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LEVEL 3 (9)
[아연양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요?]
[제 이상형이요? 아... 어... 꼭 대답해야 되는 건가요?]
[아~ 뭐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요즘 혜성처럼 떠오르는 신인이다 보니 궁금해하는 분들이 워낙 많으셔서...]
TV에서 익숙한 얼굴을 하는 여자가 나온다는 건 참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듬직한 남자를 좋아해요. 저를 이끌어줄 수 있는 주인님 같은 남자가 이상형이에요]
[아...주, 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할게요. 연습생 생활을 한 번도 안 하고 데뷔를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 맞나요?]
생각해보니 그녀들이 이곳에 떨어진 지 한 달밖에 되지 안았는데, 어떻게 이 여자는 데뷔를 한 것일까?
"디아나"
"네...넷! 주인님!"
시키지 않았음에도 내 아래에 머리를 박고 쥐죽은 듯이 있던 디아나였기에 대답이 무척 빨랐다.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이렇게 하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다고 하며 사서 노예가 되는 여자였다.
뭐... 누구처럼 무늬만 노예인 여자랑은 차원이 달라서 기분은 나쁘지 않다.
"어떻게 바로 데뷔한 거야? 너 성법도 못쓴다며, 거의 일반인 아니야?"
"그,그 작은...주인님이 전부 해결해주셔서..."
"엘리제가?"
"네, 넷! 작은 주인님이...회사에 오면... 높으신...그...이사! 이사라고 불리셔요. 다...른 사람들도 막 고개 숙이고...또..."
하긴, 엘리제의 스펙 자체가 현대 문명에서 최고 효율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 회사 하나 날름 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주인님~ 제가 전부 대답해드릴게요~ 저에게 물어봐 주..."
"입!!!"
"너무해요너무해요너무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엘리제의 칭얼거림 소리에 나는 손을 이마에 올려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무조건 내쫓으려고 했었다.
장난 하나 없이 이곳에서 내쫓은 다음 죽어도 안 보려 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버리겠다고 말하니 반발이 너무 심했다.
[저 내쫓으시면 동네방네 주인님이 여기 있다고 소문낼 거에요. 저 죽어도 주인님 옆에 있을 거예요.]
하...
"버려도 상관없다며.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말했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태세 변환하는 건데?"
"아니, 진짜로 버리려고 하실 줄 몰랐죠!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깜찍한 노예를 버릴 생각을 하실 수가 있나요!"
요즘 이상한 컨셉에 꽂힌 듯 쓸데없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손을 옮겨 이마를 짚어 머리를 굴려본다.
내가 아무리 그녀보다 머리가 안 좋아도 당한 게 몇 번인데 또 당할까?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죽어도 안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님~ 깜찍한 노예를 봐서라도 이제 화 푸세요~"
"잘 거니까. 너희도 알아서 들어가"
"밤 시중 준비할게요~"
"너 내 방에 들어오는 순간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내쫓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저는 언제나 준비되 있어요. 선생님"
내 말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한 것은 옆자리에 앉아 과일을 깎던 라일라였다.
"당장 잘라버릴까요?"
"너도 다물라고 말했지 않았나?"
이 여자들을 수도 없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해도 틈만 나면 내 말 안 듣고 꼭 입을 연다.
그래도, 라일라는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지.
"주인님. 그러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작은 주인님이 커져 곤란하실 때에는 언제든 거실로 나오세요"
하지만, 이년은...하, 화내지 말자. 화내면 내가 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어갔다.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열자 어색한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그동안 쭉 엘리제가 내 방 청소를 했었고, 이제 그녀의 일을 라일라가 도맡아 하다 보니 방 내부의 풍경이 바뀌어 어색한 것도 있지만...
"흐으응...눈아파...불꺼줘..."
금발 머리의 여자가 분홍색 잠옷을 입고 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게 제일 어색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네 방 있잖아"
"여기서 자면 안 돼?"
"응, 안...아니, 상관없어"
가만 생각해보니, 안될 건 없었다.
