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LEVEL 2 (7) (24/87)



〈 24화 〉LEVEL 2 (7)

예전 내가 아직 연재를 하던 시절 라일라가 환각에 걸렸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나약해진 주인공을 그녀가 독차지하는 IF 스토리.


주인공이 너무 강하다 보니 얀데레적인 성향이 조금 덜한 것 같아 일부러 넣은 외전이었다.


[여...여기가 선....생님이랑 저....랑 함께 살 곳이에요]

그의 여자들이 모두 죽어버린 세상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를 감금하는 것이었다.


[자....아앙...자...잘했어요. 어...어 흘리면 안 되는데... 제...제가 대신 씹어드....릴게요]

주인공의 의사따위는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이 늘 바라던 것을 그에게 강요했었다.


[자...잠시만..... 다..닦을거 가져올 테니....기...기다리세요]

그녀가 방을 나간 틈을 타서 주인공을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딱히 묶여 있던  아님에도 그는 발버둥 치다 의자에서 떨어졌다.

자꾸 도망을 친다는 이유로 양다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양팔이라도 있었다면 금방 나갔겠지만,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이유로 양 팔이 잘렸기에 뱀이 움직이는 것 마냥 몸을 틀어 앞으로 나갔다.



[또....도망가시려고...하셨어요?]



[아...아으...아...]




발악하며 그녀의 손을 거부하고 싶지만 혀가 없기에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녀의 손에 의해 발악하며 전진했던 거리만큼 다시 뒤로 가게 된다.

인간 같지도 않은 삶


라일라는 그 환상 속에서 주인공에게  하고 싶었던 것을 했었다.
....그녀는...원래 그런 캐릭터였다.


[서...선생님....이제 씻을 시간이에요]


[아...으...아....으]

[그렇게 좋아요?]


그는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수치심 따위가 아닌 그녀와 함께 씻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
그녀와 함께 그곳에 간다는 두려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으로 거부를 표했다. 악을 질렀다. 미친 듯이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의 손에 지옥 같은 공간으로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 간다는 표현은 연재 중인 소설이 전체 연령에 무료였기에 제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착정하기 위해 가는 것으로 가정하고 글을 썼었다.


성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짜내어지며 더는 나오지 않아  때쯤 그녀는 그에게 약을 먹여 또다시 발정 나게 만들어 착정을 시작한다.
그의 정액을 모으고 또 모아.......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상하며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그런 삶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런데도 그의 입은 공복을 이기지 못해 식사 앞에 굴복했고 장내에 차오르는 덩어리들을 참지 못해 시시때때로 배변 활동을 한다.
똥오줌도  가리는 개만도 못한 


[서..선생님. 좋아요? 저...저도 선생님이랑 있어서 너무 좋아요]

매번 그녀는 물어본다.
그때마다 악을 지르며 그녀에게 반항했지만, 오늘은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항상 하셨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주셔야죠....왜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예요? 기..기분이 별로 안좋으세요?....그...그럼 거기 갈까요? 거...거기가면 서..선생님 엄청...좋아하시잖아..요....]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저으며 그녀에게 용서해달라 표현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긍정이라 여기며 그녀가 말한 곳을 향해 간다.


그 외전은 그녀가 주인공의 배를 갈라 뛰고 있던 심장을 손으로 찌르며 '왜....말이 없어요 선생님?'라고 말하며 끝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 앞에서는 바퀴벌레 죽이는 것도 못 하는 소심 소녀를 연기하며 그가 없는 장소에 가면 사람 죽이는 것을 서슴없이 하는 이중인격
주인공을 위해서 그가 안 보이는 곳에서 마을 하나를 완전히 없애는 살인마
인간의 팔다리를 잘라  채로 실험하는 싸이코

내가 생각하는 라일라는 분명 그런 캐릭터였다.

***

"라일라"

쌍둥이 자매와 프리시아를 날려 보내고 내 눈앞에 등장한 라일라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있었다.
그녀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이 타이밍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이다.

"....역시 제가 옆에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죠?"


