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029. 좋아해요 (3)
* * *
한편, 1층에 홀로 남겨진 렌나는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가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바닥을 쓸고 닦고…….
가게 앞 낙엽도 치우고…….
포스기 시재도 체크하고…….
쓰레기통 비우고…….
두분은 무슨 사이일까…….
“헙.”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던 렌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전부터 궁금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사장님과 전세계적 유명인인 학생회장님.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당사자인 세혁이 밝히기로는 그냥 친구라고 그랬다. 좀 오래된 친구.
렌나도 처음에는 그럴 수 있겠거니 싶었다. 그렇지만 파면 팔수록 이상한 구석이 많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자면, 공방 청혁의 인수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은 학생회장이 융자해줬다고 한다. 단순한 친구끼리 선물할 금액은 한참 넘어섰다.
심지어 학생회장은 소규모 개인공방에 불과한 세혁의 가게에 온갖 특혜성 계약도 체결해줬다. 납품되는 물자의 단가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했고, 품질은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
자금 지원이야 새론의 경제 사정이 워낙 여유로우니 그렇다 쳐도…… 경영책임이 있는 계열사를 이용해 혜택을 몰아주는 건 리스크가 크다.
그럼에도 세혁에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건 학생회장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뜻 아닐까?
예를 들자면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든가.
“망상…… 일까요.”
혼자서 엄한 생각에 빠졌다가 폭주 내지 급발진하는 게 렌나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경우가 다르다. 렌나는 새론과 세혁의 다정한 모습을 자주 지켜봤으니까. 특히 세혁을 대하는 새론의 눈빛은 남다르다.
함께 있는 동안에는 모든 관심을 세혁에게 집중하는 그 눈빛. 아이를 지켜보는 마망의 다정함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욕망도 한껏 담겨 있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
아니 어쩌면, 렌나에게는 숨기고 몰래 사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상할 것도 없지.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일리냐와도 은밀한 관계를 쌓았던 세혁이니까, 매력적인 소꿉친구와 비밀연애도 가능하다.
혹시 두 사람이 2층에 있는 지금도…… 잠든 사장님의 바지를 벗겨 내려서…… 학생회장님이 올라타는 자세로…… 여자아이로서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지도…….
“힝.”
갑자기 마음이 아파졌다.
일리냐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차별점을 어필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학생회장과는 여러 의미에서 포지션이 겹친다.
아니지. 겹치는 걸 넘어서서 완전한 상위호환이다.
렌나가 쉽게 응석부리고 의존하는 성가신 타입인 반면, 학생회장은 돈도 많고 포용력도 뛰어나다. 여성성도 압도적이다.
학생회장이 품에 있는 상태에서 별식의 느낌으로 일리냐를 픽한다면 모를까, 렌나를 굳이 덤으로 데리고 살 것 같지는 않다.
이상, 자기평가가 극도로 낮은 렌나의 상황 판단이었다.
“지금이라도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렌나 양?”
“힉?!”
평소처럼 음습망상의 심지로 파고들던 도중, 학생회장의 목소리가 의식을 일깨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렌나의 코앞에 새론이 서 있었다.
“잠깐 올라 올래요?”
“넵…….”
별다른 저항없이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 렌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학생회장의 뒷태를 살폈다.
큼지막하게 발육한 골반과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단차를 밟을 때마다 보기 좋게 씰룩인다.
마치 모델이 걷는 듯하다. 어색하고 불편하게 걷다가 발걸음이 꼬이기 일쑤인 렌나와는 천차만별이다.
보기 좋게 재단한 검은색 세일러복도…… 렌나의 펑퍼짐한 양산형 저가 제복치마와는 격이 다르다.
여성으로서 한참 뒤쳐진다는 열등감에 렌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2층에 도달했다.
세혁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다. 혹시나 싶어서 하반신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뭔가 저지른 흔적은 없다.
거기까지 깨닫고 렌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또 상스러운 망상을 저질렀다.
