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029.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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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 유리 → 모래]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댄다. 렌나는 가슴을 꼭 붙잡고, 일단 병상에 앉았다.
쩌저적 소리를 내며 유리창이 갈리지기 시작한다. 이제 몇 초가 지나면 굉음을 터뜨리며 박살 나겠지.
그때까지 세 호흡, 렌나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로 앞으로 벌어질 사태와 스스로의 대처.
창문이 파괴되면…… 그곳으로 세혁을 비롯한 구출대가 나타나는 걸까?
출입문 바깥에는 A랭크 각성자 시라사키가 있다. 파열음을 듣는 순간 치료실로 들어서겠지.
렌나도 합세해서 맞서 싸워야 할까. 아니면 창문이 깨지자마자 탈출?
아냐아냐. 렌나의 조치가 필요했다면 지시를 내렸겠지. 상황이 흘러가는 그대로 따라가자.
결심한 순간, 와장창창! 유리가 폭발했다.
곧바로 구출대가 들이닥치리라고 예상했건만…… 잠시간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라사키가 렌나를 복도로 내쫓고 자신이 치료실을 틀어 막았다.
“힉.”
밀려나간 렌나가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이었다. 창문 바깥으로, 푸른 하늘을 아카데미 제복의 소녀가 질주했다.
지난번에 마주한 학생회장의 시녀였다. 렌나가 전화를 건 상대이기도 했다. A랭크 각성자랬지.
라우라가 공중에서 한 바퀴를 빙글 회전하며, 다섯 가닥의 장침을 흩뿌렸다. 이미 검을 뽑은 시라사키는 한 발도 허용하지 않고 모두 튕겨냈다.
라우라가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가, 마력으로 하늘을 걷어차 떠올랐다. 다시 다섯 가닥. 이번에도 시라사키는 모조리 흐트렸다.
패턴을 파악한 시라사키가 반격을 준비했다. 허리춤의 두 번째 검으로 발도 태세를 갖춘다. 라우라가 튀어 오르는 타이밍에 맞추어서…… 검기를 쏘아 보낸다.
캉! 캉캉캉! 허리춤의 단검을 뽑은 라우라가 검기를 흘려 보냈다. 순간, 진입할 수 있는 틈이 벌어졌다.
그러나 라우라는 내부로 들어서지 않았다. 대신 서너 가닥의 장침을 흩뿌렸다. 그 대목에서 뒷걸음질 치던 렌나는 깨달았다.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가? 어째서?
“아!”
싸워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렌나가 탈출하면 전부 끝난다. 라우라는 그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렌나는 숨을 삼키고 뒤를 돌아섰다. 두 걸음을 달리는 그때였다. 텁, 하고 누군가가 렌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려는데…… 이번에는 입도 콱 잡아챘다. 소리내지 말라고.
“읍읍! 읍!”
렌나라고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렌나도 사장님을 위해 싸울 거야! 그리고 렌나는 사장님 거라서 맘대로 손대면 안돼!
렌나가 앙 하고 입을 틀어막은 손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알아차렸다. 가죽 장갑. 큼지막한 손가락 크기.
“어우. 세게도 깨무네.”
깜빡깜빡.
깜빡깜빡.
“사장님……?”
“그래. 네 사장님이다.”
물렸던 손가락들이 렌나의 볼을 잡아 당겼다.
아파서, 렌나는 으헤헤헤헤 웃어버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돌아가야지. 승급하려면.”
넵! 하고 렌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 남자에게 함부로 대해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평생, 그의 곁에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장난감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렌나의 몸과 마음은 그렇게 확신해서, 간절히 바라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혁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좋아하는 손길이 렌나의 등을 쓸어준다. 이번에는 아프지 않고 따스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어루 만져지는 동안 렌나가 달콤한 한숨을 토했다.
***
스무스하게 관사를 빠져 나왔다.
곧장 가까운 동문으로 향했다. 녹슬어서 제대로 열리지 않는 폐쇄문에 렌나의 가슴이 끼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나마도 잠깐 낑낑거린 끝에 빠져나올 수 있었고.
“됐……다!”
공관을 완전히 벗어났다. 무사히 대한민국의 학원도시에 안착했다.
달리 말하면, 렌나를 구속할 수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흐와아아…….”
안도해버린 렌나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도 곁에 자리잡고 모두에게 소식을 전했다. 렌나를 무사히 데리고 탈출했다고.
