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LEVEL 1 (2)
주인공의 외모를 설정하지 않았던 것은 오롯이 내 개인적인 이유였다.
게임을 해도 여캐만을 고집했고 억지로 남캐를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커스마이징을 랜덤으로 놓고 하는 나에게 소설 속 남캐를 서술하는 것은 지독한 벌이나 다름없었기에 머리카락 한 올도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현실의 나는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좋지 않은데 타자로 하나하나 내 외모를 그대로 적으면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어 자괴감과 비참함이 몰려왔다.
반대로 훤칠한 미남으로 묘사하면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아예 쓰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했던 것이었다.
소설은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이상적인 도피처였다.
소설을 읽는 것은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유토피아였다.
심각할 정도로 주인공에게 이입을 하다 보니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기분이 들게 해 주었기에 더욱 나는 소설에 빠졌었다.
하지만, 소설에는 언제나 끝이 존재했다.
소설이 완결이 나던, 아니면 연중을 하던.
혹은 내가 그 세계를 더는 경험하고 싶지 않게 되던. 소설은 끝이 난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에서 내가 좋아하는 히로인과 영원히.
....그래서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누구보다 그녀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을 내가 만든 캐릭터. 소설 속 히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물론 그녀들의 성격 외형 등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연히 그녀들이 소설 안에서의 모습을 변함없이 유지할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설정하지 않은 부분들은?
그녀의 몸 어디에 점이 박혀있는지를 일일이 설정할 수 없고 그녀의 성격은 설정해도 상황에 따른 대답을 전부 설정할 수 없다.
그냥 그럴 거라고 예상할 뿐이다.
그러면, 변화는?
소설 내에서라면 내가 직접 그녀가 어떠한 사건을 통해서 성격 및 외모가 변했다고 서술할 수 있지만, 소설이 아닌 이곳에서의 변화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환경과 상황이 변했다.
그녀들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현실에 나타난 사람인 이상 변할 수밖에 없다.
거지였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행동거지가 변하고 서울에 살던 사람이 뉴욕에 가면 생활 패턴이 바뀐다.
식습관이 바뀌고 가끔은 좋아하는 음식이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사라져버렸을 때 사람은 변한다.
그녀에게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삶의 의미였다.
[.....제가....어떻게해야.....용서해주시는건가요?]
[대답해주세요.... 네.....? 잊어주세요... 제가 했던 일들 전부.... 기억하지 말아 주세요... 마..맞아... 선생님이.... 평생 죽지 않으면.....]
[........]
[있잖아요.......]
[...벌을....주세요...엄청... 엄청...혼내...주세요...그러니까....]
[제발.....찾아주세요.....찾아주세요....]
[....찾아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서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귀는 닫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음에도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녀는.....마지막 순간에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사랑해요...선생님...]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났는지 나는 이해할수없다.
분명 내가 만든 성격임에도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 하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벌은 평생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생 그가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평생 그녀를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
"야, 강의 끝난 지가 언젠데 혼자 뭐하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과 육중한 그의 거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어. 현우냐? 몰라보겠네. 이렇게 보니 반갑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진즉에 강의가 끝나고 모두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9월이 되고 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나는 아직 8월에 사는 느낌이다.
하긴, 3번이나 회귀를 하며 그 난리를 피웠으니 시간 감각이 이상해질 법도 했다.
"반갑다는 놈이 안 그래도 입대 타이밍 꼬여서 2학년에 동기 하나 없어서 외로워 죽겠는데 연락을 그렇게 씹었어?"
"미안해. 좀 바빴어. 지금이라도 봤으면 됐지. 남자끼리 일찍 봐서 뭐하냐"
연락한 줄도 몰랐다.
당장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연락을 받을 어떻게 받겠는가
"....밥...먹었냐?"
"안 먹기는 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점심 이후로는 강의가 없었기에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 보이는 현우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너 설마..."
"말하지 마...."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는 거야?"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
어쩐지 입대 타이밍이 꼬여 거의 4년 만에 보는 것이었기에 그와 나는 따로 연락할 사이는 아니었다.
"개강한지... 2일째인데... 어제는 어떻게 한 거야..."
"말하지 말라니까..."
"설마 너! 정말로!"
"아니야! 절대 화장실에서 먹은 거 아니라고!!"
화장실의 화자도 꺼낸 적 없다.
나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래 그 맘 이해하지. 그렇게 배고팠어?"
"아니라..."
"뭐 먹었어? 삼각김밥? 샌드위치?"
"굶었거든? 나도 자존심이 있지....아니라니까!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어허.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돼. 그 심정 잘 알고 있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말해봐"
분명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이라는 신분인데 홀로 군필이라는 딱지가 붙어 모두에게 피해지는 그 고통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대체 군필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다들 그렇게 피하는 것인가!
".....빵....먹었...."
"풉"
"....웃냐? 너도 똑같잖아. 너도 친구 없으면서"
"아, 그렇지. 나도 친구 없... 빵.....푸흡..."
