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LEVEL 4 (12) (54/87)



〈 54화 〉LEVEL 4 (12)

샤를.

벨라트릭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샤를을 마주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샤를이라는 여자의 이름은 귀에 딱지가 붙도록 자주 들었다.


홀로 제국을 몰락시킨 마족.
왕국의 3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제국을 뱀파이어의 왕국으로 만들었던 여자.

제국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망국의 길에 접어들긴 했지만, 그런데도 마족 전쟁 당시 제국은 강대했다.
그런 제국을 홀로 멸망시킨 여자가 샤를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녀 혼자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샤를 개인의 무력은 그리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녀의 힘은 오롯이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에 있다.

뱀파이어.
그녀는 일평생 농사를 짓던 농부가 기사와 비등한 힘을 발휘하게 했고, 그들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자로 만들었다.
전쟁은커녕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하지 못하던 노인은 젊은이가 되어 칼을 들게 했고, 그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미들에게 강제로 충성을 받아내었다.

그녀의 존재는 마족과의 전쟁의 문제가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왕국의 필부들은 짐을 싸 제국을 향하려 했고, 귀족들은 너도나도 할  없이 금은보화들을 모아 샤를에게 무릎을 꿇었다.


불사.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식량만 온전히 공급된다면, 천년이든 만년이든 살아갈 수 있는 인외의 종족들이었다.


그 여자는 이곳에서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샤를은 부산을 시작으로 한 달 만에 그가 살고 있던 국가를 점령했다.
TV나 인터넷과 같은 언론들을 즐겨 보는건 아니지만, 샤를이 부산을 점령한  얼마 지나지 않아 급속도로 국가 안에 뱀파이어 왕국이 생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체 어느 나라 통치자가 자신들의 나라가 점령당했음에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국가의 땅을 인간도 아닌 이들에게 내어주겠는가.


샤를이 청와대를 들어갔다 나온 순간 이미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그녀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리라.


...그곳이나 이곳이나 똑같다.
썩어빠진 새끼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국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쳤으며, 약해빠진 새끼들은 홀로 살아남는 것조차 못해 남에게 기대어 국가와 함께 죽어간다.


애초부터 전부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지켜왔던 왕국이 멸망한 것처럼 이곳 또한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정말 왔네?"

엘리제가 말한 장소에 도착하자 반기는 뱀파이어의 모습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그를 찾을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검제. 나랑 한판 붙자"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의 인상만 봐도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고방식 자체가 특이한 인간.
...저 여자가 인간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호기에 못 이겨 전쟁터 한복판에서 일기토를 신청하는 머저리 같은 족속들을 자주 보았기에 벨라트릭스는 곧장 검을 꺼 내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할 때부터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지만...


그는 수도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그녀를 유인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한참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왔더라도 방향만 안다면 얼마든지 수도를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뭐하냐?"

검사는 마나를 이용해 마법사와 같은 거대한 묘기를 부리지 못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벨라트릭스의 검이 뱀파이어가 아닌 방금 영등포에서부터 이곳까지 날아왔던 장소를 향해 겨눈다.

검이 닿는 곳의 마나만을 제어 할 수있는 검사의 영역.
그녀가 들고있는 왕가의 유물은 그 영역을 수십 배 수백 배로 늘려 마법사와 같은 이능을 부리게 만들어준다.

그녀의 검에서부터 타오르던 푸른색의 불꽃이 빠른 게 거대해지고,  크기가 주변의 산을 넘어섰을 때.
벨라트릭스는 검의 모양을 띤 이루 말할  없이 거대한 푸른색 불꽃을 들어 올려 내려쳤다.


푸른색의 불꽃이 칼날과도 같은 모양으로 바닥이 가르며 빠르게 나아갔다.


더이상 그것을 눈으로 쫓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몸을 돌려 사라를 마주 보았다.

"지금 당장 안 나오면,  발  날린다. 빨리 나와"


눈앞의 뱀파이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한  남자를 향해 말한 것이었다.

"...존나 쌔네"

기운을 모으는 순간부터 압도당해 접근하는 것도 하지 못했다.
사라는 자신이 기세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억지로라도 벨라트릭스와 일대일로 맞붙으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으며 자신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일대일을 고집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겨우 인간 주제에  정도로 강할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으드득... 에아. 나와"


에아를 부르며, 대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땅을 박찼고 순식간에 벨라트릭스와 거리를 좁힌  대검을 휘둘렀다.
총 2m가 넘는 대검을 횡으로 긋자 그녀는 여유롭게 검을 들어서 막아내었다.

"몇  정도는 죽어야 나온다. 이거지?"


벨라트릭스가 말을 잇던 중 등 뒤에서 에아가 나타났지만, 알고 있었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려 에아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뒤 바닥에 내리꽂는다.
방금 전 사라의 대검과 벨라트릭스의 검이 부딪힐 때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지만, 에아가 바닥에 꽂힐 때에는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고 지진이  듯 땅이 흔들렸다.


"아...파......."

얼굴을 바닥에 갈아버려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에아의 머리채를 잡고서 들어 올렸다.

"뱀파이어는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고 했었나? 피를 전부 태워버려..."

"그  놓으세요..."

벨라트릭스가 말을 하던 중 에아의 그림자에서부터 나타난 레이피어가 목을 향해 찔러왔고, 곧장 입을 닫고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해내었다.
뱀파이어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림자를 통해 나타날 줄은 몰라 순간 당황해 에아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했고, 곧이어 발목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  있었다.

