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LEVEL 1 (7)
흑역사였다.
정신을 차리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소설의 탈을 쓴 250만 자나 되는 거대한 흑역사 덩어리를 만들어놓은 것만으로 부족했던 것인지 오늘 다시 한번 흑역사를 갱신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벨라를 한번 흘겨보자 그녀가 곧장 반응했다.
"아무일...아니야"
아까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자리에 멈춰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 이유 없이 첫 만남부터 울어 재낀 것은 둘째치고 나는 대체 왜 운 거냐고...
부끄럽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이때를 위한 것일까?
그렇게 자신의 흑역사를 자책하고 있을 때 내 머리에 무엇인가가 닿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손?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자 나를 쓰다듬고 있던 것인지 자신의 손을 잡은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야. 뭐가 죄송해. 그럴 거 없어"
"하지만, 주군의 몸을 함부로..."
"됐다니까. 겨우 이런 거로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마"
입으로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자신의 손을 보며 기쁜 미소를 짓고 있는 벨라.
마치, 이성을 처음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엘리제와 정반대의 느낌이다.
온실 속 화초의 대명사 공주님이 오히려 요부보다 더 음탕하고 분명 땀 내냐는 남자기사들과 부대꼈지만, 남자에게 면역이 없는 기사단장.
이 부조화는 대체 뭐지?
대충 그녀를 지나쳐 간 곳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찜질방이었다.
벨라트릭스가 내 옆에 있는 이상 나는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와 엘리제 둘만 있었기에 어찌어찌 안 들키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벨라는 그 존재감이 차원이 다르다.
그녀가 정말 내 소설 속 캐릭터가 맞다면, 그녀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정도로 강했기에 엘리제가 그녀의 존재감을 감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원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탈락이었고, 돈도 얼마 없기에 무난한 찜질방이 당첨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엘리제. 나와"
"어라? 저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스르르 등장하는 엘리제.
그건 그렇고 매번 보는 것이지만, 참 유용하게 보인다.
내가 배울 수 있나?
물론, 여탕 같은 곳에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곳저곳에 정말 유용하게 사용될듯하니 언제 시간 나면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해야겠다.
배우는 것은 늘 옳은 일이니까.
"가자"
"여기 들어가시려고요?"
"응? 왜?"
찜질방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엘리제가 나를 잡았다.
"사람 많은 곳은 싫은데... 주인님! 제가 저번에 구해놓은 집으로 가요!"
"그거 아직 안 팔았어?"
"당연하죠! 제가 주인님의 신혼집을 어떻게 팔아요"
신혼집?
신혼이라는 뜻에 대한 정의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까?
"가요오~~주인니임~~"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내는 엘리제의 모습에 순간 고개를 끄덕일뻔했지만....
저번에 엘리제가 구해온 300억짜리 펜트하우스 가격을 들은 내가 그곳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집이 혹시 얼만데?"
"대충 300억 정도?"
알고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놀랍다.
내 손에 천만 원도 쥐어본 적 없고 원룸 보증금으로 200만 원까지 모아본 게 내 생애 최고 저금인데 200억이라니 상상조차 안 된다.
"그 돈 어디서 구했어?"
"...음...좀 많을걸요?"
정말 놀랍게도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니었다.
"주인님이 나쁜 놈들 위주로 하라고 하셔서. 대충 나쁜 놈을 찾아보려고 노력해봤는데...."
"봤는데?
"나쁜 짓을 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주인님과 노후자금까지 모아버렸어요"
지금 당장 휴대폰을 켜고 저번 주에 일어난 실종 및 살인 사건을 다룬 뉴스를 뒤져보면 대기업 회장님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뒤탈 없을 거예요. 제가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하잖아요"
내 팔을 가슴으로 짓누르며 나쁜 놈들 전부 죽이고 돈이랑 집 벌어왔어요. 라고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참...
아무리 봐도 여기에 있는 여자가 제일 나빠 보인다.
