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LEVEL 3 (1) (26/87)



〈 26화 〉LEVEL 3 (1)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다.

오늘 날짜는 9월 4일.
히로인들이 현대에 나타난 것은 8월 1일.

씨이발

가만 생각해보면 이 회귀라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체감상 반년은 훌쩍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달밖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 전 내가 겪었던 일들은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없어져서 잘된 일이긴 하지만...그래도 허무한건 허무한 것이다.


지현이라는 아이가 죽고, 이상한 형사 아저씨한테 취조당한 뒤 뱀파이어들이 나타나 서울 도심을 폐허로 만들었던 것들이 전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이 완전히 무너졌다.

157일.
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 대한민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사람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도로를 밟으며 공원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녁 시간임에도 차가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는 수도 없이 금이 간 아스팔트와 무너지다 만 건축물들.
아마, 내가 사는 곳을 제외하고는 전기와 물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겠지만....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아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식량이 썩고 식물들이 죽어있었으며 시체는 전부 변색이 되거나 뜯겨 죽어있었다.
TV에서 떠들어대던 좀비때가 이곳을 훑고 지나간 것이겠지.

...솔직히, 나서고 싶지 않다.
흑마법사
그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기에 더욱 나서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의 히로인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녀에 대해 서술할 때에는 정신을 놓고 썼기에 현실로 나타난 그녀가 어떤 정신 상태를 가지고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주인공 말은 참 잘 들었다.


....가짜 말고, 진짜 주인공 말은 참 잘 듣는 히로인이었다.
 여자가 주인공이 바뀐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울산을 타격했던 좀비 때가 진압이 된 지 일주일도 안됐음에도 현재 경상도 곳곳에서 좀비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현재 취재에 나가 있는 김 기자 연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하는 짓만 보더라도 중구난방이다.
목적을 모르겠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구역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무력을 행사하려는 것도...아닌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뭘 하려고 하는지 감도  잡히는 상황이었기에 솔직히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다.

하지만 서울이 붕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불효자 새끼긴 해도 부모가 죽는걸 내버려 둘 정도로 개새끼는 아니었다.
동생도 어머니와는 아직 같이 살고 있을 테니... 서울은 지키는 게 도리이긴 했다.

소설에서 흑마법사를 어떻게 제압했더라...
그러고보니

"엘리제. 성녀는 어디 있어?"


"...네?"

"....왜 그렇게 놀라?"

청소를 하고 있던 그녀는 내 말에 어깨를 움찔해 보였고, 곧이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 놀랐어요"

"....그것보다 성녀는?"


"....성녀님이요?"

무척 의심스러운 반응이었다.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그녀가 내 눈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더 의심스러웠다.

"엘리제"


"네. 주인님"


"성녀 어디 있어? 세 번째 물어봤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본다.
설마 몰래 죽여버렸나?
아.. 그랬으면 회귀했으려나?
아니면, 어딘가에 묶어 놓은 걸까?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의심이 깊어진다.


"...꼭 찾아야되나요? 그... 성녀님..."


"응"

그녀는 성녀님이라고 말했지만, 느낌상 그년이라고 하려다 그만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불편해하는 것일까?
성녀랑 공주랑 사이가  좋았었나? 그런 적 없는데....


대체 원작파괴를 얼마나 한 거야.

".....진작에... 치워버릴걸"

이제는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그녀를 재촉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거 제가 알아요"

"...라일라? 네가 어떻게 알아?"

"요즘 유명해요"

"유명?"

"길에 자주 보이던데? 선생님은 모르세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서는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컨을 들었다.
TV를 키고 버튼을 누르는 라일라의 모습에 뉴스에 성녀가 나온 적이 있다는 것일까? 싶었지만, 이내 매일같이 뉴스를 보는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참 이상하게도 TV 프로그램 재방송을 클릭했다.

"정말 모르셨어요? 하긴 저도 제 공방에 성녀가 직접 인사하러  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겠네요"


"걔가 서울에 있어?"


"그렇죠. 이쪽 구역에 잠시 촬영이 있어서 왔는데,  김에  돌리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뭐?"


"아, 나온다. TV 보세요 선생님"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미간을 좁혀 자세히 바라봤고, 그런데도 이해가 되지 않아 소파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춤을 춘다.


