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LEVEL 4 (8) (50/87)



〈 50화 〉LEVEL 4 (8)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버린 그녀를 두고 나가려 했었다.
하지만, 자꾸 눈에 밟혀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 마냥 서있었다.

그녀가 눈에 밟힌다기보다는 주변에 저질러놓은 것들이 눈에 밟혀 이대로 나가기에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로 아침마다 날 깨웠던 것은 엘리제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이 참상을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닥을 닦았고, 바닥에 내던져진 옷가지들을 정리한 후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려 했다.
이불을 덮기 전에 그녀의 나신을 아주 조금 감상했다.
그녀가 예쁜 건 사실이니 조금 오래 감상했다.


"...선생님..."


너무했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사실 조금이나마 후회 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애타게 자신을 범해달라 말하는 그녀를 무시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이제 조금 사는 게 안정이 돼서 그런 것일까?
예전 라일라에게 납치되었을 때에는 그냥 순순히 받아들였었는데, 방금 그녀와 관계를 맺을 때에는 아무리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성관계에 그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새끼는 아니었던  같은데...
그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여자를 가지고 논다기보다는 정말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었다.

새하얀 나신 위에 이불을 덮자 그녀의 손이 이불을 잡았고, 곧이어 몸을 돌려 이불을 칭칭 감았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볼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선생님'이라는 말이 몇 번이고 들려왔다.

이제야 그의 과거 기억을 통해 느꼈던 죄책감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나는 무척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캐릭터의 설정을 짜고 그에 대한 과거를 만드는 것을 정말 좋아했었다.

클리셰가 난무하는 용사 소설을 쓴 것도 이것 때문이다.
유토피아의 주된 구성은 그 안에 살아가는 캐릭터와 세계관이었기에 거대한 스토리 흐름은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용사와 마왕이라는 진부한 스토리로 소설을 진행했었다.


그렇게 모든 히로인들 만들 때 나는 정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아니, 이제와서 보니 모든 히로인에게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라일라는 아주 작정하고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얀데레를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만들어진 캐릭터.


"...선...생님..."

이것도 열정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사람 한 명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열정이라고...


"선생님...선생님"

단  번도 타인에게 사랑받아본 적 없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소녀.
그저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만이 있었던 소녀를 구해준 남자.

"선생님..."


나는 내가 만든 히로인이라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오지 않았던  같다.


애타게 사랑만을 갈구하는 소녀.
그저 소설 속에서 봤을 때에는 몰랐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 나는 정말 몰랐다.

"왜 자꾸 불러. 자꾸 부르면 선생님이라고 못 부르게 한다니까?"


"...선생님..."

"왜"


"저 아직 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의도치 않게 진한 한숨이 입을 통해 내뱉어졌다.

나는 소설을 쓰며 라일라를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신념을 중시하던 벨라트릭스.
그를 위해  번이고 나서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기사로서의 신념을 택했다.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던 디아나.
디아나는 현실의 나와 무척이나 닮아있고, 애초에 나를 모티브로 만들었던 캐릭터였다.


"사랑해요. 선생님"


그녀의 안에서 나라는 사람을 통째로 지우면 어떻게 될까?


[제발 저를 찾아주세요.]

나를 죽도록 고문했던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음을 알고 있음에도 찾아달라 애걸했다.

"선생님..."

얼마 전 라일라에게 소리를 지르던 날이 떠오른다.
어떻게 나한테 용서해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냐고... 어떻게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냐고 그녀에게 소리쳤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회귀로 인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게 되면 내가 눈치챌 테니까.
자신이 그저 사랑만을 갈구하는 인형이라는 것을 나에게 들키게 되어버릴 테니까.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녀는 멋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기에 죽는다는 선택 또한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

나는 과연 그런 그녀를 버릴 수 있을까?
나에게 버려진 순간 평생토록 죽지도 못하며 괴로워할 그녀를 매정하게 버릴 만큼 나는 쓰레기가 될  있을까?


"잠깐 산책 좀 하자"


그녀는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작은 얼굴에서 슬픔. 당황. 놀람. 기쁨을 모두 표현하고 있는 게 무척 신기했다.

"자,잠시만요. 저,저 금방 준비할게요...꺄악!"

