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LEVEL 4 (5)
엘리제.
그녀를 묶은 뒤 취조를 했던 것은 그녀가 모든 일의 열쇠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히로인.
[더는 못 돌아가게 될 때까지 붙어있어야 하니까요. 제가 없던 시간으로. 주인님은 제가 주인님이라 확신한 순간의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될 때까지 거짓말이라도 하며 붙어있어야죠.]
처음에는 그저 그녀가 나를 놀리기 위해 말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너의 회귀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 도망칠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해석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저쪽 세계에 있을 때부터 회귀의 권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가지지 못하니. 당신이 저를 가져주세요. 주인님]
그가 왕성을 나오기 이전부터 그녀는 그가 과거로 시간을 돌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던 그녀는 이내 그를 볼 때마다 그의 표정을 보며 흥분했으니 그녀가 회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와 라일라의 기억을 보던 중 엘리제에게 성녀를 설득해달라 부탁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그가 벨라를 버릴 때도 그녀는 그의 옆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 회귀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나를 자극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 있지만, 굳이 내 회귀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거짓말을 한다고?
내 회귀 시간을 결정하는데 그녀가 관여해 있다는 확신이 들자 모든 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디아나의 납치는 둘째 치더라도, 그녀가 했던 모든 거짓말이 새롭게 들려온 것이다.
벨라의 자살. 샤를의 납치.
라일라의 갑작스러운 폭주.
그리고, 내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 때마침 나를 죽이러 온 벨라트릭스와 쿠레아.
솔직히 내 첫 죽음도 의심스럽지만, 이것은 아마 억측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만난 이후로는 전부 그녀가 관련되어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그것을 확신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결과는 내 패배.
쓸데없는 정보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내 힘을 가두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이제 엘리제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음에도 나는 그녀를 협박하거나 고문해서 정보를 뜯어낼 수 없게 되었다.
츕
...나는 레벨업을 기점으로 강해지고 있다.
그의 기억을 읽을 때마다 레벨업을 했고, 그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편해진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평소 생활에 편한 정도였지 괴물과도 같은 히로인들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했다.
츄웁
...쿠레아를 한방에 기절시킬만한 힘.
소설 설정상 암살자이자 개인적인 무력만으로 라일라와 비견되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를 나는 한방에 기절시켰다.
그때 나온 힘은 대체...
엘리제가 더이상 힘을 막지 않겠다 말한 것 때문일까?
츕
적당히 무시하려고 했는데...
요즘 스트레스 덕분에 밤마다 얇은 잠을 자다 보니 누군가 내 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살짝 깨어버렸지만, 어떻게든 무시하고 자려고 했다.
적당히 하다가 가겠지 싶어 무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해도해도 너무하네...
"츕...쮸"
몽롱한 상태다 보니 어디를 간지럽히는지 애매했지만, 어느 정도 정신이 깨어 그 근원지가 내 가슴이라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을 뜨기 전 이런 대담한 짓을 할만한 히로인이 누가 있을까 머리를 굴려본다.
벨라트릭스?
최근 상태가 돌아온 벨라트릭스가 이런 행동을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이 안 된다.
디아나?
그녀는 자신이 가진 죄책감으로 인해 절대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제?
의심이 들긴하지만...이년인가?
눈을 살며시 뜨자 내 코앞에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였다.
어두운 방 안이지만, 창틈으로 비추어진 달빛으로 인해 푸른 빛을 내는 긴 머리카락.
...라일라.
"츄우..."
내 젖꼭지를 애타게 핥고 빨고 무는 모습을 하는 라일라의 모습에 나는 순간 한숨을 내쉴뻔했다.
대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선생님이...츄웁...나쁜거에요..."
그녀를 가르친 기억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못된 행동을 하는 제자를 보니 잘못 가르친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선생이 자는 틈을 타 수면간을 하는 제자라니...
잘 때는 팬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편이다 보니, 내 양 유두가 그녀의 타액에 묻어 잔뜩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수치스럽다.
나에게 정수리를 보여주던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나는 살며시 뜬 눈을 감았다.
...왜 내가 눈을 감았지?
"...선생님...커다랗게 됐다는 건...허락한다는 뜻인 거죠?"
