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LEVEL 4 (10) (52/87)



〈 52화 〉LEVEL 4 (10)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를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던 삶의 마침표를 찍게 해달라 그에게 간곡히 부탁하려 했다.
되먹지 못한 기사 주제에 약속까지 어겨서는 안 되었기에 그에게 선처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눈물을 마주하고 나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게 되었다.


[역시 누나는 오랜만에 봐도 예쁘네]

...그녀가 기억하는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그는 밝게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를 다시 만났던 날. 전쟁터에서 그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장난기를 잔뜩 머금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앞에서 죽을 수도 없었고, 죽고 싶다는 말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 듯. 그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
툭 건들면 눈물을 쏟아버릴 나약한 그를 내버려 두고 죽고 싶지 않아졌다.


[울어도 하기 싫은 거로 생각할게.]


그래서, 그녀는 도망쳤다.
그를 두고 어디론가 떠날 수도 죽을 수도 없었기에...
이것이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탈출구였다.

[우리 누나 여섯 번이야. 내가 한번 쌀 때마다 카운트하는 거 잊지 말고]


망가지는 것이 두렵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화들짝 놀라며,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녀가 허용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전부 무너져버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 세뇌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형과도 같던 어머니.
아이를 낳는다는 쓸모가 없어지자. 그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걸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구역질이 나왔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버려지는 순간까지 할  있는 것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나약한 여자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녀는 감정에 파묻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줬던 어머니의 결말을 알기에 더욱 단련했다.
나약한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에 더욱...

하지만, 아무리 단련하고 또 단련해도 잊히지 않는다.


[누나. 같이 갈래?]

그녀는 분명 그날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온 수많은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기에 그의 손을 저버렸다.

그가 고통받고 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의 손을 잡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잡지 않았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니. 그녀는 선택했다.

그리고...후회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후회였다.
아니, 이해를 할  있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감정만을 앞세운 선택의 말로는 파멸이었으니.
그것을 후회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주 보이면 좋은 거 아니야? 우리 누나.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나약하고 늘 타인에게 기대려 했던 그 나약한 아이를 떠올리게 하던 남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길에서 객사할 거라 예상했던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어째서인지 용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투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이 바보 같고 동네 양아치와 다를  없었지만. 그의 행동들은 전부 강인하고 굳세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그의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것들을 모조리 해내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 있던 당신의 뒤에 서 있는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후회라는 감정을 지울 필요가 없어졌다.
왕국의 검인 그녀가 용사인 그를 따라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으니.


조금 멀리 돌아온 것뿐.
원래 이렇게 되리라 생각하며, 마음에 지고 있던 후회라는 감정을 도려내지 않아도 된다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는 벨라트릭스 카르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기사로써 그에게  어떠할 필요도 되지 못했다.

위험한 장소에 그는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으며, 위험한 임무에 그녀를 완전히 배제했다.
그가 필요한 것은 여자였지. 기사가 아니었으며 그것을 그녀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진정 그의 필요가 되고 싶었더라면, 그의 여자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됐을 테지만...
평생을 기사로 살아왔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아양을 떤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역질이 난다.


"어서 와"

그가 다른 여자들을 안는 것과 성녀를 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에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던 성녀를 안았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 앞에 나서서 보호까지 했다.


"누나"

지금의 그는 성녀라는 여자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눈앞에 서서 성녀를 보호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파도와 같이 몰려드는 감정에 수도 없이 합리적인 이유를 대었다.

그는  여자를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를 안는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만큼은 안된다.

수도 없이 몰려오는 감정에 이성적인 이유를 들먹이지만...


...몰려오는 감정은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질투.

그가 결정한 일이었다.
왜 주군인 그의 결정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는 것일까?
그저 주군이 타인을 용서한 것일 뿐인데 어째서 그녀는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이 질투임을 알 것이다.


그의 뒤에 있는 여자의 몸에서는 그의 정을 몸으로 받아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음란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분명,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의 장난에 휘둘려버렸다.

그에게서 축객령이 떨어져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성녀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지를 물었다.

성녀가 그를 수도없이 죽일  방관했던 주제에 어떻게 단죄라는 말을 입에 담을까.


그래서, 죽으려 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기사로써 절대 가져서는  될 감정에 목을 긋고 자살하려 했다.

"죽지 마"

...또다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와도 같은 말에 그녀는 화가 난 나머지 화를 표출해버렸다.
주군에게 감정을 토할 수는 있지만.
그것 감정의 근원이 너무나도 추잡한 것이기에 방을 나와서도 자신이 했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검을 들고 목을 겨누었다.
하지만, 방을 나서기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녀는 목을 겨누던 검을 애써 내렸다.


죽지마.
정말 저주와도 같은 말이다.

이제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었고, 드디어 그의 쓸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슬픈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아픈 것일까.


후회.