불량서클 2인방과 시즈카가 이쪽으로 직접 찾아오겠다는 걸 한사코 만류했다. 괜히 함께 있다간 트집 잡힌다. 이유야 어쨌건 공관 침입은 불법이니까.
대신에 가게에서 재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점에서 통신을 종료해버린 라우라만 빼면 모두가 대찬성이었다.
“파티라도 벌일까. 단 거 땡기네.”
과자 있으면 달라는 뜻이었지만, 렌나는 어색한 미소만 흘려 보냈다. 눈동자도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등 뒤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깜짝이야. 공관 폐쇄문에 산발을 한 여자가 기대고 서 있었다. 누군가 싶었다가, 이내 깨달았다. 장학관이다.
잡아가려는 건…… 물론 아니다. 상황 종료되고 망연하게 쳐다보는 꼴이었다. 닭 쫓던 개 같은 꼴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에게 개라니 나쁜 표현인가. 꼬우면 납치범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런 눈빛을 돌려줬지만 장학관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게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이야기가 있으신가 봐요.”
렌나가 중얼거렸다.
“너에게는 어떤 사람이야?”
“잘…… 모르겠어요.”
렌나는 어떻게도 단언하지 못했다. 평가가 엇갈리는 듯했다. 오랫동안 렌나를 억압했지만, 단순한 폭력의 분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보호자가 어린아이의 행동을 제약하는 개념에 가까웠다고 렌나는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게임은 하루에 1시간씩만 즐겨라. 밤 10시 전에는 자라. 그런 느낌.
특히 이번에는 여러 상황이 안 좋게 맞물렸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뭐랄까. 진짜 뭐라고 해야 할까.
문득, 이대로 끝나도 좋은가 싶었다.
아니아니아니. 장학관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사실은 이 녀석도 좋은 녀석이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녀의 방식은 잘못됐다. 지금껏 렌나에게 부당한 지시를 가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개쓰레기이다.
하지만 잘잘못을 떠나서…… 렌나의 안에 크게 자리잡은 여자였다.
말없이 사라지는 방식으로는 후회가 남는다. 그릇된 과거라도 똑바로 마주보고 청산할 필요가 있다.
그따구로 생각한 근거는 청아 사장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난 그녀의 제안이 훌륭하다고 본다.
반항하지 못하는 아이는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할래?”
렌나에게 던져진 질문이었다. 녀석이 몇 박자 늦게 알아듣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번에는 내가 곁에 있다. 그 이야기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기 전에 렌나는 스스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터벅터벅. 진이 다 빠진 걸음으로 렌나가 폐쇄문에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1미터도 안 될 때까지.
그때도 장학관은 옴짝달싹 않았다. 선 채로 죽었나 싶었다만 눈동자만큼은 렌나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렌나가 꾸벅, 고개를 숙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학관의 동공은 렌나의 머리와 함께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장학관님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알고 있구나.”
원망은 입에 담지 않았다.
저주도, 조롱도 무엇도 아니었다. 감사 인사였다. 잘못된 방식이었을지언정 자신을 키워준 또 다른 스승에 대한 감사 인사.
혹은 작별 인사인지도 모르겠다.
“렌나는 이제…… 장학관님에게서 독립할 거예요. 독립해서, 연금술사가 됩니다. 관련해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여쭤봐 주세요.”
장학관이 코웃음을 흘렸다. 아마도 자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었으리라.
어떻게 대처할까. 성질머리를 봐서는 쌍욕이라도 퍼붓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내 착각이었다.
“학비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연금학부 연구생이 될 거예요. 선우양 교수님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쉽게 연구생이 될까?”
“추천서도 받을 거예요. 렌나가 가게에서 일하면서 어떤 물건들을 만들어 냈는지. 제조식을 얼마나 잘 쓰는지. 전부 적어서, 교수님게 제출할 거예요."
굉장히 견실한 질의응답과 미래 설계가 오가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는 뜻이겠지.
약간은 질투 날지도 모르겠다.
“생활비는?”
“사장님의 가게에서 열심히 일할 거예요. 저축도 해서, 장기적으로는 동업자가 될 거예요.”
장학관이 나를 노려봤다. 딸내미를 채가겠다고 나타난 놈팽이를 대하는 아버지의 시선이었다. 장학관은 여자이지만 말이지.
어쨌거나 동업자라뇨. 금시초문이다만, 모르쇠로 일관할 타이밍은 도저히 아니로군.
