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LEVEL 3 (2) (27/87)



〈 27화 〉LEVEL 3 (2)

라일라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닌 내 기억이다.

그녀에게 고통받았던 기억.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녀를 싫어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며 두려워하는 것도 전부  기억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녀를 싫어하지 않을 때가 있다.


회귀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때의 나는 그녀에게 그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않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대할 수 있다.


회귀하는 순간 내가 겪었던 일들은 전부 없던 일이 되며, 내 정신도 마치 그런 일은 없던 일인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와 버린다.
아무리 망가지고 부서지고 무너져도 회귀하는 순간 나는 정상인이 된다.


문제는 기억이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폭탄의 도화선 타기 시작한다.
느리든 빠르든 타기 시작한 이상 언젠가 터질 폭탄이 되어버린다.

그 폭탄이 터지면 내가 가두고 꽁꽁 숨겨두던 그 날의 기억들이 터져 나와 하나씩 망가트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웃으며 내 손가락을 잘랐던 것을 떠올려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며
온몸이 뜨거워 살려달라 부르짖을 때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려 증오할 것이다.
숨이 막혀 고통 속에서 죽으려 할 때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말하며 나를 치료해 주었던 기억이...그녀를 원망하게 할 것이다.


분노할 수 있다.
증오할 수 있다.
원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선택이다.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 나에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주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날의 강렬한 기억은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그녀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떠올라버리게 만든다.
아직 터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날의 초점 잃은 눈이...일그러진 입술이...자꾸만 겹쳐져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이뤄드릴게요. 사랑해요. 선생님]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죽으라는 내 말에 투명한 얼음으로 자신을 찔러 피를 흩뿌리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아니, 덮어버릴 수 있을까?


더욱...강렬한 것으로...덮어버리면....괜찮지 않을까?



***


"선생님!"

"어?"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대답이 없으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내 말에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선생님"

"왜?"


"그......"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그녀의 입을 막지 않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국 물어보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회차에서도 그녀는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수십 일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으니...포기할  분명하다.

"그....저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조금 전에 설명 안 듣고 딴생각했다고 복수하는 거야?"


"....네, 맞아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설명이나 해줘. 이번엔 집중할게"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뒤 지도 쪽에 손을 올렸다.

"선생님이 물어보셨던 흑마법사는 아마 이쪽 부근에 있을 거예요. 울산이라 쓰여 있는 이곳이랑 대구 사이"

".....아하"

"처음 알아볼 때는 뱀파이어들이 좀비들을 죽이기 시작하면서 울산 부근에 있던 흑마법사가 도망쳐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세력 다툼이라고 보기에는  범위가 너무 작아요. 흑마법사도 뱀파이어도 뭔가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다시.....선생님? 듣고 계신 거....맞죠?"


"응...아니, 미안해 안 듣고 있었어"

솔직히,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


"식사 드실 시간인데. 식사 먼저 하시겠어요?"

"...응. 부탁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몸을 움직였다.

내가 그녀에게 물어봐 놓고 집중  하는 건 미안하지만 조금 위험하다.
이제 3일째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어느 정도 괜찮게 대한다 싶었지만,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가 이상해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라일라는 그대로인데 어쩌다  번씩 그날의 그녀가 겹쳐지는 환각을 본다.


물이 틀어 세수하자 몽롱하던 정신이  깨는 것을 느낀다.

제발 정신 차리자.
회귀한 지 3일밖에 안 됐는데 이게 뭐냐...


서울의 붕괴를 막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서 움직이는 것인데 이번 회차는 시작부터 느낌이 이상하다.
뭐랄까...너무...힘들다.
늘 힘들었지만, 이번 회차는 유독 힘든 느낌이다.


"....주...주....주..."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 나름대로 기분 좋아 몇 번을 세수하던 중 한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저...절.. 사..사용하시러 오신 건...가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분홍색 머리를 하는 성녀가 변기에 앉아있었다.
 여자... 어제부터 이곳에 들어와 화장실에서 나가지를 않는다.


"언제 나갈래?"


"...유..육변기를...사..사용...해...주세요...제..제발...부...부탁드립...니다.."

어제 이 여자를 화장실에서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몸으로 화장실에 앉아 입을 벌린 채 나를 보고 있는 성녀의 모습에 정말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더..더러운...육변...기에.. 쉬...이...해..주..세요..."

이 여자는 대체 어떤 것을 당했길래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정말 깔끔하게 망가져 있다.

이 여자를 보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예전 라일라가 TV에서 틀어준 화면을 다시 보니 확실히 알았다.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전부 없애 버리고 필요한 부분들은 남겨 놓았다.
주인 앞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전부 포기한 체 물건이 되었음에도...
다른 이들 앞에서는 정상인인 척을  수 있는 인형.
이 여자는 아이돌을 할 정도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심으로 자신을 주인의 물건이라 여기고 있다.