이 집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부담이 없는 여자였기에 딱히 같이 자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불 꺼줘"
벨라의 말대로 나는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웠고, 곧이어 내 팔을 껴안은 듯 묵직하고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내 팔을 꽉 껴안고 있는 벨라의 모습에 나는 문득 그녀가 그날 일을 전부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안할거에...싫어요. 그건 그런데...아닌데...왜 물어보는 거예요...싫어요...해야되요...아니에요...]
이름도, 집도, 부모도, 기억도 전부 포기하겠다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벨라"
"벨라 아니야"
"왜 같이 자려고 하는 거야?"
"음...부부는 같이 자는 거니까?"
어?
"우리가 대체 언..."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말을 하던 중 나는 입을 다물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진 아이 말에 진심으로 당황해버릴 뻔했다.
"무슨 말이야? 우리 언제 결혼했었어?"
"아까, 언니가 내 배에 아기 있다고 그랬어. 아이 있으면 부부 아니야?"
엘리제 이년.
생각해보니 그날 콘돔도 안 썼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날 아이가 생겼더라면, 예전 4개월간 집안에 틀어박혀 한국이 멸망하는 것을 봤던 회차에서 알아챘을 게 분명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샤를은...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위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임을 생활화하자...
"애초에 너 벨라트릭스가 아니라며. 엘리제는 벨라 이야기한 건데?"
"아니...어...내 이름이 벨라트릭스가 맞을지도 몰라"
"응? 아까는 아니라면서"
"거,거짓말 했던 거야"
인격이 바뀌더라도, 나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 인걸까?
그녀의 이런 모습이 귀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예전의 모습이 나았다.
"내가 아는 벨라는 칼 잘 쓰는 기사였는데, 너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니야"
"나도 검 좋아해..."
"기사는?"
"....."
기사라는 것에 사로잡혀 망가져 버린 그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애가 아니라,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히로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있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쭉 이런 상태라면...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짐덩이가 될 것이다.
"그럼 아니잖아"
"꼭...기사여야 해?"
"응? 아니, 나만 지켜줄 수 있으면 돼"
"......"
"이제 자자"
내가 그녀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한 말이었지만, 사람의 정신이라는 건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정신병원에 데려가는 게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치료 도중에 인격이 잘못 튀어나오기라도 하게 된다면 서울이 어떻게 될지...
내 손으로 서울 불바다를 실현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폭주하는 것보다. 차라리, 어린 모습이 나으니까.
내일은 어차피 샤를이 올 테니, 벨라에 대한 건 얌전히 샤를을 기다렸다가 부산으로 가서 생각해보자.
흑마법사에 대한 것이나, 벨라에 대한 것이나, 앞으로의 관한 것도 전부 그때 생각해도 늦지...
.
.
.
"엘리제"
"네~ 주인님~♡"
"너, 무슨 짓 했어?'
"뭐가요오?"
"지랄하지 말고, 왜 오늘..."
"오늘이 왜요?"
아무리 기다려도 샤를이 오지 않는다.
미래가 변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내 눈앞에서 쓸데없이 귀여운 척하는 여자라는 것 정도는 초등학생이 오더라도 알 것이다.
"엘리제.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제가 바라는 건 주인님의 노예로서 본분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손이 그녀의 뺨으로 향했고 그녀는 피할 수 있음이 분명함에도 내 손을 그대로 맞아주었다.
이걸로 그녀에게 손찌검만 세 번째다.
그녀가 일부러 나를 화내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저는 노예고 주인님은 제 주인님이세요"
"내가 싫냐고 묻잖아"
"주인님"
"묻는 말에만 답해. 좋아 싫어.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둘 중에 하나만 대답해. 그래야 내가 너를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내 말에 자신의 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아 보였다.
"주인님. 제가 그녀를 이곳에 오도록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혹시, 그 여자가 이곳에 와서 주인님을 힘들게 만들었나요?"