나는 장학관에게 설명했다. 이미 계약서를 썼다고. 교수와의 면담도 내가 작성하게 될 추천서 이야기도 전부 사실이라고.
어쩌면 그걸 노리고 동업자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렌나. 무서운 아이.
“흐음.”
장학관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만, 아니었다. 오히려 난도가 높아졌다. 장학관은 더욱 현실적이고 당면한 영역의 심사를 개시했다.
“꼭 대인전 3위를 따놓은 것처럼 지껄이는구나. 막상 8강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탈락하면 어떡할 거지?”
“그래도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학부 성적은 받아야 할 만큼 받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과목을 따로 공부합니다.”
“도중에 재능의 벽에 충돌할 수도 있다.”
“좋은 스승님이 있으니까, 금세 뚫고 지나갈 수 있어요.”
“그밖에도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다.”
“렌나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장학관은 표정을 구겼다.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어쩔 테냐. 갑자기 다시 헌터로 돌아오고 싶다든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일에라도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렌나는 침착하게, 흐트러짐 없이 답했다.
“다시 노력할 거예요. 헌터가 되기 위해서.”
그 대답에 장학관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에 경도된 것처럼 보였다.
분명 전혀 다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렌나라면, 장학관이 알고 있는 어린아이라면 ‘여기서 다시 꿈이 바뀔 리는 없어요!’라고 현실적이지 못한 대답을 내놓았을 테니까.
하지만 봐라. 렌나는 살면서 몇 번이고 장래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게 됐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도, 맞은편에 있는 장학관보다도 뚜렷한 시선으로 스스로의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장학관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고, 렌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학관을 꼭 껴안았다.
“렌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 것, 타지에서 외롭지 않도록 자주 이야기를 걸어주셨던 것, 아카데미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밤새서 힘써 주셨던 것, 장학관님의 노력을 알아요. 그런 장학관님을 마치 부모님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렌나는 이제 어른이에요. 뜯어 말리고 비웃어도, 속을 썩히더라도, 마음이 시키는 방향으로 가야만 해요.”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장학관이 동작을 멈추었다.
대신, 그녀는 렌나를 꼭 끌어 안았다. 이게 마지막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겠니.”
넵, 하고 렌나는 장학관의 팔을 풀어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뜯어가며. 자신을 묶어놓는 마지막 족쇄를 스스로의 손으로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장학관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져간다. 그럼에도 렌나는 기죽지 않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후회하지 않아요. 나중에 커서, 지금의 렌나를 마주하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때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끝까지 고집 부려줘서 다행이었다고. 어른들께, 단 한번만이라도 렌나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뭔지 소리쳐줘서 자랑스럽다고.”
이제 가세요, 라고. 렌나는 매몰차게 장학관을 밀쳐냈다. 그리고 쪼르르 내게 달려들었다.
한 걸음 앞에 선 렌나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시원하게 말씀드렸어?”
타협하지 않고.
적당히 포기하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이렇게 저렇게 할 걸 뒤늦게 개탄하지 않게.
지금 이 순간 렌나가 가진 모든 진심을 남김없이 쏟아내서, 실컷 반항했나.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질문에 렌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다 말했어요!”
“기특하다! 가르친 보람이 있다!”
“으헤헤헤……. 넵! 렌나는 가르치는 맛이 있는 아이예요!””
서로 바보처럼 웃어버린 직후였다. 렌나의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에, 에에, 하면서 닦아내리려는 손을 치워냈다. 내가 대신, 한쪽 손으로 앞머리를 떼어내고 눈가를 훑어줬다.
동시에 성장을 지켜본 감상을 들려줬다. 잘했어. 정말로 잘했어, 라고. 앞머리를 붙들었던 손은 이제 렌나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게 실수였다면 실수였다. 잘 했다고 칭찬하는 그 순간에, 주르륵주르륵 눈물 자락이 쏟아졌다.
목 안쪽으로부터 뜨거운 헐떡임이 쏟아졌다. 히끅, 헤끅, 두 번 리드미컬하게 딸꾹질한 렌나는 이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잡아 당겨서 끌어 안는다. 한손은 허리를 꼭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등을 쓸어 내린다. 하지만 몇 번을 거듭해도 눈물은 더 거세게 쏟아졌다.
그 모습을 황망하게 지켜보던 장학관이 일본어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응원인지 푸념인지 알 수 없었다.
***
이번 사태의 마무리라고나 할까.