"네? 그러니까 가요"
"오늘은 이미 여기 왔으니까 내일 가자"
솔직히 돈이 없었기에 내일부터는 찜질방에서 자고 싶어도 못 잔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구한 집으로 돌아갈 법도 하지만....
확인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
한번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다.
"너희들이 처음 와서 잘 모르나 본데 여기는 남.탕 저쪽은 여.탕 이해됐어?"
"위험합니다"
"맞아. 벨라야. 이곳에는 이곳 법이 있는 거야. 너무 그렇게 주인님한테 어리광부리지 말고 여탕으로 들어가렴"
물어보고 싶다.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필요를 물었던 것인지.
그녀는 어째서 죽었던 것인지.
죽지 말라는 약속은 대체 언제 했던 것인지.
내가 썼던 설정과 그녀의 기억이 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직접적으로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질문을 생각해놓고 그 상황이 된다면... 적어도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어서 밖으로 나가시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괜한 오지랖을 떠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찜질방은 땀을 흘리라고 있는 곳이야. 여기 앉아서 땀이나 흘려"
".....네..."
이것이 현대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어때 후끈후끈하지?
막 온몸이 달아오르고 그러지?
얌전히 앉은 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제대로 찜질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에는 땀 한방울 흐르지 않는것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잡고 있는 손에서 물기가 잔뜩 느껴졌다.
뭐...그건 둘째치고 그녀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니 무척이나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짠 음식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육체에 이런 짠 음식까지 드시는 것은 매우 몸에 좋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전통음식 김치찌개라는 것이다"
"짠 음식은 과하게 먹으면 독입니다. 주군"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해준 건데 그럼 울 어머니가 나한테 독 먹인 거야?"
"....그...그건..."
"얌전히 먹자"
얼마나 귀여운가.
그녀는 전혀 귀찮지 않다.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화장실...은 좀 혼자 가면 안 될까?"
사실 귀찮다.
"귀엽죠?"
"다 싸고 나면 말 걸어줄래?"
"울 작은 주인님도 귀엽네"
원래라면 엘리제가 나타나는 것은 내가 이곳을 나가기 직전이어야 맞을 텐데....
나비효과 같은 것일까?
똑같이 하려고 했지만, 벨라에 대한 인식이 바뀌다 보니 전의 회차보다는 훨씬 너그럽게 대해줘 버렸다.
소변을 보는 중에 나타나 몸을 숙인 채 내 것을 마냥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잘 나오지 않는다.
"고개 돌려"
"그치만... 우리 작은 주인님이 커지려고 하는걸요?"
"그게 뭐!"
"작은 주인님이 절 부르고 있어요. 이리로 와서 내 새하얀 오줌을 받아내! 라고...."
아주 지랄을 한다.
그녀의 말로 인해 목적을 이루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커져 버린 아들 탓에 나는 옷을 올리고 그녀를 노려봤다.
"주인님, 혹시 화났어요? 우리 작은 주인님도 화가 잔뜩 났던데"
자신의 윗입술을 핥으며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에 억지로 내려던 화도 사그라든다.
대체 저런 표현들은 어디서 배워온 것일까?
어디 요부 강좌 같은 걸 본 것일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문 열 거니까 몸이나 숨겨"
화장실을 나가려는 척하며 문고리에 손을 잡으려 하자 엘리제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주인님은 저에게 바라시는 게 있나요?"
이게 궁금했다.
[주군께서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뭔가... 걸렸다.
그냥 넘어갈 법한 말인데, 저번 회차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녀의 이 말이 왠지 모르게... 진지하게 들렸었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 순간 벽에 밀어붙여 진 채 그녀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너...혹시 벨..."
벨라트릭스에 관해 나에게 뭔가 말하려고 한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내 입을 막는 손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치웠다.
"뭐 하는 짓이야"
"주인님. 여기 사람들은 의외로 귀가 밝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가자고 했잖아요"
"무슨 소리...."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문 쪽으로 향했고,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수있었다.
벨라가 들을거라고 말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저번 회차에서는 분명 그런말...