역시 그녀는 다르다.
그저 현대 문명에 적응해 변한 것으로 생각했다.
내 소설 설정을 기반으로 해  세계로 넘어온 순간부터 천천히 행동 패턴이 변한 것이라 생각했다.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사랑한다고... 한 번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런 억지 같은 것을 부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선생님을 제외한 인간을 벌레 보듯 해야 했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보다 약한 내 눈치를 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사랑한다는 말도 부끄러워 늘 좋아한다고만 말하는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바뀌어 그녀의 스토리 전체가 변한 것이다.
그녀가 망가지기 위해 마련된 스토리가 전부 바뀌었다.

......만약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왜 그녀가 변한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그녀를... 그 아이를 구해주러 갔을 것이다.
부모도 없고 먹는 것도 제대로 못하며 남에게 빌붙어 살던 그 불쌍한 소녀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서술한 새끼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선생님"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미치도록 무서운걸...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혹여 그때로 다시 돌아갈까 미치도록 두려워지는 것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아무 말도 없이 내 손톱을 뜯었던 그녀가...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말하며 눈을 몇 번씩이나 찔렀던 여자가...
온몸을 구멍 낸 뒤 다시 치료해주는 것을 반복하며 시작도 안 했다고 말했던 그녀가 그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미치도록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복수를 꿈꿨던 나를 더욱 허망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나만 잊어버리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때 났던 상처들이 치료되었으니까.


 다리가 잘려 울부짖으며 바닥에 더러운 것들을 싸지르던 상처들이 어째서인지 꿰매어졌으니까...
이미 죽어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렸어야 함에도 마치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나는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있다.


그저 기억만이 남았으니까.
그녀에게 공포를 느꼈던 기억.
그녀를 증오했던 기억.
그녀를 혐오했던 기억.
...고통스러웠던....기억...


그래서 나만 참으면 상관없다 여겼다.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면 된다 생각했다.

나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나만....나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그런데, 그러면 억울하잖아.

복수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억울하다.
전부 잊어버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저렇게 바라보는 그녀가 너무나도 역겹다.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내뱉은 말이다.
나에게 했던 짓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로 이 일을 계기로 내 옆에 달라붙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온몸에 바퀴벌레가 기어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싫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어쩔  없다는 이유로 타협하며 쌓이고 쌓인 빚이 그녀를 용서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개 같이 싫다.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벨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두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는  눈에 들어왔다.

"씨발년, 존나 쌔네"


"여자...시...싫어... 부...구우우운....어..딨어... 부군!!!"

싸우다 말고 내 앞으로 달려오는 이아는 곧이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고, 벨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아. 이....개년아!!! 집중 안 해??"

"뱀파이어는 심장을 찌르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했었나?"

이아의 심장에 꽂혀있는 검을 뽑으며 여유롭게 사라를 바라보는 벨라의 모습.

이길 것이다.


벨라가 저 말도 안 되는 괴물 둘을 압도하는 전투력이라면 아무리 공방 밖에 있는 라일라라 할지라도 벨라와 싸우고 있는 둘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쌍둥이 자매와 프리시아는 이길 수 있을 테니까.

"씨발년. 프리시아! 당장 주군 잡아. 이아 없이 이년 못 이겨"


"...그..그치만...마..마법사가.....마..막고 있는걸...거...검... 어디 갔지? 사라졌어...."

"개판이네. 씨발"


그런데 나는 이렇게 이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선생님?"

한쪽으로 발을 움직여 아까 프리시아가 날아가면서 떨어트린 레이 피어를 향해 걸어가자 등 뒤에서 라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도움받느니 차라리 죽어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언제로 회귀하던 지금과 똑같이 라일라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면 나는 몇 번이고 회귀할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어떻게 안 것인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때는 이미  손에 검이 들려져 있었을 때였다..


저 여자가 나한테 들러붙을 빌미를 주는 게 싫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날 관음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녀가 내 주변에 들어오는 건 죽을 만큼 싫다.

"그만!!!!!!!"

너무 소리가 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일라의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줄 알았다는 듯 그저 나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으니...

아마 벨라가 소리 치고 있는  아닐까?

목에 칼을 올려두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겉보기보다 검신이 길어 저번처럼 목을 찌를 수는 없었기에 찌르는 것이 아닌 베기 위해 비스듬하게 검을 잡았고, 망설일  없이 곧장 내리그었다.


"주인님"

힘을 주고 있음에도 칼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이어검자루를 쥔 손으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  있었다.