그녀의 말의 본의를 깨닫고 커다랗게 눈을 뜨고서 그녀를 봤지만, 그녀는 이미 내 쪽에는 관심이 없고 하반신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유일하게 입고 있던 팬티의 느낌이 사라지고 그녀가 나의 것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척이나 차가운 손.
...그녀를 처음 안았던 그 날을 상기시키는 듯한 차가운 손이었다.
"라일라"
"으...에...아?"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키자 묘한 소리와 함께 크게 뜬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만약 잠을 잔 상태로 그녀가 일을 저질렀다면 상관없겠지만, 정신이 깨어있는 상황에 그녀가 하는 행동을 방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수면...그...아니... 어떻게 일어나신 거에요?"
마법으로 강제로 잠들게 했었던 것일까?
하긴 사람 심장 소리를 읽고 거짓말을 눈치채던 여자가 왜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나 싶었는데...
수면 마법을 믿고 내 몸에 정신을 팔았나 보다.
"...피곤하니까. 나가"
"......"
"나가라니까?"
창문이 그녀의 등 뒤에 있었기에 표정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멋대로 남의 방에 침투해 수면간을 하려고 했던 여자가 도리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
"...선생님"
"왜"
"...선생님"
그녀의 두 번째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용서받기 위해 저는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세 번째 말하는 거야. 나가"
"말해주세요"
"그 이야기를 대체 왜 지금...하...짜증나게 하지 말고 나가라니까? 아니면 내가 나갈까?"
내 말에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깨자마자 화를 내고 싶지 않았고, 그녀와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가려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짜증 내실 거 알아요. 그런데,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똑같은 방식으로 용서를 빌면 선생님이 싫어하실 테니..."
"몰래 들어와서 남의 몸에 장난치고 있는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선생님이...선생님이 잘못하셨잖아요."
갑자기 날 탓한다고?
"왜, 그 여자는 되고 저는 안 되는 건데요? 그 여자가 선생님에게 저질렀던 것이 무엇인지 아시면서...저에게만 이렇게 못되게 구시는 건..."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디아나를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라일라보다 더욱 큰 죄를 저지른 여자.
하지만, 나에게 있어 디아나와 라일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순서가 다르다.
디아나는 나에게 호감을 먼저 준 여자였고, 라일라는 애초부터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결과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디아나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과거의 죄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었고, 라일라는 시작부터 위협 그 자체였으며 수도 없이 죽고 싶어 할 정도로 그녀가 나를 괴롭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긴, 이제 신경쓸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녀를 용서했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니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써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상관없어. 이제 그때 일 신경을 안 쓰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선생님. 저는 선생님에게 미움받는 게 싫어요."
"......"
"그런데, 아예 관심이 없는 건 더 싫어요."
눈을 마주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있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
[헛된 꿈만 꾸고 싶지 않아요. 저 용서 받을 수 있어요]
그래...마치, 그때와 같은 표정이다.
"그렇게 없던 일로 해버리시면 저는 이제 아무것도 용서받을 수가 없게 돼요. 관심조차 주지 않게 되어버리면 저는 평생 도구로 남아버리는 거잖아요"
"...용서도 하고 관심도 내놔라?"
"저는 선생님에게 사랑받을 거에요."
욕심.
그녀가 나를 망가트렸을 때 그녀가 나에게 수도 없이 자신을 찾아달라 부탁했던 것은 전부 이것 때문일 것이다.
용서받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것도 전부 이 욕심 때문이다.
디아나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기에 욕심을 포기했다.
벨라트릭스는 자신에게 욕심이 과분하다 여기며 또 다른 자신에게 그것을 떠넘겼다.
그런데 이 여자는 쓸대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선생님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저는 선생님의 도구도 되지 않을 거에요. 저는 선생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거지. 선생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붙어있는게 아니에요."
"이제는 협박이야?"
"협박...이라고 들으신다면...맞을지도 모르는데...그런건 아닌데...저에게 관심만 두시면..."
"누가 봐도 협박이지. 지금 내 상황을 뻔히 알고 있잖아?"
그녀를 편한 도구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녀를 용서했을지언정 옆에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도 그녀를 대체할 만한 존재가 생긴다면 그녀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
굳이 그녀를 옆에 둘 필요는 없으니까.
