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LEVEL 3.5 (1)
"어서 오세요. 용사님"
"어...어?"
시야가 밝아지고 눈앞에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번 기억은 저번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테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용사님"
대신전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세 유럽풍의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신전의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분명, 이것보다 훨씬 클게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한쪽 면을 제외한 반대쪽은 전부 흰색으로 되어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디아나의 모습...그리고...
"내가 용사라고? 아니, 그전에 여기가 판테아라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과거 기억을 보던 것과는 달리 이번 회상에서는 제삼자가 되어 그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지 않았고 기억하지 못했던 것들은 전부 흰색으로 처리되 있었고, 그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천천히 두 사람이 있는 중앙으로 걸어가 디아나에게 손을 뻗어보았고, 곧이어 내 손이 디아나를 통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희 왕국과 판테아 대륙을 지켜주세요"
"...꿈은 아니네"
그가 볼을 쥐어뜯은 후 내뱉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기억만 봐라?
하긴, 1440번의 죽음을 겪게 된다면 내가 어떤 게 될지 상상이 안 가긴 했다.
각오하고 온 것이지만, 각오 따윈 의미 없었나 보다. 아니, 그 각오가 무색하게 천 번이 넘는 죽음은 지금의 나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겠지.
"여유롭게 생각하셔도 된답니다. 당신이 혼란스러울 것은 알고 있었으니. 얼마든 시간을 사용해주세요."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돌려 보내줄 건 아니잖아."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으면서 굳이 물어보았다.
그의 감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의 생각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 온 것이 무척이나 좋을 것이다. 내가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곳에 온 것이니만큼 엄청 좋아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은 주인공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을 연기한 게 아니며 시작부터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녀들이 나타났던 것이 무척이나 즐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으며, 미래를 전부 알 수 있는 곳에 떨어진 내 심정은 그야말로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후부터 나올 말들은 쓸데없는 말이 대부분일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고, 곧이어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야 주인공이 그곳을 인식한 것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
사제복처럼 보이는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귀족과도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뭐, 남자 얼굴 따위 기억 할 리도 없고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겠지.
그런데, 유독 튀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엘리제와 벨라트릭스.
디아나까지 하면 그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 만나게 될 히로인 세 명을 시작부터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모습을 눈으로 보는건좀 신기하긴 하다.
그러니...그도 두 사람을 신기해했겠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선명한 해상도를 유지하는 엘리제와 벨라트릭스에게 걸어갔다.
붉은빛 드레스가 무척 어울리는 엘리제와 금색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채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벨라트릭스의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그녀들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메이드 복이나 사복 차림만 보다가 진짜 공주와 기사라는 느낌의 드레스와 갑옷을 보니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
점차 내가 보고 있던 엘리제와 벨라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흰색이 남았다.
그리고, 그가 디아나를 따라 이동하는 방향으로 점차 건물의 모습들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의 뒤를 쫓기 위해 발을 옮기던 중 문득 이 이야기가 무척이나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누나. 엄청 예쁘다."
디아나가 나에게 한번 말해준 적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정말 예의도 없고 주제도 모르는 놈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자기 세상이라고는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언행들이 있었다.
사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봐서 그렇지. 솔직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떨어졌다면 이런 행동을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내가 만든 세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가 만들었기에 자신감이 넘쳤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전부 알고 있고, 히로인들의 공략법도 알고 있고. 뭐...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훈련? 아... 저 저혈압이라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요. 아, 매일 누나가 깨워주실래요? 그러면 재깍재깍 일어날게요"
그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나태했다.
"일어났으면 빨리 나와라."
벨라의 한숨 소리와 함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느긋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모습을 나 또한 한심하게 쳐다본 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해가 중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저혈압인데. 늦잠 잘 수도 있는거 아닌가?
나는 지금도 엘리제나 라일라가 안 깨워주면 점심 식사를 할 때쯤에 일어난다.