애초부터 그녀가 샤를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에게 분노하는 건 다른 이유다.
"왜, 그랬는데?"
"필요하니까요"
"그러니까! 왜 그랬냐고!! 왜 말을 안 하는데!! 무슨 의도로 했고, 어떻게 했다고 왜 말을 안 해!!"
"주인님에게 필요가 없는 이야기니까요"
마치 돌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어처구니가 없어 이제 웃음도 안 나온다.
"부산으로 갈 거니까. 차 준비해"
"네, 주인님"
"그 주인님이라는 소리! ...하지마...죽여버리기 전에"
그녀는 내 말에 자신의 손을 공손히 모아 고개를 숙였고, 곧이어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내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죽는 것 따위는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히로인중 누군가가 죽었을 때 회귀한다는 걸 아는 것일까?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너한테 잘못한 게 있어?"
"......"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이 여자는 나에게 버림받더라도 계속해서 달라붙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달라붙으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다.
나는 대충 집에 있는 물건 중 가져갈 만한 것들을 가방에 넣고 난 다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 벨라나 다른 애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미리 말해놓았기에 다른 여자들도 나갈 채비를 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그 아이는 아침 스케줄이 있다고 방송국에 갔을 거에요. 주인님"
"라일라. 디아나 어디 있어?"
"선생님... 그 여자는 방송국에 있다고 하네요"
디아나를 그냥 버리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한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 이제야 버려지는 건가요?"
"엘리제"
"주인님이 먼저 시작하셨어요. 저는 분명히 그만해달라고 말씀드렸답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내내 삐질 거에요."
"삐...삐져? 지금 장난쳐?"
"아뇨. 장난 아닌데요! 그리고, 마음껏 하셔도 돼요. 저도 그 아이가 질리던 참이었거든요. 주인님이 버려주신다면, 저도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 없죠."
그녀라면 분명 이쁘게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비위를 맞춰 뜻대로 조종하는 것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으니 적당히 내 말에 맞장구쳐주며 속여 넘겨도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진심으로 나를 화나게 만들기 위해 작정한 것 같다.
"방송국 어디야"
"저에게 물어보신 거 맞죠? 주인님"
"그래...너한테 물어본 거야"
"차로 가요. 제가 운전할게요."
항복이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그녀는 나에 대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상황에서 기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허수아비가 된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 디아나가 있는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그녀를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여자이기에 더더욱...
그런데도 가는 것은 엘리제의 도발 때문이다.
일반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 여자를 엘리제가 봐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어떻게 될지 알기에 최소한의 도리로 챙기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디아나가 그렇게 된것은 엘리제 탓만은 아닐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망가진 그녀가 누군가의 명령 없이 하루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데리고 와"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디아나를 데리고 오라고 한 말이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제가요? 왜요?"
"엘리제..."
"상을 주시면 생각해볼 수도 있고~ 아까 걸로는 부족해요. 주인님. 엉덩이 팡팡 때려주시는 거로 합의 봐 드릴게요"
자신의 엉덩이를 살짝 들어 뒷좌석에 있는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에 나는 차 문에 손을 올렸다.
"라일라 같이..."
"주인님. 방송국인데 그 아이를 데려가시려고요?"
엘리제의 말대로 라일라의 푸른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띌 것이다.
"엉덩이 팡팡"
"혼자 갔다 올게"
"힝...같이가요~"
디아나가 이곳에서 정아연이라는 이름을 썼었나?
TV에서 들은 이름을 기억하며, 일단 방송국 쪽으로 걸어갔다.
걷는 도중 누군가 내 손을 잡는 느낌에 엘리제인가 싶어서 힘을 줘 떨어트리려 했지만, 벨라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벨라는 금발에 청안이니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방송국이기 때문에 예쁜 얼굴이 오히려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제와 벨라의 외모는 방송국이라는 특별한 장소임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불러모았다.