그가 자신을 평생토록 사랑하지 않는 기사가 되어 그의 옆에 있는 것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 그의 사랑만을 받는 것이 더욱더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잘못된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에 되돌려야 한다.

그녀의 입에는 짖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가지런한 이가 선명하게 보일정도로 환한 웃음과도 같은 미소였다.


***



"어머머"

그를 깨우기 위해 방문을 열던 엘리제는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놀라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든 치우려고 애를 쓴 티를 내었지만, 늘 그의 방을 청소하던 그녀였기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음란한 여자의 냄새와...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년...지렸어"

벨라트릭스와 관계를 했을 때 그것의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화풀이하기는 했지만, 라일라와 관계를  후 남겨진 흔적을 보자 엘리제는 진심으로 화가  수밖에 없었다.
그의 냄새가 배어있어야  방이 온통 라일라의 소변 냄새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라일라가 며칠 안에 무슨 짓을 벌일 거라는 것을 예상했던 엘리제였지만, 그것이 오늘. 그것도 그의 방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더욱 열이 받은 것이리라.

"어디 가십니까?"


"비켜."

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엘리제였지만, 마법사의 공방 안이다 보니 라일라가 무슨 짓을 하는지 하나도 알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벨라트릭스 때와는 다르게 그의 정이라 여겨지는 냄새가 하나도 안 났던 것이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엘리제에게 라일라는 늘 골칫덩어리였다.
그가 그녀에게 죄책감이라는 독특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넘어가더라도 라일라는 아무리 걷어내려 해도 걷어낼 수 없는 인형이었다.
그저 그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라일라를 그에게서 떨어트려 놓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방법이 있다면, 죽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상태로 만들거나.
두 개 다 엘리제가 할 수 없는...아니, 하기 싫은 것들이기에 내버려 둔 것이었다.

애초부터 인형이었던 라일라는 엘리제의 수비 범위가 아니었기에 상극이라면 상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실로 나와 현관문으로 가려던 엘리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디아나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밖에 나갔다 올 테니. 주인님 방 치워놓으세요."

"......"

"듣지 못했나 보군요. 치워놓으세요."

"당신이 하세요. 남에게 떠맡기지 마시고"


순간 엘리제는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무엇인가 꼬였다.
엘리제는 그가 기억을 되찾는 것과는 별개로 디아나를 절대 용서해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당신은 겨우 그 정도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자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짓을 생각  하고 뻔뻔하셔라"

"......"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엘리제를 향해 작은 주인님이라며 엉덩이를 흔들던 여자가 눈을 맞추고 있다.


마음에  든다.
그가 보기 전에 죽여버렸어야 했다.
망가트렸다고 생각해 이용할 생각만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가 보기 전에 치워버렸어야 했다.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이렇게 말하는데도 주제넘게 눈을 맞추고 계시네요. 저를 원망하시는 건가요? 인간 이하가 되어 평생 벌을 받고 싶다고 말했던 것은 당신이었어요."

"......"

"그날을 기억 못 하시는 주인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당신의 편의에만 맞춰진 가식적인 이야기를 듣고서 용서해주시겠다 말씀하시던가요?"


디아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당당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충 디아나가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날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가 틈틈이 기억을 떠올리며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성녀에게 잡혀갔을 때 따라가 보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실수가 너무 쌓였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그를 찾기 위해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향하던 순간. 엘리제는 누군가가 현관문 앞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도..."

"죽일까. 말까?"

"장난치지 말고 비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엘리제는 그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는 아직 무엇인가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건 약속했던 것과 다르다.


"너랑 저년을 죽이면 그 사람이 좋아할까? 아니면 싫어할까?"


"...장난 적당히 하고 나와."

벨라트릭스.
상황에 맞지 않은 밝은 미소를 짓고있는 벨라트릭스의 모습에 엘리제는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는 벨라트릭스를 완전히 망가트리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그가 먼저 약속을 깬 것이다.
그러니, 그녀 또한 약속을 깨는 것은 그저 정당방위이다.


"하지 마세요."

"......"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하세요"


엘리제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성녀는 그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회귀한 것을 느낄  있었다.


엘리제가 고개를 돌려 성녀를 마주하자 움찔하는 모습을 보인다.


"몇 번째인가요"


"세 번...아니,  모르겠네요. 감정이 너무 한 번에 들어와서..."

세 번이나 그가 죽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내 엘리제는 그와의 약속을 깨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아직 죽음에 민감할 때였고, 그 순간을 보지 못한  순식간에 지나쳐 버리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커다란 손해였다.

...그는 회귀 시간을 조절할수 있게  것일까?
갖은 의문에 휩쌓였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엘리제는 가지고 있던 의문을 접어야만 했다.


"둘이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도 끼워주지?"

엘리제는 검을 꺼내 들고 있는 벨라트릭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는다.
그의 일에 구경만하는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내가 졌어. 죽이지만 말아줘"

하지만, 그녀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건 그녀의 주인님이 망가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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