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LEVEL 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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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이 여자의 입에서 잘 지냈냐는 물음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온몸에 바퀴벌레가 기어 다닌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도 오늘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으니 괜찮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이 여자는 알고 있을까?
자랑하고 싶다.
방금까지 선생님과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그녀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선생님을 위해 참는다.
그녀도 과거 선생님의 여자였으니까.
그래 과거.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봐줄게. 내 눈앞에서 꺼져"
어차피,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분신일 뿐일 테니 괜히 힘쓰고 싶지 않...
순간 이 여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놀라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제야 이 여자가 분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으려고 왔어?"
"어머, 죽으려고 왔다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미친년"
"단순히 대화하러 온 거야.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마"
무엇이 웃긴 것인지 이 역겨운 여자는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이야기?
선생님과의 섹스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녀와 할 이야기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선생님의 옆에서 했던 수많은 것들을 봐왔기에 잘 알고 있다.
자기 본체를 직접 가지고 왔다는 건...
"강아지도 와있었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살기.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이 여자를 죽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 같은 존재였으니까.
"어머, 강아지라니. 벨라가 강아지처럼 무척이나 귀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부르면 벨라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
등 뒤로 고개를 돌려보니 청바지와 조잡한 페인트 티를 입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인처럼 꾸미려고 노력한 것 같지만, 그녀 특유의 긴 생머리는 무척이나 이색적인 외모였다.
아무리 공방 밖이고 저 여자의 능력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근접한 것도 몰랐다는 것은 실책이었다.
내가 공방에서 나오는 것을 미리 기다렸던 것일까?
"해보자는거야?"
"대화를 하러 왔다고 바로 앞에 말했는데... 벌써 까먹었어?"
"대화? 너랑 내가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었나?"
"물론 있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었다.
그녀를 늘 경계해왔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할 것이다.
"있잖아. 지금 네가 데리고 있는 남자. 정말 주인님이 맞아?"
"무슨 말하는 거야?"
"아니, 그 남자 주인공이 맞냐고 묻는 거야"
역시나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벨라트릭스가 이곳에 있는 이상 그녀를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고개를 돌려 이곳을 나가기 위해 마나를 움직인다.
기분이 좋아 계산하고 가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저 여자의 등장으로 흥이 식었다.
굳이 이곳 인간들의 법에 맞춰서 행동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집으로 가려고 하던 순간 그녀의 말이 몸을 붙잡았다.
"그렇게 나약한 인간이 주인님일 리가 없잖아. 잘 생각해본 거 맞아?"
"지랄하지 마. 너야말로 선생님이라 확신하고 아양 떨었으면서 지금에 와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나에게 뺏긴 게 그렇게 억울해? 선생님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풉..."
그녀는 갑자기 웃었다.
그리고는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웃는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이 여자는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분명 이 여자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집어내 입밖으로 던진다.
"연기한 게 당연하잖아. 대체 그걸 어딜 봐서 주인님이라고 생각하겠어"
"......"
거짓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포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남자와 며칠 같이 있어 보니 알겠던데. 넌 아직도 모르겠어?"
왜...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주인님과 관련이 있기야 하겠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야"
왜...나는 지금 선생님을 의심하고 있는 걸까...
"그 남자는 주인공이 아니야"
거짓말이 분명하다.
거짓말이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나는 대체... 무슨 짓을...
***
처음에 계획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엘리제를 붙잡고 어디엔가 외딴곳에 숨어서 일생을 평온하게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파괴 활동이 심각해지면 더는 지구에 인간이 살아갈 장소가 사라져버리겠지만,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서 최대한 오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솔직히 죽기 직전에 또 다른 방법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나 말고 누군가는 나서겠지 하는 마음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진짜 주인공이 등장하던가.
하지만, 일이 꼬였다.
엘리제가 죽었고 라일라에게 붙잡혔다.
그녀의 공방에 들어온 이상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쓸데없는 짓을 한 덕분에 평소에 팔다리가 묶인 채 지내기는 했지만.....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 도망칠 생각을 안 하면 되었다.
그래... 이곳에서 평온한 삶을 목표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상황 자체는 오히려 엘리제의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나는 그녀의 몸에 유혹당한 것일까?
분명 나를 죽인 여자였고, 말도 안 되는 고통에 수십번이고 토악질했었는데. 그리고 그렇게나 분노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원망스럽지 않아졌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 성욕에 패배했다.
