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LEVEL 4 (13) (55/87)



〈 55화 〉LEVEL 4 (13)

나는 왜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수십 번이고 죽었다.
지금까지 쭉 죽었던 순간을 하나하나 세어왔는데, 이제는 죽었던 숫자를 셀  없게 되어버렸다.


무엇인가 해보겠다며, 샤를을 만나러 가던 중 나는 죽었다.

시작부터 죽은 것이다.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하이네스가 튀어나왔고, 바닥에 지진이 일며 나무들이 자라났다.
엘리제를 자극했던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자 곧장 회귀했고, 그것을 총 네 번이나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몇 번을 죽던 마지막까지 내가 원하는 결말이 날때까지 밀어붙이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그런데, 4번의 죽음을 겪자 점차 그 다짐이 희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의 시간이 샤를을 만나러 가던 때로 고정되어있었기에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이미 중간에 포기했을 테니까.


...아니, 이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일까?


[부탁이요?]


나는 라일라에게 도움을 구했다.

앞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죽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마법을 걸어달라 말했다.
목에 칼을 찔러넣는 것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몸에 언제든 터트릴  있는 폭탄을 달아 달라 부탁했다.


[언제든 제 마법을 이용해 죽겠다고 말씀 하시는 건가요? ...제가...선생님을 괴롭혔던 기억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제가...그 정도로...안되요. 절대 못 해요. 제가 선생님에게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에요. 정말, 저는 못 해요.]

라일라는 절대로 안 된다 말하며 내 부탁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가 혹할만한 보상을 들이밀며 거래를 제안했고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며 그녀에게 동정을 구했다.

라일라 덕분에 죽기가 쉬워졌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압도적이었던 죽음 직전의 스트레스는 훨씬 해소되었다.

그에 대한 반동일까?


[그 여자 죽었어요.]


디아나가 죽게 되면 처음 정했던 결말이 틀어졌기에 회귀했다.

[...선생님. 또 회귀를...네, 죽었어요.]

원래라면, 라일라가 어느 정도 대비를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었다.
벨라트릭스가 예전 샤를의 직속 종속인 에아와 사라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내가 썼던 소설 설정보다 훨씬 강했다.

애초에 벨라트릭스가 검제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버티다가 라일라의 공방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선생님...말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말하게 되면 선생님이 돌아가실 것 같아서...]

회귀했다.
나는 디아나가 죽은 것으로 인해 세 번을 추가로 회귀했다.
총 일곱 번의 죽음.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10번의 죽음을 경험했었는데...  번에 17번의 죽음으로 늘어나니 회귀하고 난 후의 후폭풍이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선생님. 아무 준비 없이 나가게 되면 저는 도움이 되지 못  거에요]

준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
회귀를 하기  몇 번이고 디아나를 버릴까 고민했었지만...


떠올려버린다.
그가 디아나에게 1440번 죽임당하는 것을 전부 지켜보며 새겼던 다짐.
그녀들을 어떻게 마주할지 그렇게나 되새겼는데 겨우 이 정도로 흔들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선생님은 그 기사가 그렇게 되리란 걸 미리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저와 공방 밖으로 나오신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라일라와 함께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벨라가 변할 거라 확신했었다.


애초에 상황이 이렇게 되게  사람이 나인데 어떻게 모를까.


[죽지 마]

내 입으로 벨라트릭스에게 죽지 말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상황은 예정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벨라트릭스와 첫 만남 때부터 그녀는  앞에서 피를 흩뿌리며 죽었다.
 번째에는 죽게 해달라며 간청했었고 결국 자살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자. 그녀는 변했다.

그의 과거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늘 도망쳤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발버둥 쳤고, 그것이 힘들게 되자 목숨을 끊는 것으로 도망쳤다.
그 도망이 불가능하게 되자 겨우 찾은 구멍이 대타를 내세워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겠지.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디아나를 보호했고 그녀에게 죽지 말라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이딴 짓거리를 하는 것이겠지.

[일단, 그 여자한테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하긴 했는데... 선생님은 대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에요?]

