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LEVEL 3.5 (3) (42/87)



〈 42화 〉LEVEL 3.5 (3)

내가 지금까지 최고로 많이 회귀했던 시간은 어느정도일까?


아마 7번째 죽음.
1월 4일 사망 후 9월 2일로 회귀했던 죽음이 제일 많이 시간을 되돌렸던 회귀일 것이다.

95일의 회귀.
그는 최소 13680번의 죽음을 겪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죽게 했던 걸까?
나는 그의 300번의 죽음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데 1만이라는 압도적인 죽음을 나는 어떻게 마주 해야 할까?

***


"말하세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입만 다문다면, 언젠간 반듯이 벨라트릭스가 자신을 구해주러 올 거라 굳게 믿고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

"거기까지 하시죠."


"당신이었군요?"


"성녀님. 당신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서 그만두신다고 하시면 왕국 기사단을 이끄는 제 이름을 걸고 당신에게 돌아갈 죄의 형량을 낮춰주겠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니..."

"아... 그렇네요. 이곳에서 저를 그렇게나 당황하게 할만한 사람은 기사단장님 당신밖에 없었어요..."

이미 하루 이상을 고문받은 상태였기에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문을 박차며 들어온 벨라트릭스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희망이 가득  있었다.

구원이라는 이름의 희망.

솔직히, 결말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나는 무척 이 영화를 재밌게 봤을 테지만, 나는...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다.
이미 보지 않았는가? 듣지 않았는가?
1440번의 죽음 중 아직 300번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세 사람을 보는 나는 이유 모를 희망을 품어버렸다.
그래...이 고구마 같은 상황을 타개할 사이다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어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네요. 이 남자가 저를 몰아붙일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저는 어리석게도 그를 의심했었군요."

"무기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지금 무슨..."

메이스를  손에 힘을 주며 높게 들어 올린 디아나의 모습에 벨라는 순간 당황한듯했지만, 빠르게 땅을 박차 순식간에 그의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디아나에 의해 머리를 찍혔고 곧이어 세상이 뒤집혔다.

그를 죽이면 회귀한다.
디아나가 그를 죽여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을 막지 않으면 아무리 벨라가 구해주려 하더라도 그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그는 움직였다.

"성녀를 죽여주세요..."


"...뭐라?"


"지금 죽여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제가...실종됬을때...신전을 찾아오게 되신다면...성녀를 보는 즉시...죽여주세요."

"불가능하다"

"왜..."


"그녀를 죽일 수 없다. 네가 죽는다면 다음 용사 소환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그녀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강직한 여자였다.

"부,분명 처형하겠다고 말하셨..."

"회귀한다고 했었나?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었더라면 겁을 주려는 것이었겠지"


"그...그럼 제압해 주십시오...보자마자...바로..."

 누구보다 굳건한 심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는 여자였다.
소설에서도 자주 그런 묘사들이 나왔기에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았더라면, 성녀를 죽이라는 부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나라의 기둥 하나를 뽑아내라는 말을 만난 지 겨우 몇 개월 정도 된 그에게 듣는 그녀의 심정이 어떨까?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녀는 흔들렸다.
절박한 심정의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녀는 지금 망설이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직접 신전에 들어와 성녀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 자체가 흔들리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빼앗았으니까. 내가 전부  거 다 뺏어가 버려서... 그래서... 죽은 거야.]

예전 그녀의 정신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되었을 때 했던 말이었다.


초반부터 쌓아 올렸던 그의 행동들.
그것들이 소설 속 벨라트릭스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위해 설치해 놓았던 기믹을 건드린 것이다.


"생각해보마"

그는 벨라트릭스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어두워진 눈을  채 돌아갔다.
어디엔가 숨어있으면, 더욱 그녀에게 혼이 난다는 사실을 알기에 집으로 돌아가 얌전히 디아나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회귀 시간이 바뀌었어요. 오늘도 말하지 않을 셈이신가요?"


"......"


"좋아요. 이제 어느 정도 눈치챘으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돼요"


디아나의 말에 그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혹여 자신의 조그마한 반응 하나하나에 힌트를 얻을까 싶어 했던 행동이지만, 그녀는 굳이 그의 반응을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벨라스릭스 그 여자죠?"

"......"


"하긴, 그 여자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납득이 되네요"

그녀가 눈치채는  금방일 거라 예상하긴 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을 리는 절대 없었다.


