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LEVEL 4 (9) 안 (51/87)



〈 51화 〉LEVEL 4 (9)

동생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같이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자 어머니가 인터넷 선을 뽑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동생은 늘 어머니만 보면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출했었는데.

부우

지금  그 모양이다.
아니, 그때 동생이 내밀고 있던 입술보다도 불만이 많다는 듯 그녀는 붕어를 연상케  만큼 입술을 내밀어 나에게 시위를 표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커피나 마셔"

그녀는 내 말에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스틱으로 휙휙 저어 보였다.
대답도 하지 않은 모습을 보니 시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메리카노 별로 안 좋아해? 다른 거로 바꿔줄까?"


"...이것도 그 여자 돈으로  거잖아요"


"내가 사주는 거라니까? 내 말 못 믿어?"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여자에게 받아야 할 정신적인 피해 보상은 천문학적인 액수라 여기고 있으니.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은 전부  것이다.


"선생님이 돈이 어딨어요. 집도 그 여자 거잖아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만,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처럼 아프다.


"아~ 그러니까. 내가 방금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건 아니지만..."


"아, 내가 잘못한 거였네.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하니 내 말이 전부 거짓말처럼 들렸나 보다. 구라쟁이 선생님이라 미안해"

"아,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녀가 양손을 내밀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오바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까 옷가게에서부터 백화점  커피숍에 들어오기까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시위를 하는 그녀를 교육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면, 사과로는 부족한 거야? 무릎이라도 꿇을까? 매일같이 거짓말만 하는 선생님이라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서 머리라도 박아야 하는 거야?"

"아니에요! 그런  아니에요! 일어나지 마세요!"

"아니야. 아직도 믿는다는 말도 안 하고, 커피에 입도 안 대는 걸 보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내가 나가 죽든가 해야지"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잽싸게 내 손을 붙잡았다.


"...믿을게요...아니, 믿어요. 선생님이 어떤 말씀 하시든 믿어요. 그러니까...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눈치를 주자 그녀는 나 보라는 듯이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 소리를 내며 마셔 보였다.
아, 이제야 만족스럽다.

"선생님은 저를 놀리실 때만 즐거워 보이셔요"


"사실 놀리는 재미가 있긴 해"

"......"


아주 대놓고 입술을 쭉 내밀어 보인다.
인형과도 같은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 그것조차도 예뻐 보이긴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뇨...선생님이 무엇을 하시든 좋아요."


참, 일관성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아마 당장 그녀의 머리에 위에 고의로 커피를 쏟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긍정해 주는 여자.

이런 여자가 여자친구라고 한다면 무척이나 편할  같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매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애매모호하다.
그녀와 나 사이에 벽이라도 세워진 것이라면  벽을 깨부수면 되지만...

"너는 내가 왜 널 데리고 나왔는지 안 궁금해?"

"궁금해요."

손가락만 보이는 소매로 커피를 잡고서 홀짝이던 그녀는 내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안 물어보는 거야?"

"선생님과 함께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서요."

그녀를 처음부터 만났더라면...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납치되었을 때 그녀에게 사실대로 고백했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녀의 공방에서 꽤 오랫동안 그녀와 정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100일가량 고문받는 것이 아닌, 그녀와 알콩달콩 지냈다면 나와 그녀의 관계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 나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그녀와 관계를 맺으며 아이를 배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녀의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나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긍하게 되었을 것이다.
라일라의 공방 안이라면, 하이네스가 오지 않는 한 히로인 단독으로는 절대 뚫리지 않을 테고...


그날처럼 벨라트릭스와 쿠레아가  번에 밀고 들어와 뚫었더라도 라일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지켰을 것이며 나를 지키며 그녀가 죽어가는 순간을 보면서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눈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는 아마, 그날 나를 의심한 것을 기점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궁금한 게 있어."


"얼마든 말씀해주세요"

"그 새...나는 기억을 잃기 전에 얼마나 강했어?"


"네? 아..."

그동안 쭉 궁금했지만, 그냥 대충 어느 정도라고 넘어갔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저번 쿠레아를 제압할 때 느꼈던 전능과도 같은 힘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쿠레아를 단 일격에 제압하는 힘은 소설  주인공 정도쯤 돼야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그가 무슨 재주로 그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던 것일까?

"엄청나게 강하셨어요.  같은 건 감히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셔서... 얼마나 강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선생님의 여자들이 전부 적으로 돌아선다 해도 순식간에 제압해버릴 만큼 강하셨어요. 아...! 그렇다고 제가 선생님을 배신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렇게나 강하면서 왜 기억을 지웠는데?"


"...저도  몰라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그 여자와 어디론가 떠났으니까요"

"그 여자?"


"...엘리제요. 그 여자를 제외하고 선생님이 떠나신  선생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에요."


"떠났다는 게. 여기로 왔다는 말이야?"


