.
인원수가 대략 2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서버의 랭킹 1등이 바로 ‘백호’길드의 마스터였다.
“시은아, 일단 물러나자. 어차피 사냥도 오래했으니 마을에 가서 정비도 좀 하고.”
“아씨, 짜증나...!”
괜히 여기서 더 시비가 붙으면 결과는 뻔했다. 캐릭터 사망으로 인한 경험치 손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겨우 분을 삭인 박시은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 함께 마을로 복귀했다.
일단은 이렇게 물러나긴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했다. ‘백호’길드 놈들이 가장 많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을 자기들 마음대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치되면 서버에서 2번째로 강한 세력인 우리 길드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솔직히 길드의 세력이 커지고 작아지는 건 관심 없지만, 새롭게 주어진 게임의 컨텐츠를 즐기지 못 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건웅과 상의를 해서 뭔가 대책을 좀 세워야 할 것 같다.
***
후르릅!
라면을 흡입하듯이 빨아들이고 젓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은 김건웅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형, 전쟁 준비하자.”
“어차피 경쟁 대상이니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길 방법은 있고?”
“이건 공성전이 아니잖아. 우리가 전체 인원수는 적지만 같은 인원수가 붙는다면 훨씬 더 강해. 불리할 건 없지.”
이 녀석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공성전처럼 정해진 시간에 모든 전력이 집결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반적으로 레벨과 장비가 더 좋은 우리 쪽이 전투에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그런데 ‘백호’길드의 마스터는 어떡할래?”
어차피 랭킹 10위권 안에 드는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비슷했다. 명예로운 위치에 올라섰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랭킹 8위를 차지하고 있는 김건웅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레벨만 비교하자면 그렇지만 핵심은 바로 장비의 차이였다.
김건웅 역시, 내가 알기로 거의 10억 가까이 현질을 했기 때문에 최상급의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백호’길드의 마스터는 그것을 초월했다. 던전 내부에서 소수의 인원이 장기전으로 펼쳐지는 전투에 그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김건웅이 씨익 웃으며 휴대폰 액정을 바라봤다.
“어떡하긴, 나도 추가로 현질을 더 해야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오오, 재밌겠는데.”
웃기게도 ‘백호’길드의 마스터와 김건웅의 캐릭터는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무식하게 대검을 휘두르는 두 캐릭터가 맞붙으면 참 볼만하겠다. 김건웅이 ‘백호’길드의 마스터를 상대해준다면 나와 박시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형도 이제 현질을 좀 더 하는 게 어때? 랭킹 100위 안에 들었으니 레벨은 충분하잖아.”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어. 최대한 버티면서 치료하려면 방어력이 중요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초월의 룬’을 구해볼까 싶어.”
“헐,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구나?”
‘초월의 룬’은 서버에 몇 개 존재하지 않는 아주 귀한 보석이었다. 기능은 정말 단순하다.
어떤 종류의 방어구라도 이 보석을 끼워넣으면 ‘모든 직업이 착용 가능’으로 옵션이 바뀌게 된다. 즉, 탱커 전용 방어구를 힐러인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김건웅과 길드 회의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현질을 주관하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초월의 룬’이 올라왔는지 확인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매매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지만 엄청나게 비싼 가격 때문인지 어제까지도 계속 매물이 있었다.
“지금도 있네.”
[초월의 룬, 저렴하게 팝니다. (5억) 가격 협상은 불가하며, 창고에 있는 잡템을 서비스로 드립니다. 장난 사절, 진짜로 구매할 사람만 연락 주세요.]
워낙 사기적인 옵션을 가지고 있고 서버에 몇 개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이라서 귀하다는 건 알지만 정말 비싸다.
구매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걸 하나 사용하더라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투구, 갑옷, 장갑, 부츠에 들어갈 룬을 모두 구매하려면 총 20억...”
제대로 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모든 부위의 방어구에 사용해야 했다. 전부 같은 가격에 판매하지는 않겠지만 이게 거래되면 아마 시세로 정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20억이라는 금액은 아무리 나라도 좀 버거웠다. 아쉽지만 이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톡이 왔다.
[김예나 : 너, 다음 주에 생일이지? 선물 뭐 갖고 싶어?]
[박성우 : 갖고 싶은 게임 아이템이 있긴 있는데 많이 비싸...]
[김예나 : 게임 아이템이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서 얼만데?]
[박성우 : 20억.]
[김예나 : 음, 게임 아이템 치고는 조금 비싸긴 하네.]
[박성우 : 그냥 같이 저녁이나 먹자.]
[김예나 : 뭔 소리야. 그래도 생일 선물인데 그것도 못 사줄까봐?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박성우 : 그런 뜻이 아니라...]
[김예나 : 됐어. 무조건 사줄 테니까 어떻게 구매하는 건지 방법이나 알려줘.]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고민을 하고 있으니 예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게임 아이템을 구매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고 결국 나는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예나는 일단 사이트에 올라온 ‘초월의 룬’을 먼저 구매하고 추가로 3개를 더 매입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