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LEVEL 3 (4) (29/87)



〈 29화 〉LEVEL 3 (4)

히로인들은 8월 1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하나의 주가 무너지고, 국내에서는 실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산은 샤를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지방 곳곳의 산이 무너져 내려 산사태를 일으켰다.
울산은 좀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충청도, 전라도에서도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10월 31일 라일라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했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죽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회차가 가장 속 편했던 회차라는 생각이 든다.

죽고 회귀한 8월 21일.
만약, 그날 8월 1일로 돌아갈 수 있었더라면 나는 라일라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 다시는 그녀와 연관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죽인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 회귀는  죽음이 아닌 엘리제로 인해 일어났다.
9월 4일. 엘리제는 내 방에서 라일라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회귀 날짜가 또다시 변했다.

8월 26일.
만약, 그날 21일로 돌아갈 수 있었더라면 나는 엘리제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제가 나를 새주인님이라 부르며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돌이킬 수 있다면,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그 회차에서 나는 12월 19일에 죽는다.
수도 없이 고문당하며, 나는 그날 망가져 버렸고,  같은 레벨 시스템을 처음으로 눈으로 확인했다.


8월 26일.
회귀 날짜가 변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회귀한  고작 해봐야 6일 정도 시간이 흐른 9월 1일.
벨라가 내 앞에서 죽었다.


늘 올바른 삶만을 자신에게 강요하던 여자는 주군에게 자신의 욕망을 내비치는 것보다 마지막까지 기사로써 죽는 것을 원해 내 앞에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렇게 9월 1일로 회귀했다.
만약......그 이전으로 회귀했더라면 엘리제를 억압해 벨라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9월 2일. 다시 한번 벨라가 자살했다.
회귀한   회차랑 같은 9월 1일.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음으로 죽은 건 9월 26일.
나는 그날 자살했다.
답이 없다고 판단했다.

변해버린 벨라와 함께 있다가는 나까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다음 회귀한 날짜는 9월 2일.
이날 날짜가 변했던 이유를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회귀 시간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듯 이때 변했던  또한...


그리고...나는 샤를이 왜 그날 나타났던 것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다음으로 죽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후인 1월 4일.
나는 그날 세상...아니, 한국이 멸망한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것은 9월 3일.
만약, 9월 2일로 회귀했더라면...나는 그 공원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직전 회차는 9월 6일.
...마지막 회귀 날짜 또한 9월 6일.
라일라가 나 대신 죽었고...나는 그녀가 죽기 10분 전으로 회귀했다.


만약...
만약...


그래, 그 '만약'이 문제였다.
내가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회귀는 전보다 더욱  같은 시간으로 나를 옮겨주었다.

최악에서 더 최악으로
그 최악보다 더욱더 최악으로...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헛된 꿈만 꾸고 싶지 않아요. 저 용서 받을  있어요]

언젠간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첫 시작부터 벅찼던 난이도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언젠간 이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첫 죽음부터 일반인이 겪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 또한 충격이었으며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지금까지 나를 좀먹어가고 있다.

벨라에 대한 책임감은 너무 버거워 지쳐버리게 했으며, 라일라...의 부탁에 나는 원망할 대상도 잃어버렸다.

회귀하고서 며칠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밥을 먹은 횟수를 계산해보면 아마 한 3일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삼시세끼 때가 되면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밖으로 나가보면 늘 바닥에 식사를 놓아져있었다.

라일라는 병신같이 나약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여자가 나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해 그런 식으로 피하는 건 아닐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게 버겁다.
목적이 없기에...나아갈수없다.

그나마 목적이라고  만한 것은 그저 생존.
죽지 않는 것, 고통받지 않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목표가 있었던 적이 있다.
벨라
그녀를 죽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매일 같이 자신을 억압하며 자신에게 너무나도 엄하던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자신을 가두고 또 가둬 망가져 버리는 모습이 너무 가엽다 여겨졌다.


좋아한다는 말조차도 죽을 때에야 겨우 내뱉었던 그녀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해 더는 죽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의미가 있을까?

고개를 들자 아까 닫았던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고개만 내밀고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에 달린 금색 꼬리를 흔들며 빠르게 사라졌다.

"벨라"

내 말에 문틈 사이로 금색 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처음 내가 봤던 벨라가 아니다.
그리고, 엘리제의 분신을 죽이고 나를 자살로 내몰았던 그녀 또한 아니다.


며칠 마주하고 나니 저 문 너머의 그녀가 누구인지 알  같은 기분이 든다.


"들어와도 돼"


 생각해보면, 나를 때리고 나를 억압했던 그녀는 벨라가 가두려고 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반말은 기본에 남에게 막말하고, 기사도 같은 건 개나 줘버렸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하려고 하는 여자.
주군이나 공주 그리고 기사 같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저 주인공에게 사랑받고 싶은 여자...