학생회장님처럼 품위 있는 여성이 잠자는 세혁을 범할 리가 “좋아해요.”
넵?
“……넵?”
“이 아이 좋아해요.”
깜빡깜빡.
분명 학생회장의 입술이 움직였는데. 그렇다면 방금 대사는 새론이 입에 담았다는 뜻이다.
이 아이를 좋아한다. 이 아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세혁이요.”
그렇구나.
학생회장님은 세혁이를 좋아하시는구나.
“치, 친구로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남자로서요.”
학생회장이 세혁의 머리맡에 앉았다. 렌나는 쭈뼛쭈뼛하다가 맞은편에 의자를 배치…… 하는 도중 꽈당 자빠졌다.
보다시피 렌나는 당황하면 스텝이 완전히 꼬인다. 반면 학생회장의 동세는 정교하게 렌더링한 애니메이션처럼 부드럽다.
스스로의 음침함과 대조되는 학생회장의 늠름함에 렌나는 울상을 지었다가…… 어떻게든 일어섰다. 치마에서 먼지를 탁탁 털어내고 착석한다.
“남자로서…… 좋아한다고 하시면…….”
“말 그대로예요.”
새론이 싱긋 어른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잠깐 세혁을 돌아보는 새론의 뺨이 부자연스럽게 붉다.
설마설마했지만, 여기까지 치달아서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다. 학생회장 유새론은 정말로 세혁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 그러면…….”
꼴깍, 하고 렌나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소위 모쏠아다인 렌나라도 지금의 흐름은 읽을 수 있다. 새론은 성가신 도둑고양이 렌나를 질책하고 세혁에게서 떨어뜨릴 심산이다.
아니나 다를까.
“받아요.”
새론이 두툼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전개 그대로였다.
이제 학생회장이 날카로운 호통을 날리겠지. 렌나의 귓가에 쩌렁쩌렁한 가상의 일침이 맴돌았다.
——재벌 2세에 여자력도 만점인 유새론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딜 세혁을 넘보는 건가요? 이거나 먹고 떨어지세욧!
꾸우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금전에 팔아치우리라고 예상했다면 큰 오산이다.
사장님은 렌나의 꿈을 옹호해주고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준 첫 사람이다.
렌나가 암만 흙수저래도, 새론이 얼마만큼 강력한 금융치료를 가한대도 렌나는 혹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각오했는데, 새론이 스스로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현금 다발이 아니었다. 서류였다. 정확히는 상장. 겉테두리에 예쁜 금장을 둘러치고,「학생회장 특별 표창장」이라는 표제가 굵직한 궁서체로 박혀 있다.
그보다 한 단 아래에 수상자의 성명이 적혀 있다. 아라가키 렌나(?? ?). 아라가키…… 렌나?
어안이 벙벙해서 새론을 올려다 본다.
새론은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줬다.
“저번에 게이트 공략하면서 세혁이를 지켜줬다면서요.”
벨라 박사의 실험실. 그때 게이트 보스의 스탯을 잘못 입력해서 세혁을 다칠 뻔하게 만들었지.
렌나는 컨디션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스킬을 써서 세혁을 구해냈고, 결국 마력폭주로 의식을 잃었다.
이후에는 입원했다가 공관에 납치됐고…… 지금에 이르렀다.
“세혁이의 정실로서 답례라고 할까요.”
새론은 그 공적을 치하하려는 것이다. 렌나를 내쫓으려는 게 아니고.
“회, 회장님…….”
우으으, 하고 울어버리려는 렌나의 어깨를 회장이 다독였다. 은근슬쩍 정실 자리를 합의해버린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학생회장의 노림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생회장은 우아하게 사정을 풀이했다.
“실은요. 좀 질투했어요. 제가 찜한 아이인데, 귀하게 키웠는데, 렌나 양을 포함한 다른 여자애들이 손대니까.”
회장이 잠든 세혁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마치 정성껏 길러낸 아이를 대하듯 다정하게.
