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LEVEL 1 (1)
.
[있잖아. 인간은 절대 거짓말을 못 해]
그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에도 손톱을 뽑았다.
[긴장했을 때 땀을 흘려. 심장 박동수가 변하고 숨이 조금씩 가빠지거든]
나에게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음에도 발톱을 뽑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수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함에도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는 것인지 손가락을 잘라내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머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변하는데, 너는 그게 좀 심해. 그래서 모르고 싶어도 알게 돼 버리더라]
전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만해준다면 내가 아는 것을 전부 알려주겠다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물속에 넣었다.
[힘이 사라진 것도 습관이 바뀐 것도 그년이 분신이었던걸 몰랐던 것도 전부 전부 의심했어야 했는데... 병신 같은 년]
시리디 시린 추위 속에서 그녀에게 사죄한다.
[너는 왜 그랬어?]
온몸이 타올라 화상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에게 사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그딴 게 궁금한 게 아니야. 거짓말을 한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지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사는 게 무서워졌다.
[아... 살고 싶어서 거짓말했던 거구나. 그럼 살려줄게. 오래오래 살게 해줄게]
수도 없이 그녀에게 욕을 하고 잘못했다고... 그만해달라고 애원했음에도 끝나지 않는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나는...이제... 선생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통이 익숙해지면 늘 새로운 고통을 주었고, 그 고통이 익숙해지면,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죽고 싶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이제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이어 고통 속에서 눈을 뜨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차피 널 더 괴롭힌다고 해서 선생님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이제 말해봐. 선생님은 어디 있어? 말하면 죽여줄게]
진즉에 삶을 포기했던 내가 왜 이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선생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봤잖아. 왜 딴소리를 자꾸 하고 있어?]
팔다리를 전부 잃고 사람의 언어도 잃어버렸던 내가 어째서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일까?
왜 나는...
[무슨...소리를 하는 거야... 너... 소설이라니... 죽으면 다시 돌아간다니...그런....]
아직 살아있는 것일까?
[너 이름이 뭐야?]
"주인공"
지갑 안에 들어가 있는 주민등록증을 들어 올려 그곳에 쓰여 있는 것을 마냥 바라보았다.
[주인공(主人公)]
분명, 내 이름은 이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나라 성씨 중 저런 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이름은 주인공이었다.
집 안에 있는 전공 서적에도 주인공이라 적혀져 있었고 SNS에도 주인공이라 나와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주인공이라 말하고 있었다.
"끅...끄윽..."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웃었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도 웃겼고 제정신인 것도 웃겼으며 세상 모두 나를 주인공이라 말하는 게 너무나도 웃겼다.
더더욱 웃음이 나오는 것은 눈앞에 떠 있는 것이었다.
[BAD END] - 주인공 DEAD (141일 생존)
LEVEL : 0 -> 1
나는 누구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주인공에게 복수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여자를 히로인이라고 붙여준 나에 대한 원망으로 나에게 복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나를 지켜보며 내가 웃는 것처럼 무척이나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리가 없잖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병신같아 종일 웃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그래서 웃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인님"
고개를 들어 나에게 말을 건 여자를 쳐다본다.
[아, 정말 몰랐나 보네. 그 창년 분신이었잖아. 늘 자기 죽는 건 두려워서 선생님 옆에 있을 때 빼고는 전부 분신이었는데]
나는 그딴 설정을 만든 적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소설을 못 쓴다고 해도 자기가 만든 설정을 까먹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엘리제가 내 옆에 있을 때만 본 체였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처음 엘리제의 죽음으로 회귀를 했음에도 두 번째에는 불가능했던 이유.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
그녀는 살아있었다.
내가 라일라에게 붙잡힐 때도 내가 고문을 당할 때도 그녀는 살아있었다.
사지가 뜯기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음에도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있을 때 그녀는 살아있었다.
"주인님이 부탁하신 일 전부 끝냈어요. 한번 보러 가실래요?"
"필요없어"
"네...?"
"필요 없다고"
이 여자는 역겹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구해주지 않았다며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나도 역겹다.
"그래도 주인님이랑 같이 살고 싶어서 힘내서 구한 건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엄청 이쁜데"
"있잖아. 부탁이 있는데"
"네! 주인님"
"꺼져"
내가 어떤 부탁을 할지 기대했던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가,갑자기 왜... 주인님. 제가 혹시 실수한 게 있나요?"
단순한 화풀이였다.
그녀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든 것은 맞지만....
그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알려주시면 고칠게요. 그러니까..."
내가 받았던 수많은 고통.
괴로움과 억울함을 대체 누구에게 풀어야 하는 걸까?
복수하고 싶다.
100일이 넘는 시간이었다.
라일라 그 여자의 화풀이를 위해 수백 번을 기절하고 깨어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비명을 지르다 성대가 나갔으며, 수십 또는 수백 가지의 새로운 고통을 겪었다.
고통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겪기 위해 아양 떤 적도 있었으며 그런데도 그치지 않는 고통에 그녀를 셀 수도 없이 저주했다.
지금도 나는 라일라를 죽여버리고 싶다.
애초에 그럴 힘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애초에 내가 그 고통을 겪었던 시간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 기억도 못 할 것이라는 현실에 미쳐버릴 것 같이 화가 난다.
"주인님?"