현실에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생의 목표 따윈 없이 그저 방탕하게 살아오던 내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른 노력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인생을 살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남들 하는 만큼.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내 즐거움만을 뒤쫓으며 살아왔던 내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빼앗긴 것을 다시 찾는 것이었고,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만한 목표였지만, 그런데도 나는 절실했다.
이것만큼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앞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팔랑귀 작가는 이제 없다.
앞으로 현실의 이야기는 내 좇대로 쓸 것이다.


*


"부군! 부군!"

이번이 몇 번째 죽음이었을까?
그는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지금까지 죽었던 숫자를 세었다.

'스무 번이었나? 서른 번? 쉰은 넘었던  같기도 하고...'

"부군!!!"

의자에 앉아 생각을 하던  귀를 때리는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들어오는 무척이나 조그마한 소녀.


작은 키에 붉은빛이 도는 검은색 드레스.
얼굴을 반쯤 가린 검은색의 반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는 아이는 그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에 심통이  것인지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불렀어?"


"응응. 부군. 있잖아. 지금 나는 엘리일까? 아니면, 엘린일까?


그에게는 스무 번이고 넘게 들어본 질문이었기에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여서 짜증 낼 만 했지만...
그가 회귀하기  저지른 짓이 있었기에 애써 미소로 소녀를 응대했다.


"엘린. 맞지?"


"어? 어떻게 알았지?  이래. 부군이 알아보는 건 당연한 건데"

엘린은 무척이나 즐거운 얼굴을 한 채 앞에서 방방 뛰어 보였다.

"부군은 어떻게 맨날 우리를 알아보는 거야?"

"비밀이야"


뱀파이어 자매.
엘리와 엘린은 전투보다는 독자들에게 추리하는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만들었던 캐릭터였다.
그는 그녀들을 알아보는 설정을 꽤 재밌게 짰던 기억이 떠올라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힝...그러면! 지금은 엘리일까? 아니면 엘린일까?"


"엘린"


"아닌데!"


"맞잖아. 엘린이랑 엘리 둘이 같이 있네"

"와아!!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손뼉을 치며 해맑은 웃음을 보이는 엘린의 모습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자신이 만든 캐릭터와 만날 때마다 무서워하거나 경계했던 것과는 달리 정말, 자신이 그리던 캐릭터의 모습 그대로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쭉 치유하고 싶기는 했지만...

"이제 시간 됐어"

"응응"

그의 말에 소녀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다소곳하게 앉아 올려다보았다.


"여왕님한테 정말  혼나는 거 맞지? 그치?"

"응.  혼날 거야"

"...여왕님은 자기꺼 멋대로 손대는 거 싫어하시는데. 엄~~청 싫어하게 분명해."


"혼낼 것 같으면 나한테 일러바치면 되지"

이곳에 오기 전 그가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여왕님에게 혼이 나는 것이 무서웠던 소녀는 다시   더 그에게 약속을 받은 뒤 천천히 그의 목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현대에 떨어진 후부터 그 어떤 뱀파이어도 손대지 않았고, 대어서도  되는 그의 목에 처음으로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그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나중에 자신을 미워할 여왕님에 대한 두려움보다 곧이어 다가올 그의 피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송곳니가 그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피를 내뿜기 시작하자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가 만들어낸 뱀파이어들은 각각 고유의 특성들이 존재했다.
모든 뱀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체 능력의 우월함과 마나에 대한 친화력 그리고 불사의 경우와는 다르게 뱀파이어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사라는 괴력.
프리시아는 그림자.
그리고, 엘린과 엘리는 영혼.


그녀들이 악마와 같이 영혼을 수집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전투와는 전혀 무관 되게 설계했던 캐릭터였고, 그저 독자들의 재미를 위해 잠깐 잠깐씩 등장하는 캐릭터인 만큼 조그마한 에피소드를 그려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인공의 영혼을 강제로 자신의 몸에 집어 넣어버리는 에피소드.

TS라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놨던 능력이었지만.

***


"나다 이년아"

이런 식으로 쓰게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라고 안 봐준다."


작가인 그도 상상을 못 했는데, 눈앞에 있는 벨라트릭스가 그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벨라트릭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 그는 그녀에게  많이 맞기는 했지만...
회귀하기 전 그녀와의 전투에서 느꼈던 고통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팠다.

그때와는 달리 정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것 때문일까?
사실대로 벨라트릭스에 정체를 알려주면 조금이라도 살살 때릴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아직 벨라트릭스가 알아서는 안 된다.