"주인님. 있잖아요. 저는 주인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
"아무리 급하셔도... 첫 경험을 화장실에서... 꺄아, 이러지 마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잠시 버퍼가 걸린 듯 버벅거린 후 곧이어 물음표가 연달아 터진다.
회귀 전 그녀가 화장실에서 빵댕이 흔들면서 제 처음을 가져 가달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저장되있었기에 그녀가 지금 보이는 모습이 무척 가증스러웠다.
그녀가 지금 뭘 노리고 이런 행동을 몰라 마냥 바라보던 중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녀를 오래본 것은 아니지만, 매번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었을때에는 늘 안좋은 일이 뒤따랐는데...
"할 말 없으면 팔 치워. 나갈거...읍.."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상의가 당겨져 몸을 수그렸고 그렇지 않아도 가까웠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키스.
서로 혀와 타액을 교환하는....
아무런 전조도 없는 키스에 나는 당황 황당 허당이 된 채 멍청하니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다.
"하아~♥"
입을 때자 그녀와 나 사이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긴 실이 늘어졌다.
"주인님이 잘못했어요. 여자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는데. 이상한 소리나 하시구"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당장 옷 벗고 엉덩이를 흔들라고 하셨어야죠"
나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음란하게 자신의 입술을 핥는다.
요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요사스러운 언행들은 정말 남자를 가지고 노는 여우와도 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셨으니 벌을 받으셔야겠네요. 주인님"
호칭만 주인님이고, 그녀는 늘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는 나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고, 나는 요부에게 홀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채 그녀를 받아들였다.
내 혀를 핥고서 아까와는 다르게 입술을 깨물...
"아"
생각보다 강하게 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혀를 통해 피 맛이 느껴졌다.
"어머, 실수"
아주 제멋대로다.
***
만약 아버지가 이런 모습을 보셨더라면 아마 한심하게 사내새끼가 여자 하나 어쩌질 못해서 쯧쯧. 고추 때라. 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예절교육은 학교 선생님이나 이웃 어른들에게 배웠을지언정 아버지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성교육에 대한 교육열 하나만큼은 남다르셨기에 분명 그리 말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마음가짐을 세뇌하듯이 가르쳐준 잘못된 가치관 덕분에 남녀공학을 다녔던 학창 시절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자가 말을 안 들을 때에는 혼내주라고 말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여자를 어떻게 혼내는지를 설명해줄 때 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에 나는 차라리 고추 때 달라고 말했었는데...
그때 조금 들어놓을 걸 그랬나 보다.
"안 잤어?"
"기사에게 잠은 사치입니다."
엘리제로 인해 기운이 빠지기는 했지만, 다시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해야 했기에 저 회차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그녀와 마주한다.
"적당히 자둬. 정작 중요할 때 잠 못 자서 제 실력 발휘 못 하면 어떻게 해"
"중요할 때...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던 말을 멈추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마냥 바라보았고, 그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나는 이번에도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그냥 욕탕에 가버려야 했는데...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인지 아님, 그냥 그녀와 더 대화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어버렸다.
정적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있잖아. 매번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거 어색하지 않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까?"
"그 왜 있잖아. 다른 사람 보고 있을 때는 다르게 불러보는 게 어떨까 해서. 말투도 너무 격식 차리고 주군이라고 부르는것보다는 오빠? 라던가... 부르는 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주군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그건 소설 속이고, 지금 내 나이가 스물다섯이고 얘가....아.. 더 많구나...
"아 몰라. 오빠라 불러"
묘하게 그녀의 청색 눈동자가 나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럼 누나라고 부를까?"
"주군의 명령이라 하신다면 제가 주군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정말 묘하게 쳐다본다.
"누나...?"
살짝 찌푸려지던 눈살이 활짝 펴졌다.
"주군께서 기사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조금도 숨길 생각없는 것인지 입가에 함박 웃음을 지은 채 말로만 안 된다고 말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
솔직히 여기서 그래? 그러면 할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너무....
