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LEVEL 4 (11)
"라일라. 확인해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라일라의 말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죽으셨던거죠?"
라일라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목에 단검을 들고서 죽는시늉만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몇 번이고 죽었음이 틀림없었다.
'선생님...'
라일라는 그를 부르며 이제 그만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음에도 그의 굳은 눈을 마주하게 되면 내뱉을 수 없었다.
분명 그가 그녀의 앞에 있음에도 그녀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넣어 죽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디아나 상태 확인해줘"
마법사의 공방은 아무나 쉽게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부쉈다 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아직 부수지도 않은 공방을 훔쳐보거나 공방 안 누군가에게 말을 전달하는 것은 라일라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아뇨. 아직이에요."
"아직?"
"엘리제. 그 여자는 위협이 안 되는 여자지만 디아나는...적으로 돌아섰을 때 위협적인 여자다 보니, 아마 얼마 안있으면 죽게 될 거에요"
그는 라일라의 말에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내 '아마 안 죽일 거야'라고 말해 보였다.
아마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로 벨라트릭스를 자극하기 위해 디아나와 껴안고 있었고 벨라트릭스에게서 디아나를 감쌌다.
그래서, 디아나를 쉽게 죽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둘이서만 자꾸 이야기하면 나 삐진다?"
"미안. 잠깐, 볼일이 있어서"
샤를과 만나던 도중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순간 정신을 못 차리고 라일라를 찾았지만, 디아나가 엘리제를 말려준 덕분에 겨우 세 번의 회귀 만에 회귀를 멈출 수 있었다.
시작부터 일이 꼬여 처음부터 다시 판을 짜야 하나 고민했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샤를을 마주 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자기가 날 불렀잖아.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빨리 왔지. 마침, 한가하던 참이기도 했고. 무슨 일로 날 찾은 거야? 나 기대해도 돼?"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던 샤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뱀파이어.
애초에 그녀는 이미 서울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를 노리고 이곳에 올라와 있던 것이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꽤 위협적인 나머지 다른 일을 먼저 진행 중이었다.
"도와줘"
"...응?"
그의 말에 그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지금 자기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말한 거 맞지? 아니 왜...아...우리 자기. 기억을 지웠구나?"
그는 자신이 실언을 한 것일까 싶어 회귀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벌써 세 번이나 죽었으니 거기에 플러스 1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운 거야?"
"...도와줄거야 말 거야. 그거나 말해"
"흐음"
샤를은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귀로 인해 잊혀버린 과거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버리면서까지 그에게 원망받는 것을 피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대가는? 나 무보수로 일하는 거 싫어하는데"
붉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아 보이며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그녀를 대하는 방식에 실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세를 고쳤다.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다리를 꼬아 보인다.
그 누구보다 여왕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여자를 앞에 두고 오만한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한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나는 지금 너한테 부탁하는 게 아니야. 도우라고 명령한 거지"
"자기랑 나랑 만난 적이 있나 보네. 그것도 최근에"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잖아. 도와줄 건지 말 건지. 그것만 말해"
그녀의 피보다도 붉은 입술에 짖은 미소가 떠올랐다.
곧이어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자기야. 내가 아무리 자기의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알량한 마법사 하나 믿고 이렇게 설치는 건 너무 바보 같은 행동 아닐까? 우리 자기 약해진 만큼 귀여운 오만함도 시간과 장소를 가려야 돼"
그의 목에 겨누어진 얇은 검날.
프리시아가 자주 사용하던 레이피어임이 분명했다.
라일라는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뱀파이어를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이내 이곳에 오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알량한 마법사라니.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너. 그렇지 않아도 너랑 한번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싶긴 했는데, 이렇게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샤를의 관점에서 라일라는 이 수도를 점령하는 데 있어 꽤 큰 걸림돌이었다.
"집에 들어온 쥐새끼들을 잡는 건 집주인이 해야 할 일이죠. 본거지까지 찾아가 박멸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쥐새끼...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니? 뭘 믿고 이렇게 까불어?"
공방 안 혹은 그 주변에만 있어도, 샤를이 전력을 쏟아내도 비등비등한 전력을 내겠지만 이곳에서의 전투는 무조건 라일라의 패배로 이어졌기에 샤를로서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까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변에 그 여기사라도 있는 것일까?
"둘 다 그만해. 프리시아도 칼 치워. 다짜고짜 위협한다고 쫄 거였으면, 애초에 널 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기를 상처입히지는 못해도 저 여자는 죽일 수 있어."
"그럼 해보든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샤를은 그에게 장난을 치려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없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장난을 치면, 장난으로 받아주던 옛날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아마, 한 번이라도 저 마법사를 죽이면 그는 분노할 것이다.
샤를이 손짓을 해 보이자 프리시아는 검을 겨누고 뒤로 물러났다.
"나 무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어"
"자기 나랑 잤었어?"
