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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메이커-130화 (130/150)

〈 130화 〉 130화

* * *

붉은색 피가 곳곳에 낭자하고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안타까움에 대한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긴장감’이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다.

[개새끼들, 물약 사와서 다 죽여 버린다!]

[선제공격을 했다 이거지?]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이 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의 현상에 불과했기에 이런 협박 따위는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추가 현질을 통해서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는 김건웅과 그 뒤에서 활을 쏘며 지원해주는 박시은. 그리고 ‘초월의 룬’을 모든 방어구에 끼워 넣고 완전 괴물이 되어버린 내가 한 팀을 이뤄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단 3명이서 10명이 넘는 ‘백호’ 길드의 문지기들을 죽이고 신규 던전의 2층을 개방시켰다. 물론 일시적인 상황일 뿐이다. 곧 있으면 지원군들이 도착할 테니까. 특히 랭킹 1위인 길드 마스터가 포함된 인원이라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 무시하고 빨리 2층으로 진입하자.

­ 잠깐만, 동영상 촬영 좀 하고.

­ ......?

­ 게임 방송하는 놈들에게 이 영상을 넘기려고.

하여튼,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나는 김건웅의 말에 감탄하며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녀석들을 더욱 자극했다. 최대한 많은 욕설을 영상에 담아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백호’ 길드가 신규 던전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녀석들은 서버의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항하는 우리 길드의 행보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욕하는 모습까지 담겨 있으면 비난의 정도는 더욱 거세지고 우리를 지원하는 길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신규 던전의 2층.

여기는 정말 신세계였다. 물론 우리의 레벨과 장비가 워낙 좋아서 그렇겠지만 경험치가 오르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고가의 아이템을 상당히 높은 확률로 얻을 수 있었다. ‘백호’ 길드가 욕을 먹으면서까지 왜 다른 플레이어들의 진입을 차단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정신없이 사냥을 하고 있을 때였다.

­ 저, 저거 뭐야...?

­ 미친놈들....

­ 튀자!

어마어마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우리를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백호’ 길드원들이었다. 적어도 50명은 넘어 보이는데 이 던전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고렙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서 모두 동원된 모양이다. 특히 가장 선두에서 대검을 들고 있는 녀석은 정말 위험했다.

­ 저 새끼랑 한번 붙어 보고 싶은데...

­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1:1로 싸워주겠냐?

­ 응, 나는 정정당당하게 붙어주지.

­ 됐고, 빨리 튀자. 포위되면 무조건 죽는다.

­ 으, 분하다...

랭킹 1위에 등극한 상대 길드 마스터와 한판 붙고 싶어 하는 김건웅을 말리며 도주를 시작했다. 이 신규 던전은 경험치도 많이 주고 좋은 아이템도 잘 나와서 좋긴 한데 가장 큰 단점이라면 마을로 귀환을 하거나 로그아웃을 할 수 없다는 것.

지정된 장소까지 도달해야 가능한 기능이었다.

피슝! 피슝!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박시은이 도망치면서도 뒤에서 쫒아오는 ‘백호’ 길드 녀석들에게 화살을 쏘며 견제했다. 도주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을 가장 분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실수라도 하면 잡힐 수 있다고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 어엇!

­ 그러니까, 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제수가 없게도 추격 중인 녀석들에게 활을 쏘던 박시은의 캐릭터 앞에 몬스터 몇 마리가 동시에 생성되며 길이 차단됐다. 몇 대 때려서 죽일 수 있는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 젠장, 그냥 가세요...

­ 길드원을 버리고 도망 갈 수는 없지!

실제로는 겁도 많은 김건웅이 폼을 잡으며 대검을 꺼냈고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나도 혼자 도망 갈 수가 없잖아...

어설픈 동료애 때문이 아니라 힐러인 나 혼자 이동하다가는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박시은을 지원하기 위해 눈앞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우리는 ‘백호’ 길드 녀석들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독안에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녀석들은 곧바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채팅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2층에 진입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김건웅도 곧바로 채팅을 쳤다.

[남자 새끼가 쪽팔리지도 않아? 마스터끼리 한판 붙자!]

[자신 있냐?]

[당연하지!]

내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김건웅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랭킹 1위라고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다. 상황이 어찌됐건 랭커들의 전투는 제법 재밌다. ‘백호’ 길드 녀석들이 넓게 퍼지면서 전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방해가 되는 몬스터들의 진입까지 차단해주면서.

챙챙!

어느 정도의 컨트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직업 특성상, 레벨과 장비가 훨씬 더 중요한 포인트였다. 결국, 같은 레벨과 비슷한 수준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결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애송이, 잘 놀았다. 모두 공격!]