"그래? 그럼 오빠라고 불러"
즐겁지 아니한가.
그녀의 표정이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곧장 반응한다는 건 정말 짜릿한 즐거움을 전해준다.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입을 열까 말까 고민한다.
곧이어 내 말대로 따르기로 한 것인지 입을 다문다.
이내 오빠는 아닌 것 같았던 것인지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파르르 떤다.
곧이어...
"네...알겠습...니다"
"뭐야? 혹시 싫어? 내가 강제로 시킨 거야?"
"아...닙니다..."
"강제로 시킨 것 같은데? 정말 아니야? 아니면 오빠라고 불러봐 줄래?"
"......"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세상에 장유유서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무척이나 고민하는 모습.
기본 바탕인 소설을 내가 써서인 것일까?
하긴 소설을 한글로 쓰긴 했다.
나한테는 죽어도 오빠라고 부르기 싫은 것인지 입술을 몇 번이나 곱씹는다.
"오...빠..."
결국 오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그녀는 이내 나를 노려보았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 안 웃는데?"
"웃고 있지 않습니까"
말투는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전보다 덜 딱딱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다.
그런데 나 왜 이 시간에 벨라랑 이야기했던 걸까.
목적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만 했다는 것을 목욕탕에 들어가 몸을 누일때까지 잊고있었다.
***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이었는데...
아마, 나도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그것들을 들쑤셔서 또다시 그녀가 내 앞에서 죽어버릴까 봐...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필요를 물었던 것인지.
그녀는 어째서 죽었던 것인지.
죽지 말라는 약속은 대체 언제 했던 것인지.
내가 썼던 설정과 그녀의 기억이 대체 어째서 다른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더욱 그녀에게 물어볼 수가 없어졌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내가 혹시나 굳이 안 해도 될 이 말을 잘못 깨 내는 그녀가 또 다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
"아, 진짜 누구냐고"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를 정도로 똑같은 질문만 해댄다.
"집요한 새끼"
"뭐?"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니, 씨발. 그분이 누군지만 좀 알고 싶다니까? 이름이라도 좀 알자!"
벨라가 나를 찾아온 날 문 앞에서 마주쳤던 것인지 그는 허구한 날 그녀가 누군지 캐묻는다.
적당히 하다가 말겠지 하며 무시했었는데, 일주일이나 사내새끼한테 집착 당하다 보니 짜증이 임계점에 가까이 왔다.
"아니, 사귀는 사이 아니라며. 내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냐 아니면 사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냐. 그냥 이름만 알려달라고"
"아몰랑~"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달라붙는 이 새끼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같이 먹기로 했는데...
어거지로 벨라를 때어놓고 왔기에 점심을 먹으며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매일같이 집에 있다 보니 조금 상태가 나빠진 것 같은 느낌이라 점심이라도 같이 먹어서 풀어주려고 했는데... 이 새끼는...
그렇다고 현우를 밀쳐내고 가버리기에는 학교에 친구가 없었다.
"인공아. 진지하게 묻는다"
"어"
"그 여자랑 너랑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냐?"
"......"
"불가능해. 그러니까 빨리 꿈 깨고 그분 이름 알려줘"
"너는 가능하고?"
"아니지. 이름을 알려고 하는 건 매일 밤 물 떠 놓고 그분에게 기도드리려고 알려고 하는 거다"
지랄도 작작 해야 지랄이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순간 바로 앞 테이블 건너편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어, 안녕"
뭐지?
"선배님 혹시 지금 점심 먹으러 가시는 거예요?"
"응...? 어..."
"그럼 저 밥 사주실 수 있으세요?"
갑자기...?
갑작스러운 밥 사달라는 말에 매우 당황했다.
학교 생활하면서 이런적이 있었나?
눈살을 찌푸리고, 여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머리색은 갈색. 눈 색도 갈색. 얼굴도 한국인이 맞다.
예쁘냐고 말하면... 예쁘지만 애매하다.
이런 인상의 히로인을 넣은 기억이 없다.