"용사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쉿. 모르는척 해. 누나 오면 나 화장실 갔다고 좀 해줘"
"누나라면...단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언제부터 용사님이랑 단장님이 남매지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그는 훈련을 자주 빼먹었다.
나태한 것은 별개로 힘든 것도 싫었기에 늘 벨라가 안보일 때면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방금전까지 말하던 남자의 얼굴이 아예 안 보이는 것을 보고 그가 얼마나 남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가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가 훈련을 빼먹고 늘 가던 곳은 역시나 신전이었다.
"오늘도 놀러 왔어~"
아무도 없는...아니, 그녀만 혼자 있는 장소였다.
왕국 본 신전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지어진 성녀 개인의 기도만을 위한 공간.
바깥에 성기사 몇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은 금남구역이었기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성녀와 그녀의 수발을 드는 직속 여자 사제 밖에 없었다.
물론, 용사인 그는 억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이곳에 오지 말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이곳은 제 개인 공간입니다. 저는 제 공간에 남자는 물론이고 제 수발을 들어주는 사제분들이 들어오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러니 나가주세요."
"나는 들어오게 해주지. 그래도 용사인데"
"강제로 내쫓기 전에 나가주세요"
며칠 이곳에 오다 보니, 그녀도 화가 난 것인지 무척이나 날이 선듯한 목소리였다.
저 자존심 쌔고, 성녀라는 직책에 자부심이 있어 억지로라도 타인에게 웃어 보이던 그녀가 조금이나마 화를 표출하게 할 정도면, 그의 밉상 짓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이 온다.
같은 남자로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디아나는 그가 자신의 몸을 몇 초 만에 수십번씩 훑었다고 말했으니 뭐...
천천히 디아나에게로 걸어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솔직히, 그녀의 가슴에 눈이 안 간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렇게 큰데, 슴부심은 없고 자부심만 있는 건 내 설정 오류였던 것 같다.
백날 그가 어필해도 성녀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디아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 믿고 있었을 것이다.
성녀는 용사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는 설정을 넣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숨기는 것을 무척 잘하니까.
"안녕하세요. 용사님"
대충 벨라에게 도망치면서 신전을 오가던 도중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로 용사님이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
"...아...공주님 맞지? 아,아니, 맞죠?"
그는 그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만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나였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성장했을 때. 혹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만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듯 엘리제와 이렇게 만난 것을 떨떠름하게 여겼다.
"응? 저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이상하네..."
"응?"
"그게...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다르셔서요.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제 매력이 떨어지는 걸까요?"
그녀는 용사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지켜보고 알아본 다음 접근했을 것이다.
분명, 그가 호색한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을테지만, 그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를 보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여자를 밝히는 건 아닌데, 예쁜 여자를 보면 관심이 가긴 하지"
"어머, 그러면 제가 예쁘지 않다는 말인 건가요?"
"그건 아니지. 지금 관심 엄청나게 가고 있는데?"
"그런가요?"
"당연하지. 나 기다린 거 맞지? 어떤 거 때문... 식사라도 같이할래요?"
"아~뇨. 됐어요.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별로라서 식사하면 토 나올 것 같아요"
웃는 얼굴로 독설을 내뱉는 게 참 엘리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혹시 몰라서 찾아와본 건데... 역시, 제감은 틀리지 않았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여유롭게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잡아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 가버렸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는 이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마, 그는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년 무조건 후회하게 해준다.
분명하다.
이제 이곳에 온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다 보니, 아직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방금... 뭐라 했지?"
"이제 지치니까 그만하고 싶은데. 대체 이런 걸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거 칼 깨작이는 걸 몇백 번 더한다고 실력이 늘겠어요? 아~ 안 해 못해. 신전에 가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할 거니까. 공주님이랑 재상한테는 알아서 말 좀 해주세요"
그는 주인공의 권능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인공도 초반 성장률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솔직히, 소설을 첫 연재할 때에는 슬로우 파워로 밀고 나가고 싶었기에 초반에는 성장률이 떨어졌다.
