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LEVEL 4 (2) (44/87)



〈 44화 〉LEVEL 4 (2)

벨라트릭스는 주인공을 만나기 이전까지 완벽한 존재였다.
내가 설정한 것이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고백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서 완벽하게 히로인이 되지 못한 채 사라졌던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아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완전한 기사였을 것이다.


[무,무슨 말씀 하시는겁니까...]


과거 나는 벨라트릭스가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기억하고 있다.

[또 말해야 해? 내가 누나 좋아한다니까]


시작은  그의 고백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감정을 내비치는 것에서부터 그녀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격이 그녀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아...아니, 그...그건...]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도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 나야 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감정을 확인한 뒤 결혼하고 끝내는 아이를 낳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야 했다.

하지만, 이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여자는 평생을 기사로 살아왔다.
그리고, 왕국을 위해. 가문을 위해. 기사로써 그를 외면했던  날을 수도 없이 후회하며 자신을 가두어 왔었다.

[저...저는 주군의 기사입니다. 절대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는...]


그래서, 그녀는 그의 기사가 되는 선택을 했다.
그가 그녀를 가장 필요로 했던 순간 기사라는 이유로 그를 버렸으니, 그래야만 한다 여겼다.


[저는 주군을  번이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거기까지도 좋았다.
그녀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으니...

[...저도 주군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 남자를 외면했던 이유가 기사로써 주군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맹세였지만 이제 아무 상관 없어졌다.


[왜...죽인거야?]


[그냥, 꼴 보기 싫었어. 자꾸 너랑 친한척하잖아. 진짜 친구도 아니면서...]


[......]


[왜 날 그렇게 봐? 아...나보다  여자가 더 좋았던 거야? 죽이길 잘했네]

자신이 세워놓은 규율을 그를 사모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부러트렸다.

꾸준히 쌓아왔던 감정이 터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정신이 완벽하게 가꾸어져 있다는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녀의 정신은 틀 안에 갇혀 불결함 하나 없이 순수하게 가꾸어져 왔기에 그 부러짐의 의미가 달랐다.


그녀가 더럽다 여기는 것들.
해서는 안  생각들. 행동들. 성격. 판단. 가치관들을 전부 한쪽에 몰아놓고 완벽함만을 유지해오던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틀을 깨버린 것이다.


그가 고백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의 옆에 있는 여자들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  참다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틀을 부쉈다.

그녀가 소설  그저 지나쳐가던 히로인이 될 예정이었고 반응이 별로라 사라지게  엑스트라였던 것처럼 그렇게 그녀는 그에게 버려져 엑스트라가 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약자다.
그걸 인정하고 가야 한다.


그녀들에게 매일 같이 끌려다녔던 것은 전부  썩어빠진 정신과 약해 문드러진 육체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나약한 정신이 강인해질 수는 없었고, 방구석에 박혀 소설을 쓰며 운동하나 해보지 않았던 육신이 단기간에 근육이 붙어 헬창이 될 수는 없다.
애초에 벨라의 손짓 한 번에 건물이 수십 채가 무너진다.
인간의 힘으로 그녀들을 멈추는 것부터가 잘못된 가정이다.



설득?
그녀들이 나보다 더 똑똑했기에 오히려 내가 설득당할것이다.

상식적으로 디아나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그녀를 악마로 보이게 만들기 충분하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라일라를 나는 용서  수 있을까?
그렇게 책임감 강한 벨라를 어떻게 회유할 수 있을까?


다들 그 나름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른 판단을 내리고 나보다 더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대체 그녀들에게 무슨 설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태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매일같이 방구석에 처박혀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평생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이다.


이제 내가 약자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그녀들의 사정에 끌려다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지금까지 끌려다녔던 경력이 있는데, 이 이상 끌려다닌다는 것은 호구다.
육체도 정신도 갈아엎을 수도 없고, 갈아엎는 것도 싫다면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마인드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주군께서...그 여자랑..."

그녀가 검을 빼 들고 한 걸음씩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검을 바라보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 앞에 마주 섰다.


"누나"

"비키세요. 다치십니다"

"그만해."

 말 한마디로 그녀가 멈출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디아나를 죽이기 위해 검기를 일으키고 있는 검을 향해 나는 손을 내뻗었다.

"...무슨 짓입니까!"

"나도 알아. 전부 봤으니까."


"그래서는  됩니다. 전부 아시면서... 아시면서 그 여자를 받아주시면...그러면 안되는거잖습니까..."


"그래도 죽이는 건 안 돼"

"죽여야만 합니다. 저 여자가 과거에 저지른 대가를 받지도 않은 채..."

그녀는 뒷말을 하려던 도중 그제야  몸 상태를 확인한 것인지 고개를 돌렸다.
저번과는 다르게 그녀의 바로 앞에  있었기에 내 모든 것이 전부 그녀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생각했던 대로 역시나 효과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설득할 생각 죽어도 없다.


벨라트릭스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가 어떻게 했고, 어떻게 망가지는지 뻔히 봤는데, 똑같은 전철을 밟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다.

"왜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죽이겠습니다"

이 악물고 무시하려 한다.


"싫어. 그리고, 나 보고 이야기해"


"...날이 춥습니다. 옷 입으시죠"


"여기 보일러 빵빵해서 괜찮아. 그리고, 자꾸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고개 돌리는 건 무슨 예의야?"