엘리제...


"이렇게 하면 아프기만 해요"

"놔"

"싫.어.요"

그녀의 입에서 알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단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검자루를 잡고 있는 내가 어째서 검날을 쥐고 있는 엘리제를 힘으로 이겨낼  없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이건 아니지 않는가.


"내 말대로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놔!!!"


"제일 즐거운 부분에서 그만두시면 어떻게 해요"

이 여자는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끝을 보시고 난 다음가셔야죠. 주인님을 망가트렸던 저 아이가 진실을 듣고 난 뒤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걸...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그럼요. 저는 저 아이를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왜인지 저 아이는 저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제가 참 좋아하는 아이에요"


....미쳤다.

"어차피 죽으면 기억 못 해"

"당장은 즐거운걸요?"

나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좋아하니 망가트린다.
그녀가 입에 담은 좋아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 진심이라 느껴졌다.


아....그래서 일부러 벨라가 자살하도록 유도했던 거구나.
나에게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고, 화장실에서 그 개짓거리를 하도록 나를.....


"주인님. 화내다가 갑자기 웃으면 엉덩이에 털이 난대요"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난 뒤 제일 먼저 엘리제를 찾았다.
그녀만큼 안전한 히로인은 없다고 믿었고, 그녀는 나를 절대 해치지 않을 거라 믿어왔다.
그런데...


이 여자가 제일 위험한 여자였다.
나는 가장 옆에 둬서는  되는 히로인을 자진해서 찾아갔다.

[시간이 지났거든요]

[주인님께서 지금부터 저를 버리셔도 저는 상관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어머,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절반은 거짓이며 나머지 절반은...나에 대한 희롱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속고 또 속았다.

"주군....어째서 그런...괜찮으십니까?"

몸에 새빨간 피를 붙이고서 나에게 달려오는 벨라의 모습에 나는 검을 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벨라가 싸웠던 곳을 바라본다.


주변 일대의 건물이 전부 무너져있으며 그 잔해로 주변이 먼지구름으로 가득해 뱀파이어를 눈으로 확인할  없었다.

"어디 있어"


"...네?"

"뱀파이어...어디있냐고"


"죽였습니다. 부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피까지 전부...."

좇같다.
머릿속에 좇같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뜻대로 흘러간 적이 단  번도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예상외의 일만이 발생한다.
당장 죽는 것조차도 엘리제의 손에 막혔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회귀하길 바랐지만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대체 회귀하는 기준이 뭔데?
쟤네는 그냥 엑스트라고 라일라나 벨라 같은 애들은 히로인이라 회귀시켜주는 거야?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라도 알려주고 난 다음,  고생을 시키지 왜....

"...죄송합니다. 살렸어야했는데...제 독단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사죄를 하는 벨라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일라의 모습.
너무 멀어 그녀의 표정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마주하는 게 두려운 만큼 그녀도 나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개판이다.


"벨라트릭스"


"네, 주군"

"날 죽여줘"

나는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확인차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너희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가자"




***


무력하다는 것은 사람을 미치도록 힘들게 만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 일이 있고  후 집에 틀어박혔다.
방구석 폐인마냥 처박혀 밥을 축냈다.


솔직히, 밖으로 나가는 게 너무 싫었다.


히로인들이 무서웠다.
 옆에 있는 벨라나 엘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여자들

얼굴도 모르는 그녀들은 내가 사는 곳이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녀들에게 알려준 적도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뱀파이어와 벨라트릭스 그리고 라일라가 크게 붙었고, 분명 그것을 느끼거나 본 히로인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들과 마주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날 죽어야만했다.


엘리제, 벨라, 라일라, 샤를.

이렇게 네 명의 히로인과 조우한 것만으로 나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새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라도....뭔가 해야만했다.


누군가 죽으면 회귀한다.
회귀하기에 포기를   없다.

그래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했다.

대체 나는  이렇게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생각을 바꿔보았다.

목적은 무엇일까?
대체 나에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예전 벨라가 자살하고   회귀 시간이 변했을  나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인해 히로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내가 죽어 도망치는 것도 망가지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기에 회귀는 나를 도망칠  없도록 하려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레벨업은?
레벨업이라는 것도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느 정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었다.

"어디 가십니까?"