너무 답답하다는 의견이 많자. 주인공에게 여신의 권능이라는 설정을 넣고, 그것은 왕국 시나리오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무척이나 천천히 성장했으니, 그도 어차피 이 딴 것으로는 성장이 안될 거라 생각하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잠자던 벨라의 코털을 건드려버렸다.
"멈춰라"
"아~ 왜요. 진짜 의미 없는..."
"너... 이러고 무사할 줄 아느냐?"
벨라가 진짜로 화가 난 모습은 얼마 전에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가 아닌 디아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었고, 내가 옆에 있기에 혹여 내가 다칠까 싶어 최대한 절제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화가 나셨다.
"아니...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좀 찌릿찌릿한데..."
"도저히 못 참겠다. 이 이상 너의 왈패같은 행위를 묵과 하느니, 차라리 기사단장의 자리를 내려놓는 게 나을 것이다."
"...그,그러면 그만두시면 되잖아요. 목검...집어 넣...으시죠? 아니 왜 저한테..."
"그동안 너 같은 양아치에게 당했던 것이 억울해 이제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겠으니. 달게 받아라"
참교육의 시간이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도 존나 하기 싫어서 매일같이 땡깡 부리긴 했을테지만, 뭐...내가 맞는 게 아니라 상관없다.
벨라가 나에게 저런 식으로 대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그때도 이렇게 바보 같은 행동을 했었는데... 너 안 되겠다.]
아...생각해보니 예전 벨라가 폭주했을 때 좀 많이 맞긴 했었다.
그가 두들겨 맞는 모습에 살짝 동정심이 들었다.
회상이 끝나면, 그의 복수를 대신해 벨라를 잡고 엉덩이 팡팡 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버만...봐주...헤...오..."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며 한 번만 봐달라고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애써 눈을 돌렸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후 이야기는 더욱...보기 힘들어 지기 시작했다.
"또 오신 건가요. 사제들을 보내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통보했을 텐데요"
"치료만해줘. 온몸이 쑤셔서 안 되겠어"
"왕실 마법사에게 말씀하시죠."
"아니, 치료만 해달라고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용 사인데. 훈련...하다가 다친 건 치료해줘야 될 거 아니야"
"...바깥에 제 수발을 들던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부탁하시죠"
"야!"
그의 관점에서 화를 낼 만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씩 화가 나던 시점이었다.
매일같이 찾아와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고 표현하는데, 그녀가 거부를 넘어 혐오를 보였기에 그로서는 인내심이 폭발할 만 했다.
전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설정.
지금 보니 참 이상하다.
그래도, 히로인들에 대한 설정은 모든 게 들어맞았는데 어째서 성녀는 그를 싫어하는 것일까?
디아나가 직접 자기 입으로 그날 그의 눈빛이 혐오스러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성녀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를 혐오스럽다 여긴 걸까?
내가 생각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무시하는 성녀의 모습에 화가 난 그는 곧장 그녀에게 걸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때세요"
"치료만 해달라고하잖아"
"더럽습니다"
"야! 적당히...아악!!!"
그는 나약했다.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나약했고,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강했다.
그녀의 무력은 내가 설정한 것이니 잘 알고 있다.
...설정 미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법사의 치유능력을 너무 높게 설정해버려, 사제와 성녀의 위치가 흔들려버렸기에 성녀와 사제의 전투능력을 대폭 높여버렸다.
치유 능력은 둘째치고 전투능력만으로 세계관 내 중위권에 속한 성녀.
지금의 나도 전투력 최하위인 엘리제를 이기지 못하는데, 그가 성녀를 이길 수 있을까?
"아악!!!!!!"
제일 먼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댄 그의 팔의 뼈들이 메이스에 찍혀 아작났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그는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대었고, 곧이어 그의 반대쪽 팔이 아작났다.
인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마, 트럭에 치였을 때에도 이 정도 고통은 아니었으리라.
그때는 기절을 할 수 있었으니...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빛나기 시작하며, 그의 망가진 뼈들이 달라붙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오자 나는 이내 눈을 감았다.