다리에 힘이 풀려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바닥에 넘어졌다.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라는 것을 까먹은 것일까?
내 앞에 새하얀 엉덩이를 보여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까 진정시켰던 하체가 벌떡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짧았다.


"하아...오래 기다리셨죠? 준비 다 됐어요!"

어설프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때문이었는지 급하게 준비한 나머지 머리는 산발에 얼굴은 하얗게 떠 있었고, 옷도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온 것인지 상의 하의가 따로 노는듯했다.

"거울 보고 다시 와"


"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며 화장실로 들어갔고, 곧이어 짤막한 비명이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나왔다.

"...선생님.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밥 먹으러가려고"


방구석에 처박혀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였기에, 학교나 굶주린 배에 쫓겨 나온 것을 제외하고 이렇게 자진해서 밖으로 나와본 것은 오랜만이다.
공원에서 라일라를 만났던 날을 제외하고 거의 처음이 아닐까?

"혹시 국밥 좋아해?"

"선생님이 드시는 거라면 뭐든 좋아요"


예전에는 단골이었지만, 회귀능력이 생긴 이후로 국밥은커녕 바깥에서 밥을 먹어본 적은 극히 드물었기에 매일같이 오던 이 가게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나름 단골이라고 생각했고, 이곳에 안 온 지 한두 달밖에 안됐는데 들어오자마자 의례적인 인사가 나오자 조금 서운한 감이 들었다.

"국밥 두 개 주세요"

그녀와 입구에서 대충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자 왠지 모를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느낌이 모텔에서 원나잇 한 다음 그냥 헤어지기 무안해서 아침에 국밥집 온 남녀처럼 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친구는 아닐 거고, 그럼 여사친?"

반찬을 두며 말하는 이모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마치,  같은 게? 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왔기에 조금 오기가 생겼다.


"여자친구 맞는데요?"

"...그래에?"

라일라를 바라보며 사실 확인을 하는듯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일라의 모습에 아줌마는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보며 표정을 찌푸린다.

"학교도 안 가고 밤에 뭘 했는지 아침마다 퀭한 얼굴로 혼자서 국밥 먹던 학생이 무슨 재주로 요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대?"


한두  안 왔다고 아는 척도  했으면서 이제 와서 조금 궁금하니 아는 척을 하는 아줌마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국밥이나 내주세요"


"아니,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차분히 해봐. 어디서 만났어? 이 아가씨 무슨  한데? 연예인이야?"

"밥이나 내주시죠"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뭘 그렇게 성질을 내고 그래?"


내가 언제 성질을 냈냐고 묻고 싶지만,  말하면 이 아줌마가 옳다구나 하며 더 말을 할 게 뻔했다.
새벽에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잘 써지다 보니, 늘 자정을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었고, 10시간가량 글을 썼기에 업로드를 했을 때에는 새벽 시간 그리고 늘 배가 고팠었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재주는 없었고,  시간대에 문을 연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보니, 1년가량을 매일같이 이곳에 왔던 것 같다.
저 귀찮고 짜증 나던 목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 운 것 같기도 하다.


"라일라. 뭐해?"

"...아...어...그게..."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번쩍하고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당황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여자친구라고 말해서 그런 거야?"


"아...어...으..."

"여자친구가 무슨 말인지 알아?"

"...연인이요."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는데, 괜히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있고  내가 그런 반응을 싫어할까 싶어 애써 참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긴 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네"


"그럴 땐 좀 숨겨. 아닌척하거나 튕기고 그래야지. 너무 좋아한다는 거  내면 오히려 별로야"

"선생님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되는걸요"

여느 때처럼 예쁘장한 모습으로 예쁜 대답을 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괜스레 그녀의 앞에 놓인 국밥을 가리켰다.

"먹기나 해"


"네"

수저에 떠져 있는 것을 입으로 후후 불고서 입에 넣는 것을 마냥 바라보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안 드셔요?"


"...먹기나 해"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국밥과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네 입으로 유혹한다며, 나는 국밥 맛있게 먹는 여자가 좋아"

"...아"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 것일까?
그녀는 눈을 크게 떠 보이고 나를 의식하며 아까보다 더 다소곳하게 떠먹기 시작했다.