애초에 그녀들과 내 눈앞에 있는 후배님은 외모의 격이 다르다.
"얘....는 아니겠구나. 얘가 나보다 못생겼으니까"
"뭐?"
아... 왜 지금 같은 타이밍일까.
나는 어째서 그녀들과 오늘 같은 날 함께 점심을 먹겠다고 약속을 잡은 것일까.
처음으로 여자 후배가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고 먼저 다가와 주었는데 어떻게 나는 거절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미안. 나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같이 먹자"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친구의 어깨를 툭 치고 강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존나 있어 보였다.
히로인이 아닌 여자. 그것도 과 후배가 과 공식 아싸인 나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는 소설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겪게 되니 기분이 들떴다.
강의실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때까지 머릿속이 핑크빛으로 가득 찼다.
히로인들이 그 유난을 떠는 것은 그저 내가 주인공인 척을 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만, 방금은 달랐다.
인간 주인공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여자.
솔직히 내가 그동안 섹스만 해보고 여자랑 사귀지 못한 것은 오롯이 아버지의 이성관을 세뇌받아서 그런 것일 뿐.
전혀 내가 못생기거나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나왔어"
문을 열자 무척이나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의 입구를 들어올 때도 매번 놀라지만 이 문을 열 때는 더욱 놀란다.
300억짜리 집
티브이로만 봐왔던 곳을 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기에 마치 남의 집인 양 신발을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후 내 발 때가 묻을까 싶어 슬리퍼를 신는다.
"엘리제"
내가 왔는데 왜 아무도 안 나와보는 걸까?
내가 뭐라도 되는건 아니지만, 평소 내가 오는 걸 미리 알고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게 무척이나 어색하다.
"벨라"
둘이 어디 갔나?
아무 생각 없이 거실로 가서 티브이를 켜기 위해 리모컨을 잡으려 한 순간 두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분명히 나랑 점심 먹기로 약속을 했는데?
곧이어 코끝을 찌르는 냄새에 리모컨을 잡으려고 하던 손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냄새...
기억에 강렬하게 각인되어있는 냄새다.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간다.
코에서 나는 진한 그것이 2층으로 향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코를 찌른다.
"......."
현실 시간으로 한 달...
회귀 시간을 합치면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늘 이... 피 냄새를 맡아왔다.
걸으면 걸을수록 귓가를 들려오는 누군가의 숨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망쳐야만 했다.
라일라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안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히로인이?
그 누가되었든 일상은 새빨간 피로 물들어 나를 괴롭힐 것이다.
살짝 열려있는 방문을 천천히 밀자 바닥에 새빨간 피가 웅덩이가 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엘리제의 방.
그리고, 바닥에 있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몸을 잃어버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는다.
왜 나는 참는 걸까.
나는 왜... 더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방안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옮기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과거 엘리제의 육체였던 것과 침대에 앉아있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왜...?"
"이제 왔어?"
왜? 왜? 왜? 왜? 왜?
머릿속이 온통 왜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건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득 차서 정말...가득차버려서...그 무엇도 생각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공주님"
"왜...죽인 거야?"
"이곳에 있는 건 분신이야. 진짜 쪽은 안죽었어. 죽으면 곤란하잖아. 그래도 공주님인데"
엘리제의 시체를 발로 짓밟으며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그녀는 말했다.
말투도 표정도 전혀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망가져 버린 저 눈은 절대 그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변하는 건 없어"
그런데 왜 나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저 눈앞에서 사라진 것뿐이야.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벨라트릭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눈 앞에 있는 게 진짜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말하고 싶었어 그동안 쭉"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토감에 눈을 질끈 감자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귀를 울렸다.
"사랑해"
귀를 막았다.
"지금까지 쭉"
"사랑하고 있었어"
귀를 막았음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뇌를 파고든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 있잖아
이 말을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말하고 싶었어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미칠 것 같이 널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도 날 사랑해줘.
나만 사랑해줘.
나 한 명만 사랑해줘.
그럴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