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LEVEL 4 (4) (46/87)



〈 46화 〉LEVEL 4 (4)

주인공의 힘이 너무 거대해 어디에 있든 여주인공들이 주인공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설정.
그것은 그저 간편하게 히로인들을 사용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정확히는 급조한 설정이었다.
그때 아마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여주인공들이 등장해 그를 구해주던 시나리오를 연재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강하기만 하던 주인공에게 아주 조그마한 위기를 겪게 해주고 싶어 애써 넣었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글을 올리고 나서 독자들... 내 얼마 없던 독자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드디어 주인공이 고통받는 시간인데 뜬금없이 갑자기 히로인이 등장해서 구해주는 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댓글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대체 주인공이 무슨 잘못을  것인지 연재 처음으로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어차피 쓴 사람이 6명이라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댓글창이 채팅창이라도 된 것처럼 작가인 나를 향해 해명하라는 시위가 이어졌다.

그동안  설정 오류가 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주인공이 대체 지금까지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이들이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댓글의 주된 내용은 전부 주인공 반병신으로 만들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소설은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었고, 주인공을 나라고 여기며 썼기에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탄탄 대로만을 걷던 주인공이었다.


애초부터 그 시나리오는 주인공에게 위기를 겪게 할 생각이었지 고통을 느끼게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음 편을 연재할  굳이 주인공의 권능이 너무 샌 나머지 히로인들이 주인공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는 설정을 억지로 넣었다.


독자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주인공이 행복한 것이 좋다.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은 히로인들과  행복하게 살게 했는데...어째서 나는...

"찾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건물의 잔해들이 떠다니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오고  잔해들 사이에서 나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조그마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주군.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벨라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이 땅에 닿았다.
벨라가 나를 안고 순식간에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눈앞에서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며 흙먼지가 파도처럼 덮쳐왔지만, 모세의 기적처럼 내 주변만 흙먼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벨라..."


"주군. 기운들이 몰려오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

"오빠!!!!!!!!!!"

굉음이었다.
분명,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 목소리만으로 고막이 찢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흙먼지들이 근원지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몸통 박치기로 건물을 박살 냈던 존재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아...예전 뉴스를 통해 실루엣으로 잠깐  적 있던 얼굴이다.


[유럽 전체가 아이의 손에 농락? EU. 미상의 금발 여자에게 핵미사일을 발사하겠다 엄포]


오빠라는 말을 하는 히로인은 기억에 없지만...
저 사자를 연상케 하는 산발과도 같은 금발 머리.
그리고 앳돼 보이는 얼굴과 머리에 달린 호랑이 귀를 확인하자 내가 생각하는 그녀임을 확신했다.

"...피냐"


그녀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피냐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코앞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막지마!!!!!!!!!!"

"시간을 벌겠습니다. 라일라와 합류해 어서 이곳을 벗어나세요!"

폭음은 벨라의 검과 그녀의 손이 충돌해 생긴 것이었고, 그저 충격파만으로 주변 건물에 있던 유리창들이 전부 깨어지는 게 보였다.
...코앞에 있는 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벨라가 막아준 것이겠지...


피냐의 무력은 간신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정도니 무리 없이 벨라가 이길 것이다.
그래, 일단 빨리 이곳을 벗어난 다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차분히 생각하자.


"가려는 것이냐"

자리를 이탈하기 위해 몸을 돌리자 저 멀리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100m가량의 거리에서 말하고 있었지만, 코앞에서 말하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초록색으로 뒤덮여있는 여자.
 멀리 서부터 거대한 식물들이 이곳까지 자라나고 있는 게 보인다.

바닥에 질질 끌 정도로 긴 초록색 머리카락과 함께...엘프를 상징하는 길고 뾰족한 귀...
그렇다고 그녀가 엘프라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포위라도 한 것인지 갑작스럽게 생긴 나무들 위에 수백의 귀쟁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엘프가 아닐 것이다.

위그드라실.
세계수 그 자체이자.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을 위해 엘프 수만이 몰살하는 것을 방관 했던 여자.
이미 내가 썼던 소설은 주인공이 바뀐 뒤 의미가 없어졌기에 그녀와 어떤 이야기가 진행됬는지 그리고 그녀와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모른다.