'30초.'


 시간만 버티면 저 멀리서 뱀파이어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라일라는 죽지 않을 것이다.

가장 첫 타는 복부를 향하는 주먹.
그가 처음 그녀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정말 영혼까지 날아가는 고통을 느꼈었다.


기존의 그의 육체라면,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겠지만.
기존의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뱀파이어의 육체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아무리 엘리엘린이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히로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샤를의 순혈을 통해 만들어진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 귀족 최상위의 육신. 그리고, 그에 걸맞은 친화력.


이런 육체와 회귀의 권능을 가지고 30초도 버티지 못하면 나가 뒈지는 게 맞을 것이다.

주먹을 피하자마자 곧바로 날아오는 푸른색 검기를 머금은 검의 모습에 허리를 낮춰 피해낸다.
연속되는 죽음으로 조그마한 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에 오히려 기존의 몸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몸을 낮춘 채 살짝 뒷걸음질 쳐 벨라트릭스와 거리를 벌려보려 하지만, 곧장 날아드는 벨라트릭스의 신발이 보여 양손으로 그것을 막아내었다.


"...응?"

원래라면, 벨라트릭스의 발길질에 소녀의 몸이 날아가야 하는 것이 맞지만 어째서인지 양손으로 그녀의 발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소녀의 모습.

소녀에게 잡혀있는 발을 지지대 삼아 공중으로 떠 반대 발로 소녀의 얼굴을  내려 했지만, 소녀는 그것 또한 피해내어 보인다.

"너..."


벨라트릭스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소녀에게 의문을 내뱉으려 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살기를 눈치채고 몸을 틀어버린 나머지 사라의 거대한 대검이 허공을 갈랐지만, 이미 사라가 온 시점에서 소녀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기에 애처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존나 늦네"


"최대한 빨리 온... 그 얼굴로 욕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단순히 주먹질  번에 발길질 두 번 칼질 한 번이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에게는 하나하나가 목숨줄이 달린 것이었다.
저것 몇 대로 목숨 몇 번 날려 보냈고, 드디어 그녀를 제지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욕을 안 하고 싶어도 안  수가 없었으리라.

사라를 시작으로 어느새 이곳에 도착한에아와 프리시아는 곧장 벨라트릭스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너 뭐야?"


30초라는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갔던 공방은 벨라트릭스에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이나 동작들은 전혀 전투에 대해 모르는 문외한이 따로 없었지만,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미리 무슨 공격이 날아올지 알고서 움직이는 느낌.


...마치, 그의 전투 방식과 같다.


주변에서 그녀에게 검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오롯이 조그마한 뱀파이어에게 고정되어있다.

바닥에 쓰러져 자신의 심장에 치유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라일라에게 다가가는 소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짐이 돼서 죄송..."


라일라가 말을 전부 내뱉기 전에 소녀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검사는 육체를 관조하며 그 경지를 높였기에 귀가 밝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짐이 되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던 라일라의 생각 없는 말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벨라트릭스의 귀에 들어가기 충분했다.


"...너 였구나?"


소녀는 라일라에게서 눈을 떼 벨라트릭스를 바라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온몸이 부르르 떠는 것을 느꼈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의 눈에는 탐욕이 서려 있었다.


"진짜는 어디 있어"

"그걸 내가 곱게 말해줄 거였으면  몸으로 여기 있겠어?"

비아냥거리며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소녀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곧 말하게 될 거야"

이제 몸풀기는 끝났다는  아까와는 다른 기세를 뿜어내는 벨라트릭스의 모습에 침을 삼킨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

그가 만든 소설.
마법사든 검사든 가장 주된 힘의 원천은 정신력이다.


무력의 척도를 따지면 정신력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는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 스무번이 넘는 죽음을 버텨왔다.

거기다 여왕의 순혈을 받아낸 뱀파이어의 육체.
그가 싸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원래 엘리엘린이 자주 사용하던 플레일을 놓고서 가장 익숙한 박투를 할 생각으로 맨손으로 천천히 벨라트릭스를 향해 다가간다.


기절하기 전에 회귀만하면 된다.
아니, 기절하더라도 본체는 따로있기에 얼마든 회귀할 수 있다.


"해보던가"


그가 무조건 이길 싸움이었으니 쫄 이유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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