"말 더듬지 마"

"...ㄴ...네!"

"나가자"

"....아..안되요. 자..작은 주인님이...유..육변기가 되라고...하...하셨어요...제...집은 화장실에..요..."

"나보다 엘리제가 한 말이 더 중요한 거야?"

내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곧장 변기에서 일어났다.

"아...아니에요!!"


"그럼 따라와"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그녀를  집으로 들인 거나 다름없었기에 내보내기가 조금 미안했다.
....성법을 더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찾아가지도 않았을 텐데...

일단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었을 테니 밥이라도 먹이고 내보내자.

그렇게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자 라일라가 앞치마를 입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선생님이 김치찌개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일단 만들어봤는데... 마..맛없으면 남기셔도 돼요!"


일단 향기는 좋았다.
맛이 없더라도 버리는 일은 없겠지만...기대가 되는 향이었다.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어 한입 떠먹어본다.

...음....
애매한 맛이었다.
솔직히, 엘리제의 음식 실력이 사기적이다 보니 입맛이 높아졌을 뿐이지 무난하게 먹을만한 수준의 찌개였다.


"어때요?"

"맛있네"


"감사해요. 선생님"


내 옆에 서서 무척이나 기쁜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녀는 곧이어 주방 쪽으로 걸어가더니 어떤 그릇들을 내 앞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내가 방금 먹었던 찌개 그릇을 들고 간다.


"...왜 가져가?"


"네? 버리려고요"


"....왜?"

"억지로 드시면 안 되잖아요. 한식은 조금 더 연습해서 차려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 늘 이런 식이다.


엘리제는 그나마 내 행동 같은 것을 유추해 추측성 발언으로 나를 한 번씩 떠보는 편이었다.
그런데...이 여자는 조금 다르다.

그냥 알아버리는 느낌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전부 말하지 않아도 알아버린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머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변하는데, 너는 그게 좀 심해. 그래서 모르고 싶어도 알게  버리더라]


....또....
내려다보며 내 거짓말을 하나하나 집어주던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나의 귓가를 속삭인다.

"선생님?"

"...디아나.  거기  있어? 빨리 와서 앉아"


"저..저는 유..육변기입니다"


성법도 쓰지 못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하루 이상을 굶었으면 무척 배가 고플 것이다.


"먹어. 명령이야"

"...하..하지만..차..차라리 사료를...주..주세요..저..저는 자격이..어어어없어요..."


"라일라.  좀 챙겨줘"

"네, 선생님"

밥상 앞에서 이게 무슨짓인지...참...
밥상 앞에서 육변기와 사료 이야기를 하는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냥 입 다물고 밥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젓가락을 들고 있을 때 라일라가 바닥에 무엇인가를 놔두는 것이 보였다.


김치찌개에 밥을 넣은 그릇을 바닥에 두는 라일라와 그것에 얼굴을 파묻고 먹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에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아 멍청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있을법한 일이기도 하고... 그다지 놀랍지는 않지만... 상식이 깨어지는 기분은 묘하게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

"라일라. 내가 하는 말 이해 못 했어?"

"...아뇨. 잘 이해했어요"

"그런데 왜... 디아나! 그만해! 그걸 왜 쳐먹...."


그래, 디아나는 망가졌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라일라의 행동은 이해가 안 됐다.
얘가 왜?

"선생님은 기억을 잃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 여자...아니, 이년 선생님이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줄 만한 여자 아니에요"

"내가 너한테 기억 잃었다고 말한  있었나?"


"....아뇨.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네가  간섭하는데. 하기 싫으면 꺼지던가"


"....선생님"


...감정이 격해져 버렸다.
손발이 떨린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나는 지금 이 여자를 역겨워해야 되는 것일까? 싫어해야 되는 것일까? 두려워하는 것일까?

"....적당히 해. 디아나. 식탁에 앉아"


"...그....네..."

얼굴에 붉은빛 국물들을 잔뜩 묻히고 있던 디아나는 내 말에 몸을 일으켜 의자를 붙잡았지만....


"...앗..."

디아나가 앉으려던 의자가 라일라의 손에 거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라일라"

"선생님. 저는 절대 못 봐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선생님을 어떤 꼴로 만든  제가 제일  아는데...  여자가 사람대우받는 건 절대 못 보겠어요"

"......"


"그동안 그냥 지켜봤던 건. 알아서 개가 되려고 하니까 내버려 둔 거예요. 선생님. 부탁드려요"


그래,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벌일 수 있다.
이 여자가 천하의 악독한 년이어서 주인공을 괴롭혔고, 도저히 이 여자가 대우받는 것을 못 참아 멋대로 행동했다 치자.

"...도저히  지켜보겠어? 그러면 지켜보지 마"

"네?"