"깨작깨작 먹지 말고, 팍팍 먹어"


그녀는 내 말에 입으로 불어 식히는 것을 까먹고 곧장 입에 넣어 보였다.


"...으..."

마법사다 보니 입 안쪽은 허술한 것인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꼭 다물었고, 곧이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웃지 마세요"

"안 웃었는데?"

"지금도 웃고 계시잖아요...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아니야. 진짜 국밥 잘 먹는 여자 좋아해"


피할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아마, 그는 라일라를 어떻게 해서든 바꿔놓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닌 죄책감을 내려놓기 위해 그녀 안에 무엇인가 채워주려 발악 했을 테지만...

"다 먹었으면 가자"


"어떻게 벌써 다드셨...잠시만요. 금방 먹을..."


"억지로 먹지 말고 일어나."

"그치만..."

이제 겨우 절반 정도나 먹은 국밥을 어떻게 해서든 다 들이키려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죄송해요"


살다살다 국밥 한그릇 다 못먹었다고 사과하는 여자는 처음 봤다.

"죄송하다는 말 한 번만 더 나오면 집에 들어갈 거야"


"네?"

"아, 집에 들어가고 싶었어?"


"아니요아니요아니요. 전혀 아닌데요?"

괜히 거짓말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여서 그녀를 옆에 붙여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내 말에 속을 리도 없고, 그리고 그렇게 속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집에 들어간다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부정하는 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불렀다.

.
.
.

"어,어때요?"


"딱 달라붙는  좀 싫은데, 역시 내가 고른 쪽이 더 나은  같다"

"요즘 유행하는 거라고 했는데..."

어깨를 드러내는 베이지색의 오프숄더를 입고 나와 최근 유행이라며 어필했지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품평하며 한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거요?"

"그건 방금 입어봤으니까.  옆에 옆에 있는  입어봐"


내 말에 옷을 들고서 총총걸음으로 탈의실로 향하는 라일라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여성과 함께하는 쇼핑에 다들 금세 지친다고 하던데, 이렇게 쇼핑하면 편한 것을 왜 다들 힘들게 따라다니는 것일까.

"저...손님"


"네?"

"...죄송하지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했나요?"


백화점 개장 시간에 맞춰서 들어왔다 보니, 손님이 없어 여유롭게 쇼핑을 한 것이었지만, 한 가게에서 너무 오랜 시간 있었다.
이곳저곳 가게를 옮겨 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넓은 가게를 골라 들어와서 한두 시간 정도 옷만 갈아입었는데... 민폐였나보다.

"그럼, 지금까지 입어본 옷들 전부 결제해주세요"

"네?"


"들고 가는  힘들고 전부 택배로 붙여주실 수 있죠?"

아...인생 살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대사 TOP3 중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다.
속마음이 들키면 없어 보이니 애써 태연한척하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내밀었다.

"일시불로 전부 결제해주세요."

제대로 당황한 것인지 카드를 건네받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곧이어 계산대로 가서 점장과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희미하게 '어머, 어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무슨  있었어요?"

"아...어, 그거 예쁘다. 그것도 같이 결제해달라고 하자"

"그런데, 여기 있던 옷들 전부 어디 갔어요?"


"그거 포장해 주신다고 들고 갔어"


"전부요?"

라일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째서인지 얼마  마주했던 하이네스의 고양이 눈과 같은 묘한 눈이었다.


"선생님이 무슨 돈이 있어서요?"


돈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순간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엘리제가 준 카드로 긁는 건데?'라고 대답 할 뻔했다.
분명 엘리제와 라일라는 천적이나 다름 없었는데...


"비밀..."


"그 여자죠?"


"비밀인데?"

"제가 살게요."


"너, 카드는 있어?"

"...돈 있어요"


"그래, 나도 집에 돈 있어."


엘리제가 신분증을 만들어준다 했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죽어도  만들던 그녀였기에 카드가 있을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집에 라일라가 가지고 있는 금괴만 수십 개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집에 있는 것이지 지금 당장 그녀는 땡전  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사준 거라 생각해."


"......"

엘리제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그녀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싼 것이었다.
지금 옷을 사는  사용한 액수가 얼마 전 죽은 것에 대한 정신적인 피해 보상의 반의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사용하는 돈은 전부 내 돈이나 다름없다.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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