얼음 마법.
그 여자가 자주 쓰던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의 귀에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쾅.

"이제야 제대로 먹혔네"


분명, 아까와 같이 대검을 막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대검에 들어가 있던 힘을 전부 받아내지 못했던 것인지 폭음과 함께 벨라가 땅에 뒹굴었다.



***

버겁다.
방금전 유효타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대일뿐 그 이후로 이어지는 전투는 역시나 아까와 같이 일방적이였다.
뱀파이어의 특성을 활용할 때 만큼은 빈틈을 보여주긴 했지만, 마족과의 전쟁으로 전장을 굴렀던 벨라트릭스를 요령만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뱀파이어 셋.
그것도 샤를의 측근이라 불리는 세 명을 상대로 여유롭게 싸우고 있는 벨라트릭스를 바라보며 라일라는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딴 여자가 죽는 것에 왜 그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토록 증오했던 여자를 이제 와서...


"사라가 곧 베일 거야. 그 전에 보조해줘"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일라는 머릿속에 잡념을 지우며 영창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선택하신 일이다.
그녀에게 있어 그 여자가 저지른 죄악보다 선생님의 소망을 우선시 하는 게 맞았기에 떠오르는 불만을 애써 잠재운다.

최대한 조그맣게 마법을 사용할 공간을 구현한 뒤 총을 쏘듯 발사해 사라를 베려고 하는 벨라트릭스의 진로를 막았다.

"에아와 프리시아 사이로 위협용으로 몇  갈겨. 쏜 다음 이동하고"


그가 가진 회귀의 힘은 경험하지 못했던 패배를 홀로 기억해 승리로 만든다.

"샤를이  개입  거야. 샤를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아까 말했던 곳으로 이동해줘"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다.
누군가가 희생한다는 전제를 깔고 전투를 하게 되면, 얼마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라일라가 숨어있지 않고 전면에 나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마음껏 사용한다면, 얼마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벨라트릭스 입장에서 죽이기 까다로운 뱀파이어와 무방비한 마법사. 둘 중 누구를 먼저 죽일 거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마법사를 고를 것이고 그렇게 라일라는 죽게  것이다.


"왜 멈춘 거야?"


"선생님. 차라리 제가..."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선생님."

실시간으로 그가 죽고 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죽지 않을게요. 선생님이 걱정하지 않게  엄청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선생님 이제 그만..."


"닥치고  말대로 해"

그의 말대로 하면 얼마든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기억을 잃기 전처럼. 그는 계속해서 죽음을 경험할 것이고, 나중에는 그 죽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릴 것이다.

또다시 자신을 떠나고 말 것이다.

"아까처럼 커다란 거  테니. 그전에 개입해서 못 쏘게 만들어"


그의 말에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해줘. 부탁할게"


"...알겠어요. 선생님"

방금까지 흥분했던 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가 방금 죽었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의지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서울을 향한 공격은 너무나도 빨라 반응하지 못했지만, 미리 알고 있다면 막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개입하게 된다면 벨라트릭스가 이곳의 위치를 알게  것이 분명하지만, 전장에서 그의 말은 늘 옳았기에 라일라는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증오하던 마법을 배웠다.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원하는 일이기에...
나약한 자신에게 화가난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는 훨씬 덜 죽었을 것이다.
용의 심장을 가지고도 공방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싫다.

눈앞에 거대한 검염이 보이자 라일라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마법사가 검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압도적인 실력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깝지만, 벨라트릭스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유물의 힘을 빌린 마법과도 같은 것이기에 얼마든 실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

판테아 대륙의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존재하는 마나를 장악하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취급한다.
자신의 영역 속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날  없는 기적을 행사하는 것이 마법사다.


그래서 공방 밖 마법사끼리의 전투는 소리 없이 진행된다.
서로가 장악한 공간만을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만을 해야 되니 그저 심장에 가두어놓은 일부의 마나와 정신력의 차이로 승패를 판가름한다.

그저, 검의 힘을 빌려 마법사를 흉내 내고 있는 벨라트릭스를 제지하는 것은 라일라에게 있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감았던 눈을 뜨자 저 멀리 푸른 빛을 내던 기둥이 사라진 것이 보였고,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려던 라일라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몸을 멈추었다.


곧장, 몸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얼음 기둥을 생성해 보였지만, 유리창이 깨지듯 얼음들이 박살이 나는 모습과 함께 벨라트릭스의 검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귀찮아 죽는 줄 알았잖아."


"아..."

"아직 안 죽었어? 하긴, 드래곤의 심장이 박혀있다고 했었나. 너무 대충 찔렀네"

검이 심장을 관통했음에도 살아있는 라일라의 모습에 벨라트릭스는 심장에 박혀있던 검을 빠르게 빼내어 이번에는 제대로 죽이기 위해 라일라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 했다.


옆구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격통과 함께 벨라트릭스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아까 첫 싸움 때와 같이 바닥에 뒹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퉤...이번에는 또 어떤 년이야."

흙이 묻은 얼굴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켜 상대를 바라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린아이?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려주듯 창백한 피부와 특유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이긴 했지만, 너무나도 작은 키와 아기자기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이제 나설 전력이 다 떨어진 것일까?

자신의 몸의 절반이나 되는 구 모양 가시가 달린 플레일을 들고서 벨라트릭스를 올려다보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너무나도 같잖아 헛웃음이 나올뻔했지만, 이어지는 아이의 목소리에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나다 이년아."

소녀는 인생 살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대사 TOP3   하나를 해결했다며 무척이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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