라일라에게 붙어먹으며 기둥서방으로서 살아보자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디를 갔길래 안 보이는 거야?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봐서 아침 먹을 시간을 훌쩍 넘어 점심 먹을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보이지 않는 라일라의 모습에 나는 부끄럼을 타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앉아있었던 중 그녀가 들어왔다.
"뭐 하다가 이제 와"
"아..."
그녀가 날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한 번 더 그녀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순간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를 보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쳐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분 동안이나 그녀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불안하다.
"배고픈데. 밥은 먹었어?"
"아뇨..."
"그럼 뭐라도 시키자. 아... 여기는 아무나 못 들어오려나?"
분위기를 환기해보고자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인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마치,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 천천히...
"선생님"
"왜? 그냥 오늘 점심은 거를까? 하긴 나도 별로 배가 고픈 게 아니였..."
"선생님은... 정말..."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고, 곧이어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서 천천히 손을 내 얼굴에 가져왔고 몸을 뒤로 빼며 그녀의 손을 피한다.
방금 그녀의 손에서 이상한 게...
"지금 뭐 하려고 했던 거야?"
"잠깐이면 돼요. 정말 잠깐..."
"무슨 짓 하려고 했냐고!!"
그저 이쪽 세계에서 편하게 소설만 쓰던 일반인인 내가 그녀의 손을 중심으로 주변에 일렁이는 무엇인가를 맨눈으로 식별할 정도라면 그녀가 방금 나에게 했던 것은 마법임이 틀림없다 확신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상위의 마법.
생각해보면 방금 그녀는 내 얼굴이 아니라 머리에 손을 대려고 했었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경고등이 울린다.
"....선생님의 기억을... 보려고 했어요... 선생님과 저의 사이잖아요... 부부는... 숨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애초에 부부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에 담았다가는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게 분명했기에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부부끼리도 프라이버시는 있잖아"
"선생님과 제 사이에 그런 건 없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서 손을 살짝 흔들었고, 순식간에 내 몸은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굳어져 버린다.
어떻게 하지?
갑자기 왜...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냈으면서 왜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이러는 거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녀에게 기억을 읽힌다면 나는 분명 죽는다는 것이다.
만의 하나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과 혀가 돌이 돼버린 것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녀의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을 멍하니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이 아님에도 주인공의 행세를 하며 그녀를 기만했다.
내가 그가 아니라 사실대로 말했더라도 주인공이 어디 있냐며 엘리제처럼 나 또한 고문당하다 결국 죽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사실대로 말할걸...
몸이 굳은 상태로 눈을 질끈 감는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마법도 못 쓰잖아요. 어떻게 기억을 못 읽게 막아놓으신 거예요? 누구 짓이에요? 누가!!!"
눈을 뜨자 당황한 얼굴을 하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내 기억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안도하던 중 그녀의 광기 어린 눈동자와 마주하자 그렇지않아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바람을 넣은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나에 대한 의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바깥에 나갔다 온 뒤로 돌변해서 내 기억을 보려고 한다.
그저 호기심 혹은 확인하는 것 그 이상...
이것은 명백히 이상하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맞는 거죠? 그렇죠?"
그녀는 지금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말을...왜...아, 맞다"
그녀는 그제야 내 입을 마법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인지 내 몸을 구속하고 있는 무형의 것을 없앴다.
머릿속에는 수도 없이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만....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선생님"
"....."
"이제 말해주세요."
"......"
"말해!!!!!"
"맞아"
살고 싶어 거짓말을 한다.
내가 아닌 그 누가 이 상황에 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내 선택이 옳았다는 듯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미안해요..."
"......"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누가 어떻게 왜 내 기억에 손을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덕분에 나는 살았다.
마법 같은 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짓말하며 살아갈 수 있다.
어차피 이 여자는 나를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묶어놓거나 방금처럼 못 움직이게 할지언정 날 직접적으로 공격할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가 귀를 통해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나도 조그마한 소리다 보니 듣지 못했던 것이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
"라일라...?"
내가 불렀음에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서 마치 주문처럼 잘못했다는 말만을 반복한다.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는다.
"정신 차려. 이제 괜찮아. 내가 됐다고 말했..."
어깨를 붙잡은 채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말을 하던 도중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까의 마법과는 다르다.
단순한 공포였다.
"손...때..."
심장이 멈출듯한 공포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
"......"