"미친 새끼가 너는 안 그랬어? 너는 씨발 머 처먹었는데"
"나는 학교 앞에서 살아서 화장실 안 가도 되는데? 그래서 무슨 빵 먹음? 피자빵? 소보로빵?"
개강을 했다고 해서 굳이 학교를 나올 필요는 없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나에게 학교를 나오는 행위는 불필요한 행동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온 것은 조금이나마 일상을 즐기고 싶은 것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게 살다가 죽고 또다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가고 싶었다.
애초에 내가 뭘 하려고 해도 나 같은 게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시민 1 같은 느낌으로 살다가 나는 죽을 것이다.
"씨발 새끼가 넌 뒤졌....야 왜 갑자기..."
진심으로 나를 때리려고 하는 것인지 그를 피해서 몸을 빼서 강의실을 나왔고 곧이어 문 앞쪽에 보이는 수많은 인파에 발을 멈추었다.
갑자기 내가 멈춰서인지 등 뒤에서 현우가 덮쳐오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이 살짝 빼 등 뒤에서 달려드는 현우를 피했다.
곧이어 현우가 넘어진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중심을 잡는다.
"너 방금.... 어떻게... 한거야?"
당황한 듯한 그의 표정
나도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씨발....어떻게 한 거지?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등 뒤에서 달려오던 현우의 몸이 무척이나 컸다.
그런데도 등에 눈이 달린 것이 아님에도 등 뒤에 그가 달려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고, 생각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내 운동신경이 이렇게 좋았나?
레벨업을 기점으로 뭔가 몸을 움직이는 느낌이 이상하긴 했는데....
"....야...야!"
레벨업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내 팔을 툭툭건드는 현우의 행동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고 잠깐 조용히 해보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이어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길게 묶은 여자
청바지와 배꼽이 보이는 흰 티만을 입고 있을 뿐임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모을 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이곳은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일까?
손이 떨린다.
석상이 된 양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냥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바라본다.
[고통은 없을 거다]
과거 내 목을 베어내었던 여자는 어째서인지 내 앞까지 온 뒤 몸을 낮춰 무릎을 꿇는다.
"주군을 뵙습니다"
엘리제가...알려줬구나...
아무 말 없이 멍청하게 무릎 꿇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곧이어 고개를 들자 수많은 사람의 시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잠깐의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는구나.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다 뺏어가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겨 인파들 앞에서자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비켜주었고, 나는 그사이를 혼이 빠진 것마냥 멍청하게 걸어갔다.
학교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짧다면 짧지만 멀다면 꽤 먼 거리.
무작정 길을 걷던 중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고, 발걸음을 멈춘다.
"....주군"
당연히 따라왔겠지...
그래.... 안 따라오면 내 소설 속 히로인이 아니긴 하지...
초록 불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걸으면 걸을수록 등 뒤의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엘리제만으로 벅찬 상황이었다.
당장 라일라가 언제 쳐들어올지 몰랐기에 원룸에서도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
"제 행동이 주군에게 실례였던 것입니까"
대답해줄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던 것도 범죄를 저지르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작... 고작 일상을 잠깐 누리려 했던 것인데 그게 그리 잘못된 일이었을까?
엘리제에게 수십 수백 번을 부탁했었다.
학교를 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제발 내버려 둬달라고...
곧 있으면 원룸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더욱 옛날과 같은 이 생활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 그것까지도 내 과한 욕심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이해해도 이 여자는 아니다.
"...저를 무시하시는 이유라도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주신다면 고치겠습니다"
그녀에게 과거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바꾸려 노력해도 나를 죽였던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나를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더라도...일주일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녀가 나에게 검을 휘두를 때의 모습이... 그때의 시리디 시린 말들이 전부 뇌에 각인된 채 그날의 악몽을 떠오르게 만든다.
"고칠 필요 없어요. 저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집을 알고 있을 테니 오늘부터라도 찜질방에 들어가야겠다 생각을하며 그녀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할 힘도 의미도 없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나를 잡지 않으려는 듯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멀리 왔다고 생각한 나는 혹시나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살며시 뒤를 돌았고 곧이어 햇빛을 반사하는 무엇인가가 눈에 비추어졌다.
그리고 붉은색의 핏줄기
"어.....?"
저 멀리서 무릎을 꿇은 채 점차 무너지는 여자의 모습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로 전에까지 졸렬한 자존심을 부렸던 것을 잊은 채 내 몸은 이미 그녀의 앞에 도달해있었고, 그녀의 목을 꿰뚫고 있는 검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다.
"왜....?"
그녀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붙잡았다.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그녀의 몸
눈을 감은 채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정신이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주인님. 이 아이에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 왔던 걸까?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쓰러진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금빛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죽으라는 명령보다 더욱 아픈 말이랍니다"
[BAD END] - 벨라트릭스 DEAD (32일 생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