“그래도 렌나 양이라면…… 꿈이 걸린 순간에도 세혁이를 우선시할 수 있는 렌나 양이라면, 안심하고 세혁이를 공유할 수 있겠어요.”
“고, 고고고공유라고 하시면…….”
“세혁이와 계속 친하게 지내도 좋아요.”
단, 계속해서 세혁을 지지해주고 그를 제대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새론이 슬그머니 조건을 덧붙이면서 호칭도 정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론 언니로 할까요? 라면서.
“새, 새론…… 언, 니.”
이상한 울림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유명인을 언니라고 부른다니.
동시에 다행이었다. 딱딱한 학생회장님이 아니라 언니라면, 새론 언니에게라면 진심 어린 상담 정도는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렌나는 사장님을 좋아해요. 정말로정말로,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여자아이로서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사장님처럼 잘해주는 사람에게 기대고 의존하고 싶은 건지.
이런 어중간한 마음을 사랑이라고 포장했다가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건 아닌지. 세혁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렌나는 사장님을 좋아하니까…… 렌나 같은 아이와 사귀어서 사장님이 힘들고 괴롭다면…… 포기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렌나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새론이 흐음, 하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래도 호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자기 마음도 못 정한 주제에 어딜 세혁이에게 손을 대려 했느냐. 잘 봐줬더니 실망이다.
실제로도 새론은 허공에 손을 훽 들어 올렸다. 손찌검이다. 알아차린 렌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쓰다듬어졌다.
“흐왓.”
때리려는 게 아니었다. 새론은 손을 길게 뻗어, 렌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한다며, 자신도 비슷한 고민에 빠진 경험이 있노라고 덧붙였다.
“완전히 같은 고민은 아니었겠지만요.”
방향성이 달랐다. 렌나가 세혁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걱정이었다면 새론은 그 반대였다.
세혁을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면 그건 잘못이 아닐까. 세혁이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아이처럼 기대기 시작한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에 빠졌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치달았을 때, 렌나는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경청하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조금 앞서 걸었던 새론이라면 훌륭하고 명쾌한 다계책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모호한 감정을 뚜렷한 뭔가로 뒤바꿔줄 묘안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대하는 렌나에게 새론은 피식 바람 빠지는 헛웃음을 돌려줬다.
“근데 아무래도 좋더라고요.”
“넵?”
“상관 없잖아요. 절 엄마로 생각하든. 애인으로 생각하든. 세혁이와 관계를 맺고…… 아이도 가질 수 있다면.”
렌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새론은 덤덤했고.
“비유하자면 렌나 양은 세혁이의 딸 정도 될까요. 응석 부리고. 진로 상담도 하고. 효도하는 만큼 용돈도 타가고 사랑도 받고.”
“네, 넵.”
“겸사겸사 엄한 일도 벌이고 싶고요.”
“……그, 그게.”
이 타이밍에 엄한 일이라면 분명 남녀합일, 그러니까 성관계를 뜻한다. 새론은 렌나에게 세혁과 섹스하고 싶냐고 질문한 것이다.
슬쩍, 렌나는 잠든 세혁을 돌아봤다. 그를 보자마자 아랫배가 뀨우웅 저리기 시작한다. 렌나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꽉 좁히고, 달떠버린 숨결을 토했다.
일리냐에게서 제대로 된 성지식을 전수받은 이후 더는 세혁에게 성적인 상담은 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게 세혁에게 성적인 애착을 잃었다는 의미는 되지 못했다. 렌나는 여전히 오나니(자위를 자국에서 이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도중에 세혁을 떠올린다.
아니지. 어떤 의미에서는 세혁을 향한 성욕이 훨씬 강해졌다. 미묘하게 거리감이 생긴 탓에 그만큼의 성적인 환상이 더해졌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성에 관해 정확히 알아가게 되면서, 렌나의 자위 망상은 날이 갈수록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이전에는 두루뭉술하게 세혁의 얼굴이나 손가락의 감촉 따위를 떠올렸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명백히 세혁과 섹스하는 전개를 떠올리고 몰두했다.