"좀 꺼지라고!!!!!"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끼이익' 소리가 귀를 통해 들려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간 것인지 방안이 무척이나 조용해진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허공을 바라보기를 몇 분 몸이 찝찝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목이 잘려 죽기 전에 나는 죽어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는 분명 인간으로서 죽어버렸었다.
생각하는 것도 하지 못했고 배변 활동을 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시 눈을 뜨자 배가 고픈 것을 못 참게 되었고 배변 활동을 하는 것도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도 못 참게 되었다.
불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성을 되찾았다는 것에 나는 행복해해야 하는 걸까?
옷을 벗고 샤워기 물을 틀자 따뜻한 물이 머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몸을 씻던 도중 화장실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문을 닫았.....
"꺄아~"
샤워기를 잡고 허공에 물을 뿌리자 나밖에 없어야 할 화장실에서 여성의 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나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녀에게 걸어가 손을 들어 올린다.
"제 젖은 몸을 보고 싶으셨던 거에요? 응큼...."
짝 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든지 피할 능력이 있음에도 그녀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나가"
나에게 맞은 뺨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
저 눈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당황? 슬픔? 분노?
이 여자의 성격만큼이나 알 수 없는 눈동자였지만, 어째서인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그런 거 없어"
말해도 그녀는 모른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내 억지였다.
더는 이 여자들과 연관되는 게 싫다.
더이상 그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때로 회귀하는 것일까?
차라리 그녀들이 처음 나타났던 그 날로 회귀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상태 그대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눈먼 마법에 맞아 죽으면 다시 그날로 돌아가 평온하게 지내고 또 죽고 또 평온하게 살았을 텐데
왜 나는 병신같이 엘리제를 찾아서 주인공을 연기했던 걸까...
"그러면 차라리 죽으라고 말해주세요"
"..."
"미움받는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가고 싶지 않아요. 살아서 주인님을 보지 못하는 것도 싫어요"
"......"
"그러니 죽으라고 말해주세요.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따를게요"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으면서 인제 와서 죽겠다고?
"그래 그럼 죽어"
퍽이나 그럴 것이다.
100일이 넘는 시간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겨우 나 같은 놈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지 않는다.
수십 또는 수백 번의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나는 살고 싶어 했었다.
고통받고 죽여달라 부탁해도 실상 죽기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는 살고 싶다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고통에 뇌가 마비되고 영혼까지 무너졌을 때 나는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생존본능을 포기할 수 있었다.
"네. 그게 주인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의 눈을 피하고자 돌려놨던 고개를 움직여 그녀를 향하자 그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게 보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한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자꾸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마치 정말 죽어버릴 것처럼
"사랑해요. 주인님"
[사랑해요. 선생님]
"적당히 해!"
그 사랑한다는 말 이제 진저리가 난다.
"애초에 너 의심하고 있잖아.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 이젠 확신하고 있겠네. 그러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차라리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사람 미쳐버리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물어봐. 얼마든지 대답해줄 테니까. 왜, 힘이 사라졌어요. 왜 이렇게 흥분하세요. 왜 이렇게 성격이 못났어요. 왜! 왜! 왜! 물어보라고!!"
만약 내가 엘리제를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의심했고, 나를 추궁했더라면...그리고 그 결과 죽게 되었더라면 나는 두 번 다시 주인공 행세를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일라에게 붙잡혔을 리도 없었을 것이고, 섹스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랄같이 아팠던 기억도 없었을 것이고 이 자리에서 이렇게 소리치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물어보면 사라질 것 같아서요"
"....뭐?"
"이 세상에 주인님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제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느껴져야 할 주인님이 세상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모두가 그래요. 이곳에 온 모두가 주인님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에요"
"나는... 아니..."
"사실 저 포기했어요. 불과 며칠 찾아본 것뿐인데 주인님이 없다고... 이곳이 아니라고 확신을 해버렸는데....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인님이 아니라면 절대 모를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 우리의 이야기를 전부 아는 남자"
나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가 어떤 존재들인지...
그녀들에게 주인공이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님. 혹시 판도라의 상자라고 아세요?"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돼? 나는 이제...]
이 상황에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왜 알려줬어...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어 파멸해버린 여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알려주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저보고 앞으로 얼마나 고통받으라고...]
아니, 나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용서해주지.... 않을 거죠? 죽게되시면 다시 돌아가게 되신다면...]
상자를 열어버린 여자는 결국 나를 죽이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두려워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소설 속 캐릭터라는 사실보다 주인공이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 속 재앙일 것이다.
그것을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평생 모른 채로 지내고 싶었어요. 앞에 있는 당신이 주인공이라고 믿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이야기의 판도라처럼 멍청하지 않아요. 만약... 아주 만약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더라도... 그게 제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에요"
그건 너무 비겁하다.
그럼 나보고 평생 이렇게 속이고 살라는 거야?
또다시 누군가에게 걸려서 그런 비참한 기억을 다시 되풀이하라고?
"주인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어요. 그러니 책임지셔야죠"
"아니야. 나는 주인공 같은 게 아니..."
말을 하려던 도중 그녀의 양손이 내 양 볼에 닿았고 천천히 당겨 자신의 품으로 날 인도했다.
"맞아요. 당신은 누가 뭐래도 제 주인님이세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엘리제를 만난 그 순간부터.
라일라를 만난 그 순간부터.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드릴게요"
아니, 그 소설을 썼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 무엇이되었든 명령해주세요"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