"밖에"

"따라가겠습니다"

옷을 대충 입고서 밖을 나가려고 하자 벨라가 빠르게 따라 나와  뒤에 섰다.

"따라오지 마"


".....죄...."


"죄송하다고도 하지 마"

어째서 그는 이런 여자를 좋아했던 것일까?
얼굴만 빼고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애초에 누구를 가려서 사귈 입장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곧은 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정말...올바른 삶만을 살아왔을 것 같은 여자.
늘 말도 안 듣는 그 여자와는 다르게 벨라는 나 같은 놈에게는 무척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얼마 전에는 내 얼굴도 보는 게 무서워서 집에서 안 나타나더니,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러는 게 신기해서"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어떤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에 나랑 잤잖아. 그때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궁금해서"

"네? 제가 주군이랑 잠을 잤습니까?"

그때의 일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순간 거짓말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그녀가 엘리제도 아니고 나에게 거짓말을  이유가 없었다.


"벨라. 혹시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

"...주군은 저를 어린애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남녀가 사랑해서..."

"해서?"

"손잡고 신전에 찾아가면 여신님께서 여성의 몸에 아기를 내려주는 거잖습니까. 저도 다 압니다"


기억에서 완전히 지웠다.
인격이 뒤바뀌면 겪었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참, 단순한 구조다.
...부럽다.

나도 저렇게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벨라. 나갔다 올게"


"따라가겠습니다"

".....부탁할게"

"......"

"부탁이야. 벨라"


그녀는 나의 말에 입을 들썩이며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내 얼굴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만에 밖으로 나와보는지 모르겠다.


뉴스도 보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정보만으로도 벅차 그 이상의 것은 일부러 무시하려 애썼다.

분명, 마중도 안 나왔던 엘리제는 몰래 내 뒤를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다른 한 명도....


그것을 알기에 나는 마냥 걸어갔다.
저번처럼 무작정 걸은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걸었던 곳을  것은 맞다.


머릿속에 생각이 무척이나 많을 때마다 왔던 곳.

이제 막 해가 지는 타이밍인데,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와 같았다면 이 거리는 차들로 빽빽이 차 있어야 할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너무 한산했다.


...서울 한복판에 차가 하나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꽤 편하게 지냈던 거구나...
부족함 없는 방콕 생활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집에서 태평하게 지냈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의외로 깨끗했다.


무너지고 황폐해진 다른 곳과는 달리 이 공원만큼은 무척이나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특히나.....시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공원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장소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나와도 돼"

내 말이 끝나자 누군가 잔디를 밟으며 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이 라일라임을 알고 있다.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가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다시금 걸어오고 또다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을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 덕분에 그날처럼.....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탁이 있어"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녀에게 빚을 지는 것이 너무 싫어서 답이 나왔음에도 몇 번이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 고민했다.

그런데...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내 입으로 그녀를 불러내었다.


"...내가 부탁을 들어주면.....네가 바라는 걸 들어줄게"

사실 고민하는 것보다는... 방치하기 위해 버텼다.
사람들이 죽도록 방치하고 또 방치했다.
모두가 죽어버리고, 더는 게임의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는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뭐든지..."

"네. 선생님"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맞는 것인지 시험해보고 싶어 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방관했다.


"네가 바라는 걸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유를 묻지 않아도 돼? 내가  이렇게까지.......이유 듣고 싶잖아"


중간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긴 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듣고싶어요"


"그런데 왜?"

".....지금이 아니라면 용서받을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아서요"

정말 모르는 여자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내가 만든 캐릭터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여자처럼 보인다.

"라일라...."

나는.....결국 그녀에게 빚을 졌다.


"죽어줘"


불가능한 부탁을 승낙해버렸고...그녀는 오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그럼에도 나는....들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이뤄드릴게요"

감고 싶은 눈을 애써 부릅뜨며 그녀의 미소를 마주 보았고...


"사랑해요. 선생님"


바닥부터 만들어지는 투명하고 시리디시린 송곳들이 그녀의 몸을 꿰뚫는 순간을 뇌리에 박았다.


***

[BAD END] - 라일라 DEAD (194일 생존)


LEVEL : 2 -> 3

***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이제 나는 미치도록 두려워하고 증오했던 그녀를 용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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