내가 디아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했기에 그녀는 마지막까지 죽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원망스럽고, 죽여야만 하는 여자라 하더라도 벨라는 올곧은 기사였기에 나를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설득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예의...복장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주군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그럼 내가 잘못했다는 거네? 아... 내가 잘못해 버렸어. 예의도 없고 교양도 없는 주군이었네"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교양이 없다고 했습니까!"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이제는 내 귀도 이상하다는 거야? 내가 또 잘못한 거야?"


매사에 진지하다 보니, 듣고 무시하면  말을 굳이 하나하나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어리벙벙해 보였다.
그녀는 이내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닫았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런 걸 보면 마냥 군대가 마냥 나쁜 것 같지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지옥은 나쁜  맞다.


"누나. 왜, 이야기하다 말아?"


"...장난치지 마시죠.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시니 그런 것이겠죠.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누나. 그건 그렇고"

"......"


"오늘 엄청 이쁘다."


그가 왜 그녀를 볼 때마다 이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것 같다.
방금까지 나를 노려보며 책망하던 그녀가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지,지금 그,그게 할 말입니까!!! 대,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또...내가 잘못했어?"

사실, 아까 그의 기억을 볼 때까지만 해도 익숙하게 그를 하대하던 그녀가 내  하나하나 존대하며 반박하려 하는 모습에 갭이 느껴져 조금 더 놀리는 것도 있다.


"그런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알았어... 무섭게 왜 화를 내고 그래"


"화 안냈...하...알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에게 고개를 숙인  몸을 돌렸다.


"누나"


"네, 주군. 경청 하겠습니다."


"누나. 내가 안보고 있다고 죽을 생각하지 마"


"......또 회귀하셨습니까?"

"응. 난 누나가 필요해. 그러니까 죽지 마"

"...아까까진 죽을 생각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군요."

"...어? 나 실수했어?"


"방금, 주군이 하던 말씀들 전부 공주님의 말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벨라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다.

"방금 나한테 욕한  맞지?"

"...그 여자랑 닮았다는 말을 한거보니 아마 맞을 거예요"

"열 받네"


하고도 많은 말 중에 엘리제 닮았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충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입고 나갈 준비를 하려던 때 침대에서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린 채 나를 보고 있는 디아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를 버리시면  일이었어요. 아니면, 옛날처럼 대하셨으면 됐어요. 그러면 그녀도 인정했을 거예요. 왜...저같은걸..."


"시끄러워"

"...그 마법사처럼 다른 여자들도 저를 싫어해요. 분명,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충돌이 일어날 거고, 당신의 마음이 다칠 거에요"


말 길게 하면,  설득당하는데...

"그래서,  결정에 불만이야?"

"...불만이 있다고는  했어요."

"그럼 쓸데없는  하지 말고, 귀염받을 말만 해"

"변했네요...원래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셨잖아요"

생각해보면, 나는 소설 쓸 때부터 팔랑귀였다.
말 하나하나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를 반복하며 소설을 썼음에도 왜 나는 내 소설을 유토피아라 생각했던 것일까?
다른  몰라도...캐릭터 하나는 현실성이 있었던 것인지 개같이 복잡하다.


"안 변했어."


"변하셨어요. 그 마법사 아이를 대할 때는 이렇게 안 하셨잖아요. 진지하게 마주하시고는 하나하나 다 따지며 화내셨잖아요. 그 아이를 설득하시려 하셨잖아요."


"...네가 변했다면 변한 거겠지. 그래서 내가 변한 게 싫어?"

"아뇨. 당신다워져서  좋아요"


그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화를 예로 들면 그는 그레지몬에서 메탈그레지몬이된 것이고 나는 스컬그레지몬이 된 것이겠지.
이제부터 끌고 갔으면 끌고 갔지 죽어도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다.

"나가자"

내 말에 디아나는 침대에서 내려왔고, 곧이어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순식간에 흰색 로브와 사제복을 입어 보였다.
착의쇼 보고 싶었는데...
방문을 열고 나가자 벨라가  있었고, 내 뒤를 따라 나온 디아나를 본 것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주군. 정말 대려가시는겁니까"


"응. 나는 분명히 죽이지 말라고 말했어. 해코지하기만 해봐"

"후회..."


"안 해. 죽어도 안 해.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양 볼을 잡아 늘였다.
볼살이 적고 인상을 쓰고 있어 만족할 만큼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볼을 늘려놓으니 조금이나마 그녀의 딱딱한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주군. 장난 그만 치시죠"


"누나. 나 부탁이 있는데"

"손은 놓고 말씀하시죠"

"들어줄 수 있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딱히 구상해 놓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어떤  할지는 생각해뒀다.

내 멋대로 살기 위해서는 꼭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는 여자가 있다.
솔직히 그녀를 건드리는 것은 무섭긴 했다.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라일라 지금 어디 있어?"

하지만, 그녀는 참교육할 필요성이 있다.

"...저 여기있어요"


"언...제부터 있었어?"

"...조금 됐어요. 그런데, 저는 왜 찾으신 건가요"

그녀를 오랜만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회상에서도 등장하지 않았고,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등장하지 않았기에 조금 잊고 있기는 했다.


"라일라. 너한테도 부탁이 있어"


"말씀만 해주세요.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답니다"

"엘리제. 그 여자 어떻게 해서든  앞에 가져다 놔"

오늘 그 공주를 참교육시키지 않으면 내가 제 명에 못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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