이 상황에 그와 자주 접촉하며, 검술 스승이기까지 한 벨라트릭스가 개입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추리 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일어난 사고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 넘어가도록 하죠. 오늘은 기사님을 설득해야 하니까요."

"......하지마......"

"당신의 목소리를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요"

"그만해...주세요...제발...그만해주세요..."

"절 속이려고 하셨잖아요.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잘못된 것 같은데...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잡아 들어 올리며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즐거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용서해주세요...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이제...안하겠습니다...아무것도 안 할게요...그러니까..."

"무엇이든 해도 좋아요. 저는 당신이 발버둥을 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요. 열심히 노력하세요. 누군가에게 제 것을 빼앗기는 건 정말 싫어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발버둥을  때가 가장 아름다우니 어쩌겠어요. 제가 조금 귀찮더라도 당신을 풀어드려야죠."


이것보다 더한 악몽이 있을까?


[이제 주사 같은 거 안 써도 되겠어? 조금 전에 나한테 의존하게 만든다고 했었나? 그랬잖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왜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렇게 해도 당신이...용사님이 저를 원망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더는 그런 짓을 못 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이제야 그녀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나에게 약 같은걸 사용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은 기억을 잃은 나에게 다시금 원망을 새기는 것이었을 테니...
그녀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여기며, 그에게 사랑도 애정도 용서도 구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원망받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내렸던 벌은 그녀가 죽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그를 괴롭혔다는 자괴감 속에 파묻혀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가 그녀에게 준 마지막 벌이었다.

[싫어하시게  거예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낫지 않았을까...
그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며 나를 괴롭힌다.


"하루 쉬었는데, 오히려 더 상태가 나빠진 것 같네요"


다음날 그녀는 어김없이 그를 데리러 왔고, 다시금 그녀는 그를 괴롭혔다.
회귀 시간이 3일이나 되었기에 그가 버텨야 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아니, 이제는 죽어버린 그의 눈동자가 버티는 것이 아닌 포기 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예전 나의 모습이 저랬을까?
모든 희망을 잃은 그는 예전 내가 라일라에게 고통받았던 모습을 재현하듯 완전히 망가졌다.


지금까지는 그의 고통을 전부 마주해보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볼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했기에 나는 몸을 돌렸다.

내가 이것을 전부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벨라가 악착같이 자신을 가두는 이유를 알기 위해 나는 내 손으로 목을 그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보기 싫다.
애초에 과거 같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 무슨 소용이랴.
전부  마음대로  것이다.

그렇게 전부 외면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무슨짓입니까!!!"

갑작스럽게 들리는 디아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빠르게 몸을 돌렸고,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무척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한쪽 벽에 거대한 금이 잔뜩 져 있었고,  밑으로 마치 무엇엔가 얻어맞은 듯 피를 토하는 성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공주와 같이 안고 있는 벨라의 모습에 나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속...하셨잖습니까. 당신은 그저 눈만 감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을 텐데요."


"제가 어째서 성녀님 말을 듣고 불의를 참아야 하는 겁니까."


"대의를 생각하시죠.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그러니 그만 하세요. 앞으로 앞으로 그만두겠습니다"

"이미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그만하겠다라... 자신이 저질러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은 지시는겁니까?"

벨라가 그를 구했다.


"그를 죽인다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되니 제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성녀님이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당신을 직접 마주하니. 정말 역겹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제 것이에요. 돌려주세요"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 자체가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치료해주신다면 이 일은 전부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정해진 과거였다. 그가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인데...어째서...


"오늘 일을 후회하게  거예요"

이번 회차에서 성녀에게 고통받았던 것들이 없던 일이  것마냥 전부 사라졌고, 그것을 확인한 벨라는 그를 안은 채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왜...구해주신 건가요"


"내가 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입으로 내뱉은 말이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분명히...그 여자가...당신에게..."


"네가 걱정할  아니다"


그녀는 그를 구원해주었다.
왜...?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다음 행보는 더욱더 나를 의문투성이로 만들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요"

"성안은...애초에 너는 이곳이 싫지 않으냐. 지금까지 얼마나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 개인으로써는 감당할  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이곳에서 나가는  좋을 것 같구나."

벨라트릭스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성의 바깥이었다.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 미안하구나..."