하기야, 아무리 사람마다 이상형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아이돌이나 배우의 선호도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상상의 이상형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녀들이 현실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엘리제가 손을 쓴 것일까?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있긴 했지만, 안으로 출입하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주인님 제가 없으면 안 될뻔했죠?"
"......"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상주셔야 해요?"
열을 받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집부터 시작해서 차나 이런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까지 그녀가 도와주는 게 참 많다.
말만 잘 들었어도 충분히 잘 대해줬을 텐데...
아, 맞는 게 좋아서 일부러 이러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 취급을 안 해야만 말 잘 들으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제의 뒤를 걷던 중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대형 방송국 아닌가?
사람이 너무 없는데...
입구와는 다르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난 뒤 복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엘리제"
"네, 주인님"
"여기 이렇게 사람이 없어?"
"아뇨. 이 시간에는 사람이 많은 게 정상이에요"
싸한 느낌이 등골을 훑자 나는 곧바로 뒤로 돌아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누군가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의 익숙한 얼굴.
무척이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주,주인님이.. 같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이제 너무 대놓고 적대하는 거 아니야?"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주인님"
거짓말쟁이년.
"주인님...그...마법사...없는거...맞죠?...없다고...해주세요...제발...없다고 말해!!!"
아이돌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탁월한 연기실력이었다.
엘리제가 한 짓이 아니라면, 이게 전부 우연이라고?
굳이 방송국에 오도록 유도하고, 라일라를 때어놓고 오게 만든 게 엘리제인데, 이걸 모르는척한다고?
"지랄한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주인님"
"닥치고, 라일라나 데려와. 안 데리고 오면 진짜 네가 한 짓이라고 믿을 테니까"
엘리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곧장 몸을 돌려서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곧이어 등 뒤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옮기려던 발에 힘을 뺏다.
...사람들? 나는 언제 저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 사람들과 같은 모습의...괴물들.
"좀비..."
기형적일 정도로 몸을 비틀며 걸어오는 그들의 모습이 분명 좀비를 연상시켰다.
"작은 주인님을 기다렸던 건데...주인님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구라치지 마. 엘리제랑 짜고 함정 판 거잖아"
"헤...제가요? 작은 주인년이랑 짜요? 아...그년 사라졌네...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에헤헤...주인님...얌전히 잡혀주세요...앗...이게 아니구나..."
디아나가 내 쪽으로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점차 표정이 변해간다.
어딘가 망가진 듯한 얼빠진 얼굴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자리를 찾듯 날카로워진다.
[당신은 정말 쓸모가 없는 인간이군요.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다시 또 이곳에 찾아온 것입니까?]
기억 속에 있던 모습이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당신이 모든 힘을 잃고,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으며, 제가 애타게 준비해오던 장소에서"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기회. 저는 이날만을 정말 수도 없이 개 같은 여신년에게 기도하며 기다려왔어요.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원수에게 기도했던 제 기분을 이해하시나요?"
"아마 모르시겠죠. 죽어도 모르실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실 거예요"
"기억을 잃었다 해서 죄가 사라지리라 생각하셨나요?"
"얌전히 잡혀주세요. 용사님. 실수로 죽어 회귀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엘리제가 제시간에 오는 것을 기대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먼저 죽어야 할까.
"제가 아주 아팠던 만큼. 벌은 받고 가셔야죠"
자켓 안쪽에 미리 준비해놓은 식칼을 빠르게 빼 들었지만,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으로 손에 든 식칼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용사님. 당신이 미워요. 당신이 절 미워했던 것만큼이나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어요."
눈앞에 있는 디아나를 보고 있던 와중 왼쪽에서 들려오는 털썩 소리와 함께 벨라가 쓰러졌다.
"그런데..."
"당신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당신이 저를 두려워하는 그 눈빛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여요"
"미친 게 분명하겠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서 정말 수도 없이 웃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가득 차 귀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깔깔 웃었다.
"맞아요... 저는 당신에게 미친 게 분명해요. 그런데 당신이 저를 이렇게 만든 거에요."
"저의 사랑스러운 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