특히 납치 당하기 이전 마지막으로 즐겼던 자위에서는…… 일반적인 섹스도 아니었지. 굉장히 폭력적이고 피학적인 섹스를 상상했다.
구체적으로는,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인 자신을 세혁이 문답무용으로 따먹는 시나리오였다. 겁탈에 가깝게 남성기를 쑤셔 박아대면서 세혁은 렌나의 엉덩이를 새빨개지도록 때렸다.
뺨을 꼬집히고 손바닥으로 젖을 찰싹여지며 천박한 여자라고 몰아 세워지기도 했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섹스는 없다고 협박하는 세혁에게 잘못했다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따먹어 달라고 비는 자신을 망상하며…… 렌나는 땀을 뻘뻘 흘리는 처참한 과몰입 절정을 맞이해버리고 말았었다.
그랬을 정도로…… 렌나는 사장님과 섹스하고 싶다. 세혁과 몸을 섞으며 그의 아가씨를 받아내고 싶다.
렌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앞머리를 내려 눈동자를 가리면서도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하는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쉬어버렸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밝혔다.
“넵……. 사장님하고, 그것, 해보고 싶어요…….”
“그럼 됐잖아요?”
네엡? 하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새론의 말마따나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닌가?
친해지고 싶고 성관계도 맺고 싶다. 관계성만 딸과 아버지의 그것이지, 연애로서 충분히 성립한다.
오히려 평범한 연인보다도 친밀하고 자극적인 느낌까지 든다. 딸과 같은 포지션을 점하면서도 성적인 교류를 가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반려잖아.
혹시 렌나는 굉장히 쓸데없는 말에 얹혀서 불필요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닐까?
혼란이 걷히기 직전, 새론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마음이 복잡하다면 시간을 더 들이는 수도 있겠죠.”
“아, 아니에요. 되게 시원스러워졌어요.”
렌나가 으헤헤,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
고백해도 되겠다. 사장님께. 좋아한다고. 사귀어 달라고.
“감사합니다……!”
이때다 싶어서 렌나가 새론의 한쪽 손을 낚아챘다!
저질러 놓고 보니 뭔가 부끄럽고 오버한 것 같아서, 렌나는 찐따 특유의 어색한 동작으로 어버버하다가 새론의 손을 도로 내려놓았다.
친해진 상대방과 거리감을 잘 잡지 못하는 안 좋은 버릇이 튀어나왔다고 자책하면서도…… 렌나는 일단 할말은 끝마쳤다.
“덕분에 마음을 정했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먼저 돌아갈 테니까…… 세혁이가 깨면 연락하세요. 라우라를 보내죠.”
새론은 미련없이 돌아갔다.
아니. 한마디는 남겼다.
“오늘 이야기는 세혁이에게는 비밀이에요. 깜짝 선물이 되고 싶으니까요.”
“넵!”
렌나는 믿고 따를 만한 정실 언니를 구했다.
새론은 자연스럽게 응석부리기 담당과 응석받아주기 담당, 정실과 측실 포지션을 정립시켰다.
윈윈하는 밤이라고 볼 수 있겠다.
***
마음은 굳혔지만, 고백은 대인전이 끝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실행에 옮기겠다고 렌나는 분명히 정해뒀다.
그러니까 오늘은 감사인사만 남겨놓자. 그렇게 결심하고, 렌나는 조심스럽게 세혁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지. 모든 사람은 그럴싸한 계획을 갖추고 있다. 당하기 전까지는.
“히끅.”
세혁의 정수리에 렌나의 허벅지가 착 닿자마자 잠든 세혁이 꿈틀거리더니…… 깜빡이 없이 렌나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었다.
깜짝 놀란 렌나가 자리를 이탈하려는 순간, 세혁의 한쪽 팔이 허벅지 아래쪽을 파고 들었다. 그러더니 사타구니를 통해서 빠져 나왔다.
비유하자면 허벅지 하나를 베개 삼은 꼴이었다. 팔짱까지 껴서 단단히 고정한 베개 말이다.