최악이다.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새 내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내 볼에 손을 가까이 했고, 곧이어 또다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때지?"


이건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자기가 곤란해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찾아왔어."

"샤를..."

그래 그녀라면 나를 지켜줄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려 가려 했지만,  앞에 풀들이 자라나 샤를로 이어지는 길을 막는다.

"...가지 말아라."

"이거 치워"


"네 말만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찾아오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전부 잊어버렸더구나... 화를 내고 싶지만... 너는 유한한 존재이니 그럴 시간도 아깝다."

그녀의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것이 보인다.
...여자의 눈물에는 약한 편이긴 하지만, 요즘 눈물을 너무  나머지 식상하다.

"놔줘"


"이제는 네 말은 듣지 않겠느니라. 그러니 잠자코 있거라. 아...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녀의 말에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감이 잡힌 나는 발을 땅에서 때려고 했지만 이미 덩굴이 다리를 덮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만해..."

죽어야 한다.
완전히 망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엘리제를 건드리는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그 영악한 여자가 아무 믿는 구석 없이 그동안 쭉  옆에 있었을  전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움직였던 내 실수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내가 죽을  있는 수단 자체가 전무했기에 나는 내 볼에 손을 올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손이 곱구나"

"...이드"

"이드...그렇지...그렇게 불렀었지.  누구도 부를 수 없는 너만을 위한 이름...그것을 듣기 위해 그토록 기다렸다."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소유욕이 담겨있음을  수 있었다.
벨라는 피냐와 붙고 있느라 늦는다 해도 대체 라일라와 디아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알겠으니까 이제 풀어줘. 어디 도망 안 갈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네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은 변함이 없구나.  거짓말에 또다시 속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제 다시는 속지 않겠다. 욕심이라는 것을 생기게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대화를 하고 있던 이드의 어깨가 무엇엔가 베어져 그녀의 육신에 사선이 그어졌고, 곧이어 몸의 절반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군. 너무 쓸모없어진 거 아닌가?"


거대한 대검을 쥐고 있는 뱀파이어 사라.
샤를의 최측근이자 전투에 미쳐있는 여자.
바닥을 내려다보자 이드의 육체 절반은 어느새 주변 덩굴들이 덮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는 피가 한 방울도 튀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다름 달려가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사라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생길뻔했지만, 곧이어 그녀가 대검을 양손으로 잡고 나를 향해 휘두를 준비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마음을 접을  밖에 없었다.

"알아서 피하십쇼. 부군"


양다리가 덩굴에 묶여있는데 대체 어떻게 피하라는 건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뒤질 게 뻔했기에 나는 몸을 최대한 숙였고, 곧이어 귀에 쩌렁쩌렁한 폭발음이 들렸다.


아까부터 군시절 총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 잔치에 귀가 고장 나버릴 것 같다.
사실 아까부터 귓구멍을 기준으로 따스한 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귀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된다.

"씨발...끄떡도 안 하네..."

사라의 대검을 피하고자 몸을 낮추고 있던 나는 사라의 목소리에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


나보다 키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이였다.
피냐인가 싶었지만, 뒤에서도 보이는 그녀의 긴 귀와 흑색 피부를 보니 악몽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있었다.

거대한 대검의 날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주인님이 세상 어디에 있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 커다란 권능이 세상에 풀어지면,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님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고통받게 되시잖아요]

쿠레아 까지...
괴물 잔치가 따로없다.


그녀가 그 말을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위그드라실과 피냐 그리고 쿠레아가 나타났다.
샤를도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개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지금도 개판이지만 이 개판이 만만하다고 생각할만한 히로인들은 아직 몇몇 더 있었기에 이 도시가 증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도시와 섞여 나까지 같이 증발하면 좋겠지만...


"쿠레아. 날 죽여줄 수 있어?"