그걸 떠올리고 그녀의 과거가 내가 설정한 그대로라는 것을 가정하면... 눈앞에 있는  아이는 그녀가 바라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가문의 수장이 되고 왕국의 기사단장까지 올라갔던 그녀가 가두고 가둬왔던 어린 시절의 모습.


"벨라. 앞에 있는 거 알아"

그녀가 밖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가만히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알아서 다가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자리에서 몰래 일어나  쪽으로 걸어갔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무릎에 넣고 있는 금발의 꼬리가 눈에 들어온다.
며칠 씻지 않은 것인지 푸석푸석한 게 눈에 들어온다.


나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은  집에 꽁꽁 숨어있었으니...이럴것 같았다.
몸을 낮춰 무릎을 껴안고 있는 손을 붙잡았다.


"벨라. 인제 그만...악"

"흐에..."


그녀가 깜짝 놀라 도망치려 하는 순간 내가 그녀의 손을 너무 꽉 잡았던 것인지 몸이 넘어진  도망치는 그녀에게 끌려갔다.


"멈춰! 멈추라고!!"


놔버리면 되긴 하지만....

"끄엑..."


계단을 올라가는 것인지 바닥에 닿고 있는 피부가 리듬을 타며 뇌로 고통을 전해왔고, 이내 나는 이어지는 아픔에 못 이겨 강제로 손에 힘이 풀렸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눈을 뜨니 계단 중앙까지 끌려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려고 손을  잡은 게 아니었는데...
사실 중간에 멈춰줄 거로 생각하고 오늘은 무조건 그녀를 붙잡을 생각으로 했던 행동이었다.

아...씨...
쪽팔려서  일어나겠다.

"아파?"

"당연히 아프지!"

"...히익"

"아니아니아니, 안 아파. 안 아프니까. 여기 와봐"


계단에 누워있는 상태로 고개를 들어 보니 2층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서  보고 있는 벨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너무 커서 안 숨겨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안 아파?"

"생각해보니 엄청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파?"


성격은 다르지만...그래도, 원판은 벨라가 맞는 것인지 그녀는 지긋이 나를 쳐다보다 결국 일어나 내 쪽으로 한 걸음씩 오기 시작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그래도  쪽으로 다가와서 내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얼마나? 많이? 미안해..."

"...엄청 많이 아파. 그러니까"


아프다고 하는 사람 볼을 누르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어찌되었든 목적은 달성했기에 그녀의 손을 빠르게 붙잡았다.

"이번에는 도망가면  돼"

"...히끅. 놔. 놔줘!"

"싫은데?"

"거짓말쟁이. 아프다고 해놓고서는 거짓말했어."


"아닌데? 진짜 아픈데?"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내 손을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꽉 붙잡았다.

"...놔주세요"

"싫으세요. 아아!  힘쓰면 진짜 아플 것 같은데"


"놔..."


"싫어"

그녀가 더 강하게 발버둥 치기 전에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그녀를 절대 도망 못 치게  안았다.


"...꺅!"


그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진즉에 도망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다치는 걸 두려워하는 거겠지.

"...놔주세요"

"싫으세요"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하니까 그러지"


"...나 혼나?"

"내가 도저히 못 참아서 그래"


그녀를 껴안고 있다 보니 금색 머리카락이 내 코를 자꾸만 간지럽힌다.

"너 냄새 나. 그것도 엄청"

그녀의 귀가 살짝 빨개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한  맞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맞으면 뼈가 부러지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말을 너무 심하게  탓인가?
그녀는 내가 팔을 잡고 욕실로 데려갈 때까지 얌전히 끌려왔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자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서 날 따라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나 라고 말하는 건...조금 너무했던 것 같아 미안했다.

"씻을 줄 알지?"


욕실 앞에 도착하고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하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야지?"


"거짓말쟁이 아닌걸...진짜 모르는걸...여기 다 이상한걸..."


그녀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면 물이 나오고, 이게 머리 감을 때 쓰는 샴푸. 이게  씻을  쓰는 바디 샤워..."

가르쳐 주면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하는 행동만 보면 조금 많이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녀는 몇 살 정도나 어려진 걸까?


"만세 해봐"

"만세?"

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차라리 유아 플레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뭔가 범죄를 저지르는 듯한 기분은 안 들 테니까.

그녀의 손을 잡아서 위로 올린 뒤 배꼽만 보이던 흰색 티를 벗겼다.
대체 며칠 동안 입은 거야
이곳저곳 붉은색 국물이 묻어있는  눈에 띈다.

그녀의 상의를 벗기자 곧장 가슴이 튀어나와 살짝 놀랬다.


"속옷 어디 갔어?"

"...응?"


"아니다..."


내가 뭘 물어볼까...
그녀의 두 봉우리의 뽀얀 살결과 불그스름한 꼭지의 모습에 나는 괜스레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응? 뭐해?"

그녀의 말에 나는 몰려오는 자괴감을 애써 지우고 그녀의 청바지를 벗겼고, 곧장 눈 바로 앞에 있는 분홍색 팬티를 보고 침을 삼켰...