분홍색 머리를 하는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드레스를 입고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혼자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옆에 몇몇 더 있다.
하지만 유독 분홍 머리 여자가 눈에 띈다.
눈에 띌 정도로.. 아니, 솔로 가수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독보적인 외모이기는 했지만....


"....이게 왜?"

"성녀에요. 저 여자. 화장을 좀 심하게 해서 어색하긴 한데. 일단 성녀는 맞아요"

"거짓말하지 마. 걔가 왜 여기서 아이돌을 해"

"...누군가가 시켰을지도 모르죠"

이세계에서 성녀인 그녀가 현대에서는 아이돌?


구라도 정도껏 하지...
 성녀가 뭐가 부족하다고...


내가 설정한 여자였고, 얼마전 그 주인공이 라일라의 팔다리를 고치기 위해 수십번이고 성녀를 찾아갔던 기억을 봤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정말 쓸모가 없는 인간이군요.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다시 또 이곳에 찾아온 것입니까?]


그를 업신여기던 여자였다.
애초에 그녀의 설정 자체가 인간은 하등한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주인공은 성녀에게 버림받았기에.. 다른 인간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머리를 땅에 쳐 박으며 고쳐달라 빌고  빌었을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여자인것을 보면서 그것을 잘 알수있었다.


몇 날 며칠을 머리 박아도 그녀는 절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 여자였고, 그는 결국 엘리제를 이용해 라일라를 치료하는것에 성공했었었다.

모두를 공평하게 미워하는 성녀.
모두에게 줘야 할 사랑을 주인공에게만 주는 성녀.

다섯 명의 멤버 중 센터에 서서 화려한 미소를 지은 채 댄스곡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을 추고 있는 전직 성녀이자 현직 아이돌.

대체 소설을 썼던 기억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뇌에서 소설 설정들을 끄집어내 쓰레기통에라도 던져버리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원작 파괴도 정도껏이지
캐릭터 고유의 성격이라는 게 있는데 원작자 허락도 안받고 이런....


생각을 해보니 애초에 허락이 필요없었다.
원작자가 직접 원작 파괴를 했는데... 굳이 허락을 받을 이유가 없지...

그런데 아무리 성격이 바뀌었다해도 저 여자가 왜 저기서 춤을 추고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순간 당황하는 엘리제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해보니 몇 번이고 성녀에 관해 물어봐도 그녀는 입도 뻥끗 안 하려 했었다.

"엘리제...."

"그 여자 이미 도망갔어요. 선생님"

"엘리제!!!!"


"....영악한 여자예요. 이미 불릴 줄 알고 귀를 막았을 거에요"


"당장 나와서 설명해!"


거실을 한 바퀴 돌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라일라의 말대로 이미 도망간 것인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내가 부르면 나와야 할 여자였다.

"이렇게 평생 도망갈  아니잖아? 빨리 나와서 설명해 엘리제! 라일라. 이 집에 엘리제 있어?"

"그 여자가 한번 숨으면 저도  찾아요"


"......"

흑마법사를 쉽게 상대하려 했다.
라일라와 벨라가 있어 이기기야  테지만, 흑마법사의 천적인 성녀라면 아무런 피해도 없이 편안하게 이길 수 있었기에 그녀를 찾으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 벨라의 상태가 이상했다.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보자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방긋 웃으며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고 그녀는 자신의 혀를 내밀고는 곧바로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저거 나 미워하는  맞지?"

"다중인격이네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한 것이라고는 며칠  라일라와 함께 집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침대에 쓰러진 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밖에 없었다.
그냥 자는 모습이 귀여워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아 퇴행을  듯이 빼액 울기 시작하더니....

다시 방에서 나와 나를 몰래 지켜보는 벨라의 모습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에요"


"더 심각해지지 않을까?"


"설마요. 그래도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검제였는데..."

벨라의  상태가 쭉 계속된다면 흑마법사고 뭐고 일단 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만나자. 만나고 나서 생각하면 되지"

일단 성녀를 만난뒤 숨어있는 엘리제를 찾을지 말지 결정하자.
잘못 돼 있으면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그녀를 때릴 거다.

"네, 선생님.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잡을 동아줄이 라일라밖에 없다는 현실이 참....
물론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싸이코 같은 여자가 아니고, 그녀는 내게 했던 짓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를 원망하며 밀어내면 나만 손해라는 것도 정말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보니 그녀를 보면 가끔 놀라게 된다.
회귀한 지 얼마 안됐을 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다시금 그때의 기억에 정신이 오염되는 느낌이다.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점차 수면위로 드러난다.
내가 그녀를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짓눌러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밖으로 튀어나온다.