"디아나는 용서해주셨잖아요...그렇게나 마음 쓰고 계시잖아요... 저 알아요. 그 여자가 선생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제가 한 짓보다 훨씬...훨씬 나쁜 짓을 했는데...왜..."
"디아나는 용서해줬으니 너도 용서해줘라? 내가 언제 디아나를 용서해줬는지는 둘째치고, 왜 그게 너도 용서해달라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데? 누굴 어떻게 대하는지는 내 마음이야. 형평성을 왜 인간관계에 가져다 붙이려고 하는 건데?"
"...하지만..."
"그리고 용서했다니까? 이제 마음 더 안 쓴다고"
"절 무시하고 계시잖아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린다.
"애써...애써...무시하고 계시잖아요...제가 옆에 있는 것도 무시하려고 하시고...저라는 사람이 있다는걸...이 악물고 무시하고 계시잖아요...그게 어떻게 용서한 거에요..."
"강요하지 마"
"...기다리는 거 저 못해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 저 절대 못 믿어요. 사랑받을 거예요. 어떻게든 사랑받을 거에요."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하는 억지가 오히려 반감을 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아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화를 내듯 굳은 얼굴과는 다르게 그녀의 떨리는 손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평생 도구로 쓰이다가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 설령...그렇게 도구가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거짓말이라도 들어야겠어요. 거짓말이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을 거에요."
"그래,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지금 말해주세요. 내일 되면...아무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실 거잖아요."
그녀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귀찮게 하지 마"
"절 도구로만 쓰실 거잖아요! ...그렇게 선생님 원하시는대로만 절 사용하실 거라면...저...댓가...받을거에요"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썼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봤자.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을.
히로인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그녀와의 관계가 이대로 평행선을 달리게 되면, 금세 잊혀 버려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이런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그거면, 만족한다는 거지?"
"...지금까지...절 사용한 댓가...아니, 그건 기억이 안 나시니. 이제 앞으로 절 사용 할 댓가를 받아야겠어요!"
"그 말 취소 안 하면 진짜 물건이 되는 거야."
"......."
"네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
"안아주세요."
방금까지는 사랑한다는 말만 해달라 해놓고서는 이제는 안아달라고 말하는 모습에 그 짧은 시간 만에 욕심이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약속하자"
"어떤 약속이요?"
"딱 한 번이야. 딱 한 번 네가 바라는대로 해줄게"
"평생... 한 번이라는 말 아니죠? 아니라고...말해주세요...아니죠? 그러면 저 못해요. 절대 안 돼요. 죽어도 안 할 거에요."
그녀가 양손으로 내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에 팔을 내리쳐 매정하게 떼어내고 싶었지만, 순간 그녀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달에 한 번...사용료잖아요. 쭉 선생님의 도구가 되는 거잖아요. 평생 한 번이라고 하면 나중에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쁜 마음 안 먹게... 다음을 기대할수있게 해주세요."
"반년"
"그건...너무해요..."
지금까지 쭉 굳건하게 버티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년이라는 말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속 좁은 나라도 순진한 처녀에게 이런 말을 내뱉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네 말대로 한 달에 한 번. 대신 언제 끝낼지는 내가 정해. 그리고, 내가 끝내자고 말했을 때 군말 없이 포기하는 것까지 수긍한다는 조건으로"
"포기라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에는 죄책감이 느껴졌기에 눈을 피한 것이었다.
그녀를 곁에 두려 마음먹는다면 얼마든 곁에 둘 수 있다.
과거 그녀가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용서했을지언정 그녀가 나를 괴롭혔다는 껄끄러움과 감정의 골은 남아있다.
속좁다 생각할수 있지만, 굳이 그것을 매번 그녀와 마주할 때마다 과거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그 귀찮고 껄끄러운 마음을 상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게요..."
"...한다고?"
조금은 더 고민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선생님이 절대 포기 못 하게 만들 거에요"
참 일관성 있는 여자다.
"저 선생님 유혹할 자신 있어요!"
푸른색 눈동자에 담긴 의지 하나 만큼은 인정 할 만 했지만...
그녀와 자본적 있는 나였기에 그녀의 말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