"어떻게 제가 이런 실수를... 당신도 참 대단하네요"
"왜...왜...이러는거야..."
"지금까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잘 속여왔는데, 당신 때문에 전부 없던 일이 되어버렸어요. 당신의 그 추잡한 눈동자와 언행들은 늘 제정신을 좀먹어 왔죠."
"...사...살려줘..."
그가 자신이 들어온 문을 향해 뛰어가 이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발악했지만, 이미 성녀가 성법을 사용한 것인지 그가 발로 차고 몸으로 밀쳐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아무리 소리쳐도 바깥에 있는 성기사에게 닿지 않았다.
"당신이 전부 자초한 일이에요. 저는 수도 없이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답니다. 이제 전부 끝났어요. 저도, 당신도"
"...그만해...그만해...지금 그만하면...아무말도 안 할게...나...나...나...다시는 여기 안 올 테니까..."
"당신 같은 허술한 남자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길거리 창부와 계약을 맺을 것 같네요. 적어도 그녀는 당신보다 입술을 덜 놀릴 테니까요"
"하지 마...하지 말라고!!! 가까이 오지 마!!! 아악!!!!!!"
"용사에게 손을 대었다는 게 만약 알려지게 된다면, 그 여자가 참 좋아할 거에요. 늘 저에게 이를 꽂으려 발버둥 치던 그 여자가 무척 좋아할 걸 생각하니...차라리 당신을 죽이고 자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되네요"
아무리 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단 그녀와 거리를 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뛰려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인해 발이 걸려 넘어졌고, 곧장 한쪽 다리가 그녀의 손에 들린 메이스에 의해 짓뭉개졌다.
"아, 그렇다고 제가 죽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당신 같은 하찮은 남자와 제가 목숨이 같다는 건 너무하잖아요. 어차피 다시 용사 소환을 해야 하고, 그 소환에 제가 없어서는 안될 테니. 저는 아마 죽지 않을 거예요."
"아악!!!!!!!"
"그때까지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당신을 죽이고 다음 용사 소환까지 천천히 제가 새롭게 살아갈 길을 생각해봐야겠죠."
"그만...그만...그만..."
짓이기고 짓이겨진다.
그녀의 흰색 사제복이 붉은색으로 전부 염색이 될 때까지 그녀는 그를 내리찍고 또 내리찍었다.
"아...아...아악!!"
"세 번째 용사소환에서는 정상적인 용사가 왔으면 좋겠네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는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
그의 수도 없는 비명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새빨간 피가 전부 묻어있어 보기 싫었기에 곧장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띈 해맑은 미소를 보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춘 채 마냥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이렇게 안 죽어요? 빨리 죽으세요"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나 질긴 것일까?
한방에 뼈를 부숴버리는 그녀의 메이스가 그의 머리를 십수 번을 찍었음에도 그는 죽지 않는 것은 그의 맷집이 쌔기 때문일까?
아니...그저 그녀는 그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뿐이었다.
광기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메이스를 즐겁게 내리찍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비명을 지르는 장난감이 되었다.
[싫어하시게 될 거예요.]
이제 첫 죽음이다.
벌써 그것을 기억해내면...안된다.
아무리 그래도...그렇게 호언장담해놓고 시작부터 흔들리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럴 수 있다.
그녀는 내가 만들었으니...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이며...내가 당한 게 아니기에...그럴수 있다.
"이제야. 죽으신건가요?"
세상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고, 곧이어 다시금 세상이 나타났다.
10분이 이렇게나 짧았던가?
방금 메이스를 내려치고 있는 그녀와 그것을 하염없이 맞고 있던 그의 모습이 또다시 나타났다.
"아...아..."
그는 회귀하자마자 몰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메이스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야. 죽으신건가요?"
세상이 검게 물들었고, 곧이어 세상이 나타났다.
"왜 이렇게 안 죽어요? 빨리 죽으세요"
굳이...이것을 볼 필요가 있을까?
벌써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