"아뇨. 이곳으로 온 것과는 별개로 저쪽 세계에 있을 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어요. 오랫동안... 그리고, 선생님이 이곳으로 왔다는 말은...그 여자를 통해서 들었던 거에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엘리제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왜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제를 데리고 있었던 것일까?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에 엘리제를 그때까지 안 죽이고 있었다고?
나라면... 그녀를 죽이지는 못했을 테지만, 절대로 나를 따라올 수 없게 만들어 놨을 것이다.


"왜 엘리제만? 엘리제를 좋아하기라도 했대?"

"...저도 잘 몰라요. 선생님이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정말 몰라요. 다만 알 수 있는  선생님은  그 여자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다른 사람이  때는 그저 그 여자가 늘 억지로 달라붙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선생님은 일부로 그 여자만 달라붙게끔 의도하셨었어요."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됐고, 그럼 나는 어떤 식으로 강해졌던 거야?"

이것이 본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어떻게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됐는지를 모르겠다.

두 번째 시나리오인 마족 침공 때까지만 해도 그는 별거 아닌 존재였다.
로제를 등에 업고 깝죽거리고 다니는 깡촌 기사 1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할 정도로 히로인들에 비해 그는 약했다.

그의 재능으로는 수십에서 수백 아니, 수만 번을 회귀하더라도 벨라의 재능을 뛰어넘을 수 없을  같았다.
그런데 그날 느꼈던 말도  되는 힘은...


"...그때로 돌아가시려는 건가요?"


"아니. 내가 미쳤어? 기억은 죽어도  찾을 거야. 그냥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 궁금해서"


그녀는 나의 말에 한참을 뜸을 들였다.


"왜 말을 안 해줘?"


"알려드리지 않으면 안 되나요? 히, 힘 같은 거 없어도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못미더우실지 모르지만, 저 엄청 강해요!"


마법사인 그녀가 어째서 힘이 쌔다고 말하며 한쪽 팔을 들어 알통을 보여주려 하는지는 잘모르겠다.
그리고, 헐렁한 옷이라 알통이 보일리도 없고 있을리도 없었다.

"궁금한 것뿐이야. 그냥 말해주기만 하면 돼"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입을 다시금 열어 보였다.

"그런데...선생님은 강해지실 때마다 늘 힘들어하셨어요. 절대 이길  없다고...힘들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되면,  선생님은 망가지셨고...순식간에 엄청나게 강해지셔서... 저는 그저 선생님이 미래를 보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죽음으로 다시 시간을 돌린다는 말을 듣게 된 후부터..."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회귀밖에 없던 새끼니. 불가능하다 여기는 것들은 대가리 깨지도록 죽고 또 죽었겠지.
그런데, 그것이 재능을 뛰어넘을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했다.


시간과 노력을 아무리 들이더라도 히로인들의 재능은 절대 뛰어넘을  없다.
그것은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을 짠 내가 제일  안다.


그는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


"...이건 당장에는 쓸 수 없겠네."

"당장 힘이 필요하신 거에요?"

"아니...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그러게, 이유를 물어보지 그랬어.
그녀와 굳이 밖으로 나온 이유.
나는 애초부터 그녀가 밤에 나를 덮치러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늘 라일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올 생각이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걸까?
시간때우기를 해야하니 노래방이나 갈까 싶었지만,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라일라의 표정이 점차 찌푸려지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는 의자에서 때었던 궁둥이를 다시 붙였다.


"선생님!"


"듣고 있으니까. 조용히 말해도 돼"

"지금 당장 돌아...아니...다른곳으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허둥지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일라. 혹시 주변에 느껴지는  없어?"

"...네?"

"엘리제라던지...아니면. 뱀파이라던지"


"선생님. 그게 중요한게 아니..."


"라일라. 내가 물어보잖아. 대답해야지."

"...그 여자는 공방 안이 아니라면 제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아요. 그리고 뱀파이어는 이 주변에 있긴 하지만..."


얼마 전 나는  멋대로 하기로 했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기는 하지만 나의 자유는 무척이나 값비싸다.
전생...아니, 기억을 잃기  나라라도 팔아먹었던 것인지 가지고 있는 죄가 너무 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 너무나도 빡빡하다.

"선생님. 그 여자는  돼요."

"응? 샤를 말하는 거야?"


"그 여자는..."

"알아. 그러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설정한 캐릭터인데,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거기다 그녀의 왕국에서 생활하며 그녀와 배를 맞춘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그녀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나를 대리고 있던 것 정도는 아주 잘 알고있다.

그냥, 생존만을 위해 산다고 하면 개과천선한 샤를만큼 좋은 히로인도 없을테지만...지금은 아니다.

나는 나약하고 머리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유를 위해 조금 많이 나빠질 필요가 있다.

"그냥 한번 보자고 전해줘"

 말에 라일라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입을 열어 보였지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자 애써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선생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면 저는 따를게요."


아직 결과를 마주하지 않았지만, 벌써  고지식한 여자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으로 현실에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지만, 내가 목표했던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을 때. 내가 얼마나 죽어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오늘을 몇 번이나 다시 보게 될까.

내가 조금만 똑똑했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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