얼마든 그럴 수 있다.
엘리제나 벨라도 나한테 거짓말하거나 싫은 명령을 거부하곤 했고 나는 그것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라일라는 아니다.
그렇지않아도 이 여자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스트레스인데...
거기다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는 사실까지 더하게 된다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미 3일 만에 한계가 찾아왔고 나는 강렬했던 그 날의 기억에 파묻혀  여자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조차도 모를 지경까지 왔다.


"못하겠으면 나가라고"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한 것인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왜..."


...알고있다.
내가 멍청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정도는... 하지만, 그 정도로 나는 지금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나가고 싶지 않으면...시키는 대로 해... 디아나.  다 먹었으니까 네가 여기 앉아서 먹어"


"....주..주인님의 자리에 함부로...."


"좀! 하라면 해!"

"....네..."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라도 시킬 겸 산책하기 위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선생님"

문제없다.
평소와 다름이 없다.
나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

"선생님"


빠르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제가 그렇게 미운 이유가 뭔가요? 제가 어떤  잘못했는지라도 알려주세요"


결국 그녀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발 하지 않기를 수도 없이 바랐던 말을....

"......."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요? 처음 봤을 때부터...지금까지...절 그렇게까지 원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벨라가 망가지고, 엘리제가 없는 상황에 라일라라는 말까지 잃게 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새끼가 된다.
소설에 대한 정보도 무의미해졌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뻔히 알고 있는 내가 자신의 손으로 들고 있는 패를 버리는 짓만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아무 것도...."

"제가 무슨 잘못을 했건... 선생님에게 용서받고 싶어요..."


"......"

"그러니, 알려주세요"


"...용서 같은  불가능해"

나는 자기감정도 주체  하는 병신 새끼다.

"그래도, 평생 속죄라도 할 수 있게 알려주세요. 선생님이 저를 무서워하는 건....싫어요..."

애초에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그것이 나오지 않게 틀어막는 것은 가능했다.
아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선생..."


"처음....네가 처음으로  건..... 내 성기를 잘라내는 거였어"

처녀막을 찢었다는 이유로 다시는 주인공을  보겠다는 이유로 그녀는 내 성기를 먼저 잘라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극한의 고통에 나는 정신을 잃었어야 했지만...각성제와 같은 것을 사용한 것인지 그녀는 내가 기절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붙여주더라. 생각해보니, 너무 쉽게 잘라버린 것 같다고..."

별걸 다 했다.
정말....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는 힘을 다했을 때 즈음 고통에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녀는 능숙하게 다른 곳에 고통을 주었다.
하나하나...

"손톱...발톱...찢고...뜯고....뜯고...또 뜯고..."

가장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은 손바닥과 발바닥에 고문할 때였다.
수십에서 수백 개의 가시가 박힌 것으로 가장 통점이 많은 발바닥과 손바닥을 뚫을 때 나는 가장 큰 고통을 느꼈었다.


가장 크게 공포를 느꼈던 것은 온몸을 불로 지를  그리고 눈을 찌를 때였다.


"...치료하고 또 치료하고... 또 치료하고..."

고통이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을 보여줬다.
물속에 들어가 질식으로 인해 죽기 직전의 상황일 텐데...몇시간이고 죽지 못했을 때...
배고픔이 한계를 넘어섰을 때...
정말...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오는 것들을 경험했다.

"그러면서...웃더라. 한마디 말도 없이...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제발 무엇인가 물어봐 주길 원했다.
어떤 것이든 대답하고 싶었다.
그냥 죽을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알려주고 싶었다.


"며칠? 몇 주? 뒤지고 나니까 몇 달이나 그 지랄했다는 걸....알게되더라"

100일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확신하고  확신했으면서...
왜? 지금은?

"왜 그랬어? 왜...의심했어? 왜 그때는  의심하면서 지금은 선생님이라고 하는 거야?"

뇌가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을 때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들 전부 말하라고 말했다.


수도 없이 고문을 해봤으니 정말  알았을 것이다.
그때의 내가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망가지는 수준까지 와있다는 것 정도는...알고 그때 입을 연 것이었다.

"대답해봐...왜 그랬던 거야?"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리 힘들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잖아.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잖아.


"죽으면 회귀한다고 말하니까. 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런데 너무 억울하잖아...
그렇게 고통받았는데...
 이유를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는건...
원망할 대상조차도 없다는 건...
너무하잖아...


"용서해달라더라... 제발 용서해달라고... 네가 생각했을 때 그게 할 말이야?"

화풀이라는 거 안다.

"그게 할 말이냐고 묻잖아!!!"


하지만, 이미 도화선은 전부 불에 타버렸고 폭탄은 터져버렸다.


"대답해 라일라"





하늘을 연상케하는 그녀의 공허한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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