"선생님은... 어디있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야. 쉽게 말하지 마. 어차피... 들을 이야기도 많으니까..."
붉은색의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고개를 들어 근원지를 바라보자 곧바로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과 마주친다.
붉게 충혈된 푸른색 눈동자와 그곳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렇게 시야가 검게 변했다.
***
판테아 대륙 마법사들은 그 수준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공방을 만든다.
마법사에게 있어 공방은 실험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하나의 마법을 준비하는데 들이는 시간이 큰 마법사라는 족속에게 미리 수십 또는 수백의 마법을 준비해놓을 수 있는 공방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수년간 결실과 육신을 지키는 최고의 요새였다.
그렇기에 공방에 틀어박힌 마법사와 상대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그가 밖으로 나온 순간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고 몇 달 혹은 몇 년가량을 공방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있을 때가 있다.
이게 그녀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경우.
그녀는 눈앞의 건축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의 공방에 직접 들어간 건 몇 번이나 해보았던 일이기는 하지만, 이곳을 만든 마법사는 그동안 상대했던 것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기에 더욱 머리가 아파진다.
'이럴 거면 그때 제압하라고 하시지. 왜, 공주님은 지금에 와서 여길... 하..."
그렇다고 이곳을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남자가 주인님에 대해 알 거예요]
이곳에 떨어진 후 몇 달 동안 그를 찾아 헤맸지만, 주군의 흔적조차도 찾지 못한 그녀였기에 그 말이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그가 살았다고 하는 서울... 아니, 대한민국을 전부 뒤져봐도 찾을 수 없어 힘이 빠지고 있었는데 이제야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마법사의 공방과 주군의 행방
고민할 여지 없었다.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마녀의 땅에 발을 디뎠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기에 금방이라도 검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커다란 것을 준비하는 것일까 싶었지만, 이곳의 마나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수백 걸음은 걸은 것 같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공방을 버린 건가?'
하지만, 그녀의 기감에 잡히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거대한 마나와 조그마한 마나. 최소 두 명의 인간이 이곳에 존재한다.
두 마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마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그마한 마나를 향해 걸어간다.
함정이라도 상관은 없었다.
이곳에서 싸우는 것을 상정해 충분히 대비는 해놓았기에 마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은 마녀를 죽이는 것이 아닌 그 남자가 있는 쪽이었고, 금세 그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헤에....헤...."
".....악취미군"
정확히는 남자였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이것을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지가 전부 뜯겨나간 인간이 의자에 묶인 채,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의미불명의 신음을 내는 남자의 모습에 이마에 손을 올린다.
'...골치아프군'
망가졌다.
유일한 실마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망가져 있는 것을 보니 머리가 아파진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그를 일깨워보았다.
"히익[email protected]$%^@@#!%@#"
놀란 것인지 격하게 고개를 휘저으며 묶인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남자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검을 빼내어 들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 것이다"
길거리의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듯한 자비였다.
이미, 정신적인 죽음을 겪은 그에게 육체적인 죽음을 내려주는 자비.
"죽이려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마녀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이곳에 올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있었다.
'공방에 들어올 때부터 반응을 안 한 것도 있으니.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거겠지'
"방해할 건가?"
"마음대로 해"
이 정도로 괴롭힌 장난감이라면 조금의 정이 남아있을 만한데 생각보다 쉽게 승낙하는 모습이 의아하다.
"대신 부탁이 있어... 벨라트릭스"
고개를 돌려 마녀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이 남자와 같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정신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인간.
"날 죽여줘"
"무슨 의미지?"
"더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어. 그런데 혼자는 못 죽겠으니... 네가 죽여줘... 아니다.. 거기 있는 엘프야 네가 죽여줄래? 이름이 뭐였더라...쿠레아...맞아...쿠레아. 날 죽여줘"
허공을 쳐다보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는 마녀
주군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쳐 과한 행동을 시도 때도 없이 일으켜 주군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여자였지만 싫어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공주님을 싫어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마녀는 적어도 주군의 총애를 받았던 여자였으니...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죽여달라고 한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는다.
"헤에...히익..."
스스로 사는 것을 포기한 인간.
이유를 물어볼 가치가 없었기에 검을 들어 남자를 바라본다.
"고통은 없을 거다"
분명 듣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횡으로 그어 그의 목을 베었다.
***
[BAD END] - 주인공 DEAD (141일 생존)
LEVEL : 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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