그녀가 그것을 왜 궁금해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왠지 대답해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응? 왜 대답이 없어?"
샤를이 기세 좋게 그를 덮치던 모습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해달라 울부짖던 모습이 떠올라 자랑스럽게 샤를의 앞에서 떠들고 싶긴 했다.
하지만, 다소곳하게 옆에 앉아 그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날의 일을 어떻게든 함구하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 어서 말씀해주셔야죠. 저분께서 물어보시잖아요."
"...기억 안 나"
"아니야. 대답 안 해줘도 돼. 내가 뭐부터 하면 될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에 샤를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윙크해 보였고, 곧이어 아까부터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라일라의 손아귀 힘이 조금 강해졌다.
"선생님? 대답하셔야죠. 궁금하시다잖아요"
"샤를이 괜찮다고 한 말 안 들려? ...라일라. 손 아프니까 놔주지 않을래?"
"저만...받지 못하는 거군요. 저만 나쁜 여자네요? 그렇죠?"
벨라트릭스도, 디아나도, 샤를도 안아주었으면서...
어젯밤 그녀의 나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만 했던 그가 다른 여자들은 전부 안아주었다는 것에 해명을 요구했다.
"그만해. 장난할 기분 아니야"
"장난...아니에요. 제가 선생님에게 장난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잖아요."
"기억 안 난다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만...맨날 나만..."
"계속 칭얼댈 거면, 손 놔"
"......"
데이트가 끝난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한 라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오기 전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었다.
죽어도 손을 놓지 않겠다며 샤를과 이야기를 하는 내내 꼬옥 손을 잡고 있던 라일라였기에 손을 놓으라는 그의 말은 꽤 효과가 있었다.
눈에는 불만이 한가득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라일라의 모습.
"샤를"
"눈꼴 시린 데, 진짜 그 여자 죽여버리면 안 돼?"
"벨라트릭스를 제압할 거야. 협조해"
"...그 여자라면..."
샤를이 말을 전부 내뱉기 전.
누군가가 둘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며 이야기 끼어들었다.
검은색 부츠가 눈에 띈다.
"인간 최강. 검제 벨라트릭스 카르딘"
"이야기 중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사라"
"거, 겨우 이런 거로 민감도 하시네. 어찌됬든 부군. 방금, 그 검제를 말하는 거 맞는가?"
자신의 목숨줄인 여왕을 눈앞에 두고서도 이런 무례를 벌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인지 샤를은 여유롭게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들어 그것을 입에 대어 보였다.
"크으... 그 여자랑 일대일로 한번 맞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
사라의 말을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일대일은 무조건 져"
"부군. 오랜만에 봤다고, 지금 무시하는 거요?"
"사라를 포함해 최소 에아, 프리시아. 거기다 라일라가 포함되어야 해볼 만 해"
방금 그가 호명한 4인팟은 되야. 아무 피해없이 벨라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제약이 없어진 벨라트릭스는 그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니, 과거의 그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지.
"부군. 나를 너무 무시..."
"그래서, 언제 그 기사를 납치하면 돼?"
"라일라가 어느 정도 준비..."
샤를의 질문에 대답하던 중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라일라와 마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당장"
"지금?"
"선생님. 아무 준비 없이 나가게 되면 저는 도움이 되지 못 할 거에요"
그가 마법사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법사에 대한 설정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소설을 쓸 적 마법이나 기사들의 무력에 대해 하나하나 독자적인 설정을 짜냈다며, 자화자찬했던 그였으니.
공방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마법사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쳐들어...아니, 그곳에서 나오게 해야 해"
라일라는 또다시 그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회귀했다.
또다시 그가 눈앞에서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방금 그는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그녀는 그것을 절대 모른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분명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했을 것이다.
늘 완벽에 가까운 선택만을 했던 그였지만, 사실 그의 한번의 선택은 수십번의 실패 이후 성공이 결정난 선택이었다.
실패했던 과거는 전부 없었던 일이 된다.
라일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회귀라는 것도 이곳에와서 처음 안 그녀였다.
그녀의 선생님은 늘 올바르고 완벽한 남자였으니까.
"선생님..."
그는 그저 아까의 오만한 표정을 애써 유지하고 있을 뿐 라일라의 부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척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벨라트릭스는 소파 허리를 기대어 양팔을 올린 채 혼잣말을 했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왜 안 오는 거지? 이미 저녁이 다됐는데..."
그는 분명히 이곳에 와야만 했다.
이곳에 벌어진 상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이 상황을 보고 도망칠 남자가 아니었기에 분명 그는 돌아와 야만 했다.
그래서 일을 벌인 것이다.
마법사의 공방에서 죽어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자신의 발로 밖으로 나갔고, 거기다 인질까지 자신의 손에 남아있는 이 황금과도 같은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죽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어떻게 생각해?"
벨라트릭스가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바라본다.