"선생...님.  여자..."

그리고, 그녀는 참 눈치가 빠르다.
잠깐 그것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 어느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는 나에게 '왜'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있다.

"왜? 지금 만나기 힘들어?"

"...아뇨.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  같아요"

나는 그녀를 용서해야만 한다.
...그녀와의 약속이었고, 나를 위해서도 올바른 판단이다.
나는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야만한다.


나에게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도 내가 있어야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집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다.

"이름이 디아나 맞지?"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손을 머리에 올려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선생님.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존나 머리 아프다.
라일라의 도움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방송국으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좋았다.
마법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런 만능과도 같은 것이니 나는 정말 편하게 성녀가 있는 대기실로 들어올  있었다.

그런데...


"멍멍...멍..."

납작 엎드려 강아지 울음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성녀의 모습을 보니 상황이 말도 안 되게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언니 갑자기  그래? 일어나 빨리!"


"당신들 누구야! 당장 여기서..."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해 주변 사람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일라. 조용히 시켜"

"네, 선생님"


그녀가 손뼉을 치자 소리를 치던 여자들이 전부 바닥에 넘어져 기절해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래, 차근차근히 해보자.

"디아나. 맞지?"


"멍!멍멍!"


사람 말이 불가능한 것일까?
아까 TV에서 봤을 때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을 넘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여자라는 생각이  정도였다.


"멍!멍멍!"


춤을 추며 엉덩이를 흔드는 것을 보긴했지만, 이렇게 몸을 땅에 처박고 엉덩이만 들어 올리고 흔들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디아나. 사람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듣지 않겠어?"

그 말을 꺼내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살며시 들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저...저 같은 게...말...해도 되...는건..가요?"

심각하다.
이건 엘리제가 한 짓이 분명하다.
심증일 뿐이지만, 나는 확신했다.
분명, 주인공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전부 엘리제....그 여자 짓이다.

"그래, 말해. 디아나 맞지?"


그냥 아니라고 해줘.
도플갱어라고 말해줘.

"...아...아니요!...아...니에요..."


"...아니야?"

"저...저는 주..주인님의...유...육변기...에요. 이름...같은거....없어요..."

그래. 생각을 바꾸자.
오히려 좋지 않은가?
그 고압적인 성녀의 성격이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데 꽤 고생 했을 것이다.
....생각을 바꿔보니 이게 훨씬 나은 것 같다.


내가 왜 화가났던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예전에 흑마법사 상대해본적 있지? 그때랑 똑같을 테니까. 그냥 몸만 와서 잠깐 일해준 다음에 다시 복귀하면 돼. 뭐... 노래 좋더라. 엘리제 시켜서 도와주라고 할테니까. 앨범 많이 내"


이 상태라면 물어보지 않아도 힘을 빌려줄 테지만, 혹시 몰라 명령조로 말하고 집에 가려고 했었다.
이상하게 오늘 멘탈이 조금 많이 흔들리는  같아 휴식이 필요했기에 빠르게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주...주인님...그...그런데...저..."


"응?"


"....저...성법...모..모르는데요..?"

"뭐라고 했어? 방금?"


문을 열고 나가려던 도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몸을 천천히 돌려 도게자를 하는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다...다..이...잊어버렸어요...유..육변기는..그런거...필요없다고...하셔서..."


"누가"

"...자..작은...주..주인님이...요..."


말하지 않아도 그 작은 주인님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전부 잊어버린  아니잖아...그렇지?"

"...겨..겨우 전부...이...잊었어요...헤..헤헤...사..상...을..받을수..있을..까요?...사..상...너..너무..오..오랜만에..봐서..모..못..참겠..어요..."


엉덩이를 흔들며 조금씩 기어와 혀를 내밀어 내 신발을 햝는 성녀의 모습에 나는 눈을 감았다.


"...머..멋대로..시..신발 더럽...혔어요...버..벌...주세요..."

이건 용서가 안된다.

"엘리제!!!!!!"


"선생님 이곳에 없어요"

"당장 나와!!!!! 엘리제!!!!"

"선생님...."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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