사실 마무리라는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 공관에서 탈출했을 뿐이지 승급이 결정된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중간 점검이라고 해두자. 이번 사태의 중간 점검이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렌나와 함께 가게로 돌아갔다. 호사스럽지만 이번만큼은 택시를 이용했다.
그러는 내내 렌나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떼어 놓으려다가, 오늘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다행히 가게에 도착하고 나서는 놔주었다.
출입문을 열자마자 빵빠레가 터졌다. 고양이귀 머리띠를 장착한 일리냐의 소행이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알몸 등장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폐점 상태에서 단촐하게 과자와 음료로 파티를 열기로 했다. 사장인 내가 쐈다. 1층에서 원하는 만큼 가져 오라고.
일리냐는 컵 짜파게티와 사이다, 하윤은 참깨스틱, 시즈카는 새우깡과 라무네(이 인간이 발주해 달라고 졸라서 시켰다.), 렌나는 칙촉 세 박스를 골랐다.
참고로, 렌나는 원래 많이 먹는다. 전부 가슴으로 가니 괜찮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내가 감자칩 몇 개를 집어드는데…… 갑자기 신호가 왔다. 전신의 근육이 톡 쏘는 듯한 알싸한 느낌. 마력 폭주였다.
다섯 병밖에 안 마셨으니까 어떻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잠시뿐이었다. 거의 몇 분만에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일리냐와 하윤이 나를 소파에 짐짝처럼 실어 나른 뒤, 소녀들끼리의 과자 파티가 시작됐다.
이후의 기억은 다소 흐릿하다. 일단 나도 끼워 달라고 한참을 칭얼거렸던 건 분명하다. 하윤이가 시끄럽다고 타박을 줬고.
가게에 아주 악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렌나의 경우 곁에 다가와서 자장가를 불러줬다. 덕분에 코코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가게 불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그리고 렌나의 무릎이었다.
좀 뜬금없나.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일어나 보니 모두가 돌아간 가운데 렌나만이 남아서 잠든 나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 얼굴을 붉힌다, 라는 고전적인 상황은 성립하지 않았다. 렌나의 커다란 젖가슴이 시야를 모조리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몽사몽한 내가 몸을 일으키려 들자, 렌나가 어깨를 꽈악 짓눌렀다. 여전히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마주치려면 마주치는 각도가 있을 텐데. 부끄러워서 감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잘…… 주무셨나요?”
“어, 어, 응.”
무슨 상황일까. 어째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 따끈따끈한 무릎 베개를 제공하는 중일까.
답을 찾으려면 렌나가 최근 겪었던 사건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
우선, 믿었던 장학관에게 납치됐다. 결과적으로 탈출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호자와도 같았던 존재와 결별했다.
생활의 밑천이었던 정부 지원금도 더는 받아내지 못한다. 앞으로의 삶은 스스로 헤쳐 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장학관은 마음을 놨다고 해도 그 윗선까지 감화됐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사소한 방해 공작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음음.
간단하군. 혼자 있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나 같아도 그랬겠다.
암만 그래도 대인전이 코앞인데. 밤에는 맘놓고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도부나 학생회에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니, 렌나는 대번에 괜찮다는 대답을 돌려줬다.
“그 부분은…… 문제 없어요. 대인전이 있기까지 댁에 머물러도 좋다고, 학생회장님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아하.”
난 또 뭐라고. 새론이가 다 해결해 놨구나.
……예?
당황하는 내 표정을 가슴 때문에 보지 못하고, 렌나는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학생회장님이 건강 조심하래요.”
“그건 알겠는데…….”
새론이가 갑자기 왜 튀어 나오냐고.
우연히 가게를 들렀다가 자초지종을 듣게 됐나. 아니면 라우라가 발설했는지도.
그렇다면 새론이와 렌나는 도대체 무슨 대화를 왜 나눈 거야. 뭐가 어떻게 진행돼서 렌나를 이틀간 식객 삼아준다는 건데요.
“허어.”
뭐가 됐건 또 폐를 끼치고 말았다. 나 자신도 아니고 내 직원을 집에 들여 보호해주기로 결정했다니. 이 은혜를 또 어떻게 갚아야 할지.
평범하게 한탄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무튼 렌나는 안전지대를 찾았다는 거잖아. 밤이 무서워서 내가 깨어나길 기다릴 이유가 있나.
“사장님.”
후우, 하고 렌나가 길게 심호흡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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