이해할  없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그는 이내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가 성밖에 이렇게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이곳에 떨어지고  후 처음이었다.
그녀가 손에 쥐여준 돈을 품에 꼭 넣은 채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드디어 그녀라는 악몽에서 도망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도 꿈만 같아 자신의 몸은 돌보지도 않은 채 왕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며칠 정도 풀을 뜯어 먹고 흙투성이인 곳에서 몸을 뉘어 잠을 잤지만, 그런데도 그는 행복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그는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조마조마 한 심정이었지만, 이대로 풀만 뜯어 먹다가는 어떻게 얻은 목숨을 허무하게 잃어 회귀해 버릴 것 같기도 했기에 마을로 가서 그녀가 준 돈으로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쉽게 알아버렸다.

그녀라는 존재가 가진 위상이 너무나도 높아 왕도 옆 깡촌 사람들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기에 그는 금방 알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았을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르는  했을까?


그녀가 죽었던 날짜가 마침 그가 왕도를 도망쳐 나왔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 왕국에서 그녀를 죽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유추할  있었다.

그러면,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지금 그의 감정을   없다.
하지만...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아 수도 없이 혼잣말을 하며 자신을 세뇌하는 모습을 하는 그가...마지막에 내릴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
그곳이 아무리 고통받고 지옥 같았던 곳이라 하더라도...나로인해 누군가 죽는 것은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좆같이 힘들어도... 구원받았는데, 어째서 구원받은 지도 모른다.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그녀가 그를 구한 이유를 평생 모르게 될 테니까.

평생 은혜를 갚지 못하게  그는 돌아가야만 했다.

"성안은...애초에 너는 이곳이 싫지 않으냐. 지금까지 얼마나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 개인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이곳에서 나가는  좋을 것 같구나."


"왜..."


"왜 그렇게 보는 것이냐?"

"왜 죽은 것입니까! 자살이라니...왜...?"

"...돌아왔구나. 정말 지금까지 너는 쭉 그렇게 죽어왔었어..."


그녀의 말투는 예상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유를 듣고 싶어서...들어야만해서..."

"너는 그렇게나 그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음에도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냐... 내가 죽은 게  정도로 안타깝더냐?"


생각해보면, 그는 훗날 벨라트릭스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다.
이딴 왕국을 구할 필요도 마족을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그는 벨라를 찾기 위해 왕국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너는...정말 어리석구나..."


그녀를 살리기 위해 수십번 수백 번이고 죽었으며, 그녀를 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정말...너무나도 기뻐했다.

"내전을 겪은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겪을 수는 없다."


"지금...무슨...말을..."

"내 손으로 일으킨 내전이었다. 여왕...아니, 주군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그분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나는 왕국 병사 수천을 내 손으로 죽였다."


"......"


"병사를 죽였던 내가 이제 국가 신앙의 상징인 신전에 검을 들이밀어  기사들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녀가 방해한 사람이 벨라트릭스인 것을 알고 난 후 그녀에게 했던 말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냥...도망가시면..."

"카르딘 가문을 책임지는 내가 도망이라니. 너무 무책임한 소리구나"

그녀는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녀는 참 융통성이 없으며 정말...강직하고, 책임감  자체인 기사였다.


"저를...왜 살리신겁니까"

"그건..."


"차라리...제가 죽는걸...그냥 내버려두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런말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조금이나마...내 마음이 편해지고자 했다. 내가 왕국 병사를 죽였던 것은 명령 때문이었지만, 내가 그 아이를 버렸던 것은  욕심 때문이었으니..."

그녀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라고 말했음에도 그는 자리에 우뚝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이곳에서 도망치면, 그녀는 죽는다.
말려도 그녀는 변함이 없을 것이고, 어떠한 말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다.


그녀의 성격은 내가 만든 것이었으니까.


"도망치거라."

예전 그의 기억 속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나. 그러면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내 명령 없이 절대 죽지 말기. 멋대로 사람 구하겠다고 뛰어들지도 말고, 죽을 것 같을 때는 기사도 같은 건 전부 버리고 도망쳐. 어때 쉽지?]

아마, 그는 이 순간 구원받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디아나에게서 풀려났을 때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에게 구원받았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저한테는 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


"그러니까 살아야죠."


그가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마, 그의 눈동자에 깃든 의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반전되었다.


"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회귀해버렸네요"

반전된 세계가 돌아왔을  눈앞에 악마가 서 있었고

"여긴...성녀님? 왜 내가 여기있... 아..."