"하지 마..."

"몸에서 냄새나는데 안 씻을 거야?"

"...냄새난다고 하지 마..."


"그럼 얌전히 있어야지?"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겨 나신이 된 모습을 보자마자 아래쪽에 피가 쏠렸다.


"...여기 뭐가 있어! 커진다!"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는 건 나에게 너무 이른 것 같다.


"다시 작아졌다."

"조용히 하고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를 씻기는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눈 감아"

"따가워..."

"감으라니까"


사실 이렇게 평화로운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피해왔었는데...

"아 해봐"


"아~"

사실 누군가를 씻긴다는 건 귀찮긴 하지만, 색다른 느낌이긴 했다.

"이거 뭐야?"

"거품....잠깐만"


"간지러..."

바디 워시로 거품을 내 그녀의 몸에 칠할 때는...또 색다른 느낌이다.

"있잖아...있잖아"


"응, 말해"

"...이름이 뭐야? 아니, 뭐에요?"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던  그녀가 하는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사실 늘 하던 대로 주인공이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들이 나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그렇게해야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처럼 고통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안 되면...


"이름 없어?"

"...잊어버렸어"

"...히히, 나도 없는데. 똑같다"

그녀의 발을 닦던 도중 들려오는 말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벨라트릭스 있잖아"

"...아닌데? 그런 이름 없는데? 없어 그런 거"

"왜?"

"......"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응석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나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표현하지도 않은 채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해... 그럼 내가 뭐라고 널 불러야 하는데?"


"...아무거나. 그거만 아니면...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이제야 내가 매일같이 부르는데도 가까이 안 오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원래 살던 집이 싫어?"

"......"

"칼 쓰는 것도 싫어?"


"...좋아해"


"기사는 좋아해? 기사..모르려나?"


"......"

"아빠는?"


"......"

"엄마는?"


"......"


"...동생은?"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같은 얼굴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왜?"

"빼앗았으니까...내가 전부...걔꺼 다 뺏어서...그래서..."

"네가 한 게 아니었잖아. 그냥, 동생은 아파서 죽은 거였잖아"

"내가...칼  했으면...사람들이...혼내지도 않았을 거야...나랑 비교  하게...가만히 있었으면...칭찬들었을거야..."

너무 사소한 설정이다 보니 기억도 애매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말도 안 되는 검술의 천재라는 설정을 넣은 기억은 있다.


"네 잘못 아니잖아"

"아니야!  잘못이야...내 잘못...내가 뺏으려고 했어...약하다고 비웃었어...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남자라는 이유로 뺏어갔다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려고? 벨라트릭스도  하고, 카르딘 가문 가주도 안 하고, 기사도 안 하고... 그럼 나는? 기사도 안 하는 거면 이제 나는 안 지켜주는 거야?"


마지막은 그냥 물어본 것이었다.

"그게...아니...안할거에...싫어요...그건...그런데...아닌데...왜...물어보는거에요...싫어요...해야되요...아니에요..."


사실 나는 그녀가 이대로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도망치는  어때서... 숨는 게 어때서...


[그러면 저는 주군에게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그런데...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그녀가 바라는  전부 버리는 것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을 하는 그녀를 계속해서 기다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간에 나는 지켜보고...그녀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그녀가 계속 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대답은 들을  없게 되었다.


"선생님!!! 어서..."

또각또각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집을 울리듯 내 귀에 들려왔다.

"우리 자기. 내가 너무 늦었지?"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우리 자기 더 맛있어 보인다]

"조금  늦게 오지 그랬어."

"우리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거 듣고,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한줄 알아? 빨리 안 왔다고 지금 나 혼내는 거 맞지?"

피보다도 붉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와 더불어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띄는 뱀파이어.
부산을 뱀파이어들의 소굴로 만들고서 국가 비상사태를 만들었음에도 군대를 무력화시킨 후 청와대를  발로 들어가 부산을 독립 자치 구역으로 만든 여자.


"일 처리하느라 늦어버린 건데. 너무하다 우리 자기"


인간의 고통을 보는 것으로 쾌락을 느끼는...내가 만든 괴물.


"선생님!....아악!"


"여왕님... 몸에 손대면...아,아안되요..."


라일라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프리시아가 그녀를 짓밟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저번에 봤던 샤를의 직속 종자들이 함께 있는 것까지도 보였다.


"비켜...비키라고! 선생님...도망가세요..."

저번에는 벨라와 라일라가 함께 있었고, 상대는 샤를이 없었기에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벨라가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느껴지자 나는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몸인 기사 아가씨랑 껴안고 있는 거 보려고 빨리 온 건 아니었는데... 자기야.  화내도 되는 거 맞지?"

죽어야 되는 건가?
...아니, 죽어 회귀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상황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10초 뒤로 옮겨질 수도 있겠지.

나는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도망가다 이제 도망가는 것조차 포기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