"......"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나를 죽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다시 한번 눈앞을 바라보자 쿠레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곧이어 아까 나에게 대검을 휘둘렀던 사라가 비명 한번 못 지르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피가 터져 나오는 사라의 몸을 짓밟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한 손의 흑색 단도를 역수로 쥐고서 내 눈을 마주치고 있는 다크엘프.
그녀를 막으려면 벨라나 라일라 둘 중에 한 명은 있어야 한다.


"라일라!"

"그 아이는 지금 괴물을 막고 있느라 정신없어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흰색의 안개를 흩뿌리며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디아나. 빨리  죽..."

말을 전부 내뱉기 전에 세상이 멈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디아나의 모습과 그녀를 죽이기 위함인지 쿠레아가 단검을 들고서 그녀를 내려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이 정지된 것이다.


이드의 덩굴에 의해 발이 묶여있을게 분명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 몸이 디아나를 향해 달렸고, 어느새 단검을 들고 있는 쿠레아의 팔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내 몸이 마치  몸이 아닌듯한 느낌에 당황하며 쿠레아를 잡고 있던 손을  주위를 둘러본다.

운석이라도 맞은듯 쿠레아를 기준으로 바닥의 콘크리트에 거대한 구덩이와 균열들이 생겨나 있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용사님...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그건 아니다.
기억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 없다.
방금 아주 잠깐 느껴졌던 전능감과 같은 것은 회귀한 뒤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디아나. 빨리 날 죽여"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기에  말을 바로 알아듣고 자신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나에게 휘둘렀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이  것을 대비해 눈을 감은 것이었다.
 초가 지나도 죽음의 고통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실눈을 떴고 고양이와 같은 찢어진 동공이 코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는 내 손에만 죽을  있다고 몇번이나 말했을텐데?"


"...하...이..."

"내가 잠깐 미국물 좀 먹었다고 인사를 하이라고 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지?"

고개를 뒤로 빼려는 순간 그녀가  턱을 잡아끌었고,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끌려 입술을 빼앗겼다.

"츕...약해진건 둘째치고 패기가  이렇게 없어졌어? 뒤질래?"


"하이네스"

"그게 아니잖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가르쳐 주지 않았나? 그새 까먹은거야?"


은발 머리 사이로 거대한 뿔이  개가 우뚝  있는 여자.
그녀를 단독으로 막아설  있는 히로인은 없다 싶이 할 정도로 그녀는 강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괴팍해 엘리제 만큼이나 어디로 갈지 예상하기 힘든 히로인이였다.


그녀를 마주 보자 나는 지금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압도적인 공포.
눈앞에 있는 이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손발이 떨리는 것은 둘째치고...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겨우 이 정도로 오줌을 지리면 어떻게 해. 아... 힘만 없는  아니라 기억도 잃은 거야?"

"......."

입을 열어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교육 시켜야 되는구나... 자. 따라 해봐. 주인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진짜 좆된다.
그 일념 하나로 어떻게든 버텨보지만, 딱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녀를 눈앞에 두고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기에 나는 멍청하게 그렇게 그녀의 손에 잡혀있을 뿐이었다.

"고장 났네. 일단, 가서 이야기 하..."

그녀가 손짓하자 허공에 검은색 균열이 생겼고,  안으로 나를 데려가려던 때 그 균열 위에서 투명한 얼음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또 너냐? 적당히 하지? 자꾸 그러면, 심장이고 뭐고 너도 죽여버릴 거야."


"...선생님은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니 놔주세요"

"아니, 내 물건인데?"


라일라의 목소리에 희망 가득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그녀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부들대는 다리로 애써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내 그 희망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라일라는 이미 지쳐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싸우려는 것인지 라일라의 주변으로 무엇인가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무엇인가가 펑펑 터져나가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아까 벨라와 피냐가 붙을 때도 그랬지만, 이들의 싸움은 나 같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확인조차 못 한다.


특히나 마법은 더욱...

"...너는 정말 죽이기 싫은데...아까 공간마법을 마음대로 저지하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그렇게 죽고 싶어?"

"그러면 선생님을 놔주시면 됩니다"

"그건 안되지.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걸 어떻게 포기하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 팔을 당겼고, 그대로 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안겨졌다.
가슴이 의외로 크다고 생각하자.
순간 디아나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

"아, 저거 아까  죽이려고 하길래 내가 죽여버렸지"


벨라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히로인이 죽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회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한 적이 있는데...