흐엑, 하고 렌나가 기운 빠지는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 상태에서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세혁의 손길이 렌나에게는 기막히게 효과적인 고정장치이기 때문이다.
“추워어…….”
허벅지에 볼을 비비적거리며 세혁이 잠꼬대를 흘렸다.
아무래도 저녁 공기가 차서, 따뜻한 존재에 무의식적으로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그게 하필이면 스타킹을 신어 잘 보온된 렌나의 허벅다리였고.
이걸 어떡할까요, 어떡할까요, 허둥지둥하기도 잠시였다. 세혁의 뺨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눈물이었다.
“렌나. 미안해.”
세혁이 웅얼거렸다.
깨어났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잠든 채로 입만 오물거리는 꼴이었다.
렌나는 일전에 일리냐에게서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세혁은 마력이 폭주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변해서 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쏟아낸다고.
“어째서…… 미안한가요?”
“모자란 스승이라서.”
세혁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모든 일이 훨씬 간단해졌을 것이다.
대인전 3위가 되느니 마느니를 다투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공략 도중 부상을 입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자국의 후원자들과 관계가 틀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세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훨씬 근사하고 제대로 된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예를 들자면 청아였다. 세혁의 스승이라는 사람. 그녀는 렌나의 재능을 더욱 잘 써먹었을 텐데. 몇 배는 아름답게 개화시켰을 텐데.
지금쯤 렌나가 받아 마땅한 결말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세혁의 목 안쪽에 맺힌 아쉬움이었고.
“흐흣.”
렌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바보네요.”
“어어딜 스승님에게…….”
술주정뱅이처럼 투덜거린다.
그러자 렌나는 세혁의 양쪽 뺨을 붙잡고, 가볍게 잡아 당겼다.
위를 올려다 보게 고정한다. 이어서 렌나는 가슴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상체를 살짝 틀었다.
반쯤 감긴 세혁의 눈과 렌나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진짜로…… 바보네요.”
뚝, 하고.
눈물 몇 방울이 세혁의 뺨에 떨어졌다.
두 사람의 눈물이 소리없이 뒤섞인다.
“대인전 3위 정도는…… 사장님의 장비만 있으면 껌이에요. 또, 떠나간 사람도 있기야 있겠죠. 그렇지만 렌나에게는 당신이 있잖아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다시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렌나는 침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계속 주절거려도 좋다는 허락이라고.
근거는 없다. 그냥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까 망설임 없이 말한다.
“당신은…… 렌나에게 수많은 처음을 가르쳐줬어요. 세상에서 당신보다 좋은 스승님은 없어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비록 음침하고 둔하고 눈치없고 소심하고 강단도 없지만, 여성스럽게 꾸미는 방법도 모르고 남자를 기쁘게 만드는 재주도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좋아해요.”
아직 남아있는 모든 「처음」을 당신에게, 아낌없이 드릴게요.
맹세하고 세혁을 내려다 보았다.
편안히 잠들어 있다.
후아, 하고 렌나는 뜨거운 한숨을 토했다.
워낙 충동적인 고백이어서 다소 음습한 멘트를 섞어 버렸다. 처음을 주겠다니 어쩌느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혁은 의식이 없다. 이번 고백은 무효. 야한 여자아이라는 사실도 들키지 않는다.
“그치만…… 예행연습으로는, 훌륭했어요.”
부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었다.
***
드릴 말씀이…… 있어요.
스으읍.
후우우우.
스으으으으읍.
후우우우우우우우우…….
좋앝.
다, 다시할게요.
됴읕.
다…… 시요.
도아핳.
한 번만, 더요.
스읍스읍.
후우우우우우우우.
……넵?
아…… 넵넵. 그거 맞아요.
자, 잠시만요. 렌나가 말씀드릴 거예요. 이번이 정말로…… 정말로정말로 마지막, 이니까요.
쪼, 쪼아해욧.
제대로, 발음됐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