벽에 달라붙어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 아니, 이제는 피로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 색이 붉은색으로 변해버린 디아나.
배에 꽂힌 검에 의해 바닥을 피로 적시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가느다란 숨을 내뱉으며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있잖아. 나는 네가 정말 싫어"
"...다행이네요...저도 당신이 싫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생겨났거든."
소파에 고개를 젖히고서 디아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마냥 바라본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그게 제 탓이라...생각하시는건가요?"
그날이 시작이었다.
[누나. 같이 갈래?]
그날 그의 손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그녀가 생겨났다.
정확하게 시작을 따지자면, 동생이 죽었던 날이겠지만.
그를 떠나보냈던 그날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그녀라는 인격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후회 덩어리.
그가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눈을 뜨자마자 그를 보고 싶고 눈을 감을 때 그를 보며 감고 싶다.
그의 눈이 평생 나만을 향하게 하고 싶다.
그의 팔이 나만을 만지게 하고 싶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다.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의 비명을 듣고 싶다.
그를 가지고 싶다.
그를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마음대로 하고 싶다.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내었다.
무엇을?
"그래 네 탓이 아니긴 하지."
그녀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벽에 박혀있는 디아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너만 없었으면 나와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잖아"
디아나의 배를 관통해 벽에 박혀있는 검자루에 손을 올려 그것을 옆으로 돌린다.
소리 없는 비명.
디아나는 금방 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치료해야만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곳에 디아나가 있기에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 성녀를 마주하면 할수록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분노에 휩싸여 죽여버리는 것 또한 이 여자에게 너무나도 관대한 처사일 것이다.
검을 뽑아내자 그곳에서 피가 분수와 같이 쏟아져 그녀의 흰색의 티를 적셨다.
"치료해"
"......"
"너도 이렇게 죽으면 안된다는 거 잘 알잖아. 그러니까 치료해"
"저는 당신에게...벌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요"
디아나의 말에 벨라트릭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없어?"
"그에게 받아야 할..."
"없어?없어?지금 네 입으로 없다고 말한 거야? 벌 받을 이유가 왜 없지?"
"......"
"미친 거지? 미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말이 입에서 나올 수는 없는 거잖아"
광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너 때문에 그 사람과 이렇게 됐는데. 없어?"
"......"
"너만 없었으면, 지금쯤 그 사람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거야."
디아나는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벨라트릭스의 발길질에 바닥을 굴렀다.
"아이도 낳고 있었을 테고. 그 사람이 기억을 지우는 병신같은 짓도 하지 않았을 거야"
"...아뇨. 당신은 똑같았을 거에요. 제가 아니었더라도, 당신은 그를...악..."
"왜, 계속 지껄여야지"
검에 찔려 등에서부터 배를 관통했기에 다음 말을 내뱉을 수 없게 되었음에도 벨라트릭스는 디아나를 재촉했다.
"...결국...아윽...당신은 똑같은... 선택을 하셨을 거에요."
박혀있는 검을 빼내어 두어 번 몸에 구멍을 내었지만, 디아나는 자신이 할 말을 전부 내뱉는데 성공해 보였다.
"잘 버티네"
"당신은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이에요. 몇 번을 다시 해도 멍청하게 똑같은 짓을 반복할 거에요."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여줄게"
"회귀라는 전능한 힘을 가진 그가 사랑했던 당신을 기어코 버린 것을 보면 모르시겠나요? 당신은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에요. 그렇게나 강하고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주제에"
살리려고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디아나가 살아있어야 그가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살려놓으려 애를 썼다.
"그때 당신은 분명 전부 가졌었어요. 전부 허상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만큼은 진짜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신 손으로 전부 포기했던 거에요. 지금처럼"
이 여자가 없어도 전부 파괴하면, 그가 알아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라트릭스는 검을 바로 잡았다.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반박할 수 없기에 더욱 눈앞에 있는 여자를 죽여 야만 했다.
그렇게 검을 내지르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엘리제의 목소리에 그것을 멈추었다.
"죽이면, 안돼"
"...엘리제. 너 먼저 죽여달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아마, 성녀를 죽이면 주인님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거야"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의 말이었다.
벨라트릭스는 엘리제가 무슨 의도로 말하려 하는지 궁금한 나머지 몸을 돌렸다.
"왜, 그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어?"
엘리제가 의자에 몸을 묶인 채 눈이 가려져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왕국의 유물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니, 주인님을 만나고 싶어도 이제 못 만나."
엘리제는 그 말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샤를. 그 박쥐 같은 여자가 주인님과 같이 있어."
귀찮게 되었다.
그 소유욕이 넘치는 여자가 그를 손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주인님이 지금 당장 만나러 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전해달래"
누가 봐도 그가 판 함정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샤를과 라일라가 그에게 붙어있는 이상 그가 판 함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말 엘리제가 말한 대로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