그렇게 회귀의 권능은 첫 번째 각성을 이루어내었다.


***

디아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우는  아니라 말했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로 괴로운 기억을 전부 잊을  있게 되었을 것이다.

성녀가 가지고 있고, 죽어버린 전 용사도 가지고 있는 이 여신의 권능은 각성을 할  있다.
용사의 파워업을 위해 만들어놓은 설정이었지만, 너무 남발해서는 안 되기에 참 특별한 조건에 맞춰 그것이 각성하도록 했었다.

그는 그것으로 디아나에게 고통받았던 순간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살아야 한다.
그도...그녀도...살아야 했기에 그는 기억을 지웠다.
그가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이제 벨라트릭스가 움직인다.
그녀는 그를 구할 것이고,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누나. 나 신전에서 볼일이 있다고 해서, 며칠 안 보일 거야"

"갑자기...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찾지 말라고"

"얼마 전까지 너는 분명..."


"난 분명히 말했다?"

그는 살기 위해 죽는 것을 선택했다.
기억을 지울  있기에 그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수백 번...천번을 넘도록 죽일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발로 그녀에게 찾아가 죽었다.


"이제 자신의 발로 오게 되었군요..."

"오라고 말하지 않았어?  오면 잡아갈 거잖아"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한  곧이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성하고서도 죽는 모습이 참 안쓰러워 차마 보지 못할 정도였지만,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1440번의 죽음을 왠지 전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전부 채울 때까지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전부 그것을 봤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 잊어버린 죽음.
그것이 1440번이 채워질 무렵.

"누나. 재상이 나 내쫓는다고 하는데. 말 좀 해주면 안 돼?"

"...나가는 게 좋겠구나"

"아니, 누나도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그녀의 앞에서는 늘 철부지가 되고 싶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쫓겨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으니...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에이, 설마 진짜 내쫓겠어? 그치? 누나 말 좀 해봐"


"......"

이 이야기의 끝은...그가 밖으로 이 성을 탈출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아무리 봐도 나는 이것이 해피엔딩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너무 사는 것에 급급했다.
그에게 마음의 여유를 바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인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그는 조금이나마 그녀에 대해 더 생각해야만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그딴 새끼들도 버텼는데 뭔들 못하겠어? 누나야말로 나중에 기사단에 들어와달라고 애원하지나 마"


"서쪽으로 가면 카르딘 가문의 영지가 있다. 일단 그곳에서..."

"누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녀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그는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그가 망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각성하기까지 그 이후 그가 연기하는 것도 전부 눈치챘음에도 쭉 방관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같이 갈래?"


그녀는 왕국의 기사였다.

"...나 진짜 간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외면했다.


벨라트릭스의 모습이 점차 흐려져 갔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맨몸으로 털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마냥 바라본다.

그리고, 왕도를 나서서 더는 보이지가 않게 되었을 때 털썩 소리와 함께 그가 주저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울음소리가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흐느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와 같은 울음을 내었다.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악을 지르며 울었다.


 울음은 서러움일까?
그게 아니면 안도일까?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행복?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나는 이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게 되었다.

그가 벨라트릭스에게 구원받았던  순간부터...  달..아니, 회귀하는 시간까지 합쳐서  년을  지켜봤고, 이제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가 아니다.
그녀에게 구원받았던 그 순간 그의 생각. 말투. 판단. 감정. 전부가 나와는 달라져 버렸다.

그의 울음을 전부 들으며 이제  이야기가 끝난다는 확신이 들 즈음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

"그 못된 여자는 제가 다시는 용사님 못 건드리게 했으니 걱정 마세요!"

이제는 헛웃음이 아닌 진짜 폭소가 터져나온다.
그녀는 참 대단하다.
진심으로 감탄스럽다.

"꺼져..."


"저 미칠 것 같아요. 매일 밤 당신 생각에 잠을 못이루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가질 수 있나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고 있는 저 검은 머리의 여자는 디아나보다 더한 여자일 것이다.

"저를 그렇게 싫어하시니... 아! 용사님의 여행에 노예 한  데리고 가시는  어떠신가요? 전직 공주이자 능력 있는 노예가 주인 없이 떠돌고 있는데. 가져가실 주인님 계시나요?"

"꺼지라고..."

디아나와는 별개로 이곳은 애초부터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제가 당신을 가지지 못하니. 당신이 저를 가져주세요. 주인님"

그것을 끝으로 세계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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