"...놔줘..."


공포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잡고 떨어트리려 했지만 이내 그녀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어디 하나 잘리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하이네스가 등장한 시점부터 포기했다.
그녀가 등장한 이상 그녀와 마주 할 수 있는 히로인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없었기에 이 개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라일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내 상의가 뒤로 당겨져 진다는 느낌과 함께 눈앞에 벨라의 것으로 보이는 검과 레이 피어가 보였다.


"자기. 내 앞에서 다른 여자한테 안기고 있으면 어떻게 해"


등장한 지 그렇게나 오래 되놓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주제에 말은 잘한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벨라와 프리시아의 뒷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샤를. 날 죽여줘"

"...오랜만에 보자마자 한다는 첫마디가 그 소리에요? 진짜 너무한다."

"빨리!"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벨라와 프리시아 그리고 라일라만으로는 절대  괴물을 이길 수 없다.
그건 하이네스를 설정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여기 있는   프리시아와 샤를이 아닌 쿠레아와 로제였다면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쿠레아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 손으로 기절시켜버렸다.


"뱀파이어. 그거 죽일 생각하지 마."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하이네스를 이길수 없었기에 그녀는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 긴 손톱을  목으로 가져왔고, 곧이어 나는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눈앞으로 붉은색의 물감이 튀어 올랐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느새 벨라와 프리시아 사이를 뚫고 내 앞으로 다가와 있는 하이네스.
나는 대체 얼마나 강한 괴물을 만들어 놓은 걸까.

정말, 이대로 포기해야 되는 건가 싶을 때. 한쪽 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쿠레아의 단검.

아까 바닥에 내리칠 때 여기로 굴러내려 왔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것을 쥐어 곧바로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내 바로 앞에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한번만 봐주면 안 돼?"


"응, 안돼. 넌 내꺼야"


이 여자에게 잡히면 어떻게 될까...
곱게 뒤지지는 못하겠지?
이 여자가 웃는 것만 봐도 무섭다.
샤를처럼 겁만 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을까?
설마...그건 너무 긍정적인 판단이다.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설정한 이 드래곤이 나를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행복한 삶을 쥐여줄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씨발년"

머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한 물들이 온몸을 적셔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있던 샤를의 것이 분명한 붉은 피.


제발...누가 날 죽여줘.


"병신 새끼.  이러고 있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실제로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예전 라일라와의 기억을 살펴보던 중에 수도 없이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그가 몇 번이고 의지했고, 몇 번이고 그를 죽였던 여자.


그 목소리가 로제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내 목에서부터 격한 통증이 밀려오며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




[BAD END] - 주인공 DEAD (44일 생존)



***




"네! 얼마든지 말해주세요!  모든 것인 주인님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시야가 돌아오기도 전에 진실을 말하겠다는 엘리제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이었다.
그래, 나는 악몽을 꾼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방 안 전등 하나가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악몽 속 모든 사건의 원흉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마주 보고 있고, 나는  모습에 애써 입을 열었다.


"...무죄"


"네?"


"당신은 무죄입니다."

상대가  된다.
그녀가 들고 있는 카드는  같은 것은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는 재앙이었고, 그녀를 유죄판결 내리는 순간 나는 정말로 악몽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엘리제님을 풀어주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라일라! 어서 풀어줘!"

"...네? 저요? 선생님 갑자기 왜...일단 알겠어요..."


라일라가 손짓을 하자 엘리제를 속박하고 있는 무형의 것이 사라졌고, 곧이어 엘리제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진실은 밝혀지는 거군요"

"......"

"어머, 주인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혹시 저한테 화나신 거에요? 정말 그런 거에요?"

"...아닙니다"


"저 같은 천한 노예에게 존댓말을 쓰시다니! 주인님께서 화나신 게 분명해요!"

"......화...안났어...으드득..."


엘리제는 무척이나 해맑은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주인님. 착하다. 착해."

진짜 나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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