[......]

‘백호’ 길드의 마스터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50여명의 길드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우리 3명의 캐릭터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

치지직.

현란하게 손목 스냅을 이용해서 웍을 흔들었다. 기름에 뭔가가 튀겨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평소에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관없기는 하지만...

“넌,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게임을 하려고 하는 거냐...?”

“최상의 환경에서 해야지 집중이 더 잘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왜 우리 집이냐고.”

“부길마님이 해주는 요리도 너무 맛있고 헤드셋으로 대화를 하는 것보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 호흡을 맞추는 게 반응 속도가 더 빨라요.”

“겨우 몇 초 차인데...?”

“1초 차이로 인해서 캐릭터가 사망하기도 해요. 특히, 지금처럼 ‘백호’ 길드와 전쟁 중일 때는 더더욱!”

“........”

신규 던전의 2층에서 ‘백호’ 길드에 의해서 캐릭터가 죽임을 당한 이후로 박시은이 게임을 할 때마다 내 오피스텔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점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어제는 거실 소파에서 잠들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여기가 너무 편해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는 건 좀 아니잖아.”

“부길마님은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으세요?”

“싫은 게 아니라... 가끔은 좀 불편하지. 내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저 없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활동 하시면...”

“원래 혼자 있을 때,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그래도 돼?”

“부길마님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

오로지 게임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걸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내뱉은 말인데, 역시나 그녀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한 답변을 했다. 그래도 조금은 망설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살짝 당황스럽다.

그렇다면 조금 더 자극을 줘볼까.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남자는 말이야 혼자 있으면 가끔 야동 보면서 욕구 해소도 좀 해야 하는데 그게 많이 불편할 것 같아.”

“그건...”

“네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모른 척할 테니, 방문 잠그고 하세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박시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 또한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그럼요. 자위 하겠다는 뜻이잖아요. 뭐, 남자라면 그게 정상이겠죠.”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진 것도 아니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시은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오히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사냥이나 가자.”

“몬스터도 잡고 ‘백호’ 길드 놈들도 보이는 대로 처리해요.”

“당연히 그래야지.”

더 이상 신규 던전은 ‘백호’ 길드의 전용 사냥터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항상 많은 인원수가 몰려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내가 포함된 소수의 게릴라 전투에 상당히 고전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건웅이 촬영한 영상이 유명한 BJ에 의해서 알려지면서 다른 길드에서도 같이 대항하기 시작했다.

“어엇, 전방에서 몬스터가 때로 몰려와요!”

“저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진짜 사기 캐릭터가 따로 없네요.”

예나에게 ‘초월의 룬’을 생일 선물로 받은 이후에 최고급 방어구를 구매하기 위해서 내 돈으로 10억 정도의 현질을 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만큼 지금 내 캐릭터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서버에 존재하는 ‘초월의 룬’을 내가 대부분 구매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 누구도 이런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탱커와 힐러의 역할을 한 명이 하고 있으니 경험치 이득이 엄청나요. 아이템 획득으로 얻은 수익은 제가 3분의1만 가져가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저기 보이는 놈들이야. 집중 해.”

“좋아. 제대로 복수해 줘야지.”

사냥 중에 마주친 ‘백호’ 길드를 보자마자 박시은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나 역시 녀석들에게 빚이 있으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달려 나가며 녀석들을 도발했다. 이어서 박시은이 활을 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사냥하던 다른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지원했다.

‘백호’ 길드 녀석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박시은의 입 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누가 보면 작품이 대박이라도 난 줄 알겠다. 복수에 성공한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후아, 너무 좋다. 그런데 부길마님이랑 이렇게 호흡 맞추다 보니, 이제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같이 파티 못 할 거 같아요.”

“음, 미안해서 어쩌나. 이제 나는 좀 쉬어야 하는데.”

“버, 벌써요...? 아직 시간 얼마 안 됐는데...”

“아까 말했던 거 잊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박시은.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그걸’ 지금 해야 할 것 같아서.”

“아,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야.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냥 다른 플레이어들이랑 파티 맺고 사냥해.”

“사냥 효율이 다른데 그냥 기다렸다가 부길마님이랑 할래요.”

“뭐, 맘대로 해.”

박시은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펴며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컨디션을 위해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풀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좀 다를 거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3시간이 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똑똑똑!

기다리다 지쳤는지, 결국 박시은이 방문을 노크했다.

“부길마님! 아직 덜 끝났어요?”

“오늘은 힘들 것 같으니까 게임은 너 혼자 해.”

“아, 안 되는데...”

박시은의 목소리에서 곤란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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